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탄忍歎(Intern) (5)
*
진혁을 태운 쿼드론은 바로 서울로 직행했다.
자동차도 아닌데 목욕탕을 찾아 중간에 머물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회장 집무실이 있는 빌딩 옥상에 착륙하자, 기다리던 홍기준이 반갑게 다가왔다.
“여어-, 고생했다.”
전역했는데 경례부터 올려붙여야지.
조금 민망하니까 목소리는 작게.
“단결.”
역시 경례 구호는 과거식이 편하다.
4주를 함께 했지만 충성 구호는 입에 맞지 않았다.
“하하하! 그래. 단결. 고생했다.”
정장 차림임에도 어색함 없는 자세, 군필자 홍기준이 절도있게 경례를 받고는 진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집에는 말해뒀으니까 쉬다가 저녁에 가라. 점심부터 먹자. 뭐 먹을래?”
“짜장면요. 콜라도요.”
아, 이건 국룰이여.
*
홍기준에게 양해를 구한 후 사우나부터 다녀왔다.
평일 낮 시간임에도 사우나에는 직장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들이 꽤 보였다.
홍기준이 함께 오지 않으려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배려겠지.’
근무 시간에 그룹 회장을 사우나에서 마주치면 얼마나 곤란하겠냐고.
자신들보다 젊고 몸도 좋은 회장에게 주눅드는 건 둘째치고, 직속 상관 앞에 불려갈 각오를 해야 할 거다.
‘어허-, 뜨끈허다아-.’
열탕에 몸을 담그니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열기가 치솟았다.
때를 불리고 세신 서비스까지 받았다.
때를 미는 세신사 아저씨가 힘겨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흐엑-흐엑-. 사람 몸이 아니라 수세미로 돌을 닦는 기분이네. 세신사의 눈은 그리 말하고 있었지만 진혁은 눈을 감고 그저 즐길 뿐이었다. 어헐씨구-, 개운하니 참말로 좋구나아-.
일회용 면도기로 깔끔하게 면도도 했다.
작년쯤부터 제법 수염이 자라기 시작해서 매일 면도를 했는데, 신병교육대에 있는 동안에는 씻는 시간이 짧아 1일 1회 면도가 어려웠다.
“아따따-.”
에헤이-, 피 봤네.
면도날에 베이는 건 남자의 숙명인가 보다.
준비한 스킨로션이 없어 목욕탕에 비치된 제품을 사용했다.
“아따따-.”
미스쾌남진.
조교 눈빛보다 따가운 녀석이었다.
면도날에 베인 곳은 통증이 몇 배나 강했고 상처 부위가 눈에 띌 정도로 발갛게 부었다.
목욕탕을 나서니 허기가 몰려왔다.
홍기준과 손진혁.
두 거물이 어깨를 맞댄 채 거리를 걷자 자연스레 시선이 몰렸다.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이 집이 짱개를 잘해.”
회장도 아재는 아재, 편하게 내뱉는 표현이 자연스럽고, 그 자연스러움이 듣는 이를 편하게 해준다.
닥닥닥-.
그릇 바닥까지 긁어 짜장면 두 그릇을 가볍게 비웠다.
“더 먹을래?”
“괜찮습니다.”
한 그릇은 적고, 곱빼기는 보통의 짜장면 맛이 나지 않고, 세 그릇은 느끼하다. 그래서 짜장면 보통으로 두 그릇이 딱 좋다. 효율 성애자 손진혁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결정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회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한강이 보이고, 그 위쪽으로 고급 아파트와 빌라촌, 그 너머로 남산타워가 보였다.
‘북향이네.’
사업가 홍기준의 지향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배치 아닌가.
「미친 듯이 돈을 모으고, 유전과 광산을 사들이고, 무기를 개발하는 이유를 알고 있니? 언젠가 만주와 연해주를 삼키고 싶다. 그 땅에 국가 규모의 항공우주기지를 짓는 거야. 이름하여 발해기지. 그러자면 북쪽 땅을 밟아야 해. 그때 국민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돈이 많이 필요하다. 기업은 어차피 국민 세금으로 보호받으며 성장한 이익집단이다. 때가 되면 기업이 돈을 풀어 국민을 보호해야 해. 나 혼자 잘살자는 생각이었다면 내가 역사를 바꾸면서까지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야.」
전생의 소극적인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배포가 커졌다.
‘지금 사는 땅이 좁기는 하지.’
똑똑하고 재능 넘치는 국민을 모두 품지 못하는 좁은 땅, 작은 나라.
그래도 홍기준이 그 정도 스케일의 청사진을 품었으리라고는 예상 못했다.
「전쟁은 안 될 말이야. 힘으로 열되, 돈의 힘으로 열어야지. 어눌한 이들은 의아하겠지. 돈으로 열겠다면서 무력을 키우는 이유 말이다.」
글쎄. 모두 아는 사실 아닌가?
└ 「내가 원하는 뭔가를 당당히 요구하고 제시하기 위해 상대방과 비슷하거나, 보다 우월한 힘을 보유하는 것. 그것이 정치와 외교의 기본이라서 힘을 모으시는 거 아닌가요? 각각 다른 말 같아도 뜯어보면 그 본질은 교섭과 협상 아닙니까.」
일상에서 크게 활용할 일 없는 지식이지만 배우고 깨달은 지식인이라면 기본으로 장착해야 할 지혜였다. 그걸 모르면 헛똑똑이나 헛공부했다는 소리를 듣는 거고. 심할 경우 헛살았다거나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었다는 칭송을 듣겠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내는 시험 문제다.」
시험 문제라······.
구체적으로 뜻을 알려주지 않았으니 어물어물 넘겨짚을 뿐이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뭘 선택한다는 뜻일까. 짜장이냐, 짬뽕이냐······.’
어윽-, 느끼해라.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가 콜라는 안 시켜줬어.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SSS 소속 경호원이 회장실 문을 열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선 사람은 쿼드론에 동승했던 직원이었다.
쟁반에 차를 받쳐 든 비서는 진혁과 눈을 마주치고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조심성이다. 쿼드론에 함께 탔을 때, 진혁에게서 퀴퀴한 냄새가 났을 텐데도 저 직원은 인상 한 번 찡그리는 일이 없었다.
“전망은 언제든 구경할 수 있다. 차부터 들자.”
“네.”
시험 문제가 뭘까 궁리하느라 몰입한 탓일까, 진혁의 귀에는 시험 보자는 말로 들렸다.
따뜻한 홍차가 입에 남았던 느끼함을 날려주었다.
차향을 음미할 때 홍기준이 은근한 소리로 말했다.
“이제라도 대학 공부를 하고 싶다면 어떤 곳이든 보내주마.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말만 해.”
첫 번째 시험이다.
진혁의 예리한 육감이 말하고 있었다. 홍기준의 진심이 어떻든, 세인에 첫발을 내딛는 진혁을 테스트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정말 괜찮습니다. 진리는 강의실이 아니라 현장에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이야말로 진리라는 걸 이미 경험했구요.”
헨리 존스 주니어라는 종신직 고고학 교수가 이구아나 존스라는 영화에서 한 말이다. 물론, 진혁이 그 말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제가 대학을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대학에서 배운 게 있어요. 담임 교수가 어느 날엔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뭐랬냐면······.”
진혁의 대학 시절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호기심 동한 홍기준이 눈썹을 추켰다.
“법은 최소한의 양심이며 상식이다. 너희가 법을 공부하는 이유는 최소한의 양심을 속이고 상식을 갖추지 못한 자들로부터 이 사회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럴 마음이 없다면, 어깨에 힘을 주고 그저 줄이나 잘 섰다가 출세하고, 돈 많고 힘 좋은 집안의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법을 공부하는 것이라면 너희는 자격이 없다.”
호오-. 홍기준은 아랫입술을 비죽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그럴싸하게 들렸으니.
“너무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최소한의 양심과 상식,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을 깔끔하게 정의 내리는 말 같기도 했구요.”
으음-. 동의한다는 듯 소리를 내면서도 홍기준은 말을 아꼈다.
진혁의 눈에는 테스트 중이니 경청하겠다는 태도로 비쳤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스캔들이 터지더라고요. 여제자랑.”
진혁이 씁쓸하게 웃었고, 홍기준은 쓴 입맛을 다셨다.
“추잡한 거래였죠. 학점을 인질로 잡은 추악한 야바위였고요.”
“왜 대학에 회의를 품었는지 알 것도 같구나.”
“뭐······ 그런 일 때문에 그만둔 건 아니었어요. 지식과 교양의 전당까지는 기대하지 않았고, 나라 전체가 암울한 시기였다고는 하는데, 직접 겪어 보니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만 힘들더라고요. 저는 사실 비빌 언덕이 없기는 했지만, 빚도 없고 제 한 몸 건사하면 되니까 세상 탓을 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냥 개인적으로 흥미가 일지 않았어요.”
흐음-.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데도 저는 다른 모두와 비교가 되더라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아! 나는 평범하게 살 운명이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그냥, 세상에 나가고 싶었어요. 그때는 너무 지루하고 지겨웠어요. 강의 때나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이요. 그런데 강의에 막상 들어가면 새로운 내용, 제가 모르는 내용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어서······.”
그래, 그때도 낭중지추였겠지. 찻잔에 코를 걸친 홍기준은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움직였다. 오늘따라 차향이 끝내준다.
“수정이랑 대학에 다니는 거 말이다.”
“네.”
“수정이 듣기 좋으라고 한 얘기였지?”
두 번째 테스트인가?
아니, 이게 테스트가 맞나?
어째 얘기가 지극히 개인적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경영관이라든가 입사 후 계획 같은 걸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여건이 된다면 함께 다니고 싶습니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의문부호를 그리면서도 진혁은 솔직하고 덤덤하게 생각을 밝혔다.
홍기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허허-. 빈말 않는 녀석이 웬일인가 했는데 진짜였어?”
“그 녀석에게도 빚이 있어서요.”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 “우리 딸 잘 부탁하네!”
홍기준의 당부 때문도 아니었다.
“그때가 되었을 때, 수정이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더 좋다고 하면 저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고요.”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금세 식을 거라 생각했던 녀석의 관심이 여전하다 못해 더 깊어진 영향도 있었다. 더이상 외면하기도, 상처 주기도 싫었다.
“그렇구먼. 그러려면 기반을 잘 다져야겠구나. 5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할 일이 많겠어.”
“긴 시간입니다. 준비는 다 되었으니까요.”
진혁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홍기준도 이미 알고 있다.
삭도 연구소는 그래서 생겼다. 거기에 해저 연구소와 지하 대공동을 구축한 건 홍기준의 의견이 추가된 것이고.
*
상대에 따라 어투나 대화의 수준이 달라져야 하는 건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홍기준쯤 되는 사람이 그 상대라면 더욱 신경을 써야 했고, 그래서 이들의 대화는 항상 건설적인 방향으로 지루했다.
하품을 참다가 눈물을 흘릴 만큼 말이다.
“피곤한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배가 불러서······.”
“서울로 오는 것 말인데에-.”
“네.”
“거처는 생각해둔 곳이 있니?”
“아직요.”
“내가 구해줘도 되겠니?”
“제가-.”
완곡히 거절하려던 진혁은 말을 삼켰다.
저를 보는 홍기준의 눈, 강요나 압박은 아닌데 어딘가 이상했다.
아, 역시 테스트인가?
“봐두신 곳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어허허-. 그래. 눈치채야지. 그래야 손진혁이지. 네가 좋아할 만한 곳에 마련해주마. 우리 집에서 함께 살자는 말은 안 할 테니 염려 말고.”
“좋아할 만한 곳······.”
“옛날에 말이다. 네가 땅속으로 꺼지기 전에.”
“네.”
“참 말수도 적고 차가워 보이는 녀석이었지. 그런데 딱 한 번 신나게 얘기한 때가 있었어. 그렇다고 남들처럼 신나서 떠벌였다는 소린 아니다.”
진혁은 내심 갸웃했다.
그랬을 때가 있었던가?
“옥탑방에 살았었다고,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일부러 그런 곳을 찾았다고 했지.”
“아······.”
어렴풋하게 기억이 날 듯했다.
“옥상을 독차지하고 운동도 하고, 빨래도 하고, 책도 읽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장 행복했다고 했지.”
별것 아닌 이야기를 기억해주니 감사할 뿐이다.
실제로는 돈을 아끼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옥상에 조립식으로 올린 단칸방을 구했던 것이었는데.
“여름에는 찜통이고, 겨울에는 뼈마디가 삐그덕거릴 정도로 춥지만 비가 오면 소음 섞이지 않은 빗소리를 들을 수 있고, 눈이 오면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만질 수 있어서 어릴 때 시골에 살던 때를 떠올리게 해준다고 했다. 강아지도 한 마리 키우고 싶었는데 돌봐줄 시간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는 말도 했지.”
“네······.”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흐릿한 기억이 많을 텐데도 저에 대한 일을 이렇게 디테일하게 기억해주다니, 홍기준이 저를 얼마나 특별하게 여겼는지 알 듯했다.
“음······ 불편하지만 충분히 낭만적인 공간이라고 한 말도 생각나는구나.”
다른 이가 말해주는 자신의 과거를 들으며,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럼 머물 곳은 내가 준비하기로 하고······. 차장까지 했던가?”
회상을 늘어놓던 홍기준이 화제를 돌렸다.
“네.”
“알았다. 차장부터 시작하라고 하면 좋겠지만 차장 직급은 아직 두지 않았어. 많이 뽑는 만큼 월급 도둑들 내보내다 보니 인사 적체도 없고 부서 세분화가 덜 되어 있거든.”
이번에는 겸손함 테스트인가?
내심 갸웃거린 진혁은 늦을세라 생각을 말했다.
“정말 수습도 괜찮습니다. 제힘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아, 대답이 틀렸나?
호선을 그린 입매와 달리 홍기준의 눈빛은 싸늘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직장 생태계도 예전과 달라서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 수월한 일일 거야. 그래도 이룬 업적이 있고, 내가 거는 기대도 있고, 네가 한 일이 있으니 밑바닥에서 올라오라고 할 수는 없다. 나도 염치는 있는 사람이야.”
아, 어쩌라고요!
“그러시면······.”
“부회장부터 시작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