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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321화 (321/338)

시작 (2)

***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들과 간단히 인사한 후 본부장실로 들어섰다.

“푸우-. 화려하게 정신없는 첫 출근이었다.”

투레질하듯 입술을 털고는 홍기준의 선물부터 확인했다.

포장지를 뜯고 상자를 열자 묵직한 명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래전략본부장 사장 손진혁」

과거 홍수정을 위해 만들었던 조직.

홍수정이 맡았던 자리.

이번에는 진혁을 위해 민용락과 다른 복심들로 조직을 꾸리고, 본부장 자리는 1년이 넘도록 공석으로 둔 채 전략기획부장 김이도에게 대행을 맡겼다.

‘참. 내가 뭐라고 이렇게 잘해주시나.’

복에 겨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짓겠다던 녀석이 여의도의 번쩍이는 건물에서 사장을 달았으니. 어느 누구에게도 세상이 뒤집히는 충격일 것이다.

그래도 농부가 되겠다는 꿈은 아직 유효하다.

이병세 선생이 그랬다.

뭣 빠지게 운동하다 힘 떨어지면 그때 농사지으면 된다고.

‘무인 조종 트랙터로 로타리치고, 드론으로 거름 주고······.’

농약을 적게 쓰면 잡초가 걱정이긴 한데 좀 자라면 어떠냐. 종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같이 살지 뭐.

부임 첫날부터 딴생각을 하는 것 같지만 모두 진혁이 구상하던 일이다.

비어가는 농촌을 위한 무인영농.

그러자면 하늘길 프로젝트의 영감이 필요하다.

토다다닥-.

부팅된 노트북 위에서 손가락이 춤을 추었다.

「국토 3차원 그리드와 좌표의 세분화, 지형지물 자동 인식 또는 목표 영역 사전 입력······.」

떠오르는 대로 입력했다.

이것이 마인드맵이 되고, 전략기획부에서 텍스트로 개념을 형상화할 것이며, 개발지원실을 거쳐 프로젝트팀이 꾸려지고, 흥미를 느낀 연구원들의 자발적 참여로 결실을 맺을 것이다.

앞으로 모든 사업은 이러한 체계로 진행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뜻에서 홍기준 회장이 두 연구소를 진혁의 품에 안긴 것이니까.

똑똑-.

열려있는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낭랑하다.

본부장실 문은 닫아두지 않았다. 누구든 편히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저어-. 아까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려서······.”

출입구에 서서 쭈뼛거리는 중년 사내를 본 진혁은 벌떡 일어섰다.

“아! 이리 앉으세요.”

전략기획부 김이도 부장의 뒤를 따라 ‘실세’ 민용락도 발을 들였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좋으련만, 오랜 직장 생활로 잔뼈가 굵은 김이도에게는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어리다 해도 상관 아닌가. 어쩌면 세대가 달라서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상석을 비우고 김이도의 맞은 편에 앉았다. 자연스레 민용락의 옆자리가 되었다.

“앞으로 저를 스티브로 불러주세요. 사장님, 본부장님, 소장님 이런 말 빼고요. 공지도 띄워주시면 좋겠습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미소로 답하는 이들.

이들은 어린 나이와 맞지 않는 직급 때문에 불편할 직원들을 위한 결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할 직장 생활이 크게 기대된다. 다만 기대감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기대감 표현 또한 부담으로 이어질 것이기에.

구부린 검지로 안경을 밀어 올린 김이도가 물었다.

“다른 직원들도 별명을 만드는 게 좋겠습니까?”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기업문화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만드는 게 좋겠어요. 제가 통제하는 건 본부장 의결이 필요한 사항뿐일 겁니다.”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으리라.

사무적인 자리에서 말이 길어지면 메시지가 흐려지고 피로만 쌓일 뿐이다.

일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추가 설명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 보충 질문을 하기 마련. 직장 생활, 아니 모든 사회 생활의 기본이다.

“비서는 없지만 비서 업무는 기획팀, 아아- 기획부에서 하는 것 맞죠?”

“예-, 스티브.”

김이도의 대답에 진혁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눈치도 빠르고 적응력도 좋은 사람이다. 세인에서 부장까지 올라가고 본부장 대행도 했던 사람의 관록이겠지.

“책임 부서원은 민 과장님일 테고요.”

“으응-, 스티브.”

그리 대답한 민용락은 눈동자를 굴리며 목을 매만졌다.

목숨을 내건 도전을 감행한 사람이 보일 행동이었다.

진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계속 그렇게 불러주세요.”

시골에 함께 머물 때는 민용락과 적당히 거리를 두었었다.

선을 넘을 때는 은연중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갑질이었다. 그때의 미안함을 갚아주고 싶었다.

“오전엔 본부 인원들과 인사 나누고, 오후에는 이곳 연구소 직원들과 인사하겠습니다. 내일은 삭도연구소에 방문하겠습니다.”

“스케줄 등록하겠습니다. 그런데 스티브?”

메모하던 민용락이 고개를 들었다.

“여비서는 필요 없으신지 회장님께서 확인하시라고 방금 연락이 왔어요······.”

“필요해지면 말씀드리죠. 어차피 전략기획부 전체가 본부장 보좌역 아닙니까?”

그것도 응큼한 홍기준 회장의 수작이여, 이 양반아.

정말 궁금하다면 직접 물었겠지, 다른 사람을 거칠 이유가 있을까.

유명선부터 홍기준, 유세라까지.

진혁은 제대로 발목이 잡혔다.

‘제정신이면 독수공방하며 조심하는 게 정상이지.’

의도하지 않아도 스캔들이 터지고, 조심해도 구설에 오르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동선과 스케줄을 간소화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줄여 알리바이를 확실히 만들어두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 정치적 인간의 첫걸음이라고 홍기준은 가르쳤다.

김이도 부장이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술을 떼었다.

“맡으신 조직이 큰 만큼 직원들 업무 보고를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지 방침을 주시면 거기에 맞게 준비하겠습니다.”

“본부 한 곳과 연구소 두 곳, 합해서 인원이 몇 명입니까?”

“저희 본부에 삼백오십 명, 여의도 연구소에 사백 명, 삭도 연구소에 오백 명입니다.”

그렇게 많지는 않네요. 진혁이 턱을 쥐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이미 꿰고 있었지만 김이도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연구소마다 약 오십 개의 팀이 있고 그 밑에 하위 프로젝트팀이 다양하게 분포합니다. 프로젝트팀은 조직 편성을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구성합니다.”

“팀장이 공석인 팀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절대 항해사 없이 일하지 않습니다.”

김이도가 조직도를 펼쳐 진혁이 보기 좋도록 돌려놓았다.

이 또한 이미 숙지한 내용이었으나 눈으로 성의껏 훑었다. 거만하거나 건방지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김이도가 입맛을 다시고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했던 말을 다시 해야 할 때 조심하는 자의 태도였다.

“식구들 업무 분장 보고를 드려야 할 텐데 보고 순서를 정해주시면-.”

“보고서는 생략합니다. 본부 포털 자료실 게시물로 공부하겠습니다. 파악하다가 궁금한 점은 부서장들께 문의하겠습니다. 물었을 때 담당이 누구인지, 진행 상황이 어떤지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머뭇거리는 분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공지하겠습니다.”

김이도의 울대가 움직였다.

부서장들이야말로 부서원들의 업무를 꿰고 있으라는 뜻이었으니.

호랑이 없는 굴에서 대장 노릇하던 좋은 시절은 다 갔다.

“우리 본부에는 그동안 별다른 실적이 없었죠?”

“사실입니다.”

김이도가 다른 파일을 펼쳐 진혁의 앞으로 밀었다.

“개발실에 실적이 있었습니다만 연구소 보조에 가깝습니다.”

“개발지원실장이 없었을 테니 그 공로도 연구소장이 다 가져갔겠네요.”

“예. 그렇습니다.”

연구소장이라면 진혁의 부임과 함께 회장 부속실로 옮겨갔다.

다른 계열사 대표로 취임하거나 은퇴 후 OB 지원을 받으며 여가를 보내리라.

“민 과장님은 인사실에 연락해서 각 실장들 후보 자료 좀 보내라고 해주세요. 전무급 이상으로요. 없으면 제 마음대로 앉히겠습니다.”

“넵! 스티브!”

함께 손발을 맞춰온 이들로 실장을 채우면 좋겠지만 진혁은 이제 시작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 사람들로 꾸린다는 것 또한 시기상조였다.

곱지 않을 대내외의 시선을 감안할 때, 당분간은 그룹 내 인력으로 채워야 한다. 이 또한 홍기준으로부터 사사한 정무감각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 본부가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겁니다.”

각각 메모를 하던 김이도와 민용락이 고개를 들었다.

“제 눈치 보실 필요 없고, 자잘한 프로젝트에 제 승인받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큰 방향은 잡아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편하시겠죠.”

“네. 솔직히 그렇습니다.”

김이도는 침착한 표정이었으나 흔들리는 눈동자는 어쩌지 못했다. 진혁을 익히 경험한 민용락의 당연하다는 반응과 대조적이다. 아무리 혁신적인 기업의 자유분방한 본부라지만, 회사 생활 한 번 안 해본 애송이가 백전노장처럼 조직 생리를 꿰뚫는 말을 하니 놀랄 수밖에.

“조직개편은 천천히 논의하겠습니다. 첫날부터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

방향잡기, 적당한 거리두기 설정으로 간단히 첫 미팅을 마쳤다.

“저, 사장, 아아- 본부장, 아아- 스티브.”

김이도는 두 번이나 고개를 가로저어 호칭을 수정했다.

“첫날인 만큼 중식은 저희 부서에서 함께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말씀도 어렵지 않게 꺼내주셔서 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이 있으면 제가 알아야 하는데요, 스티브?”

민용락이 눈을 키웠다.

“디자인실 동기 누나가 점심을 산다고 했거든요.”

“아-.”

걘가?

민용락이 갸웃했다.

진혁을 마중하기 위해 로비에 내려갔다가 점심을 사주기로 했다며 자랑하듯 떠들던 디자인실 신입.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로비가 쩌렁쩌렁 울렸다.

***

여의도에 상주하는 직원들과 간단히 상견례를 마친 오후, 조직도와 직원들 신상명세카드를 살폈다.

민용락이 커피를 홀짝이며 그런 진혁의 눈치를 살폈다.

“서운하세요?”

“앗-. 아니 뭐······.”

민용락은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 봐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운해 마세요. 즐거울 일 없는 회장님의 놀이였다고 생각하자구요. 우리 아버지도 몰랐어요.”

“아, 그래?”

“엄마만 아셨어요.”

진혁이 피식 웃었다.

아빠에게는 숨겨도 엄마에게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비밀보장을 약속받은 후 몰래 털어놨을 때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엄마의 눈이 크다는 건 알았지만 더 숨어 있는 눈동자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와- 근데, 진혁- 스티브.”

“네.”

서류를 뒤적이던 진혁은 고개를 들어 편안한 시선을 보냈다.

“전생에 나라라도 구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성공하려면?”

세상 사람들이 진짜 궁금한 건 그거겠지.

도대체 뭐가 잘나고, 무슨 복을 타고나서 말도 안 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지.

“나라 가지고 되겠어요? 최소한 지구는 구해야죠.”

진혁이 취한 사람처럼 푸근하게 웃자, 민용락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지구는 무슨, 네가 슈퍼맨이냐.

“서류가 많네요. 천천히 봐야겠습니다.”

“그래요, 스티브. 오늘만 날이 아닙니다.”

본격적으로 미팅을 하겠다는 신호로 이해한 민용락이 자세를 바꿨다.

“그런데, 스티브. 여자든 남자든 비서직원 한 명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요? 제 스케줄은 과장님이 봐주시잖아요. 힘들어서 그래요?”

“힘들긴 무슨-, 사장에 본부장님인데 커피도 직접 타고 복사도 직접 하고 그러니까 직원들이 오히려 불편해해. 윗사람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은 거라고.”

그도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그래도 어린 상사라서 내심 편하게 여길 줄 알았는데 월급쟁이들에겐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경기도 좋고 본부 채용 예산도 넉넉한데 일자리 몇 개 더 만드는 게 뭐 대수겠냐고 김 부장님도 그러시더라고.”

“커피도 직접, 복사도 직접 하겠습니다. 다른 이유 없으시면 이대로 가시죠. 직원들도 자주 보며 친해져야 저도 나중에 어렵지 않게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겠어요? 이 방에만 갇혀 있으면 감옥이나 마찬가지예요. 특히나 저처럼 몸을 계속 움직여야 하는 사람은 더 그래요.”

“아, 예에-.”

딸깍-.

진혁이 소파에 앉자, 민용락은 다이어리를 펼치고 볼펜을 눌렀다.

“보고서는 요점만 간단히, 본부장 결재가 필요한 문서가 아니면 부서장 전결로.”

민용락은 고개를 끄덕이며 볼펜을 놀렸다.

“개발실에 얘기해서 전산개발 하나 하라고 해주세요. 모든 프로젝트 메일에 본부장 비밀 참조로 걸도록.”

“벌써 거기까지 업무파악이 된 거야? 부장 달고도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파악은 무슨, 대부분의 기업이 돌아가는 이치야 뻔하지 않은가.

미래로 치면 IT용역이나 자사 전산관리, 또는 개발팀에 요청할 내용이다.

경험해 봤으니 알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연구기술직 외에는 야근하는 직원 없죠?”

“많지는 않아.”

“있기는 한 모양이에요?”

“조용한 밤에 일이 더 잘된다는 꼴통들이 좀 있습니다.”

진혁은 내심 뜨끔했다.

본인도 새벽에 업무 집중력이 더 높았으니까.

22시에서 새벽 1시까지는 뭔가 싱숭생숭하다가 1시를 기점으로 두뇌가 파파팍- 돌아가는 느낌. 야근해 본 이들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건 아마도 공부에 미쳐 살던 리듬의 영향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유연 근무제를 도입해야겠네요.”

“그게 뭐야?”

민용락이 그다지 유연하지 않은 허리를 움직이며 물었다.

‘황소개구리가 요가하는 것 같네.’

진혁이 이를 꽉 깨물었다.

민용락은 진혁을 편하게 대하던 예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진혁도 그게 편하다. 업무상 최소한의 격식은 갖추어야겠으나 계급으로 사람을 나누는 일은 여전히 불편하다.

“프로젝트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편한 시간에 출퇴근하라고 하세요. 물론, 협업 파트너들의 업무에도 지장을 주면 안 되겠죠. 이런 건 자율에 맡기면 부서장 눈치 보느라 못할 테니 본부장령으로 못박아주세요.”

“인사실에서 가만히 있을까?”

“그럴 때는 무조건······.”

진혁이 잠시 말을 끊었다.

다음 단어를 적절히 고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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