시작 (13)
***
진혁의 철벽에는 이유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특별한 이유.
다른 어느 여자가 손진혁의 시선을 끌고 관심을 살 수 있을까. 친구들의 공통된 관심사였다. 저 새끼는 연예인도 개 콧구멍 보듯 하더라.
진혁은 행동으로 그 대답을 내놓았다.
그토록 오래 간직한 감정을 어느 누가 넘보랴. 감히.
마법처럼 녹아내린 강철 옹벽은 포근하게 날개를 펼쳐 홍수정만을 안에 담았다.
그리고 수개월.
“제 친구들이 오빠를 보면 신기하대요.”
“뭐가? 유명한 사람이라서?”
“그것도 그런데, 저한테 잘하는 게 신기하대요.”
아무리 나이 차가 있고,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다지만 늘 다정하게 구는 진혁이 외계인 같다고. 부와 명성이 아니더라도 또래 남자들과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 면모였다.
“어른이라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 없이 저한테 다 맞춰주잖아요.”
“수정이도 이제 어른인데 뭐. 나는 우리가 다른 별에서 안타깝게 헤어졌던 사이가 아닐까 생각해.”
그래서 후회 없이 사랑하려고 무엇이든 홍수정이 하자는 대로 하는 중이다. 억지로 뭔가 시키지 않고, 어딘가로 데려가려 하지 않고. 시냇물처럼 졸졸졸 소리 내며 곁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오와! 다른 별? 그런 표현 근사해요. 그래서 어릴 때 만났나 봐. 헤어지지 말라고.”
표절인데, 헤헤-.
별것 아닌 일에도 크게 감탄하고 감동하는 홍수정은 어릴 때와 다르지 않아서 함께 있으면 소꿉장난하는 기분이 들었다.
애절하고 간절한 마음은 홍수정도 마찬가지였다.
강의를 주 3일로 몰아넣거나,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선글라스를 쓴 채 여의도를 배회하는 등의 기행은 보이지 않았지만, 진혁이 서울에 있는 날이면 최소 하루 한 번은 얼굴을 보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
손진혁과 홍수정, 둘의 만남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듯 아무런 화제도 얻지 못했다.
방송으로 편성했다면 교육 방송 오전 프로그램보다 시청률이 저조하지 않았을까.
양가 부모도, 친구들도, 진혁의 팬들도 ‘쟤들 저럴 줄 알았어.’라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덕분에 비밀스럽게 만날 이유도 없었고, 소박하게 만나 별것 아닌 소소한 추억을 쌓았다. 영화를 보고, 해 뜨는 동해 바다를 보러 가고, 해 지는 서해 바다에서는 나란히 앉아 일몰을 감상했다.
주말이면 공연을 관람하고, 출출해지면 길에서 파는 떡볶이와 어묵으로 요기했다. 옷에 튄 떡볶이 양념을 서로 닦아주며 덤벙이라고 핀잔하는 것도, 그리곤 바보처럼 웃는 것도 여느 평범한 연인과 다르지 않았다. 진혁과 홍수정이 바라 마지않던 일상이었다.
“동기들은 솔직히 어려 보이고, 예비역이라는 선배들은 별로 어른스러워 보이지 않는데도 득도한 사람들처럼 굴어요. 우리 오빠랑 비교하면 그냥 철부지들인데. 그래서 어릴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이랑 자주 만나는 거예요. 걔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주니까.”
“확실히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저를 좀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재미없어.”
“눈이 높으면 이게 문제야아-. 다른 사람들 볼 때마다 오빠랑 비교를 하게 된다궁-.”
“신경전으로 사람 마음을 흔들어서 내 가치를 올리는 건 유치해요. 내가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끝인 거지 사람끼리 왜 밀고 당겨? 그게 재밌대요? 그건 애들 장난이잖아. 내 노력으로 빛나야지. 그게 홍수정이야.”
어릴 땐 은근 밀당도 했던 녀석이 뭐라는 거야.
그래도 진혁은 육성찬에게 배운 대로 토 다는 법 없이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려, 그려. 우리 수정이 말이 다 맞어-. 이이-.
재잘재잘-.
벚꽃이 한창인 여의도공원에서 홍수정은 가장 신나고 빛나는 사람이었다.
화사한 낯빛은 야구캡으로도 가리지 못했고, 오랜 운동으로 빚은, 더이상 꼬꼬마가 아닌 체형은 카디건과 넉넉한 원피스로도 숨기지 못했다.
그 빛나는 눈동자에는 오롯이 한 남자만 담겼다.
“케흠! 내가 준 선물은 다 썼어요?”
진혁의 팔짱을 끼고 걷던 홍수정이 헛기침을 뱉고는 곁눈질하며 물었다.
첫출근 때 준 선물.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진혁은 꿀꺽 침을 넘겼다.
“아니. 무슨 뜻인지 몰라서······.”
“뜻은 무슨 뜻? 서필구 감독님이 운동선수들 필수품이라길래 준 거였는데요?”
홍수정은 세인체육재단 육상 감독 서필구에게 자주 대회에 출전하는 운동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물었다.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남자에게 필요한 물건을 묻는다는 것이 운동선수인 진혁을 기준으로 생각하다 보니 질문이 그렇게 나간 것.
서필구는 진지한 표정으로 남녀를 불문하고 콘돔이 가장 중요하다는 답을 들려주었다. 당시 중학생이던 여자아이에게 말이다.
그런 사정을 들은 진혁은 볼을 부풀린 채 말을 아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자유분방해졌다지만 도대체가 멀쩡한 인간이 없어.’
답의 진실성 여부를 떠나, 엄마를 닮은 외모를 떠나, 곧이곧대로 실행에 옮긴 것만 봐도 유세라 딸이 확실하다. 어떻게 첫출근하는 사람에게 콘돔을 선물할 수가 있냐. 일반인 눈에는 운동선수가 아니라 다른 업종 선수로 보이지 않겠냐고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오빠가 말하는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요?”
“자제하지 못하고 욕망에 휘둘리는 사람?”
그렇지. 일하고 운동할 때 외에는 신부님보다 신부님 같고 조용한 징역 오빠지. 아니, 차라리 로봇 같아. 끄덕이는 홍수정의 고개를 따라 긴 머리가 부드럽게 물결쳤다.
“그럼 내가 준 선물 버렸어요?”
홍수정이 이번에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벚꽃이 아닌 홍수정 한 사람을 위해 준비한 조명이라는 듯, 빛을 받은 눈동자가 붉은 보석처럼 빛났다.
“안 버렸어.”
“왜애애-? 쓰지도 않을 거 다른 사람이라도 주지 그랬어요?”
다른 사람들을 보면 아이 때는 강하던 호기심도 시간이 흐르며 잦아들던데, 한 가지 흥미를 느끼면 파고드는 홍수정의 집념은 여전했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진혁은 홍수정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한 대답을 내놓기 위해 고민했다.
그저 고무로 만든 신축성 좋은 투명 비닐일 뿐,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이상한 곳에 사용할 궁리는 하지 않았다?
육성찬도 중학교 때는 안방 서랍장에서 찾은 콘돔에 물을 채워 던지며 놀더라?
염병택은 다방에서 주운 콘돔을 학교까지 가져와서는 풍선처럼 불고 놀았다?
아, 생각이 너무 길어진다.
‘선물 받은 거니까 못 버렸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정이가 준 선물이라서 더 소중해. 그래서 버리지도 못했고, 누구 주지도 못했어.’
크으- 그래, 이 정도면 평범하면서도 멋진 대답이다.
드디어 평범한 사고를 하게 된 진혁이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수정이한테만 쓰려고.”
와씨, 미친놈아.
이건 너무 직진이잖아.
*
졸지에 노골적인 표현을 한 꼴이 되었지만 홍수정은 진혁의 특성을 알고 있었다.
생각이 깊어지고 길어지면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대답이 튀어나오는 인물이 주위에 진혁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오빠 말하는 거 보면 가끔씩 우리 엄마 같아요.”
휴우-, 화내지 않아 다행이다.
야구캡을 고쳐 쓴 홍수정은 뒷짐진 채 깡총거리며 앞서갔다.
손징역, 운 좋게 시험 통과한 줄 알아라. 그거 썼으면 넌 죽었어······. 중얼거리면서였다.
그 사뿐대는 뒤태가 무척이나 근사했다.
진혁은 영화에서처럼 번쩍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고 싶었지만 참았다.
저 하늘거리는 천사가 인파 속에서 길을 잃을까, 갑자기 사라질까, 걸음을 재촉하는 것으로 온 마음을 기울였다.
***
겉보기에는 침착하고 자상해도 인간의 내면이란 얼마나 복잡한가. 그리고 단순해서 쉽게 설레고 쉽게 상처받는다.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노력은 발전의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실수를 잉태하기도 한다.
진혁 또한 인간이었기에 무던해 보이려 애썼지만 속은 그렇지 못하니 종종 실수가 빚어졌다.
5월 초, 해외에서 열린 육상대회에 참가했을 때는 문자 사고를 냈다.
대회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문자가 여러통 와 있었다.
노곤해서 눈이 감기는 와중 가족과 친구들의 문자에 일일이 답 문자를 입력했다. 제 사람들을 최대한 아끼고 챙기며 살기로 한 자로서 당연히 들여야 할 수고였다.
진선규: 「한잔할래?」
└ 「저 술 암 마시는 거 아시닪아요.」
이 사람은 옆방에 있으면서 왜 문자질이야?
천길룡 할아버지: 「워커가 떨어졌소이다. 조니 워커」
└ 「다음에 내려갈 때 사 가겠스비낟.」
술을 그렇게 드시는데도 정정하신 걸 보면 참 신기한 할아버지다.
아빠: 「엉아 저 정원인데요. 아빠가 핸폰을 안 사줘서 아빠 핸펀으로 보내요」
아빠: 「엉아 근대요 엄마가 집을 나갔어요. 김밥 싸주고 집을 나갔어요」
아빠: 「엄마 이모네서 놀다 온데요. 그래서 나갔어요」
└ 「폰은 엉아가 사줒게」
와씨, 갑자기 아빠랑 싸워서 가출이라도 하신 줄 알고 놀랬잖아 이놈아.
그리고 ‘데요’, 아니고 ‘대요’야.
마지막 경기를 마친 날이라 그런지 전날보다 피곤했다.
역시 개인전보다는 팀을 챙길 때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로도가 몇 배는 증가한다.
유진이: 「오빠! 챔피언 축하춥스!」
유진이: 「오늘 뜌뎡 언냐 쌩일! 축하춥스해주셨나요?」
└ 「ㅇㅇ. 출국 전에 선물도 주고왔디. 시합 전에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줬더.」
가족과 홍수정의 생일은 꼬맹이 시절부터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챙긴 진혁이다.
토다다닥-.
수마가 덮쳐왔지만 현란한 손놀림으로 모든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한국은 새벽 시간이니까 다들 일어나면 확인하겠지.
끄아아아암-.
쩌억- 벌어지는 입에서 장군이 하품 소리가 나왔다.
루비: 「계주 우승도 축하해요! 낼 일찍 나가야 해서 먼저 잘게욤 ^_^」
└ 「나도 이제 자려고. 수정아 다시 한번······.」
아침에 일어나 휴대전화를 확인하고는 집어던질 뻔했다.
「나도 이제 자려고. 수정아 다시 한번 생ㅇ리 축하해.」
오우 지쟈스······.
“으아아아악-!”
머리를 감싸 쥐었지만 이미 늦었다.
한국은 이미 정오를 넘긴 시각이고 홍수정은 눈 뜨자마자 문자를 확인했을 테니.
쿵쾅쾅-.
“왜! 왜! 무슨 일이야!”
괴성에 놀란 진선규가 팬티 차림으로 방문했다.
그러나 진혁을 달래주는 건 진선규의 핑크색 팬티가 아닌 홍수정의 이해였다.
루비: 「ㅋㅋ 뭐가 그렇게 급해요. 오빠는 모든 일을 달리기처럼 하나 봐.」
진혁의 똥볼은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홍수정은 여신의 인자함을 보여주었다.
‘네가 아니면 누가 날 이해해주겠니.’
그래서 더욱 아끼고 잘할 수밖에.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는 사람, 구멍 뚫린 가슴을 따스하게 메워주는 사랑.
루비: 「ㅇㅖ전엔 완벽해 보여서 어려웠는데 지금은 빈틈이 있어서 더 좋아요. 밉지 않아」
일부러 의도하지 않아도 은은하게 흐르는 향기란 그런 것인 모양이다. 엄마가 그러했듯 한결같은 신뢰의 눈빛,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맑은 음성과 향기에 완전히 도취되니 단단히 콩깍지가 쓰일 수밖에.
루비: 「새벽 2시 도착이죠?」
└ 「네 쥔님」
진혁은 자발적 노예가 되었다.
루비: 「ㅋㅋ 공항으로 마중 가겠습니다요.」
홍수정이라고 진혁과 신분이 다른 것은 아니었다.
아무렴, 계급사회에서는 같은 노예 신분끼리 엮이는 것이 평범한 일이다.
*
사랑하면 닮기 때문인가. 그래서 홍수정의 인력에 정신연령이 끌려 내려간 것인가. 아니면 때가 된 것일까.
또래가 더이상 어려 보이지 않았다.
‘홍 회장님도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영육의 괴리가 5년 정도면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내면의 변화를 예리하게 주시하던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통찰이었으리라.
어쨌거나 반가운 일이다.
그것이 호르몬의 조율에 의한 것이든, 홍수정이라는 사람에 의한 것이든.
“5월은 푸르구나아- 우리들은 자라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날이 많아졌다.
철이 없어졌다는 표현이 적당하겠지.
철이 없어지는 진혁에 비해, 어쩐지 홍수정은 날이 갈수록 어른스러워졌다.
5월의 셋째 월요일.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을 함께 먹어야 한다고 우겨 홍수정의 집 근처로 달려갔다.
“짜잔-.”
“에엥? 웬 장미꽃? 웬 향수?”
내심 오늘을 기다렸던 홍수정은 어색한 연기를 펼쳤다. 놀라는 척을 해야 선물하는 사람이 더 기뻐하니까.
“오늘이 성년의 날이래. 꽃 꺾는 거 싫어하는 건 아는데 특별한 날이라서 산 거야.”
“으흐흥-. 이쁘다. 고마워요.”
진혁은 집 앞에서 홍수정을 들여보낼 때도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배웅하는 사람이 미안할까 봐 그런 것이었지만, 누군가 보았다면 허세나 똥폼으로 비쳤으리라. 그럼에도 홍수정은 타박하지 않았다.
“늦었다. 들어가.”
진혁이 눈치 없이 굴 때마다 해결사 노릇을 하는 것도 용감한 홍수정의 몫이었다.
“그냥 가려고요? 선물 하나 빠진 것 같은데요오-?”
아, 키스.
어허헛-. 뒷머리를 긁고 바보처럼 웃으면서도 자석처럼 끌려가는 진혁이었다.
‘헤헤-, 후식으로 소프트아이스크림 먹길 잘했다.’
부드럽고 달콤했다.
아이스크림 말이다.
*
의도하지 않아도 운명처럼 다가오는 사람이 있고, 계획한 일처럼 찾아오는 날이 있다. 마치 선물처럼.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소나기에 놀라 함께 재킷을 쓰고 달리는 일도, 라면으로 유혹하는 일도, 섬에 갔다가 배가 끊기는 일도 없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진혁의 로맨스에 일대 사건이 벌어진 것은 홍수정이 첫 방학을 맞았을 때였다.
드드드드드-.
야근의 즐거움에 한창 몸을 떨 때, 덩달아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나방을 잡는 장군이 앞발처럼 잽싸게 휴대폰을 낚아챘다.
“어! 수정아! 여행은 즐거워? 미국은 지낼만해?”
- 저 여의도예요.
“여의도? 왜 벌써 왔어?”
방학을 맞아 LA에 사는 친척 집에 놀러 가는 홍수정을 공항까지 배웅한 것이 불과 일주일 전, 원래대로라면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한다.
- 이이잉-, 오빠 보고 싶어서 몰래 왔어요.
몰래 같은 소리하네.
눈 벌겋게 뜬 SSS가 몇 명인데.
와씨. 그런데 이거 뭐지?
쿵쿵쿵쿵!
‘심장이 너무 세게 뛰는데?’
툭-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그렇다고 기절했다는 건 아니고.
“어디야? 내려갈게.”
- 지하 3층 주차장요.
검토하던 서류를 집어던지고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이것이야말로 호르몬의 명령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