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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314화 (314/338)

인탄忍歎(Intern) (2)

나라 잃은 이의 얼굴도 손광연보다는 나으리라.

“시험 쳐서 들어가도 수습부터 시작하는 거야? 이야아-. 세인 들어가기 어렵다더니 정말인가 보구나?”

감탄처럼 내놓았지만 손광연의 음성에는 실망감이 깃들어 있었다.

“어려워도 매년 상하반기 통틀어 몇만 명씩 입사해. 모두 수습 기간을 거치고.”

보장된 처우 때문에 지원자도 많고 경쟁률도 치열했다.

월급의 80%를 받으며 3개월간의 수습 기간을 거친 직원들은 정식 계약과 동시에 그동안 받지 못한 60%를 보너스처럼 받는다. 결과적으로 수습 기간도 봉급은 동일한 셈이다.

수습 기간 동안 평가 제도를 두지만 그 또한 형식적인 것이어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조직문화를 훼손하지 않는 경우 채용결격자가 없었다.

다른 기업은 아직 흉내 내지 못하는 인사시스템이었다.

“아, 그래도 특별대우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손광연은 서운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네 아들 생각이야. 내가 자리 주는 대로 토 달지 않고 받겠다더라. 그래서 수습부터 시작하랬다.”

여유롭게 웃는 홍기준의 표정과 느릿한 말투는 갑질하는 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뭐-, 그려어-. 우리 아들 속에 뭐가 들었는지 나도 모르니까.”

흥, 홍기준 재수 없어. 거푸 한숨을 쉬는 아빠를 보며 진혁의 광대가 솟았다.

“채용시험 합격한 다음에 고민할 문제 같아요. 기출문제 확인했는데 시험이 어렵더라고요.”

5지선다 인적성 검사를 통과하면 2차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2년 전부터 도입한 채용시험은 모조리 서술형이었다.

정해진 답이 없었고, 주어진 세 개의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지식을 논리적으로 작성하는 것이었다. 분량은 주제당 최소 2,000자. 그래서 세인그룹 채용시험은 논문 작성이라는 말이 나도는 것이다.

그럼에도 홍기준의 말처럼 매해 수만 명의 합격자가 나오는 시험이기도 했다. 자유분방함 속에서 자신만의 논리를 갖춘 이라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는 덕분이었는데, 보다 나은 처우를 바라는 경력자가 신규 직원 채용시험에 응시하는 광경은 드문 일도 아니었다.

“수습······.”

쩝.

감정을 숨기지 못한 손광연은 친구를 흘기듯 보고는 입술을 꾹 닫았다.

저 새끼는 너무 거물이 되어버려서 이제 욕도 잘 안 나온다.

“시험 떨어지면 그때 선수계약으로 들어가면 되고요. 제가 아버님께 진 빚이 있어서 그냥 자리 주시는 대로 받기로 했어요-.”

IMF를 막아준 데 대한 채무이행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는 IMF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

“그려어-. 기준이가 진혁이 앞으로 빌딩도 해주고 미국에도, 홍콩에도 우리 아들 이름으로······. 으음-. 수습······. 아빠 회사 오면 이사 달고 시작할 텐데.”

쩝-.

빙긋 웃은 한유영이 남편의 어깨를 살근살근 주물렀다.

“우리 아들한테 맡겨두기로 했잖아요. 고등학교 졸업하면 이제 어른이에요.”

“어허허-, 그렇죠. 맞아요. 아이고 시원허다아-.”

손광연이 아내를 보며 눈이 사라지도록 웃었다.

홍기준에 대한 서운함 따위 금세 사라진 얼굴.

한유영에게는 참 다루기 쉬운 남자다.

생글생글 웃는 한유영을 보며 유세라가 물었다.

“진혁 엄마는 서운하지 않아요?”

“제 인생 각자 알아서 챙기는 거죠. 서운할 게 뭐 있겠어요? 손해만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회사보다는 운동에 더 집중할 나이고요.”

“회사 말고 대학 말이에요. 여자친구도 사귀고 다들 들뜰 때잖아.”

여자친구라는 말에 홍수정이 엄마를 째려보았지만 유세라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얼굴이었다.

지금도 딸과 눈싸움을 하고 있잖아.

한유영이 홍수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저도 처음에는 대학에 가서 친구도 사귀고, 재미나게 놀면 좋겠다 했죠. 그런데 진혁이 말 들어보니까, 우리 아들은 유명세 때문에라도 이제 평범한 대학 생활은 어렵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리고-.”

크흠-. 헛기침을 삼킨 한유영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귀한 우리 아들을 품기에는 대학이 너무 누추하지 않겠어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노려보듯 홍기준을 향하고 있었다.

재수 없지만 맞는 말이라 유세라가 입을 꾹 닫았고, 선명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받은 홍기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보통 엄마가 아니다.

***

2월이 되어 떠들썩한 졸업식을 마치고,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한 달 정도 훈련과 휴식을 취하는 틈틈이 동생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파주로 떠났다.

“3월인데 많이 춥다. 공주나 논산으로 가도 됐을 텐데······.”

“어차피 전화도, 면회도 안 되는 건 똑같아요. 위탁훈련이 가능한 부대 중에는 파주에 있는 부대가 입소 일정이 가장 빠르더라고요. 금방 다녀올게요.”

아쉬워하는 엄마를 안아 달래는 진혁의 얼굴은 평온했다.

후훗-. 특전사 출신 손진혁에게 보병사단 신병교육대 훈련이 훈련 축에나 들까? 가볍게 쉬다가 오면 그뿐.

그리고 세계적인 유명인사 아닌가. 부대에서 여러 가지 편의를 봐줄 거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니까.

“히잉-. 우리 오빠······.”

“어이구우-. 울 애기, 오빠 없어도 친구들이랑, 동생들이랑 잘 지내고 있어야 해?”

“찌히이잉-.”

삐죽삐죽 울먹이는 유진이도 안아 다독였다. 유진아, 오빠 잡지 버리지 마. 그거 한정판이야.

정원이도 번쩍 안아 들었다.

“읏차-. 우리 정원이가 형 없는 동안 엄마랑, 아빠랑, 누나 잘 지켜줘야 해, 알았지?”

“녜, 에헤헤-.”

아빠는 어쩐 일인지 흐뭇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랑스럽다. 우리 아들. 언제 이렇게 커서 벌써 군대를 가네.”

“잘 다녀오겠습니다.”

취재를 위해 사단 정문까지 찾아온 김유덕 기자와도 간단히 인터뷰를 마쳤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내 일이니까. 건강하게 다녀와. 나오면 이 누나가 두부 사 줄게.”

두부라니, 역시 이상한 여자다······.

환송을 위해 동행한 재단 직원들, 팬들, 그리고 취재진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버스에 올랐다.

부우웅-.

진혁을 태운 버스가 출발하자, 밖에서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야수의 포효와도 같은 소리에 눈물이 가득 섞여 있었다.

“아들아아아아아아-! 으허어어어-!”

“오빠아아아아-!”

끼아아아아-!

버스에 앉아 그 소리를 들은 진혁이 얼굴을 감쌌다.

아이고 창피해.

엄마가 알아서 챙기시겠지.

***

3월의 파주는 친절하지 못한 곳이었다.

진혁은 공익요원들과 같은 중대에 배속되었는데, 순전히 훈련이 4주라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진혁보다 모두 나이가 많은 이들이었고, 서른을 바라보는 훈련병도 있었다.

“앞으로 본 조교가 너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개조해 사회 물을 빼도록 하겠다!”

예에-. 어련하시겠어요.

“지금부터 개인 장구류에 본인 명찰을 바느질하도록 한다.”

오버로크 안 쳐줘?

이건 뭔 당나라 군대도 아니고······.

“여긴 군대다. 동기는 모두 친구고 형제다. 사젯말을 쓰거나 동기간 존칭을 쓰지 않도록 한다.”

듣다 보니 조교가 무서워 보이는 것도 같고······.

아, 그러고 보니 아직은 옛날 군대구나!

그리고 군대처럼 느리게 변하는 조직도 없지.

“본 조교는 자비가 없는 사람이다. 나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가겠다는 꿈에 부풀었었다.

그 환상이 깨지며 현실감각을 깨우는 데는 1시간이면 충분했다.

조교 눈빛 무서워.

“조교나 교관이 부르면 ‘예’가 아니라 ‘훈련병! 홍길동!’ 우렁찬 목소리로 관등성명을 대도록 한다.”

어휴 삭막해. 알았으니까 작게 좀 얘기해요.

엄마 보고 싶다.

키가 작아 맨 끝줄에 앉은 동기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자기소개할 때 어디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과정을 밟다가 늦게 군에 왔다는 사람이었다.

“질문 있습니다!”

“네가 여자냐! 질문이 어디 달렸나!”

와-. 옛날 군대 조교는 드립 수준이 저질이네.

“본 조교가 기회를 주기 전에는 입도 뻥끗하지 않는다! 알겠나!”

당장 그 동기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조교는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

누가 봐도 샌님인 대학원생 출신 동기가 얼어붙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예, 예······.”

“예에-?”

“예! 알겠습니다!”

“본 조교가 돌아올 때까지 내무실에서 조용히 대기하도록 한다.”

하휴-. 숨막힐 듯 답답했던 긴장이 풀리며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호랑이 없는 굴에는 여우가 대장 행세를 하기 마련.

온몸에 용 문신이 있는 동기가 태반, 내무반이라기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교도소와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에이 쒸벌-. 어린놈의 새끼가 조교라고 드럽게 지랄이네-.”

“아! 담배도 못 피게 하네. 짜증나게.”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조빱 새끼들이-.”

“아아-, ⬛⬛⬛ 뜨고 싶다.”

에휴, 저 양아치들.

진혁은 참선하는 승려처럼 지긋이 눈을 감고 대기했다.

무서운 조교 씨가 언제 오려나.

늙수그레한 훈련병 하나가 수양록을 들이밀었다.

“을라야, 사인 하나 해돌래?”

“그래.”

사인을 요청한 동기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섀이 보라? 이름 쪼메 알려짓따꼬 행님한테 반말이가?”

“조교님 말씀 못 들었나?”

무감정하게 되물은 진혁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지었다.

전생에도 복무 시절 두어 살 어린 동기들이 친구처럼 굴어도 그러려니 했었다. 나도 이럴 때 연장자에게 반말 좀 해보자 동기야.

“을라야-, 니 내 누군지 아나? 니가 유명하다 캐도 내도-. 어으으윽-.”

진혁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려던 녀석의 손이 종잇장처럼 꺾였다.

어느새 진혁에게 손이 잡혀 고무처럼 오그라든 것이다.

진혁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멧돼지보다 약하고 조교보다 카리스마 없는 녀석이 뭘 믿고 깝치는 걸까?

녀석의 몸에 밴 습관일 터였다. 상대의 어깨를 미는 버릇 말이다.

그러나 진혁이 아무리 관대하다 한들, 그 불쾌한 몸짓을 그대로 받아줄 이유도 없었다.

“네가 밖에서 누구였는지, 내가 밖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긴 군대고 우린 똑같은 훈련병이니까.”

그리 말한 진혁이 좌중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녀석의 손을 쥔 채였다.

끄으-, 끄으-. 신음이 올라왔기에 살짝 풀어주고는 입을 열었다.

“여기 좋아서 온 사람 있나?”

겨울바람보다 차가운 진혁의 눈을 마주한 동기들은 눈을 돌리거나 대꾸하지 않았다.

조교에게 질문하려다 차단당한 동기만 진혁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다들 억지로 끌려온 곳이잖아. 그래도 우린 편해. 한 달도 안 되는 시간만 견디면 그만이야. 내 말이 틀렸나?”

이번에는 고개를 젓는 동기가 꽤 늘었다.

“서로 짜증나는 일 없도록, 민폐 끼치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가자고 동기님들아. 기왕 이렇게 만난 거 화기애애하게, 으쌰으쌰 어울리다 가면 좋잖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는 놀라운 곳이다.

멀쩡한 사람도 훈련병이 되면 어리바리해지고, 점잖던 사람도 군복을 입으면 양아치 아저씨로 돌변한다.

신분과 복장이 달라지고 환경이 변해도 한결같이 반듯한 사람은, 그런 자들 틈에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진혁은 입소하며 조용하고 편안하게 훈련을 마치기 위해 누군가와 한 번쯤 부딪쳐야 할 거라 예상했고, 이런 상황을 그려둔 터였다.

‘때마침 적당한 시비가 들어와 줘서 고맙네.’

침묵이 감도는 내무반, 끼이- 끼이- 변비 걸린 장군이 소리와 흡사한 신음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소음의 주인공에게 눈길을 돌렸다.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 그리고 네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지? 너는 내 동기다. 사 주 동안만. 조용히 있다가 가자.”

“알았어, 알았-. 이 손 좀-.”

고통에 못 이긴 녀석이 무릎을 꿇고 한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어설픈 사투리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인해줄까?”

“예, 예-. 어흐흑-. 손 좀.”

“어디 부러진 것도 아닌데 엄살 부리지 마, 동기야.”

사내자식이 손가락뼈끼리 좀 비벼졌다고 그렇게 죽는시늉을 하냐.

투덜대는 소리로 가득하던 내무반이 금세 평화로워졌다.

뽁-.

네임펜 뚜껑을 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이름이-.”

“오덕수······요.”

“누가 군대에서 ‘요’자 쓰라데?”

“오덕수입니다.”

“말 편하게 해, 편하게.”

이렇게 예의 바른 녀석이 아깐 왜 그랬을까.

역시 인간은 알다가도 모를 동물이다.

‘내게 강 같은 평화.’

스스슥-.

정성껏 펜을 놀렸다.

「오덕수 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찡긋. 손진혁-.」

덕담과 함께 진혁의 사인 트레이드마크 윙크하는 그림도 그려 넣었다.

사인을 마치고 뚱한 눈으로 내무반을 둘러보며 말했다.

“손진혁 사인받을 훈련병-.”

“훈련병! 임영준-!”

“훈련병! 송정헌!”

우르르 몰려오는 동기들을 보며 진혁이 장탄식을 뽑았다.

관등성명은 왜 대는데 이 동기들아!

“훈련병! 신동기!”

대학원 다니다 왔다는 동기님은 이름도 동기네.

“훈련병! 김현석!”

어질어질하구먼!

그만해 이놈들아! 그 무서운 조교가 달려와서 얼차려라도 주면 어쩌려고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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