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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327화 (327/338)

시작 (8)

채규호가 팔을 크게 벌리는 바람에 손에 든 캔커피가 넘쳐 손등으로 튀었다.

덜렁이 짝꿍이 중학교 때도 곧잘 하던 짓이라 두 친구는 그러려니 했다.

손등을 쫍- 빨아들인 채규호가 늙은이처럼 허어- 한숨을 쉬었다.

“미국 학생들은 거라지에서 이것저것 만지며 발명도 하고 창의력도 발휘한다는 거여어-. 양복쟁이들 이거 순 미친놈들 아니냐? 아우-씨! 내 일도 아닌데 갑자기 열받네?”

급발진한 친구를 보며, 진혁은 크게 소리 내지도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순둥이처럼 보여도 엉뚱한 곳에서 앙칼지게 구는 친구가 귀엽게 보인 탓이다. 중학교 때는 왜 남아일언중천금을 어기고 회장에 출마했냐며 따졌던 녀석이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교육 행정가들의 똥볼에도 절로 실소를 자아내게 된다.

“어이없긴 하다.”

“미국에서 성공한 아이티나 테크 산업은 죄다 거라지에서 시작했다는 거여. 아니 시발 회장, 이거 어디서부터 어떻게 따져야 되는 거야? 걔들은 현실적으로 거라지가 집에 붙어 있고 널찍하니까 작업실로 쓰는 거잖아. 그럼 우리는 접근성 좋고 편하게 작업할 공간을 갖추자! 이런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 거 아냐?”

“그렇지. 그게 적당한 해석이지. 어플리케이션이 잘못됐네. 마침 다음 주에 계열사 강연 잡힌 게 있는데 써먹어야겠다.”

“헛다리 사례로?”

“응.”

미국 학생들의 창의력을 배우겠다며 차고를 짓는다니, 응용 또는 적용이 부적절한 예로 사용하면 좋을 듯했다.

“그리고 미국놈들이 아무리 거라지에서 별짓을 다해도 세인연구소 발뒤꿈치도 못 따라오잖아. 그러면 세인이나 세인과 산학 협력 맺은 학교를 연구해야지 왜 미국을 가는 거냐고요오-. 안 그래?”

재규어, 이 자식··· 수다 떨고 싶어서 찾아왔구나.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을지 감히 짐작할 순 없어도 점차 밝아지는 친구의 표정은 달가웠다.

고막이 너덜너덜해지는 것 같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짝꿍을 위해 진혁은 버티고 또 버텼다.

‘친구 좋은 게 뭐냐. 나도 친구 노릇 하면서 사는 거지.’

한참이나 수다를 떤 채규호는 소화불량이 해소된 사람처럼 행복해했다. 나중에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회사 내부가 궁금하다며 진혁의 눈치를 살폈다.

사장 친구 빽으로 구경시켜 달라는 뜻이다.

진혁은 눈치가 좋아져서 그런 것도 안다.

짝꿍을 이끌고 미래전략본부 사무실과 연구소를 둘러보게 했다.

“우와-. 누나들 진짜 이쁘다······.”

이 새끼가?

채규호는 진혁과 대화할 때보다 더 집중한 눈빛이었다.

“회장. 그래도 걱정 마. 삭도에 쑤셔넣을 놈들 열 명 넘게 섭외해놨어. 회장을 위해 개발 중인 것도 있지. 나중에 보면 깜짝 놀랄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채규호는 여직원들을 향해 눈을 빛냈다.

제 놈도 꼴에 남자라 이거겠지.

떠날 때는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아쉬워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아까 그 하늘색 블라우스 누나 연락처 달라고 하면 때릴 거야?”

“응.”

진혁은 장난스레 쥔 주먹을 고양이처럼 휘둘렀다.

개인정보는 소중하다.

본인 동의 없는 연락처 제공은 ······ 아무튼 나쁜 짓이다.

“베이지 스커트 누나는?”

“죽는다, 진짜.”

“생머리에 뿔테 안경 누나느-.”

“그만. 내 손으로 짝꿍을 죽이고 싶지 않다.”

“아니, 그냥 나이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생머리에 뿔테 안경이 너무 내 스타일이라 그래.”

채규호는 유독 심동미에게 미련을 보였다.

“내 입사 동기야. 우리보다 다섯 살 많아. 밥 잘 사주는 누나야.”

“아아-, 다섯 살 차이면 딱 좋은데······.”

재규어 이 새끼, 연상 좋아하네.

버스에 오르는 채규호를 보며, 진혁은 모처럼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더이상 갈등하지 않고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되었기에 정체성에 대한 모호함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이쁜 것 같기도 하고, 누나들 같기도 하고······.’

어려진 것인지, 드디어 정신연령이 제 나이를 찾은 것인지.

어쨌거나 놀라운 발견이다.

버스 문이 닫히려는 찰나, 채규호가 몸을 밖으로 빼고는 손을 높이 흔들었다.

“회장! 졸업하고 보자! 올해 마무리 잘해!”

“너도!”

멀어져가는 버스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마무리할 일이 있지.’

***

2001년 12월.

밤눈이 지독하게도 많이 내렸다.

고층 빌딩에서 내려다본 서울은 하얀 나라가 되어 있었다.

통유리 너머 밤하늘을 회색으로 만들며 펑펑 쏟아지는 눈을 배경으로, 박우정이 여전한 독기를 뿜었다. 그 눈이 테이블 위에 놓인 것들을 응시했다.

서류철, 신문 기사, CD, 카세트테이프, 비디오테이프, 그리고 수백 장의 사진.

노쇠했다.

환갑을 훌쩍 넘긴 그의 나이를 증명하듯 광대 밑이 푹 파였고, 인중에는 빗살처럼 주름이 가득했다. 물기 없는 눈에서는 예전의 총기를 찾을 수 없었다.

테이블 건너에서 박우정을 무심한 눈으로 보는 이들의 눈에서는 일말의 동정심도 찾을 수 없었다. 닮은 듯 대조되는 사내들의 대치는 삭막하고도 건조한 풍경을 자아냈다.

두르르르륵-.

꼴에 눈치는 있어서 입을 뻥긋하지는 않았으나, 뚱보 리처드 해먼드만이 박우정의 회장 의자에 앉아 아이처럼 빙빙 돌며 신난 표정이다.

테이블을 보던 자세 그대로 박우정이 눈동자만 굴려 앞에 앉은 이들을 훑었다.

세인그룹 홍기준 회장.

세인전자 대표이사 유준식 사장.

세인그룹 미래전략본부장 손진혁 사장.

한눈에도 중국계로 보이는 이는 홍콩의 글로벌 투자사 ‘골드 다이아몬드’의 CEO 마이클 첸.

미국 대형 투자사 ‘웰스 케이프’의 래리 존스.

거기에 회장 의자를 놀이기구처럼 타는 저 뚱보는 그 유명한 RB Investment의 리처드 해먼드.

그리고 지금 설명을 늘어놓는 이는 박우정의 수족 노릇을 하는, 아니 수족 노릇을 했던 신상열 실장.

“알비를 주축으로 하는 컨소시엄은 대주주로서 박운철 전 회장이 없는 대정은 오너 그룹으로서의 결집력과 대외 위상이 약화되었다고 판단하여······.”

그 누구도 신상열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대주주의 지위를 획득한 이들이 박우정의 퇴진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것이 이미 한 달을 넘었는데 이제 와서 새삼 놀랄 까닭도 없지 않은가.

박우정은 다시 시선을 테이블로 내렸다.

온갖 헤드라인이 의심 어린 시선으로 박우정을 거론하고 있었다.

「박운철 회장 장례 엄수, 정재계 인사 조문 줄이어.」

「대정家 경영권 분쟁? 박사랑 대정물산 사장, 투신 自殺」

「노동자 사망사고에도 공장 가동한 대정식품」

「노사 합의 불발, 대정중공업의 운명 안갯속으로」

신문을 치우자 박우정의 사생활이 가득 담긴 선명한 사진이 수북했다.

하나같이 젊은 여인들과 알몸으로 뒤엉킨 사진이었는데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진이 대부분이다. 그중에는 유명 배우와 가수의 얼굴도 있었다.

그런것쯤 무섭지 않다.

어차피 자기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자를 향한 세상의 손가락질에는 익숙했으니.

박우정은 피부색 가득한 사진을 치웠다.

그러자 그 밑에 깔렸던 사진이 드러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셋째 아들.

미국 교도소에 수감 중인 박현수였다.

눈은 벌에 쏘인 듯 퉁퉁 부었고 코가 삐뚤어졌으며 이빨도 몇 개 부러져 있었다. 성한 곳 없는 자식의 몰골에 평정을 유지할 부모가 있을까.

‘감히.’

턱에 힘을주자 이가 부서질 듯 끼이익- 비명을 질렀다.

“······ 저도 살기 위해 밝은 길, 옳은 길을 택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부디 양해를-.”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는 신상열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던져주는 먹이를 주워 먹던 종놈 주제에 밝은 길 운운이라니.

카메라를 숨기고 자료를 수집한 주제에 옳은 길을 들먹이다니.

‘돈이야말로 밝고 옳은 길이다.’

신상열에게 손을 내저었다.

당장 꺼져라. 너는 나중에 두고 보자.

이제 와 따져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저 비디오테이프에는 당연히 잠자리 영상이 있을 테고, 녹음테이프에는 정치인과 장학생들을 개나 노예로 칭한 자신의 목소리가 담겨 있을 터.

허리를 꾸벅 숙인 신상열이 나간 후 홍기준 일행에게 시선을 두었다.

이들 앞에서 금권金權 강의를 늘어놓을 이유는 없다.

이미 박우정보다 더한 권력을 쌓은 이들 아닌가.

“그래, 내가 순순히 물러나면 이 자료들을 비공개하겠다는 건가? 내 아들도 미국 감옥에서 빼내 주고?”

신상열이 밝힌 대로 주주총회를 거치지 않고, 겉보기에 아름다운 몰골로 제 발로 내려오는 수순. 눈앞에 널브러진 증거가 말하는 바는 그뿐이었다.

그러나 홍기준은 묵직하게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협의는 없소. 선택과 결정만 하시면 됩니다. 대답은 컨소시엄 대표에게 하시고.”

홍기준은 그리 말하며 팔을 뻗어 진혁을 가리켰다.

할 말을 마친 홍기준이 몸을 일으키자 일행이 따라나섰다.

리처드 해먼드는 회장 의자를 가져가고 싶었는지 몇 발짝 끌고 가다가 래리 존스에게 목깃을 잡혀 끌려나갔다.

“스티브, 나 저거 하나 사 줘. 뉴욕에 있는 것보다 좋다구!”

그 와중, 박우정의 속을 뒤집는 말을 잊지 않았다.

“헤이-, 팕-. 당신 아들 직장도 파열됐대. 빨리 빼내는 게 좋아. 리처드는 힘이 있어서 언제든 꺼내줄 수 있어!”

단 한 사람, 손진혁은 말석에 앉아 무감정한 눈으로 박우정을 응시했다.

아들 생각에 치가 떨렸을까, 박우정의 음성은 불안정했다.

“그래, 너 같은 놈들이 많았지.”

박우정이 뭔가 지껄이기 시작했으나 진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속에 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집중했다.

“종놈들이 제법 밥벌이를 하고, 딴따라로 성공하면 주인과 겸상을 하려 든단 말이야.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저 늙은이는 뭐가 아쉬워서 나쁜 짓을 반복했을까.

“너는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성공한 놈이구나.”

저 늙은이의 눈에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걸까.

생명보다 존귀한 것이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

“나와 겸상할 자격이 있-.”

“박사랑의 죽음이 궁금할 거요.”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진혁이 박우정의 말을 잘랐다.

내용도, 목소리도 더 듣자니 역겹기도 해서 입을 틀어막을 필요가 있었다.

“당신 여동생도 죽기 전에 나를 만났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진혁은 박사랑이 투신한 후 검찰 조사까지 받았다.

세상의 눈을 달래기 위한 형식적인 조사였다.

경영권 다툼 중인 그룹의 주주로서 격려 방문.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진혁에게 살해의 동기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지금······ 내 동생 죽음과 네가 관계가 있다고 하는 거니?”

“당신에게는 알려주지. 내가 죽였소. 내 얼굴을, 몸을 훑는 색욕에 찌든 눈깔이 역겨워서 죽였소. 투서 한 장으로 내 외조부를 모함하고 어머니의 집안을 풍비박산 낸 죄를 물어 죽였소.”

그리 말한 진혁은 가방에서 뭉툭한 서류 뭉치를 꺼내 박우정 앞으로 던졌다.

“그 정도면 십칠 층에서 몸을 던질 사유에 무게를 더해주겠지. 남자에게도 그렇겠지만 여자에게는 더욱 지독한 형벌일 거요.”

진혁이 던진 서류철을 펼친 박우정이 이마를 짚었다.

역시 피부색 가득한 사진, 피는 못 속이고 씨도둑은 못 한다고 했다.

박우정은 젊은 남자들과 뒤엉켜 놀아나는, 눈이 까뒤집힌 박사랑의 사진을 얼른 뒤집어버렸다.

“당신도 똑같이 해주는 게 자식 된 도리 같소.”

진혁이 저승사자처럼 최후통첩을 보냈다.

박우정의 한쪽 광대가 도드라졌다.

부끄러움은 가진 것 없는 것들이나 느끼는 것, 대장부가 어찌 저런 일로 목숨을 버릴까. 스캔들로 다져진 박우정의 내성은 진혁의 통보를 비웃고 있었다.

“그래, 비웃어. 박사랑도 그랬지. 그런 일이 대수겠냐고. 오히려 능력과 매력을 과시할 수 있어서 좋다더군. 그때 알았소. 양심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족속이라는 걸.”

“허어-.”

“거래를 하지. 장사치답게. 당신 동생이 했던 것처럼.”

뭔가 짜증스러운 감정을 표출하려 숨을 내쉬던 박우정이 입을 닫았다.

호랑이 숨소리가 저럴까.

낮고 잔잔한 음성인데도 이상하게 으르렁거리는 듯 들렸다.

“거래? 내 동생도 거래 대가로 목숨을 내걸었나?”

“내일 정오에 검찰에서 압수수색을 들어올 거요. 당신네가 열심히 키운 그 장학생들 말이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박우정의 눈에는 그리 쓰여있었다.

쿠웅-.

진혁이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 두툼한 서류뭉치를 던졌다.

자연스레 펼쳐진 서류에는 박우정이 받은 것과 다를 것 없는, 회계 부정 자료가 건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신상열을 통해 얻은 자료가 꽤 되거든. 회계 부정, 외환 관리법 위반······ 맛보기용 자잘한 건으로 몇 개 보냈소. 정권에는 좋은 먹잇감이 되겠지. 친기업 정부라는 오명을 슬슬 벗을 때가 됐으니 말이오. 쇄신을 부르짖는 검찰도 계기가 필요할 테고.”

상체를 반쯤 일으켰던 박우정은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공포에 의한 탈력이었다. 서류는 그렇다 치고, 저 애송이의 눈동자가 제 영혼을 몸 밖으로 끄집어내는 듯했다.

“아이야, 너는······. 스무 살 같지가 않구나.”

“스물셋이오.”

60년을 산 스물셋이지. 중얼거린 진혁이 소파를 박찼다.

눈이 쏟아지는 창가로 향했다.

우뚝 멈춰 서서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하나만 묻자······.”

질끈 힘을 준 턱관절이 도드라졌다.

박우정은 몸을 돌려 진혁을 노려보았다. 지쳤으나 혐오의 빛이 가득했다.

유리를 통해 그 눈빛을 접한 진혁은 애써 짜증스러운 심기를 감췄다.

“용서를 구할 생각이 있나? 내 할아버지께, 할머니께, 아버지께. 순수하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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