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하루 휴식 후 서울로 떠나야 한다.
스승을 뵈려 파티 음식과 술을 얻어 천길룡을 찾았다.
“지넥아.”
“네, 할아버지.”
“시간보다 빠른 것은 없느니라.”
천길룡이 누누이 강조하던 가르침이다.
그래서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일분일초를 금같이 사용하기 위해 애썼다.
“나 외의 세상 모든 사람은 얼간이다. 암, 얼간이들이지.”
쩝쩝-.
천길룡이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혀로 훑었다.
굳이 되묻지 않았다.
이 할아버지는 논쟁을 피하는 법을 가르치는 중이었으니까.
그리고 손진혁은 더이상 애송이가 아니다.
“알아들었는고?”
“······.”
진혁은 천길룡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나 외의 모든 이는 얼간이라면서요? 둥글게 휘어진 진혁의 눈매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케헤헤-. 알아들었구먼. 고연 눔. 내가 얼간이가 됐어-.”
쪼르르-.
빙긋 웃은 진혁은 천길룡의 사발에 와인을 따랐다.
“유 회장은 뭐라 하시더냐?”
“별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자주 보자는 말 외에는요.”
“여우 같은 늙은이로고. 자주 보자는 말이 곧 별소리로다. 장사치는 장사치여-. 손녀로 준걸을 취하니 남는 장사로다.”
크으-. 떫구나. 와인을 반 사발 마신 천길룡이 수염을 훔쳤다.
“내가 지넥이한테 무슨 잔소리를 더 허겠는고? 준걸이 되었는데 말이다. 그가 걷는 곳이 곧 길이요, 그가 하는 말이 곧 진리일지니-. 허나, 그리 살아도 후회할 일은 생기는 법, 이 할애비도 그렇단다. 부디 바라노니···.”
케흠-.
천길룡은 말하기 어려운지 진혁의 눈치를 살폈다.
‘나쁜 짓은 피하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거겠지.’
앞으로 할 일 중에는 평범하지 못한 일도 있다는 사실을 서로가 알고 있다.
염화미소.
스승의 뜻을 헤아리는 제자로서 심심상인을 먼저 밝히는 것도 도리일 터였다.
“선하고 옳은 일을 많이 하겠-.”
“여인을 많이 품, 아니 저기 그거 뭐야- 만나거라아-.”
오디오가 겹쳤다.
나는 많이 만났는데도 아쉬워서 말이여어-. 유 회장에게는 비밀로 해주마. 히히-. 와인을 원샷한 천길룡이 히죽히죽 웃었다.
이 영감탱이들이 진짜.
역시 맹자가 옳다. 세상에 얼간이, 아니 스승이 너무 많다.
서로 다른 가르침을 내리려 해서 문제지.
***
하루 휴식을 취하고 드디어 첫 출근이다.
진혁의 넥타이를 매며 한유영이 감탄을 쏟아냈다.
“우리 아들, 정장도 이렇게 잘 어울리네.”
“하하하-. 의류 모델 제안이 괜히 들어오나요?”
파일럿과 함께 마주 앉아 숟가락을 든 손광연이 맞장구쳤다.
직접 고른 넥타이 핀을 채우며 한유영이 당부했다.
“광고 많이 찍어. 공부에 때가 있다는 말들 하던데, 엄마는 빛나는 시절이야말로 짧다고 생각해. 광고모델도 제안하는 곳 있을 때, 할 수 있을 때 하는 거야.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못할 날이 올 거잖아.”
“네, 그럴게요.”
“광고 모델 수입도 전부 기부할 거니?”
“네. 그렇게 처리해 주세요.”
“이제 진혁이가 직접해.”
“왜요? 엄마 통장관리 좋아하시잖아요.”
“좋아서 한 거 아냐. 내 아들이니까 한 거지. 우리 아들 독립하니까 이제 직접해. 돈 관리도 직접 해보는 게 좋아. 가족이라고 믿고 전부 맡기면 나중에 뒤통수 맞을 수 있어요. 훗날 색시 생기면 넘길 때 넘기더라도 당분간은 직접 해 봐.”
“네.”
모자의 대화를 듣던 손광연이 밥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진혁아. 쿼드론인지 쿠드롱인지 타고 매일 출퇴근하면 안 되는 거니?”
“제가 아직 조종법을 몰라요. 면허 취득 방법도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구요.”
“조종사 고용하면 되잖아. 조종사 숙소로 사용할 곳도 많고.”
그리 말한 손광연은 파일럿의 의중을 떠보듯 곁눈질했다.
“관련 법규가 없어서 아직 상용화가 안 됐어요. 그리고 당분간은 업무와 훈련에 집중할까 해요. 아시안게임 준비도 해야 하고, 집을 구해주신 아버님 성의도 있고요.”
음, 그렇지.
손광연은 숟가락을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 녀석이 그렇다는데 무슨 말을 더 얹을까.
주머니를 뒤적여 반으로 접힌 지폐를 꺼냈다.
“취직 선물이야.”
애틀랜타 올림픽 때 진혁이 슬쩍했다가 돌려놓은 1,000 달러 지폐였다.
“괜찮아요. 이미 취직 선물로 가방 사주셨잖아요. 그건 아빠 수집품인데 안 쓰길 천만다행이에요.”
“이거 아빠가 구할 때보다 가치가 오십 프로나 올랐는데도? 아-, 아빠 선물인데 받지······.”
그리 말하면서도 손광연은 지폐를 냉큼 집어넣었다.
다행이라는 표정과 함께였다.
*
쿼드론 조수석에 앉아 헤드셋을 착용했다.
기체 소음이 큰 편은 아니지만 파일럿과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는 필요한 장비였다.
“기장님, 회장님이 먼저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네. 그룹 본사 사옥으로 가겠습니다.”
“본사에서 여의도로 갈 때 차가 많이 막힐까요?”
“출근 시간에는 대중교통도 지옥입니다. 비행으로 가는 걸 추천합니다. 옥상 이착륙장에 대기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둠과 안개를 헤치는 짧은 이동시간, 미래 사업 중 하나에 발을 걸치고 있는 파일럿과도 나눌 대화가 많았다.
“제가 마지막으로 보고서를 열람한 게 한 달 전이어서······, 하늘길 조성 사업은 얼마나 진척됐나요?”
“삼차원 그리드 작업은 회장님 지시로 완성된 상태입니다만 정부에서 승인해야 하는 문제가 남았습니다. 정부 주도 예비 타당성 조사도 아직 첫발을 떼기 전입니다.”
“기체 소형화도 숙제겠죠.”
“그렇습니다. 그러자면 소형 엔진도 필요한데, 기존 엔진을 소형화해서는 현재 쿼드론만큼의 양력을 만들지 못한다는 시뮬레이션 보고가 있었습니다.”
“갈 길이 멀겠네요.”
“회장님께서 제시한 엔진 개념이 있는데 연구원들이 현실화의 벽에 막혔다고 들었습니다.”
용피지, 그걸 한국어나 영어로 번역해서 내놓으니 아직 걸음마 수준인 인간의 기술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 테다.
앞으로 진혁이 풀어가야 할 숙제였다.
“제 손위 처남이 택시 영업을 합니다.”
파일럿이 다른 운을 띄웠기에 진혁이 고개를 돌렸다.
“하늘길이 열리면 벌이가 줄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는 노파심이 생깁니다.”
섣부른 걱정이었다.
현실화하려면 적어도 20년, 어쩌면 30년이 걸릴지 모르니까.
그래도 이 자리에서 파일럿의 우려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늘길이 열리면 관련 산업이 일어날 테고 일자리도 생기잖아요.”
“다른 일을 찾아도 된다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이, 하던 일을 계속하고픈 관성이라는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장년층 이상 연령은 변화에 둔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상 도로도 계속 이용하게 될 거예요. 단거리 승객과 화물은 어쩔 수 없이 땅으로 다니는 편이 효율적이고 안전합니다. 이동량이 줄어 정체나 교통사고도 줄고, 유지보수에 들어가는 세금도 줄어요. 그 자본과 인력을 다른 곳에 활용할 수도 있고요. 하늘길 유지보수는 가상의 그리드만 수정하는 것으로 충분해서 유지보수 비용이 거의 안 들잖아요.”
파일럿은 해박하게 설명하는 진혁을 곁눈질하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유명한 운동선수라서, 회장과 친분이 있어서 특채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니 당황스러우면서도 젊은이들을 보면 놀랍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적응해요. 저만 하더라도 공군사관학교에서 배운 지식에 머물러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는 거겠죠. 젊은이들을 곧 미래라 부르는 이유일 테고요.”
어렵지 않고 유익한 대화를 나누는 중, 그룹 본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기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주말마다 진혁을 태워줄 파일럿.
앞으로 그에게서도 배울 점이 많을 듯했다.
*
비서의 안내를 받아 회장실을 방문했다.
“연수원에서 많이 익혔니?”
“네. 이제 분위기와 사람들을 파악할 차례 같습니다.”
어차피 세인의 기업문화는 틈틈이 숙지하던 참이다.
아무래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회사였으니까.
“별일이다. 네 입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말이 나오다니.”
그러게요. 소리 없이 웃는 진혁의 눈이 사라졌다.
저만 잘하면 된다며 제 할 일에만 매달리던 사람이었는데, 평범한 회사원들이나 할 말을 뱉지 않았나.
“인간 손진혁의 계획을 들어볼까?”
“운동선수로서의 편의를 회사 측에서 봐주신다 했지만 운동은 이른 아침과 저녁 시간에 할 생각입니다.”
그래, 운동도 해야지.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홍기준이 입술을 오므렸다.
“아시안게임에서 성적을 내면 청와대에 한 번 다녀올 생각입니다. 만나서 할 얘기가 있어서요.”
“내 도움은?”
“제힘이 부족하면 청하겠습니다.”
“그래.”
“올해 계획은 이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묻자. 후회 없니? 세상에 나서는 것 말이다.”
“원 없이, 행복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시기와 사건도 경험해 봤고요, 호르몬 때문에 폭주할 것 같은 시절도 겪어봤습니다. 이제 갈등하지도 않고,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가족, 동네 사람들, 친구들. 누구 하나라도 없으면 서운하고 가슴 시릴 만큼 행복한 추억을 쌓았습니다. 이걸 위해 제가 돌아온 거겠죠. 저는 이제 준비가 됐습니다.”
“그래. 네가 만족하고 행복하면 됐다.”
회장의 흐뭇한 웃음을 마지막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홍기준이 의자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을 대신할 때, 진혁이 아껴둔 말을 꺼냈다.
“바보 같았습니다. 제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그걸 깨달았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는 듯 홍기준이 턱을 올렸다.
“과거의 제가 너무 멍청했다는 뜻입니다. 그때도 주어진 환경에서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데, 여기저기 손을 내밀고 마음을 열었다면 극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홍기준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과거에 진혁을 보며 가장 아쉬워했던 점이니까.
이제라도 깨달은 자가 되었으니 다행이다.
늦었으나, 늦지 않았다.
“시작하는 젊은이에게 주는 옥탑방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오늘 간단히 인사 마치고 가봐. 보안 팀장에게 말해뒀으니 안내해 줄 거야.”
“네. 감사합니다.”
“아, 이거 가져가라. 수정이가 주는 첫 출근 선물이다.”
반지 케이스 크기의, 꼼꼼하게 포장된 물건이었다.
금색과 붉은색이 섞인 포장지가 조명을 받아 빛났다.
무게나 경도로 보아 반지 케이스는 아닌 듯했다.
손으로 무게를 가늠하며 물었다.
“이게 뭘까요?”
“물었는데 통 알려주지 않더구나. 혼자 있을 때 몰래 풀어보라더라. 편지라도 넣은 모양이야.”
“네. 수정이에게는 따로 연락하겠습니다.”
“이건 내가 주는 선물. 앞으로 잘 부탁한다.”
홍기준이 건넨 물건은 길쭉하고 묵직한 상자였다.
홍수정의 선물을 가방에 넣고, 회장의 선물은 옆구리에 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홍기준과 악수를 나누고 옥상으로 이동했다.
*
“첫날이니만큼 여의도 연구소 정문에 내려드리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예, 그게 좋겠네요.”
의도하지 않아도 과시하는 꼴이 되겠지만 당분간은 홍기준 뜻대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 “세상의 반발이 크지 않을까요?”
- “이 홍기준에게 반기를 들 사람이 있을까?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내가 오래전부터 작업해둔 게 있으니 그럴 리 없을 거다. 있다 해도 불만은 네 실력으로 잠재워야지.”
여의도 연구소에는 연구소 외에도 미래전략본부와 산하 개발실, 디자인실 등이 위치해 있다.
여의도 연구소에는 선배 사수들이 로비에서 신규직원을 환영하는 행사를 조촐하게 여는데, 신규직원들은 로비에서 사수를 만나 배정된 부서로 이동하는 것이다.
구시대적이면서도 인간미가 느껴지는 행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수습 직원들이 출근 첫날부터 헤매지 않아도 되니까.
‘작년 결혼식 이후 처음 만나는 건가?’
민용락의 모습도 궁금했다.
홍기준의 편애와 손진혁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미래 전략 본부의 실세로 활약 중이라지.
우우우우웅-.
진혁을 태운 쿼드론이 잘게 떠는 것도 잠시, 묵직하게 기류를 누르며 솟아올랐다.
“도시 경관을 구경하시도록 천천히 비행하겠습니다. 오 분 후 도착 예상합니다.”
천천히 가도 오 분······. 하늘길은 정말 빠르구나.
진혁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여의도에 위치한 그룹 회장실 직속 미래전략본부는 분주하게 아침을 열고 있었다.
본부 밑에 12개의 실을 갖춘, 기형적이라면 기형적 구조의 대형 본부.
그룹 내에서는 이미 별도의 법인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별동대처럼.
1년여 전 회장 지시로 갑자기 생겼는데 덩치만 크고 하는 일은 없는 본부.
돈만 쓰면서 여의도 연구소 새 건물에 들어가 꿀을 빠는 사람들.
다른 계열사 직원들의 속마음은 이와 같았다.
모니터를 확인한 민용락이 구레나룻을 긁적였다.
“왜 없지?”
“민 과장, 왜 그래?”
전략기획부장 김이도가 친근하게 어깨를 감았다.
“이것 좀 보세요.”
김이도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민용락의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그룹 포털 사이트에 인사정보 공지사항이 떠 있었다.
「그룹 미래전략본부 공채 수습사원 인사발령의 건件」
「000000 심동미 / 디자인실 / 부서명 --- / 담당 업무 --- 」
「000000 공지철 / 디자인실 / 부서명 --- / 담당 업무 --- 」
···
「000000 고영희 / 개발지원실 / 부서명 --- / 담당 업무 --- 」
「000000 강하진 / 개발지원실 / 부서명 --- / 담당 업무 --- 」
···
「000000 박봉수 / 마케팅정책실 / 부서명 --- / 담당 업무 --- 」
「000000 장현철 / 마케팅정책실 / 부서명 --- / 담당 업무 --- 」
···
「000000 김지원 / 본부홍보실 / 부서명 --- / 담당 업무 --- 」
「000000 서모니카 / 본부홍보실 / 부서명 --- / 담당 업무 --- 」
「이상 심동미 外 78名」
많기도 하다.
사번과 이름, 소속이 간단히 기록된 표였는데도 본부 산하 총 12개 실에 배당된 79명의 신입사원 명단은 한 화면에 담기지 못했다.
흐음-. 김이도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민용락이 답답하다는 듯 검지로 모니터를 두드렸다.
“없어요. 없어. 분명히 제가 어제 확인했거든요? 회장님 뵙고 바로 여기로 출근한다고 했어요.”
수십 명의 인사 정보가 떠 있었지만 어디에도 손진혁의 이름은 없었다.
“연구소 소속으로 가는 거 아냐? 저거 연구소 발령 명단 확인해 봐.”
김이도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해당 공지사항을 클릭하며 민용락은 고개를 저었다.
“벌써 확인해 봤죠오-. 없어요. 그리고 제가 인사실에 확인했는데 우리 본부로 온다고 했거든요.”
“누락된 거 아냐?”
“그렇다면 큰일이죠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일 유명한 애를-. 아유우-! 인사실 애들도 일처리 하는 거 보면 하여간 엉망이라니까아-.”
민용락이 거드름을 피우며 수화기를 들었다.
본부 실세로서 이럴 때 용트림도 하는 거지.
“예! 민용락 과장입니다. 아니 인사발령을- 예?”
민용락은 멍한 눈으로 수화기를 내렸다.
김이도가 민용락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라는데 그래?”
“아직 안 내려왔다는데요?”
“뭐가? 명령이?”
“예. 부속실에서 아직 명령이 안 왔다네요? 회장님께서 아직 안 주셨대요.”
“허허-. 낙하산이라고 대놓고 광고하시는구먼?”
그리 말한 김이도는 제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생각에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장은 장난으로라도 쉽게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존재, 자칫 비방이라도 했다가는 직원들의 서슬 퍼런 눈빛을 받아내야 한다. 장인으로부터 자리를 넘겨받고 대규모 물갈이를 거쳐 세인을 장악하고, 그룹을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린 홍기준의 입지는 그런 것이었다.
“저는 마중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도 아는 녀석인데······.”
“어, 그래. 다녀와. 아니다! 같이 가자.”
김이도는 서둘러 재킷을 챙겼다.
유명인사라는 점을 떠나, 느낌이 이상했다.
***
웅성웅성-.
1층 로비에는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신규 입사자를 환영하고,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사수가 걸어주는 사원증을 목에 건 수습사원들이 치아를 자랑하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들 머리 위, 벽에 걸린 모니터에는 환영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신규 입사자의 사진과 소속부서가 차례대로 표시되었다.
정문 위쪽 벽과, 로비 중앙 기둥에 거울처럼 모니터가 마주 보고 있었는데, 모니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하하-. 내가 걔를 업어키웠다니까? 걔한테 뭐 부탁할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면 돼.”
“와하하-! 제 동기예요. 오늘 제가 점심 사주기로 했어요.”
이때를 놓칠세라, 민용락과 심동미는 처음 보는 직원들에게 손진혁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키유우우웅-.
로비 앞 인도에 내려서는 쿼드론을 본 민용락은 손바닥을 비볐다.
“짜식! 드디어 왔구나!”
마침내 탑승객이 내렸다.
‘햐-. 쟤는 신입 티도 안 나네.’
훤칠하고, 저 정장을 벗기면 강철 근육이 숨어 있는 녀석.
몇 년간 매일 지켜보던 실루엣을 떠올린 민용락은 감동적인 심정이 되었다.
인도에 대기하며 손진혁의 첫 출근을 취재하려던 기자들은 SSS가 친 바리케이드를 넘지 못하고 셔터만 눌렀다.
오오오-.
왔어? 저거 타고 온 거야?
로비를 서성이던 직원들의 관심이 회전문에 쏠렸다.
그러나 진혁은 회전문이 아닌 옆의 통유리 여닫이로 향했다.
대기하던 SSS 요원이 문을 열며 허리를 숙인 탓이다.
길다란 상자를 옆구리에 낀 진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이마를 긁었다.
홍기준의 선물을 들어주려는 SSS 요원도 정중한 손짓으로 제지했다.
쩝. 입맛을 다셨다.
‘다른 건 다 변해도 취미나 취향은 안 변하는 모양이네.’
홍기준 말이다.
깜짝쇼라니,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없다.
하긴, 진혁도 취향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디라리링-.]
몽환적인 선율과 함께 로비 모니터의 소개 화면이 바뀌자, 진혁을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눈동자를 올렸다.
「수습 임원 선임의 건件」
···
···
「직책 : 미래전략본부장 / 제1연구소장 / 제2연구소장 겸임」
「직급 : 사장」
「약력 :
제1연구소 발기인 및 상임고문(경력 6년)
RB Investment(세인 그룹 2대 주주) 소유주」
이제 스무 살 된 애송이가 RB 소유주라니, 내심 홍기준의 낙하산 인사에 불만을 품었을 사람조차 숨이 컥 막히게 만드는 약력이다.
로비에 들어선 진혁의 눈에는 단체 최면처럼 보였다.
민용락을 비롯한 직원들이 어벙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입이 떠억 벌어져서 언제든 침이 떨어질 것 같았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광경이다.
‘날 봐야지, 이 양반들아.’
하아-.
출근 첫날부터 한숨이 나온다.
책상을 탕탕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을 홍기준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마 이러고 있겠지······.
으하하하하!
수습이라고 했지, 사원이라고는 안 했다 이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