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9)
굵은 눈송이가 빗줄기처럼 노이즈를 만드는 거울.
어둠을 입고 거울처럼 변한 유리창에 박우정의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순수한 비웃음이라는 말이 있다면 저런 표정이겠지.
용서를 구할 의사를 묻는 말에 돌아온 조소에서는 일말의 양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다.
“저 자료가 아니더라도 당신을 세상에서 지울 준비는 모두 마쳤어. 준비한 지 벌써 10년이 되어가. 나는 완벽히 준비하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거든. 돈으로는 막지 못할 거야. 어차피 자금도 모두 묶일 테지. 검찰도 당신을 밟고 살아남으려 들 테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피차 마찬가지니까.”
“궁금했는데 그 이유였나······.”
박우정이 입을 떼었으나 창에 손바닥을 댄 진혁은 돌아서지 않았다.
“날 몰락시키기 위함이라면-.”
“그냥 실행하면 됐을 텐데 왜 굳이 만나서 기회를 주느냐 묻고 싶은 거겠지. 그게 궁금한 거겠지.”
목소리가 듣기 싫어 이번에도 말을 잘랐다.
“내 아버지께 사죄하기를 바랐다. 관대한 분이시라서 인간 같지 않은 놈조차 용서하고 밥을 먹이시거든. 그래서 내 아버지가 널 용서한다면 나도 널 잊을 생각이었다.”
“흐흐흐-.”
“할아버지와 할머니 영전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 기회를 주고 싶었다. 너를 위한 기회가 아닌,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편히 눈 감으실 계기. 그래서 할아버지를 찾고도, 쉬실 시간을 드린 후에야 움직였다.”
“흐흐흐······.”
어이없다는 듯 가슴을 들썩이는 박우정을 외면한 진혁이 말을 이었다.
“당연히 사과 따위 할 생각이 없겠지.”
그래서도 안 돼. 너는 끝까지 악인으로 남아야 한다. 진혁은 창에 댄 손에 힘을 주어 지그시 밀었다. 박사랑의 결정을 도울 때도 했던 일이다.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삶이나 죽음이 아니다.”
쩌저저저-.
서서히 가하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두꺼운 통유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회적 징벌은 너무 물러 터졌지. 법으로는 네 죄를 모두 다스리지도 못해. 증거가 있다 해도.”
쩌저저-.
“그래서······. 날 밖으로 던져 살인자라도 되겠다는 게냐?”
“죽음은 너무 쉽고 편한 벌이야. 당신에게 그보다 더한 고통이 뭘까 생각해봤어.”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박우정이 눈을 좁혔다.
진혁은 파열음을 배경 음악 삼아, 박사랑에게도 했던,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거래를 제안했다.
“내가 역사에서 배운 게 있다면 씨를 말리고 재산을 거덜내는 게 진정한 복수라는 거다. 고마운 줄 알라고. 난 당신처럼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성격이 못 돼서 말이야. 그래도 모은 재물을 말릴 자신은 있어. 큰아들, 딸, 둘째 아들, 셋째아들, 그리고 더 있지. 당신 손주들. 구정물을 마시고 썩은 음식을 주워 먹게 만들어 주지. 당신이 종이라 여겼던 이들에게 구걸하고, 껌값을 벌기 위해 더러운 골목에서 기꺼이 개처럼 엎드려 몸을 팔고, 거지들의 발가락을 핥으며 시궁쥐처럼 연명하게 할 생각이야.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으나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말이었다.
빙의자로 살며 보고, 듣고, 느꼈던 이세계의 일상. 그 혹독했던 기억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 잉태한 발화.
“혼자만 죽을 것인가-.”
쩌저저-.
힘주기를 멈춘 후 거미줄처럼 금이 간 유리를 몇 번 밀었다.
“-자식들까지 벌레처럼 시궁창을 기어 다니게 만들 것인가. 당신은 그것만 선택하면 돼.”
웅웅-.
통유리가 묵이나 푸딩처럼 묵직한 몸짓으로 울부짖었다.
“내 제안을 거부하면 다른 방법으로 죽을 거다. 대정도 조각조각 나누어 팔아치울 거야. 중공업은 폐업하고, 기계는 대만에, 자동차는 인도에, 전자는 중국에, 화학은 일본에, 물산은 필리핀에. 헐값에 넘길 생각이야. 당신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거지. 그 완벽한 소멸을 지켜본 후에 죽을 텐가, 유산으로라도 남길 텐가. 그것만 택해.”
유리가 충분히 약해졌음을 확인한 진혁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난 이곳을 복마전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당신을 타도해야 할 유산가로 생각하는 노동자도 아니야. 그저 부모를 해치려던 놈을 죽이러 온 아들일 뿐이다. 내 사적 복수니까 대의니 영웅 심리니 하는 이죽거림은 넣어두라고.”
손을 두어번 탁탁 털고는 차가워진 손바닥을 비볐다.
“왜 당신 말을 잘랐는지 아나? 왜 최후발언 기회를 주지 않는지 알고 있나?”
하얗게 질린 낯빛의 박우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이 멍한 것이, 이미 영혼이 가출한 사람처럼 보였다.
망나니 앞의 사형수와 다를 바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악인의 이야기를 담을 공간이 없어. 하소연은 돌아가신 분들께 가서 해보라고.”
갱생의 기회는 문석일 일행으로 끝이다.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오만한 권력자의 사치일 뿐.
진혁은 오만하지 않다.
힘을 숨겨야 할 때와, 사용할 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수족을 하나씩 제거하며 겁을 줘볼까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너무 뻔하더라고.”
할 일도 많은데 손도 많이 가고 말이지. 진혁은 테이블에 있던 자료를 모아 챙겼다.
“이 자료로 내가 뭘 할지 상상해 봐. 현실보다 상상이 더 두려운 법이지. 그 상상은 곧 악몽이 될 거다. 저승에 가서라도 사죄를 하면, 모든 계획을 없던 것으로 해주겠다.”
나는 관대한 우리 아버지 아들이니까. 이미 얼이 빠진 박우정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영 번을 길게 누르면 내가 받는다. 자식들을 살릴 수 있는 건 오늘 자정까지야.”
그 말을 남긴 진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바깥의 그것보다 더 차갑고 무거운 공기를 남긴 채.
“이봐. 홍기준도, 양키들도 함께 세운 계획인가? 아-,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겠구먼.”
멍청한 얼굴로 자문자답하는 박우정을 향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은 진혁이 문을 닫았다.
쿠웅-.
문이 닫히는 육중한 소리가 박우정에게는 천지개벽의 천둥소리로 들렸다.
*
한 시간, 두 시간······.
경영권 다툼에서 밀려난 이들이 뛰어내리는 모습을 많이도 보았다.
한심한 작태였다.
돈이 있으니 그저 살면 되는데, 편하게.
“그게 아니구먼.”
권력의 맛이련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허탈감이 지나쳤다.
겨우 두 시간 만에 눈썹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흐······ 흐허허-.”
두려웠으나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병마와 싸우며 약해졌던 부친 박운철이 회상 한 조각을 들려주었었다.
문예는 단 한 번도 자신의 호의를 수락한 적이 없다고.
그 단호하고 차가운 거절조차 얼음으로 심장을 비비는 듯 짜릿했다고, 사람이 뿜는 냉기가 달콤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고. 돈으로 사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문예에게서 처음 배웠다고.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피의 힘이련가.
저 아이는 복수조차 유혹하듯 하는구나.
‘낭만적이구먼······.’
원수의 숨통을 직접 끊는 쾌락을 포기하고 자결을 명하는 복수자라니.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도 상대를 희롱하며 즐기기보다는 제 할 말만 하고 떠났다. 한마디 항변도 하지 못한 답답함은 저승에 가서 풀라며.
‘그 정도면 훌륭한 복수로구나.’
거부할 수 없는 거래는 받아들이는 것이 장사치의 기본이다.
정도와 담을 쌓은 계급사회 꼭대기에 군림했었으나, 장사치의 됨됨이를 잊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부모라는 사명감도.
손진혁이 두고 간 휴대전화의 숫자 0을 꾹 눌렀다.
액정에 아무런 번호도 표시되지 않았는데 신호음이 들렸다.
뭔가 수작을 부린 전화기 같았다.
- 말하시오.
“내 자식들은······.”
- 보호해주지. 나는 명예를 아는 사람이다. 박현수도 내일 풀려날 거야.
뚝-.
손진혁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홍기준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다. 그래도 최고 권력자가 누군지는 알고 가는구먼. 저런 물건이 있었다니······.’
툭-.
소파에 앉은 채 발을 밀자 구두가 벗겨졌다.
내일 헤드라인이 어떻게 되려나.
컨소시엄의 횡포! 박우정 회장, 사퇴 압박에 투신.
그래, 그 정도면 깔끔하다.
죽은 자에게는 관대한 것이 인간 세상 아니냐.
그래도 끝내 남에게 굽히지 않았으니 자존심 하나는 지키고 간다.
그것이 종들과 다른, 동생 박사랑도 유지한 귀족의 명예렷다.
이 애송이 놈아, 내가 저승에 가더라도 사죄 따위를 할까 보냐.
우지지직-.
자존심의 힘인가, 한세상 원 없이 누리고 욕망이 일거에 소거된 자의 해탈인가.
무게중심을 옮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휘이이이잉-.
박우정은 항상 빨랐다.
누구보다 빨리 성공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제쳤다.
떨어지는 속도도 눈송이보다 빨랐다.
고급스럽구나. 폭신해 보이는 양털 담요라니. 이 얼마나 귀족에게 잘 어울리는 이부자리냐.
***
「경영권을 둘러싼 대정家의 비극」
사퇴 압박을 받던 중 검찰 압수수색 정보를 사전 입수한 박우정의 극단적 선택으로 투신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정승집 개 죽은 데는 가도 정승 죽은 덴 안 간다고 했다.
박우정은 초라한 혈흔만 남기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형제들과의 다툼에서 패해 비슷한 선택을 했던 다른 재벌가의 늙은이처럼.
유준식은 컨소시엄의 결정에 따라 대정그룹 의장에 올랐다.
대정전자 대표이사를 겸하는 자리였다.
[그간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사, 예를 갖추어 고 박우정 회장님의 장례에 차질이 없도록 지원할 것입니다.]
유준식은 마이크가 있든 없든 말을 아꼈다.
그렇다고 본성을 숨기지는 않았다.
대정 계열사 임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박우정의 장남과 차남이 인맥과 권력을 동원하여 반항을 시도했으나 유준식에게는 좋은 빌미였을 뿐이다. 딴에는 사회적 명망이 있고 법조인의 지원사격이 있다 한들, 유준식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보다 볼품없는 힘이었다.
“내가 우리 매제 밑에서 사람 좋게 일만 했더니 저 애송이들이 나를 아주 만만하게 본 모양이야. 상속받은 지분이 있다 이거겠지. 손 사장, 이놈들 본때를 보여줘도 되겠나?”
- 의장님 뜻대로 하실 일입니다.
“내 아무리 권한 위임을 받았다 해도 알비 소유주 의견이 우선이지.”
- 죄 없는 이를 보호하는 것과, 주제 모르고 설치는 자를 용서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똑똑한 자들이었다면 얌전히 임원 연봉이라도 받으며 기반을 다지고 때를 기다렸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지, 그렇지. 한참 젊은 사람도 아는 진리를 모르고 설치다니, 그동안 누린 게 그만큼 컸던 모양이야. 그런데 뚱- 해먼드에게는 연락받았나?”
- 예, 석방된 박현수가 공항 인근에서 행방불명되었다더군요. 미국 경찰 말로는 멕시코 애들이 손을 쓴 것 같다고 합니다.
“딱하게 됐구먼. 나도 자식 간수 잘해야겠어.”
- 자제분들이 말 안 들으면 제게 보내시죠.
“어허허허허!”
진혁과 대화할 때마다 각각 대학원과 대학에 다니는 아들과 딸을 떠올리는 유준식이었다.
그러나 유준식은 애써 비교를 꺼렸다. 저런 놈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텐데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은가. 매제 홍기준의 말이 실로 그럴듯하다.
- “유일한 사람입니다.”
***
곧 펼쳐질 월드컵으로 나라 안이 시끌벅적했지만 손유진의 학교는 다른 일로 떠들썩했다.
「경! 태양여중 손유진! 제〇〇회 청소년 과학올림피아드 대상! 축!」
- 교육부•과학기술부 공동 주관 / 후원: 세인 테크니카
에헤헤-.
손유진은 학교 정문에 걸린 현수막을 보며 바보처럼 웃었다.
“유진아, 너무 멋져!”
“헤헤, 감사합니다. 언니.”
“유진 언니 최고예요!”
“오옹-, 고마워 얘들아.”
고등학생을 제치고 중학교 2학년생이 달성한 쾌거, 태양여자중학교 최초의 역사였다.
손유진이 제출한 모델은 초소형 스파이 드론이었다.
직경 15mm 크기의 구체 내부에 소형 팬을 달아 비행능력을 확보하고, 휴대폰 카메라보다 작은 렌즈를 삽입했다. 수은 건전지를 사용해 1시간 이상 비행이 가능했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데이터 저장 공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사진 몇 장을 저장하는 것이 전부였다.
조잡한 물건이었으나 그래도 기획 의도대로 작동했다.
“유진아, 그런 건 어쩌다 만들게 된 거야?”
“행운이 찾으려고 만들었어요.”
“행운이?”
“제가 알을 주워다 부화시킨 아이인데 언제부턴가 자주 안 보이더라구요오-. 어디 절벽 동굴에 숨거나 매가 채가면 높아서 못 찾잖아요. 그래서 사람이 가기 힘든 곳, 높고 좁은 곳 조사할 때 쓰려고 만들었어요.”
홍기준이나 진혁의 도움 없이 스스로 고안하고 발명했다는 점에서 손유진 스스로도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제너럴의 도움으로 기체를 디자인하고 납땜과 조립에는 조슬찬의 도움을 받았지만 아무튼.
심사위원들도 손유진이 스파이 드론을 고안하게 된 배경에 종을 초월한 사랑이 깔려 있다며 후한 점수를 주었다는 후문이다. 성능과 활용도를 높게 산 것은 당연하고.
“그래서 행운이는 찾았어?”
“네······.”
**
행운이를 이틀째 보지 못한 날이었다.
장군이와 검마를 앞세워 찾아다니던 손유진은 저수지 근처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목에 분홍색 리본이 달린 뱁새의 사체를 찾았다. 장군이가 나무 위를 보며 짖기에 스파이 드론을 띄워 사진을 촬영해 확인했다.
무려 30m나 되는 높이, 날렵한 장군이도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었다.
행운이는 주인 없는 까치 집에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뱁새 평균 수명의 1.5배를 살았으니 행운이는 장수한 셈이었다.
손유진은 엄마에게 마지막을 보여주기 싫었던 행운이가 조용한 곳을 찾아 잠든 게 아닐까 추측했다.
제 방 컴퓨터로 사진을 확인하고는 다시 미루나무를 찾아가 나무에 분홍색 끈을 둘렀다. 나무를 벨 수도, 기어오를 수도 없으니 그것으로 조의弔意를 대신한 것이다.
“그대로 두자. 잘 자, 행운아. 엄마가 자주 올게.”
손유진은 행운이가 잠든 사진을 몇 장 더 찍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 방 창턱에 집 짓고 사는 행운이 주니어들이 더 중요하다.
붉은머리오목눈이 알 한 개에서 시작한 역사는 지금에 이르러 손유진의 창 테라스에 대가족을 이루었다. 녀석들은 손유진에게 다가오지 않지만, 손을 뻗어도 도망치지 않는다.
엄마와 아빠가 그랬다.
살아있는 생명이 더 중요하고, 늙은이보다 어린이가 더 중요하다고.
“미루나무 꼭대기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행운이와 노래하던 기억을 떠올려 노래를 흥얼거렸다. 행운이는 손유진이 노래를 부를 때면 삑삑- 거리며 좋아했는데, 어쩌면 행운이는 손유진을 따라 노래를 부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울음이 섞여 나왔다.
“으애애애애-. 내 새끼, 행운이-.”
행운이는 왜 하필 미루나무를 택했을까, 아마도 가장 높아서 그랬겠지만······.
아빠가 가르쳐준 미루나무 노래를 자주 불러서 그랬던 걸 거야. 행운이는 유독 그 노래를 좋아했어.
슬픔을 잠재울 수 있을까, 크게 부르면 행운이가 들을 수 있을까, 목청을 높였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김일성 빤쓰가 걸려있네에-. 으흐흑-. 지나가던 김정일이 냄새 맡고 쓰러졌대요오-. 으흐흐흑-, 행운아-. 내 새끼 보고 싶어······. 우이이잉-.”
이제 훌쩍 커서 어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걷는 속도가 빠른데,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나 먼 날이었다.
**
“유진아, 그런데 버스 정류장은 그쪽 아니지 않니?”
“터미널 가요. 오늘은 서울 가는 날이거든요오-.”
이 주에 한 번, 수업이 있는 날이면 학교를 마친 손유진은 오빠를 만나러 모험을 떠난다.
오늘은 상장 외에도 오빠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
내 동생 잘했다며 칭찬할 오빠를 생각하니 행운이를 떠올리며 침잠했던 감정이 따스해졌다.
어린 손유진이 동네를 순회할 때 그랬던 것처럼 팔을 크게 휘두르며 씩씩하게 걸었다.
헤헤-. 오빠 만나러 출바알!
“에헴-. 봄이로고오-. 어허이-. 따따앗- 허다아-.”
누가 그러더라.
중학교 2학년생의 감정변화는 조울증과 비슷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