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10)
“유진아! 여기-!”
터미널에 도착한 손유진을 대합실에서 기다리던 주신영이 반겼다.
그의 손에는 이미 발권한 차표가 두 장 들려 있었다.
“에이-, 제 차표는 제가 끊어도 되는데요.”
“이거 얼마나 한다고. 그럼 유진이가 휴게소에서 우동 사.”
“그래요. 에헤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휴게소에서 간식을 사는 사람도 주신영이다.
서울에 갈 때마다 매번 반복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부잣집 자제고 간접 고용주의 딸이라지만 이제 15세 여자아이에게 얻어먹을 주신영은 아니었다.
“오와아-! 삼촌, 서해대교예요. 볼 때마다 대단해요.”
“연말에 여기에서 일몰 보는 사람 많대.”
“일몰은 그냥 집에서 보면 되는데에-.”
“하하-. 그건 유진이네 집이 좋아서 그런 거고.”
“헤헤-. 그건 그래요.”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서울까지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서초동 남부터미널에서 3호선을 타고 가다가, 옥수역까지 가는 주신영에게 손을 흔들고 교대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했다. 주신영이 여의도까지 바래다주는 것도 처음 한 번이면 충분했다.
2호선으로 갈아타는 이유는 딱히 없다.
손유진은 길을 익혀 혼자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도 없이 버스를 타고 서울 여행을 다녔다. 서울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시골 아이의 즐거움이었다. 최미경 언니도, 김은정 언니도 대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을 찾았을 때 많이 어려워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모든 일에 능숙한 오빠가 언니들을 도와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다고.
‘우리 오빠는 못하는 게 없어요.’
어차피 목적지가 정해진 모험이지만, 경로는 매번 달랐다.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가방을 앞으로 메고 지하철 노선도를 외우다가 아무 곳에나 내리는 거다. 걷다가 버스가 있으면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이 나오면 다시 지하철을 타고.
사춘기 방황은 아니었다.
‘낯선 아저씨.’
도깨비 아저씨가 짠- 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하는 소녀의 망상으로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사람도 많고 볼 것도 많은 도시, 이상하게 서울만 가면 놀랍고 신기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정글 같은 빌딩 숲, 다른 세계와의 통로처럼 보이는 어두운 골목, 거기서 후줄근한 복장으로 나오는 남자 마법사, 저 자동차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르지 않을까. 눈앞의 굽이진 아스팔트 너머에는 바다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6학년 때부터 이어온 모험에도 도깨비 아저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왜 이런 짤막한 모험을 하는지 목적의식은 뚜렷하게 남았다. 우연 속의 인연.
이렇게라도 해야 도깨비 아저씨를 잊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반복적인 행동이 기억을 유지하고 의식을 벼리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한 후로 습관이 되었다. 누군가 보기에는 배회겠지만 손유진에게는 모험이었고 순찰이었다.
역시 모험은 모험, 도깨비 아저씨는 만나지 못했지만 지하철에서는 나쁜 손 아저씨들과 종종 맞닥뜨렸다.
으드득-.
“으아아아악-!”
“아저씨, 내 치마 들추려고 했지요?”
“아아아-.”
손유진의 손에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잡혀 뒤로 꺾인 사내는 발레리노처럼 빙그르르 돌며 비명만 질렀다. 실로 놀라운 균형감각이다.
“또 그럴 거예요?”
“예, 예-. 아니, 아니-. 아아아아-.”
남자들에 비해 힘이 약할 뿐, 손유진은 몸놀림도 잽싸고 호신술을 넘어 격투술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주위에 노련한 무사들이 즐비한데 당연한 일 아닌가. 건강관리를 위해 운동하는 엄마와 함께 곰짐에서 무술을 연마한 지도 벌써 8년이 넘어간다.
“스읍-, 까불면 으더터져요 아주-.”
무릎을 들썩들썩 올려, 뽕알킥을 연상시키는 위협 액션으로 치한 퇴치를 마무리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겁이 났는데 두 번째부터는 단단히 혼꾸멍을 내는 중이다. 손유진은 대찬 아이라서 그런 것도 할 줄 안다. 그래서 몰래, 멀찍이 따라붙은 SSS 요원이 할 일이 없었다.
잔잔한 에피소드와 쓸거리를 차곡차곡 가방에 담으며, 오늘 모험의 종착지에 도착했다.
「世人」
근사하게 음각된 검은색 머릿돌이 손유진의 입성을 반겼다.
오후 햇살에 대머리처럼 반짝이는 새까만 돌이 탐스럽기 짝이 없다. 각도에 따라서는 언뜻 정원이 엉덩이처럼 보여서 찰싹 때려주고 싶어.
세인 여의도 연구소 직원이라면 손유진을 모르는 이가 없다.
SSS 요원은 업무 특성상 VIP를 꿰고 있기에 그랬고, 미래전략본부나 연구원들은 손유진이 초등학생 때부터 자주 얼굴을 비친 까닭에 알 수밖에 없었다. 아, 쟤가 본부장, 소장 동생이래.
“언니, 안녕하세요!”
건물에 들어가려다가 로비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인사했다.
인사성 밝은 것은 동네에서나 타지에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먼저 밝게 인사하는 중학생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어머나-! 유진이구나?”
2000년 마지막 날, 이 건물 옥상에서 폭죽 구경을 할 때 봤던 언니다. 오빠의 입사 동기라며 놀러 왔던 언니인데 나이는 거의 손유진의 두 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허허-, 오빠 만나러 온 거야?”
검은 생머리에 뿔테 안경을 낀 예쁜 언니인데 웃음소리가 좀 특이했다.
“네! 어디 가세요? 출장 가세요?”
“언니는 퇴근하는 거예요.”
아, 맞다. 토요일은 격주로 12시까지 근무라고 했지.
그마저도 내년부터는 주 5일로 바꾼다고 들었다. 그 후로는 4.5일, 4일 점차 줄여갈 예정이라는데 오빠네 회사에만 적용하는 제도라고.
“퇴근이 늦으셨네요?”
“네에-. 언니는 오늘 늦게 출근했거든요.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머리가 띵하더라고. 탬버린도 너무 열심히 흔들었나 봐요. 팔꿈치가 쑤셔요.”
불리한 정보를 솔직하게 전달하는 걸 보니 좋은 사람 같다.
그런데 머리 안 감았나? 왜 뒤통수를 긁는담?
“언니! 저 오늘 드디어 연구소 출입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됐어요!”
“그으래? 이제 오빠 없이도 들어갈 수 있어?”
“네! 오빠가 그랬거든요. 연구원 아닌 학생이 드나들려면 과학동아리를 만들어서 산학 협력 인증을 받으면 된댔어요. 상시 견학으로요.”
“와하하-. 동아리 만들었어?”
볼수록 리액션이 상당히 좋은 언니다.
“네! 우리 아빠 회사도 조건이 같아서 두 개 만들었어요. 그쪽은 화학 쪽 동아리거든요오-.”
“허허-, 어이구 잘했네.”
“언니는 무슨 연구해요오?”
“어허-, 언니는 연구 아닌데요? 저는 디자인인데요오?”
눈을 동그랗게 뜬 심동미가 손유진의 표정과 말투를 흉내 냈다.
“아! 나중에 발명품 디자인 부탁해도 돼요오?”
“허허-. 언니는 월급 주는 사람하고만 일하는데?”
“아, 그게 맞지요오-.”
역시 서울은 좋은 곳이다. 친하지 않은 언니에게서도 현장감 있는 자본주의를 배울 수 있잖아.
재잘재잘-.
한참 수다를 떨다가 심동미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 후 로비로 들어섰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로비를 순찰하듯 서성이던 SSS 요원이 다가왔다.
“유진이, 안녕? 오빠 집에 올라가 있을 거지?”
“그래야죠. 엄마가 오빠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랬어요.”
“삼촌이 햄버거 사줄까? 이 앞에 팝아이스 없어지고 버거가킹 생겼거든.”
예기치 못한 제안에 손유진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햄버거?
이 아저씨는 도깨비 아저씨가 변신한 게 아닐까?
그러나 손유진의 떨리는 눈을 마주한 요원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재빨리 한걸음 물러선 요원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니, 아니이-. 그 이상한- 그 아니고-. 그냥 순수하게 햄버거······ 사주고 싶어서 그랬지.”
나는 순수해. 그다지 순수해 보이지 않는 요원은 얼굴이 벌게진 채 해명하려 애썼다.
“오해는 하지-.”
“오해 안 했어요. 저 그냥 올라갈게요.”
햄버거라는 말에 도깨비 아저씨가 생각난 손유진은, 홀로 오빠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삐죽삐죽 울었다. 아아-, 사춘기 싫어.
***
겨우 첫발을 뗀 UOF는 완성이 요원했다. 프로토타입에서 오류와 고장이 반복된 탓인데, 삭도 연구소 직원들은 최소 5년을 더 다듬어야 안정화된 기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론과 실체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아 뛰어넘기 어렵고 부술 수도 없는 벽.
개발을 마친 방탄복은 여의도 연구소로 둥지를 옮겼다. 제너럴에서 소재를 보완해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개발을 마친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작업은 여의도에서 상품화를 위해 디자인과 성능을 개량하는 것이었다.
진혁은 방탄복 디자인 시안이 인쇄된 용지를 들고 사무실을 서성였다.
‘이건 심동미 작품, 이건 노현진 작품······, 노현진 작품은 무난하고 심동미 작품은 독특한데 멋지네. 고구려 무사 갑옷 같다. 오오-, 로봇을 이런 형태로 제작하면 어떨까? 그래도 최신 방탄헬멧에 황소뿔은 좀 그렇다. 백병전할 때 들이받기 좋으려나? 찔리면 사망각인데······.’
중얼중얼-.
박사랑과 박우정의 최후를 유도한 후로 부쩍 일에만 몰두하는 중이다. 죄의식 따위는 들지 않았다. 마땅히 내려야 할 벌, 문예의 손자로서, 손광연의 아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감상이었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사람의 죽음 앞에 초연해서.
그건 어쩌면 마음을 주고 정을 들인 사람이 아닌, 내심 죽기를 바란 사람이 사라졌다는 지극히 간사하고 인간적인 안도가 아닐까.
두구 엘릴은 나타나지 않았다. 간절히 부를 사정도 없었지만, 제 녀석이 먼저 등장하는 일도 없었다. 간다는 인사도 없이 떠난 듯했다.
이런 저런 인간으로서의 잡념을 떨치고 일상에서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토록 좋아하는 스포츠 이벤트, 월드컵이 목전에 있는데도 말이다.
[비비비빅-.]
“네, 손진혁입니다.”
- 로비 당직 오원호입니다. 손유진 양 숙소로 올라갔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오노 님.”
이름이 특이한 사람이네. 일본계인가?
외국계를 핵심 기업에 채용하다니, 역시 글로벌 기업 세인답다.
“퇴근하자.”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을 캐비닛에 넣고 잠갔다.
본부장실은 주말과 평일을 가리지 않고 직원들이 편하게 회의실로 이용한다. 따라서 항상 문을 열어 두어야 하기에 책상에는 어떤 업무 자료도 남기지 않고 있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옥상 헬기장에서 다른 직원과 담소를 나누는 유진이가 보였다. 낯가리지 않고 어울리는 것도 진혁에게는 없는 붙임성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교적인 아빠 성격을 닮은 거겠지.
“와아-. 이렇게나 키가 큰데 중학생이라고?”
“어머나, 정말. 교복만 아니면 어른이라고 해도 믿겠어.”
직원 휴게 공간으로 이용하도록 옥상을 개방해서 누구나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비단잉어 밥을 줄 수 있다. 지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찾는 인원이 많지는 않았다.
“저보다 큰 친구들도 많아요오-.”
“요즘 학생들은 정말 인종이 다른 것 같다니까?”
“어! 오빠 왔다!”
“어이구우-, 울 애기 왔어-?”
“오빠아아아-!”
스물넷, 열다섯.
손 남매의 재회는 언제나 다정한 아빠와 딸을 연상케 했다.
유진이와 대화를 나누던 직원들의 입꼬리가 절로 흐뭇하게 올라갔다.
“오빠, 여기 앉아요. 앉아 봐요.”
연못가에 먼저 앉은 유진이가 옆자리를 두드렸다.
그리고는 부랴부랴 가방을 열었다.
어찌나 신났는지 침방울까지 떨어뜨렸다. 스읍-.
“오빠, 이거 보세요오-. 짜잔-.”
“오와아-. 이게 무야아? 대대대대대대상-!”
“까하하-!”
동생 앞에서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오빠의 버릇도, 그런 오빠를 보며 환하게 웃는 유진이도 여전했다.
“오빠는 한 번도 받지 못한 과학올림피아드 대대대대상!”
참가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수상내역도 없다.
“까하하-! 또 있어요오-.”
“또? 태권도 대회 나갔다더니 설마 트로피 들고 온 거야?”
“그건 지난 주말에 봤잖아요오-.”
“아, 그렇지.”
웃으며 눈을 흘긴 유진이가 꺼낸 것은 학교장이 발행한 동아리 인증서였다.
“여기에 오빠가 사인만 해주면 돼요.”
“복사도 해야지.”
“네, 맞아요. 3층 대외협력실 씨에스알팀에 복사본 제출하면 연구소 출입증 준대요.”
“에구우-. 사인도, 제출도 오빠가 직접 하면 되는데 뭐하러 가져왔어-. 구겨졌네.”
“발품 파는 낭만이 있잖아요. 히히-.”
진혁은 어린 유진이에게 하던 것처럼 가볍게 맞댄 이마를 비볐다.
이 녀석이 제법 머리가 컸다고 낭만을 찾잖아. 조만간 연애한다고 화장하려나.
“음······, 동아리 이름이······.”
반으로 접혔던 동아리 인증서를 펼친 진혁이 이마를 긁었다.
「내거친생각과학」
저절로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되는 건 기분 탓이겠지.
진혁만의 착각은 아닌 듯했다.
내 거친 생각 하아앙-.
어깨너머로 보던 연구소 직원이 콧노래를 흥얼거렸으니까.
“이름 멋있죠, 멋있죠? 이거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에요.”
“멋- 있네······.”
그럼, 그렇지.
손가장에서 이런 이름을 생각해낼 사람은 아빠가 유일하다.
뭐, 유진이가 만족한다면 오빠는 행복하다. 얼굴은 왜 화끈거리는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제목과 달리 동아리 소개는 정상적이었다.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인간을 위한 과학을 탐구하는 태양여자중학교 학생들의 실험, 연구, 발명 동아리.
주요 활동: 전기, 기계 제작 등」
휴머니즘. 거- 조오치!
“아빠네 연구소 출입할 동아리도 만들었어요.”
유진이가 다른 인증서를 들이밀었다.
진혁의 손이 자동으로 이마로 향했다.
“그 동아리 이름도 아빠가 지어주셨니?”
“네!”
벅벅벅-.
손톱을 버티지 못한 진혁의 이마가 붉게 물들었다.
「불안한눈빛화학」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지구와 자연을 보호함으로써 인간을 이롭게······.
주요 활동: 친환경 비료 연구, 신소재 개발, 폭파 시험, 화산 활동 연구 등」
제정신입니까, 아빠 휴먼?
오빠의 서명을 받아 인증서를 가방에 갈무리한 유진이가 손을 모았다.
“오빠! 오늘 쿼드론 타고 갈 거예요?”
“응. 그래야지.”
“명동에서 놀다가 밤에 가요오-.”
“그러자.”
사람 많고 붐비는 건 질색이지만 동생이 가자는데 가야지.
‘오늘 저녁 운동은 곰짐에서 해야겠다.’
벌떡 일어선 유진이가 집으로 향했다.
“우리 오빠 집 청소부터 해야지. 저번에 보니 털이, 털이-. 으으으-! 사진 찍어서 수정 언니한테 보내 줄 거야.”
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