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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222화 (222/338)

< 질주 (3) >

*

방학이 끝나갈 무렵, 그 많은 나무를 진혁 혼자 다 세웠다.

훼손 후 원상 복구, 역사力士에 의한 역사歷史였다.

저게 과연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인고? 세우란다고 진짜로 세우냐.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맑은 천길룡의 눈이 반짝였고, 눈동자 반짝이는 것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장군이도 그 옆에서 연신 대나무숲을 기웃거렸다.

“지넥아, 몇 개나 세웠는고?”

“삼백쉰여덟 개요.”

“허이고오-, 많이도 보냈네에-.”

“예?”

“아니다, 아니여. 말이 헛나왔느니.”

다 세웠으니 이제 갈 곳 없이 떠돌던 다른 녀석들이 찾아오리라.

차라리 잘된 일이다. 일컬어 선순환이라 하던가. 갈 놈 가고, 올 놈 오고.

웨이팅이 길어지면 손님들은 기다리다 지쳐 다른 집을 찾기 마련인데, 그런 손들이 애먼 곳에 해코지를 하고 다닌다.

끌끌-.

“욕봤다, 지넥아-.”

“헤헤-.”

짜식이, 웃기는.

천길룡도 푸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저놈이 많이도 변했다고 생각하며.

아무리 제 놈이 벌인 일이라지만 일당도 안 주는 집에 매일 찾아와 구슬땀을 흘리다니, 참으로 기특하지 않은가. 시원하고 칼칼한 막걸리라도 한 사발 주도록 할까.

“지넥아, 할애비 집에 가면 뒤란 연못에 장독대가 있는데 함께 가서-.”

“어버버, 안녕히 계십-세오! 장군아 가자!”

황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 진혁이 발바리를 불렀다.

당황감에 물든 눈빛을 볼 때 뭔가 단단히 오해한 듯했다. 그러나 천길룡이 해명할 틈도 없이, 진혁은 냅다 튀었다.

“허어-. 일 시키려는 게 아닌데.”

훠어이-. 고놈 참, 빠르기는 더럽게 빠르다.

천길룡은 바람처럼 달려가는 애송이를 한참 동안 감상했다.

‘한데······.’

동그랗던 천길룡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질풍처럼 사라지는 진혁을 보며 감탄하던 감상과는 별개로, 갑자기 날아든 여상하지 않은 감각 때문이었다.

“음양오행이고 나발이고 뭔 괴상한 힘이 어디 있다는 게여?”

말하자면 감각이라기보다 무감각에 가까우리라.

작업하는 내내 곁에서 지켜보았음에도 해괴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으니.

다만 신기한 일이고, 신기한 놈이다.

수년 전 만났을 때는 보름달에 비할 만한 강한 음기, 또는 천년 묵은 여우에 견줄 만한 오싹한 귀기가 잠시 머물다 사라지더니, 최근에는 솔향처럼 은은하게 풍기던 상쾌한 기운이 사라졌다.

‘자리를 비운 사이 뭔 일이 있긴 있었던 게벼-.’

영안은 없다지만 비범한 기류가 있다면 천길룡이 어찌 잡아내지 못할까.

한데 최근의 진혁에게서는 사내아이답게 양기가 넘칠 뿐, 묘한 기운은 감지되지 않았다.

‘제 놈의 양기로 모조리 몰아낸 것인고?’

그랬다면 그야말로 기이한 일이로다.

고민하느라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도 궁금해 물어보았으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엉뚱한 녀석답게 허무맹랑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던가.

- “앉아서 숨만 쉬었어요. 정말이에요.”

천길룡이 듣기에, 믿을 까닭 없는 헛소리였다.

들려주기 싫다는 뜻이겠지.

무릇 비밀이란 그런 것일 터이니.

“창림이 너 이놈, 네놈들이 사고 친 것을 저 애송이헌티 돌리려는 수작은 아니었더냐?”

억지였다.

말하는 이조차도 억지스러운 말임을 알고 던진 것이다.

그 뒤틀린 숲을 직접 본 이상 빈객들의 소행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나, 이미 죽은 귀신들이 기가 죽어 축 처져 있는 꼴이 보기 싫어 던진 농담이었다.

사아아-.

어제까지만 해도 ‘저 새끼 숭악한 새끼예요!’ 외치던 차사 창림은 실어증 걸린 귀신처럼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저 늙은이에게 말발로 이길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귀신이든 사람이든.

차라리 귀신의 숙명인 양 욕을 먹고 마는 게 낫다.

차사가 인간에게 시달리는 곳이 바로 이승이니까.

다만 대나무를 벗어나 질풍처럼 달리며 외치고 싶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다리가 없어 달리는 건 언감생심이지만 귀신도 꿈은 꾼다.

***

개학을 목전에 두고, 학교에서 운동하는 시간을 과감히 줄였다. 예전과 같은 일과를 수행하기에는 온전한 인간의 육신이 지닌 한계가 너무나 분명했다. 과도한 운동은 감당하기 버거운 피로를 안길 뿐, 성장의 계기를 마련해주지 못했다.

“회장, 요새는 왜 밧줄만 타는 겨?”

“철봉도 하는데?”

대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더 가졌다.

시간보다 빨리 달리는 법은 없어도 함께 걷는 방법은 있다는 천길룡 할아버지의 말을 마음에 새긴 까닭이다.

초등학교, 중학교가 그랬듯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고등학교 생활도 당연히 처음이다. 친구가 있고, 마음이 닫히지 않았다면 누구나 마땅히 누릴 권리가 있는 시절 아닌가. 청춘이 아쉽지 않아서 어서 성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이렇게 어울리는 것도 이때뿐임을 알기에 소중했다.

“승훈아, 우성아. 턱걸이 내기하자.”

“오우싸! 메론아 내기허는 겨!”

이승훈은 과거 등 부상이 심해 씨름을 접었다.

이번 생에는 단련 수준도 좋고 잘 관리되어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 그래도 진혁은 이렇게 놀이를 빌어서라도 더 담금질해두고 싶었다. 단련할수록 강해지는 건 주지의 사실이니.

“그렇다면 난 기권하는 게 인지상정!”

포켓몬스터 로켓단의 로사를 열렬히 사모하는 과과과체중 신우성은 자신 있게 포기했다.

짝-!

“악!”

“으이그! 자랑이다!”

최미경 여고생이 신우성의 등짝을 차지게 갈기며 등판했다.

팔뚝을 주무르기에 선수로 참가하려는 줄 알았는데.

“야, 야! 이 누나가 개수 세어줄 테니까 나는 썅썅바 사줘라!”

최미경은 쫙 편 두 손을 들었다.

효율을 중시하는 진혁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의견을 냈다.

“그럼 우성이가 먼저 가서 사와. 나중에 지는 사람한테 받으면 되지.”

“내가 질 텐디 돈 부텀 내고 허먼 되지. 냐아-, 받어.”

판세를 분석한 똑똑한 이승훈이 기꺼이 지갑을 꺼냈다.

이승훈의 지갑에서 천 원 지폐 두 장을 꺼낸 신우성이 잠시 머뭇거리다 한 장을 더 잡았다.

“승훈아, 나 추위사냥 두 개 먹어도 돼?”

“그려, 인마.”

어허허-.

아무리 친해도 말수는 적었던 녀석들인데, 셋 틈에 최미경이 끼어드니 더할 나위 없이 분위기가 수다스럽다.

당연히 싫다는 뜻은 아니었다.

수다스럽게 까불대는 친구들을 보며 진혁도 헤벌레 웃었으니까.

헤헤-.

*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전력 질주 거리를 조정하며 적합도를 테스트했다.

사점을 넘어 질주하는 훈련을 거치고 몸이 한껏 달아오르면, 지친 상태로 100미터 기록을 측정한다.

“좋아! 최고 기록이야!”

민용락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10.24」

기록을 확인한 진혁도 만족스러운 고갯짓을 했다.

심지 굳은 남자의 의사 표현은 한 번의 끄덕임이면 충분하지.

‘족쇄로 작용한 게 맞아.’

힘의 역설이다.

지치지 않도록 도와주었으나 육체를 한계에 가두지 않았던가.

“한 번 더 뛸래? 기계가 좀 이상한 거 같은데?”

“아니에요. 내일도 뛸 텐데요 뭐.”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체력이 금세 고갈되고 피로가 쌓이는 속도 또한 빨랐으나 주력은 향상되었다. 꾸준히 단련한 신체가 족쇄에서 벗어나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은 많이 지쳐 보인다?”

“힘들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좋아요.”

이상한 힘이 사라졌다 하여 아쉬울 것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뇌 호흡을 하면 지체 없이 심장과 단전으로 기운이 몰려들었으니.

“그럼 오늘은 이만 할까?”

“네. 유진이가 정원이 데리고 올 시간 됐어요.”

다소 늦은감이 있지만 비우며 채우는 방법을 깨달은 것만도 충분히 만족할 성과였다. 알려주는 이 없어 혼자 골머리를 앓았으나 어찌 되었든 문제를 찾아 해결했으니 그 자체만으로 어찌 뿌듯하지 않으랴.

“유재운 소장님 퇴근하셨을 텐데 아직 안 보이네요? 그러고 보니 주 의무관님도-.”

“운동하러 왔다가 삐삐 받고 둘이 같이 갔어. 김춘식 선생댁 암소가 송아지 낳다가 퍼졌대.”

김춘삼이랬나? 민용락이 무성의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이 더운 날 분만이라니, 은정이네 소도 힘들겠다. 진혁은 샤워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간식 좀 줄이세요. 그러다 장가 못가요.”

“하아-, 너마저······.”

민용락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지막 남은 바닐라맛 웨하스를 마저 입에 넣었다.

기록 측정을 하고, 민용락과 미팅을 마치면 유진이가 귀염둥이 족제비처럼 따라붙는다. 누나 손을 잡은 정원이도 함께.

“오빠, 오늘 운동 끝났어요오? 이제 같이 수영할 수 있어요?”

“응아-. 따이!”

“그래, 물놀이하자. 우리 정원이는 형이랑 샤워부터 해요오-.”

“응아아-! 따아아-!”

정원이가 형을 따라잡기 위해 와다다- 발을 놀렸다.

방학 내내 형, 누나와 더불어 곰짐에서 살다시피 하며 다리 힘이 좋아진 정원이는 걷기보다 뛰어다니는 걸 좋아한다.

머리 때문에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리는데, 넘어지지 않기 위해 더 빨리 다리를 놀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기답지 않은 발놀림도, 성장 속도도. 차라리 질주라 부를만했다.

“아이구, 이놈아. 넘어질라.”

귀염둥이 막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기들은 자유롭게 쏘다니는 걸 좋아하겠지만, 형으로서 품에 꼭 안는 행복을 포기할 수 없다.

제아무리 빠르다 한들 시간보다 빠른 것은 없다더니.

얻은 것 많은 방학이 그렇게 눈 깜짝할 새 흘러갔다.

***

밤공기 선선해진 9월.

손유진은 간밤에 푹잤다.

너무 세상 모르고 자다가 행운이를 깔아뭉갤 뻔했다.

사과의 뜻으로 함께 벌레 사냥을 나섰다.

“진혁아아아-!”

일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최미경 언니가 찾아왔다.

손에는 비닐봉지를 들었는데, 저 언니는 아기였을 때도 비닐봉지를 들고 오빠를 찾아왔다고 들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봉투 컬러가 흰색 반투명이 아니라 검은색이라는 것 정도라던가.

“손진혁 나와라아아아-!”

옥상에서 행운이와 놀던 손유진은 까치발로 빼꼼 내다보고는 살살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에는 천길롱 해비지가 찾아오셔서 저렇게 부르더니, 우리 오빠가 또 뭐 사고쳤나 봐.

“행운아, 우리 오빠가 무슨 짓을 했을까요?”

삐이-.

어쩜 이리도 똑똑할까. 행운이는 손유진이 뭔가를 물을 때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모른다는 뜻이겠지.

“그치? 나도 모르겠네요.”

관심을 끄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하기로 했다.

손유진은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옥상 화단을 뒤적였다.

원래는 퇴비장을 뒤졌는데 거기엔 더러운 게 너무 많다며 오빠가 말렸다. 수로 옆 질척한 땅을 뒤집을 때는 물에 빠질 수 있다며 오빠가 또 못하게 했다.

- “공주님은 위험한 곳에 가는 거 아냐.”

- “제가 왜 공주님이지요?”

- “오빠가 공주님이라고 하면 공주님인 거야.”

음···, 왠지 그럴듯한 말이라 손유진은 더 대거리를 잇지 못했다.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

밭둑 옆 풀숲을 뒤적이다가 뱀을 본 이후 오빠에게 하소연을 했다. 행운이 밥을 주고 싶은데 도대체 어디서 사냥을 해야 하나며. 행운이는 직접 사냥하는 똑똑한 새지만 손유진이 밥도 차려주고 싶었다. 손유진이 행운이의 엄마니까.

그랬더니 오빠는 잘 익은 두엄을 삽으로 퍼담아 옥상으로 옮겼다.

더럽다고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하던 그 퇴비장의 두엄을 말이다.

오빠 덕분인지 옥상 화단에는 벌레가 많이 산다.

“행운아, 이거 먹을 수 있어요오?”

삐이이-. 찹찹-.

행운이는 제 몸집만 한 굼벵이도 꿀떡꿀떡 삼킨다. 쪼롱이 아지찌 말로는 이 커다란 게 장수하늘소 애벌레라고 하는 것 같던데, 퇴비장에 많이 산다. 너무 큰 애벌레는 손유진의 손바닥보다 커서 먹이지 못하고 작은 녀석만 골라 먹였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손유진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저도 모르게 벌레를 삼킬 뻔한 적도 있다.

그런데 저 언니는 뭐 하자고 이쁘게 빼입고 찾아왔나?

“행운아 가서 엿듣고 와라요.”

삐이이-.

행운이는 입을 쩍쩍 벌리며 고개를 저을 뿐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헤헤-. 만화 보면 다들 그렇게 하던데.”

행운이는 그런 능력이 없는 모양이야.

괜히 겸연쩍어 벌레 잡던 나뭇가지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행운아, 그래도 새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해요. 우리 아빠가 그랬어요. 음 뭐랬더라······?”

낮말은 새가 듣고 반말은 듣기 싫다고.

그러니까 낮말은 좀 엿듣고 그래라요.

배가 부른 행운이는 날개에 머리를 묻었다.

오늘도 행운이 교육은 물 건너간 듯했다.

“아악-!”

마당에서 오빠 비명이 들렸다.

도둑고양이처럼 움직인 손유진이 옥상 난간에 턱을 기대자, 행운이도 궁금한지 머리를 뺐다.

***

“어이그, 인마!”

“왜 꼬집고 그러냐아-.”

“손톱도 안 박히는 놈이 뭐래? 어?”

최미경은 놀란 눈으로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돌덩이 같아서 마음 놓고 때리지도 못하던 진혁인데, 오늘은 꼬집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기 때문이다.

“손진혁, 너······.”

진혁은 숨을 들이쉬었다.

아뿔싸, 이 눈웃음 살살 치는 불여우가 내 비밀을 눈치챈 게 아닐까?

“손진혁 살쪘냐?”

아니구나.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난 살 안 쪄.”

매일 그렇게 운동하는데 살찌면 문제 있는 거지.

“아무튼 꼬집으려고 온 건 아니고. 수정이하고 통화하다 들었거든? 혹시 삐삐에다 이상한 숫자 찍는 변태가 너냐?”

와씨, 사나이의 트루 러브 순애 로맨스를 두고 변태라니.

싸우자, 이 X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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