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12)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머릿속을 배회하는 무수히 많은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으니.
다시금 집중력과 목적의식이라는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현재 위치에서 ······.”
거기까지 말한 진혁은 황제민에게 눈짓을 보냈다.
황제민이 검지를 세우고 입을 뻐끔거렸다.
1해리.
주파수를 가로채 통신을 시도했다는 것 자체로 초계정 정장은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알 것이다.
마침 마뜩한 반응이 돌아왔다.
- 듣고 있다우. 말하라······.
“일 해리만 더 내려오면 격침시키겠다.”
- 기게 무슨 말이네? 일 해리 남녘도 우리 북조선이 보장받은 해역-.
“영토 논의나 하자고 부른 게 아니다. 우리 해군 애들 건들지 말라고 경고하는 거다.”
- 이야아-! 내래 누군가 해소! 니기 세인이구나 야? 기럼 기리티! 또 쥐새끼처럼 엿들은 기야. 기쿠만. 기런 거여소.
“그래서 대답은? 서로 피 볼일 만들지 말자고.”
- 알갔소. 물리갔소.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저쪽의 어조가 누그러들었다.
홍기준과 세인의 위상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반응이었다.
- 긴데······, 님자래 뉘기요? 뉘긴지는 알어야-.
“내 이름을 밝히는 건 어렵지 않아. 그런데 호기심의 대가로 당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데 괜찮겠나?”
- 아, 기럼 일 없소.
뚜국-.
하아아-.
교신을 마치자 황제민이 긴 숨을 내쉬었다.
“다음부터는 저한테 지시하시죠. 아무래도 시나리오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스티브 방식이 나쁘다는 건 아닌데 지나치게 호전적이어서 또라이라도 만난다면 확전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예······, 죄송합니다.”
시나리오 생각을 못했네요. 두 걸음 물러선 진혁이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확실히 해두어야지.
“말 안 들을 수도 있어요. 꼴통들이잖아요. 위에서 시킨 짓인데 우리가 엿듣는 거 알면서 지들끼리만 짠 것처럼 일부러 흘린 걸 수도 있구요. 그렇다면 말과 행동이 다르게 나올 수 있어요.”
“동의합니다.”
진혁은 디스플레이에서 서해 5도 해역을 가리켰다.
“이쯤에 아르디급 잠수함 대기시켰다가 수상한 짓 벌이면 바로 가라앉히세요. 문제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책임.
힘 있는 사람만이 거론할 수 있고, 취할 수 있는 행동.
황제민은 진혁이 서울에서도 방패막이로서 직원들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혁이 말하는 책임이라는 것이, 단순한 사과를 넘어서는 수준일 거라고 생각했다.
진혁이 나선다면 홍기준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세인의 역량과 홍기준의 성향을 볼 때 북쪽을 밀어버리고 다른 나라를 세워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진혁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함장에게 교전권 부여합니다.”
황제민은 발을 모으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아르디급 배치하겠습니다.”
바다뱀이라는 뜻을 지닌 아르디급 잠수함은 홍기준의 주도하에 세인 테크니카에서 극비리에 개발한 2400톤급 중형 핵잠수함이다. 더 크게 만들 수 있지만 한반도 해역에 적합하도록 소형화한 모델로, 600mm 어뢰와 잠대함, 잠대지 미사일로 무장했고 거의 영구적으로 해저를 누빌 수 있다.
무엇보다, 자동항법과 자동전투 기능 덕에 두루 통달한 승조원 1명만 있어도 작전 수행이 가능하다는 점이 다른 국가와의 차별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르디급의 진정한 위력이었다. 무기가 떨어지지 않으면 혼자서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도 있는 무서운 병기, 절대 공개할 수 없는 이유였다. 잠수함이라는 특수성과 해저 기지 덕분에 노출하지 않을 수 있었다.
‘홍 회장님이 넘겨주신 힘.’
힘이 있으면 써야지.
우리 편을 보호하는 일에.
선제공격은 그럴 때 하는 거다.
“노출 겁내지 말고 무력화시킬 때는 확실하게 하세요.”
“명령 접수합니다.”
견고하게 대답한 황제민이 블라인드 너머 대형 모니터를 보았다.
월드컵, 남은 몇 경기라도 편하게 좀 보자. 이 간나 새끼들아.
“계속 주시해 주세요. 적선, 우리 해군선, 어선, 중국어선, 유람선까지도요. 쫓을 놈들은 확실히 쫓고 생명은 구해주세요. 위급 시엔 선조치 후보고 원칙으로 갑니다. 제가 책임자로 있는 한, 삭도 해저 기지의 존재 목적은 영토 방어가 아니라 인명보호입니다. 가치가 충돌할 때는 자국민을 우선으로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상황을 정리하고 블라인드 조절 손잡이를 잡았다.
차폐가 길어지면 지나치게 커진 바깥 요원들의 호기심을 살 것이기에.
“스티브는 오늘도 여기서 묵으십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지상에 올라가면 숙소도 있고 운동할 곳도 있으니까요.”
“뭐-, 알아서 하시겠지만 너무 일만 하지 마시고 젊으실 때-.”
블라인드를 올리며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 아저씨도 천길룡 할아버지처럼 굴려고 드네?
그래도 업무를 떠났을 때는 친근하게 구는 사람들이라 잔소리가 싫지 않다.
“예, 내년부터는 저도 그렇게 살까 봅니다.”
***
시끌벅적했던 2002년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홍수정과 함께 대학을 다니자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벌여둔 일 중에는 긴장을 유지한 채 주시해야 할 사업이 많았다.
인정해야 했다.
팔짱을 끼고 캠퍼스를 누비겠다는 로망은 그저 로망일 뿐, 초인도 현실의 우선순위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미안.”
연애하고 싶다는 이유로 앞으로 펼칠 사업, 하고 싶은 일이 수두룩한데 퇴사할 수는 없잖아.
“괜찮아요. 어릴 때 한 약속이잖아요. 모든 약속이 지켜지면 싸우는 사람도 없고 좋겠지만, 세상에 지키지 못하는 약속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래도 미안하고 아쉬워. 나도 수정이랑 학교 다니고 싶다는 생각 했었거든.”
“그때그때 상황이 변하는걸 어쩌겠어요. 그럼 상황에 맞게 바꾸고 변할 줄도 알아야지. 그래도 그런 약속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사과까지 한다는 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서라는 것도 알아요.”
“응. 맞아. 알아줘서 고마워.”
“훈련소에서 그렇게나 편지를 많이 썼는데 모르는 게 바보 아닌가? 에헷-.”
편지를 많이 쓰기는 했다.
겨우 4주 훈련 받으며 30통 넘게 썼으니.
스토커나 할 짓이다.
홍수정은 그 편지를 코팅해서 앨범으로 만들었다.
다행히 진혁에게만 보여줘서 쥐구멍을 찾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2003년 1월의 광화문, 공연 관람을 마치고 세종문화회관을 나서니 언 길 위에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고교 졸업과 대학 진학을 앞둔 홍수정은 함께 대학에 다니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엄마를 닮았지만 성격이나 행동은 전혀 닮지 않아 어른스럽다.
“오빠는 많이 바쁘잖아요. 아빠가 늘 하는 말이 아니어도, 얼마나 바쁜지 속속들이는 알지 못해도 바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알아요.”
홍수정은 대학 생활에 큰 기대가 없다고도 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높아졌고, 세상을 보는 눈이 또래 친구들처럼 로맨틱하지 못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매 순간 각자 있어야 할 곳에서 전쟁을 치르는지 아는 이의 당연한 성찰이었다. 홍수정은 제 관점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시야를 갖추고 있었다.
홍수정이 다소 힘빠진 웃음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유학을 가는 것도 괜찮을 뻔했어요.”
“가지 마.”
순간, 올려다보는 홍수정의 눈동자가 커졌다.
꽁꽁 언 도시가 한순간 화사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진혁은 여기서 더 무슨 말을 보태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 “들입다! 확! 들고 입을 확 그냥, 막 그냥 다 먹어버려!”
이제는 의대 본과 4학년인 최미경의 조언은 무시했다. 과거의 최미경 유부녀가 생각날 만큼 날이 갈수록 괴팍해진 탓이다.
- “밤에 유오에프 보러 가자고 꼬셔서 창고로 끌고 가라. 당연히 멱살을 잡아야지.”
제너럴에 입사한 김은정 회사원의 괴상한 코치에는 웃어버렸다. 창고에 멱살 잡혀 끌려가던 조슬찬의 모습도 웃음을 키웠다. 오작교 모텔도 건재한데 그것들은 도대체 왜 창고에 들락거리는지.
“아무 데도 가지 마.”
하얗게 질린 손이 시릴까, 홍수정의 손을 감싸 쥐어 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대로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앞으로는 내 옆에 있어 주라. 계속.”
낮에도, 밤에도, 새벽-.
아, 새벽은 아직 좀 그런가. 뒷말은 속으로만 생각해서 다행이다.
놀란 것인지, 무슨 뜻인지 고민하는 것인지. 몇 차례 눈동자를 떨고 가슴을 크게 들썩이던 홍수정은 이내 개구쟁이 얼굴로 돌변했다.
혀를 한차례 뾰족 내밀고는 진혁을 흘겨보았다.
“뭐래? 나 계속 오빠 옆에 있었는데?”
그랬지.
늘 그 자리에 있던 녀석이다.
꼬맹이 시절부터 관심사가 오로지 손진혁 하나뿐이었다.
“아까워서 어딜 가겠냐고요. 그래서 늘 불안해.”
“불안해하지 마.”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뭐······.”
길바닥에 돌멩이도 없는데, 홍수정이 툭- 걷어차는 시늉을 했다.
부츠로도 가리지 못한 정강이가 쭉 뻗어 올라왔다.
“하긴, 나도 그래.”
“뭐가요?”
으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뭐가 어떻게 불안한 것인지.
다만 솔직하게 말하는 건 가능하다. 그럴 용기도 충분했다. 이제는 예전과 달리 평범한 인간의 마음을 가졌으니까.
“그냥 불안해. 안 보이면 걱정되고, 전화 안 받으면 서운하고, 문자 답장 안 오면 괜히 쓸쓸하고, 운동하다가도 계속 휴대폰 확인하고······.”
“와아-. 오빠도 그런 생각해요? 오빠도 그렇게 해요? 오빠는 그런 감정 전혀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왜 한 번도 그런 말 안 했어요?”
“수정이가 나한테 질려서 도망갈까 봐.”
그리 말하며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질척대지 말라는 최미경의 조언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았지만, 늘 생각하고, 늘 그리워했다.
이제는 없는 별이 되어버린, 다른 세상에서부터 간직하고 넘어온 감정.
사랑.
홍수정의 반응은 이상했다.
“으히히히-.”
큭큭큭-.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다가.
이이익-! 고양이 펀치로 진혁의 어깨를 두드리다가.
에흠흠! 벌게진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싫어서 보인 반응이 아니라는 것쯤 알 수 있었다.
코트 주머니 속, 진혁과 맞잡은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으니까.
화려하지도, 화끈하지도 않았지만.
진심이 담긴 고백이 받아들여진 듯해 기뻤다.
‘와씨. 심장이 왜케 빨리 뛰냐아-.’
오른손으로 심장을 누른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구렁이 담넘듯 하는 건 좋지 않다고 최미경에게 배웠다.
화려하진 못해도 고백은 확실하게-.
“수정아, 우리-.”
그때였다.
쿠웅-.
“크윽-!”
전혀 예상치 못한 두통이 덮쳤다.
가슴을 짚었던 손이 자연스레 머리로 이동했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어, 어-. 괜찮아. 사랑니가 아파서 그래.”
“충치도 없는 오빠가 무슨 일이래?”
둘러댄 말로 홍수정을 안심시키고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야, 너 뭐야.’
【간절하기에 와봤다. 저 여인이 말을 안 듣나? 그렇다면 기절부터 시켜라. 그대의 석기시대 조상들은 마음에 드는 암컷을 돌도끼로 기절시켜 동굴로 끌고 가는 방법으로-.】
뜬금없이 뭔 헛소리야······?
‘너 간 거 아니었어?’
【할 일이 있다.】
‘할 일?’
【그런 게 있다. 계획 중인 것이 있느니.】
이새끼 다시 불친절해졌네.
진혁과 관련 없는 일이라 이거겠지.
‘아무튼 가. 다음에 보자. 머리 아프다.’
두구 엘릴이 스르르- 존재감을 지우자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라졌다.
홍수정이 코트 주머니 속에서 잡은 손을 흔들었다.
걱정스러움과 호기심이 함께 담긴 눈을 빛내며.
“오빠, 무슨 말 하려고 했어요?”
“우리 정식으로 그-.”
역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 대 사람으로, 극도로 개인적인 감정에서 기인한 목적을 타인에게 주입하는 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행위에는 생각보다 더한 용기가 필요했다.
“정식으로 뭐요? 사귀자고?”
홍수정은 진혁보다 용감한 영혼이었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
기대에 차 반짝이는 눈도, 배시시 웃는 입 모양도 다른 별의 홍수정과 닮았다.
그래, 홍수정은 한 명뿐이다.
진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흐음-.”
마침내 용기를 냈지만, 홍수정은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콧소리를 내었다.
‘응? 이런 반응은 안 좋은 거 아닌가? 꽃다발이라도 살걸 그랬나?’
진혁이 잠시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홍수정은 코트 속에 있던 손을 빼고는 저만치 앞서 걷기 시작했다.
“교복부터 벗고요.”
벌써 벗자고?
진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넌 학생이고 난 회사원이야!
게다가 보는 눈도 많고 눈도 많이 오는데······.
‘아, 그 소리가 아니구나.’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종종걸음 놓는 뒷모습을 보며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지금 입은 옷도 교복은 아닌데 오버할 뻔했잖아.
다급히 뒤를 쫓는 남자를 향해 홍수정이 고개만 돌렸다.
“오빠 하는 거 봐서요.”
그리곤 보란 듯 혀를 내밀었다. 메롱-.
저게 언제적 애교인가 싶지만 따지고 보면 홍수정도 옛날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거 밀당 맞지?
‘아······. 제발 나한테 그러지 마.’
미끄러지지 않도록 보폭을 좁히면서도 속도를 올렸다.
몸이 달아 쪼르르 따라가는 모습이 손광연을 닮았다.
“저기, 수정아아······. 졸업할 때 하더라도 대답은-.”
“에히히-. 벌이에요, 벌.”
무슨 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따지고 싶었지만 도발하면 안 된다.
“수정아아-.”
“소공동 가서 엄마한테 저녁 사 달래야지-.”
균형감각을 자랑하며 언 길을 내딛는 홍수정을 따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루비와 거리가 벌어진다. 따라붙는다.}
{악!}
{길이 미끄럽다. 2호가 자빠졌다.}
{임무가 우선이다. 낙오자는 버리고 간다.}
{구두로는 무리다.}
{말은 필요 없다. 스티브도 구두를 신었다.}
{꾸웅-.}
{한 놈 더 낙오했다.}
{낙법이나 잘 쳐라.}
도시의 그림자에 숨어 달달한 꽁냥꽁냥을 훔쳐보던 SSS에게도 뜬금없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수정아아-.”
“에히히히히-. 사골 칼국수가 좋겠다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