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3)
“제 이름 파세요. 누구든, 어디든, 우리 본부와 연구소에 태클 걸면요. 제가 그렇게 정했다고 하세요. 굳이 맞서 싸우고 말 만드느라 애쓰지 마시고요. 아시겠어요?”
“넵!”
“상사는 그러라고 있는 사람입니다. 싸워야 할 일이 생기면 제가 싸워요.”
팀장 하던 버릇은 여전했다.
뭐, 나쁜 버릇은 아니니까 회장님도 이해해주시겠지.
“전체메일 돌려야겠습니다. 상사는 방패다. 궁지에 몰리면 본부장을 팔아라.”
“좋네요.”
실실 웃는 민용락을 보니 재회가 실감난다.
*
미팅을 마치고 민용락과 함께 전략기획부로 향했다.
본부 업무를 총괄하고 본부장을 보좌하는 부서답게 본부장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상석에 앉은 김이도 부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늘 회식하시고 비용처리는 제 앞으로 하세요. 다른 부서로도 전달 부탁드립니다.”
김이도가 의자 팔걸이를 쥐고 엉거주춤 일어서며 물었다.
“스티브는 같이 안 가십니까? 마침 메뉴를 여쭈려던 참입니다.”
“저 있으면 불편하잖아요. 저는 당분간 회식 참석 못합니다.”
편하게 하세요, 편하게. 회식하며 상사 욕도 하고 그러는 거지.
아? 돌아섰던 진혁은 거기에 생각이 닿자 다시 몸을 돌려 김이도를 보았다.
“부서장들은 부서장끼리 회식하세요. 부서원들 회식에 끼지 마시구요. 확인하겠습니다.”
파티션 끝자락 막내 사원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것을 보니 나쁘지 않은 지시 같았다.
*
“퇴근할 때 엘리베이터 잡아두는 일 하지 마세요. 배웅하는 것도 하지 마시고요.”
첫날이라 그런지 지시할 일이 많았다.
그래도 차근차근 하나씩 고쳐가기로 마음먹었다.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을 바꾸면 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
일반적으로 기업에 근무하는 SSS 직원들은 기업에 보안용역을 제공할 목적으로 양성된 직원들이었다. 그러나 연구소처럼 보안 등급이 높은 곳에는 정예 요원들이 머문다. 그리고 그들은 진혁이 입사하기 전부터 VIP 리스트를 꿰고 있던 이들이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1층 로비에 진혁이 나타나자 선임 요원이 급히 옆에 붙었다.
“숙소를 봐야겠는데요.”
“네. 이쪽으로······.”
요원은 정문을 향하던 걸음을 돌려 로비 구석의 비상구로 안내했다.
비상구를 열자 계단이 보였다.
요원을 따라 지하 1층 통로를 20미터쯤 걷자 다른 엘리베이터가 나왔다.
「P, B1, B2, B3」
버튼은 네 개뿐이었다.
‘펜트하우스?’
P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시작하자 요원이 설명했다.
“지하 삼 층으로 가시면 훈련장과 연결되는 주차장 통로가 나옵니다. 진선규 선수도 거기에 차를 대고 훈련장으로 이동합니다. 그곳도 따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1분 조금 넘게 걸려 27층 건물 꼭대기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은 저 멀리 옥상 끝에서 반질반질한 대리석 질감의 아이보리 외벽을 뽐내는 건물이었다.
“회장님께서 준비해두신 곳입니다.”
“옥탑방 치고 크네요······.”
저건 그냥 집인데?
“저 건물은 파일럿 휴게실입니다. 머무실 곳은 이쪽입니다.”
요원의 손을 따라 왼쪽으로 시선을 돌린 진혁의 턱이 떨어졌다.
‘이게 무슨 옥탑방이냐······.’
좌에서 우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2층 저택이 빌딩 옥상에 있었다.
빌딩 건평이 있으니 옥상이 드넓은 건 그렇다 치고, 중앙에는 헬기 착륙장이 있었고 쿼드론이 얌전히 앉아있었다.
주위로 잔디밭과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에는 비단잉어가 유유히 노닐었다.
‘아니 왜 먹지도 않는 생선을 넣어둔 거여?’
그래도 장군이가 좋아할 듯했다.
물도 깨끗하고 유속도 없어서 숏다리 장군이도 쉽게 사냥을 하지 않을까.
더 대단한 건 집 내부다.
“이거 몇 평이나 될까요? 혹시 아세요?”
“저도 문외한입니다만 건평이 대략 백오십 평 정도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클 이유가 있을까요?”
눈을 지그시 감은 진혁이 눈썹 언저리를 긁었다.
뜻밖의 충격에 피로가 몰려온 탓이다.
“체육시설과 극장, 오락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가족분들과 친구분들도 초대하라는 뜻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미리 얘기 좀 해주시지······.”
“저희 요원들은 회장님의 유일한 취미라고 알고 있습니다.”
깜짝쇼를 말하는 거겠지.
요원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SSS를 각별히 챙기고 요원들을 보듬는 일에 정성을 들이는 홍기준이니 이들은 알 수 있겠다 싶었다. SSS도 업무 특성상 요인을 파악해 두는 건 기본일 테고.
“아니, 집에서 밥 해먹을 일도 없는데 이게 다 뭐야아-.”
집안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구내식당이 잘 되어 있어서 아침, 점심, 저녁, 야식, 간식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최고의 복지였으나 삐딱한 눈으로 보면 일하다 죽으라는 메시지로 비칠 수도 있었다.
아무튼.
“우리집보다 커요.”
월세 내놓으라고는 안 하겠지?
월급에서 까려나?
***
회장실에는 주로 나이든 사장단이 배석했다.
“아무래도 나이도 너무 어리고 사회 경험도 일천한 사람을 앉혔다는 평가가 직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임원진들 생각도 그렇겠군요. 스무 살 가까이 어린놈이 회장 자리에 앉아 있으니 얼마나 고깝겠습니까?”
“저,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홍기준은 임직원의 불만을 원천차단했다.
간혹 다른 젊은 직원들의 박탈감을 들먹이는 임원들이 있었으나 나이 공격은 곧 홍기준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여 되받아쳤다.
“윤리위원장을 맡기신 것도······.”
“젊고 사회 때가 타지 않았으니 가치 판단에서 더 중립적일 거라는 발상입니다. 어린 사람이니 인정도 상당 부분 기대할 수 있겠죠. 어차피 윤리위원장은 모두가 꺼리던 자리 아닙니까?”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영양가 없는 자리라서 갖기는 싫고, 굴러들어온 놈이 완장 차는 꼴은 보기 싫고.
쳐낸다고 쳐냈는데도 아직 버릇을 버리지 못한 임원이 많이 보였다.
“내 딸에게도, 아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자리를 나눠줄 겁니다. 문제 있습니까?”
“그래도 미전본부장은 회장님 혈육이 아닌지라······.”
“명예회장님 앞에서 그 얘기를 해 보시죠. 왜 혈육도 아니고 남인 사위에게 회장 자리를 넘겼냐고 말입니다.”
“아아-,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여러분.”
시종일관 여유있게 대응하던 홍기준이 목소리를 더욱 낮게 깔았다.
“저 아직 젊습니다. 앞으로 이십 년을 더 해 먹을지, 삼십 년을 더 이 자리를 지킬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 하시는 걸 보니 제가 죽을 때까지 이 자리를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겨우 마흔네 살.
전생의 홍기준은 칠순을 넘기도록 정정했고 끝까지 회장 자리를 지켰다.
입을 꾹 다문 사장단은 소리 없는 한숨을 콧구멍으로 내보냈다.
종신 독재를 할 테니 토 달지 말라는 말임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나중에 잘리느니 지금 그만두는 편이 낫다. 그러나 어느 기업과도 비교하지 못할 연봉과 혜택 때문에 쉽게 내놓지 못한다.
“제가 여러 선배님들을 보며 안타까운 게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는 듯 사장단의 이목이 쏠렸다.
“늘 새 얼굴이 오면 견제하고 회유하고, 시비를 걸어요. 차라리 시너지를 일으킬 협업을 구상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여기 계신 분 중에는 제가 입사했을 때 찍어 누르려던 분도 계시네요.”
빙긋 웃으며 한 말에 전자 대표이사로 있는 유준식이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홍기준은 그를 가리킨 게 아니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손주뻘 되는 신임 사장을 견제하시려 하십니까?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알고요? 저라면 그 젊은 사람 등에 올라타겠습니다. 한참 어린놈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사실에 욱하지 마시고, 그 혈기를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곳에 쏟아부읍시다. 그리고 윤리제보 채널 더욱 활성화하도록 지시할 테니 내부 단속들 잘하세요. 나이 든 사람일수록 의도치 않게 실수하지 않습니까?”
손진혁이 윤리위원장을 맡게 되었으니 너희 명줄이나 잘 간수하라는 뜻이었다. 성비위, 공금유용, 폭언, 욕설 등등. 단숨에 모가지가 날아갈 사례가 널렸으니.
*
모두 물러가고 홍기준과 유준식만 남았다.
“매제.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홍기준의 오른팔, 그룹 주력사업체를 꾸리는 대표이사.
유명선 체제였다면, 그리고 홍기준이 데려온 엔지니어들이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성공 가도를 달리는 유준식이었다.
홍기준의 방침에 반기를 들 생각은 없었다.
“그 녀석 실력이야 지켜보면 될 일이니 불만은 없어요. 어차피 미래를 위한 투자고, 실전으로 경영수업을 시킨다고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왜 그렇게 높은 직급을 줬냐는 뜻이겠죠.”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세인보다 훨씬 작은 그룹 오너들도 처음에는 사원부터 시작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학사나 석사 학위를 들고 말이에요.”
“그 녀석들이야 부족한 구석이 많으니 대학이든 대학원이든 가서 더 배우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대외적으로 비난을 면할 스펙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죠.”
“아,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름대로 논리는 되겠습니다만-. 우리끼리 그렇게 설전을 하듯 말할 건 아니라고 봐요.”
두 사람의 대화는 잔잔하고 부드러웠다.
다만 유준식은 여전히 의문이 남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 실력이야 이미 널리 알려졌죠. 형님도 아실 겁니다.”
“그렇지. 워낙 유명하니······. 그래도 기업 경영은 다른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 영업, 회의, 접대 강행군을 벌여야 하는 자리예요. 저 뻣뻣한 친구가 걱정이 돼서 그래요.”
진심으로 염려하는 어조였다.
“문화는 바꾸기 마련입니다. 시대가 변하면 영맨들도, 경영자들도 변해야죠. 아버님께서도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서 세인이 침몰하지 않도록 제게 방향타를 맡기신 게 아니겠습니까?”
“예, 뭐······. 매제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나도 열심히 변해보겠습니다만. 매제가 뭔가 속 얘기를 안 해주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죠. 허허.”
유준식이 서운한 기색으로 떱-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홍기준이 눈을 빛냈다.
“얕잡아보게 둘 수 없었습니다. 빼앗기기 싫었습니다.”
유준식이 무슨 뜻이냐는 듯 눈썹을 추켰다.
“힘있고 돈있는 놈들이 얼마나 추파를 날리겠습니까? 녀석이 힘이 없으면요. 말랑말랑한 사회 초년생, 돈도 많고 허우대도 좋은데 어떻게 해보려 접근하는 놈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내가 만나 보니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던데-.”
“네. 단단한 친굽니다. 그래도 남들은 그걸 모르죠. 방송사 카메라 앞에서 수줍어하는 모습만 기억할 겁니다. 귀찮게 굴겠죠.”
“아-. 그것도 말이 되는구먼. 사장쯤 되면 쉽게 생각 못하겠네요······.”
이제야 납득이 된 모양, 유준식이 답답했던 가슴을 해갈하듯 후- 숨을 토했다.
“같이 일어나시죠. 뉴욕에서 뚱보가 날아오는데 함께 만나셔야죠.”
아, 리처드 해먼드. 유준식은 고개를 저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도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아직도 어려워. 허허-.”
“하핫-. 평범한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힘들 뿐입니다. 힘을 좀 빼세요. 한우만 사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친굽니다.”
“예에-. 갑시다.”
대정 그룹의 운명과 박우정의 처분을 진혁의 뜻에 맡기기로 한 후 많은 일이 있었다.
기록으로 남긴다면 책을 써도 모자라겠으나 핵심만 요약하자면 외국 거대 자본의 대정 잠식이었다. 뉴욕의 RB를 비롯해서, 경제 뉴스를 보는 자라면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투자사가 대정 계열사 지분을 대거 획득했다. 글로벌 투자사를 뒤에서 부채질한 해먼드의 물밑 작업 덕분도 있었으나, 해먼드의 수완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중소 투자사들도 결국 대세를 따르게 되어 있었다.
해먼드의 행보를 보며 홍기준은 진혁의 계획을 짐작해 보았었다.
그룹을 무너뜨리기 좋은 방법 말이다. 지배구조의 핵에 있는 기업과 우량 계열사 지분을 다수 확보했다가 일시에 털고 튀는 방법. 그러면서 채권 금융 기관을 압박하는 계획. 거대 외자가 빠져나가면 기관을 비롯한 다른 큰 손의 이탈이 이어지고, 결국에는 무너지는. 유치원생도 아는 뻔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주먹이야말로 가장 두렵고, 주먹이 크고 묵직할수록 공포감은 커진다.
지분 보유율을 방어하고 이사회 신임을 얻기 위해 무리하게 돈을 끌어다 쓴 그룹이 결국 갚지 못해 파산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국가라는 집단에서 정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기업의 말로란 그처럼 뻔한 것이었다.
홍기준의 강의가 아니라도, 돈이 돌고, 돈을 따라 움직이는 심리를 아는 이라면, 그만한 능력이 있다면 능히 그릴 법한 설계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진혁은 기업 흔들기를 원치 않았다. 해먼드의 공작이 작전세력이나 할 짓이어서가 아니었다.
- “직원들은 죄가 없습니다.”
회사를 무너뜨리지 말라.
장 밖에서 얼마나 많은 암투와 두뇌 싸움이 있었는지, 홍기준은 회상을 꺼렸다. 영웅담도 아니었고 즐거운 추억은 더더욱 아니었으니. 열 배는 빨리 늙는 기분도 들었다.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회장이 문을 열었다.
유준식이 흐뭇하게 웃으며 매제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 미국 친구, 오늘은 간단히 인사만 하는 거지?”
“네. 아직은 이사회를 열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매제. 내가 정말 대정 회장이 될 수 있을까?”
“의장이 되시는 겁니다.”
홍기준의 굵직한 미소에 안도한 유준식은 장난스레 갸웃거렸다.
스읍-.
“세인전자 대표에서 대정전자 대표로 가는 건 누가 봐도 영전은 아닌데에-.”
“하하하-. 그러니 그룹 의장을 겸하셔야죠.”
홍기준의 우군, 홍수혁의 배경이 될 수 있는 자로 대정을 장악하게 하라.
진혁의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