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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220화 (220/338)

< 질주 >

예기치 않은 상황이라도 생길까 봐 동생의 행동을 집중해서 관찰하던 진혁은 서둘러 정원이를 건졌다.

영리한 녀석이라 물을 먹지는 않지만 너무 깊이 들어가면 아기들은 두려움을 느끼거나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아이고오-. 이 겁도 없는 녀석아-.”

“따아아-!”

걱정하는 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정원이는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난 모습이었다. 지금도 형에게 들려 만세를 부르는 일에만 열중이다.

그런데 옷도 안 입고 엉덩이로 입수하면 뽕알 안 아픈가?

알몸으로 다이빙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어려서인지 금방 적응하네.’

깊은 수영장에서 아기에게 물놀이를 시켜도 될지 고민했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정원이는 처음 수영을 배울 때의 유진이보다 물과 잘 어울렸다. 가르치지 않아도 물속에서는 숨을 뱉었고, 두려움 없이 수중에서 눈을 떴다. 힘을 뺀 채 물에 몸을 맡기는 건 기본이었다.

‘정원이는 수영 천재가 아닐까?’

여느 부모들처럼, 진혁도 동생들을 보며 착각의 자유를 누렸다.

천재가 아니면 어떠냐.

물속에서 눈을 똥그랗게 뜬 아기 얼굴, 입에서 뽀골뽀골 올라오는 기포를 보고 있자면 수중에서도 웃음을 짓게 된다. 물이라도 먹을까 봐 먼저 잠수해 지켜보던 진혁이 활짝 웃었다.

‘이히히히히. 귀여워.’

푸과과과과-.

너무 크게 웃어서 입속으로 물이 들이쳤다.

숨을 모두 뱉으면 정원이는 입을 오므린다. 그리고 열심히 젓던 팔다리를 거북이처럼 천천히 허우적거린다.

더 뱉을 숨이 없을 때 입을 벌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급하게 허우적대면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그때 형이 밑을 받쳐 물 위로 올려주면 된다.

물놀이가 반복되며 서로 자연스럽게 맞춘 합이랄까.

“따아아-! 음마아-. 빠아아-. 누나아-. 응아- 비유웅-.”

까르륵-.

왜 온 가족을 다 부르는지는 몰라도 정원이는 행복해 보였다.

비행기 자세로 방긋거리는 정원이 뒤로, 수달처럼 뒤집힌 유진이가 둥둥 지나갔다. 고고하게 발목만 차서 전진하는데, 자유자재로 수영을 하는 실력자의 면모였다. 아기의 안전을 염려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진이에게도 동생과 노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다.

“정원이도 누나처럼 해볼래?”

“따아아-!”

뭐라는 거야······.

정원이는 사방으로 물만 날렸다.

따로 운동을 하던 SSS 요원들도, 앉아 쉬던 주민들도 정원이와 유진이가 물놀이를 할 때면 눈을 모은다. 어린아이들 노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달콤한 휴식은 없으니.

“따이이이이-!”

퐁당-.

꼬물이 정원이도 그렇게 당당히 곰짐의 일원이 되어 갔다.

***

똑 닮은 딸인데 어쩜 이리도 엄마 말을 안 들을까.

유세라는 홍수정이 답답하다.

“할아버지 내려가실 때 같이 가라니까? 징역 오빠도 보고, 유진이랑 정원이도 만나고 와. 너 전에 미경 언니도 보고 싶다고 했잖아.”

“아, 됐다고요-. 나 할 거 많단 말야.”

책상 앞에 앉은 홍수정은 엄마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사락-. 책장이 제법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얘 좀 봐? 어린애가 할 게 뭐가 많다고 그래? 네 나이 때는 친구들이랑 놀고-.”

“그래, 친구들. 친구들이랑 놀아야지. 그러라고 일부러 지금 다니는 학교 보냈다며? 근데 왜 자꾸 시골에 가라는 거야?”

얼씨구, 논리가 그럴싸한데?

얘가 이렇게 말을 잘했나? 유세라가 잠시 꿀을 먹은 사이, 홍수정이 물 흐르듯 생각을 폈다. 여전히 엄마에게 등을 보인 채였다.

“그리고 외삼촌네도 다녀와야지. 문식 삼촌네 오빠도 미국에서 왔지, 준식 삼촌네 언니도 영국에서 왔지.”

“왜, 왜 자꾸 삼촌들 이름을 부르고 그러니?”

기껏 되묻는 수준이 이러하니 엄마라는 사람으로서 자괴감이 들만도 한데, 팔짱을 낀 유세라는 당당했다.

“아, 삼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게 좋다잖아. 결혼하면 이름으로 불리기 어렵다고 이름 불러달래요오-.”

크으음-.

유세라는 다시 한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건 말다툼이라기보다 딸에게 교육을 받는 느낌 아닌가.

팔짱을 낀 채 괜시리 목을 긁었다.

짜증이 올라올 때는 매번 목이 가렵더라.

“그리고 이거 봐요.”

팔락-.

여전히 의자에 앉아 등을 돌린 홍수정이 몇 장의 종이를 엄마 눈앞에 디밀었다. 팔이 그렇게 뒤로 꺾이다니, 우리 딸 유연하기도 하지.

유세라가 받아들기도 전에 홍수정이 감정 없는 말투로 또박또박 열거했다.

“피아노, 발레, 태권도, 영어, 수학, 컴퓨터. 더 말해?”

“아휴-. 아니다. 쉬어.”

“쉬기는. 숙제해야 돼.”

엄마 때문에 다니는 학원만 다섯 군데다.

홍수정이 자청해서 하는 운동은 예외고.

그런 사실도 잊은 채 딸에게 놀러 가라고 등을 떠미는 꼴도 우습다.

그런데도 홍수정은 투덜대지 않았고 엄마보다 차분했다.

‘나도 사춘기 때는 저렇게 똑똑했다고 들었는데.’

쩝-.

그 똑똑이는 어디 가고 덜렁이만 남았다.

오빠들은 그런 유세라를 두고 사춘기의 저주라며 놀렸다.

지능과 이성을 사춘기 시절에 몰빵해서 써버리는 바람에 맛탱이가 가버렸다고.

‘뭐래, 뷔애앵신들이.’

욕이 아닌 오빠들을 향한 유세라만의 내적 애정표현이다.

유세라가 보기에, 오빠들도 맛탱이가 간 건 마찬가지였다.

얼굴과 허우대만 멀쩡한 큰오빠, 지능만 쓸모있는 작은 오빠.

전략적 사고가 가능한 아들이 하나 더 있어서 셋을 합쳤다면, 그룹을 물려받은 사람은 사위가 아니라 아들이었을 거라고 남편과 술을 걸치면 시시덕대곤 한다. 결국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이다.

기어이 돌아앉은 홍수정이 한숨을 쉬었다.

이 엄마가 갑자기 조용해져서 돌아본 건데 목을 긁고 있잖아. 조금만 더 긁으면 피 나오겠어.

“엄마······, 엄마?”

“으응? 간다. 가.”

사춘기 시절에 이지를 탕진한 편이지만 아직 말귀는 알아듣는다.

*

엄마가 나간 후, 홍수정은 책상 서랍을 열어 삐삐를 꺼냈다.

친구들과 연락할 때 사용하라며 아빠가 선물한 신문물이다.

‘흐음-. 오늘도 연락이 없네.’

분명 징역 오빠에게 삐삐 번호를 알려줬건만, 삐삐에 찍히는 번호는 학교 친구들 번호뿐이었다.

연락처 없이 이상한 숫자만 남긴 것도 몇 개 있는데 목소리샘에 음성 녹음을 남기지 않아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0000」

「0024」

「0124」

‘국제전화도 아니고 이게 뭐야.’

아빠에게 삐삐를 선물 받았을 때는, 방에 전화기가 따로 있고 차에도 전화기가 있는데 왜 삐삐를 써야 하는지 의아했었다. 학교에서만큼은 평범한 학생이라 수업 중에 긴급히 연락받을 일도 없으니까. 그런데 써보니 이 삐삐라는 기계에는 숨겨진 기능이 있었다.

기대감과 설렘이라는 기능이다. 아, 비슷한 말인가?

아무튼 징역 오빠는 삐삐를 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책상 위, 가장 잘 보이는 곳의 액자를 보았다.

허리 숙여 삽질하는 손진혁과, 히죽이며 그 뺨에 침을 묻히는 꼬맹이 홍수정이 있었다.

‘기억 안 나.’

사진으로 존재하니 그랬나 보다 생각할 뿐.

징역 오빠는 홍수정이 뭘 하든 옆에서 지켜보고, 뭘 요구하든 오냐오냐, 공주님처럼 아껴주던 사람이다. 개울에 자빠졌을 때도 냉큼 달려와 건져줬지.

너무 어렸던 때라 대개는 어렴풋하지만, 일부 기억은 오래도록 강렬하게 남는 모양이다. 그런데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니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나 보다, 하게 되었다.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그리움조차 무뎌졌다.

속 깊은 홍수정은 아마도 사춘기라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 중이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 같으면서도, 어린아이인지 철든 사람인지도 헷갈린다.

“흥.”

뭐, 좋을 대로 하라지. 아직은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다.

방학하기 무섭게 경기도의 놀이공원에도 다녀왔는데, 아빠 덕분에 친구들 앞에서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모든 기구를 다 섭렵하며 이틀 내내 공원을 돌아다녔는데, 얼마나 열심히 놀았던지 나중에는 다리 풀린 친구가 발생하는 바람에 남은 하루는 숙소에서 게임만 하다가 왔다.

친한 친구에게 슬쩍 물어봤는데 다섯 살 차이면 벌써 고등학생 아니냐며 너무 노땅이라고 했다. 틀린 구석이 없는 말이어서 홍수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친구들의 남자친구는 다 동갑내기니까.

그래도 뭔가 아쉬워 입술을 비죽 내밀며 삐삐를 만지작거렸다.

방학마다 내려가면 함께 뛰어다니고, 산딸기를 따주고, 업어주기도 했지.

와씨, 생각하다 보니 다시 그리워졌다.

이제 와서 다시 가겠다 할 수도 없고.

마음 같아서는 시골까지 달려가서 뭐하느라 연락도 없느냐 따지고 싶다.

‘먼저 해볼까?’

변하긴 했다.

예전 같았으면 고민도 없이 수화기를 들었을 텐데, 이게 뭐라고 가슴이 간질거리며 머뭇거리게 되냐.

언젠가 아빠에게 물은 적이 있다.

어른들은 휴대전화를 쓰면서, 그리고 대량 생산도 가능하다면서 왜 보급을 안 하냐고, 왜 저는 삐삐를 쓰게 하냐고.

- “아빠가 빚을 진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작은 배려야. 차근차근, 남들처럼 누릴 수 있는 시절을 누리라는 뜻이랄까?”

똑똑하다고는 하나, 아직 어린 홍수정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엄마나 외삼촌, 아니면 할아버지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물어보니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모두 휴대전화기를 사용 중이다.

‘손광연 아저씨가 빚쟁이인가?’

별스럽지 않은 추리를 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용기 내어 수화기를 집을 때였다.

툭- 탁툭-.

적막이 감돌던 방안을 밝히는 소리. 동생 홍수혁이 딸랑이로 누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일찌감치 누나가 어르고 달랜 덕분인지, 홍수혁은 전담 돌보미가 있는데도 누나를 찾는 시간이 많았다. 그만큼 누나를 잘 따르는 동생이기도 하다.

“기다려! 누나가 열어줄게!”

홍수정이 급히 바닥을 박찼다.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순발력과 스피드가 돋보였다.

돌보미가 곁에서 보겠지만, 혹시라도 혼자 찾아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기가 까치발로 문손잡이를 잡아당기다 균형을 잃기라도 하면 넘어질 수 있고, 아기들은 무게 중심이 머리에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넘어지는 홍수혁의 머리를 홍수정이 받친 것만도 벌써 수차례다.

“으헤헤-, 수혁이가 누나 보고 싶어서 와쪄?”

집안에서 홍수정이 유일하게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이 있다면, 동생 홍수혁이 누나 방을 찾았을 때다.

“누나, 옹부 우떼떼 해따애더 애우도?”

“아니야, 우리 수혁이랑 노는 게 더 중요해. 아이구! 무거워라! 제가 같이 놀다가 데려갈게요.”

동생을 안아 들고는 돌보미에게도 예의 바르게 목례했다.

“누나, 하꾸 다너와끕에우요떠-.”

“방학 중이라 학교는 안 가도 돼.”

“하꾸 앙가- 뚜여기 또뚜르르 부아아-.”

“아하하-.”

아기만이 낼 수 있는 음성과 부정확한 발음, 푸푸거리는 입술까지.

아기 재롱에 뭘 하던 중인지도 잊어버린 홍수정은 동생을 안고 바보처럼 웃어버렸다.

2층 계단참에서 훔쳐보듯 눈을 가늘게 뜬 유세라가 턱을 쥐었다.

‘내 딸이 확실해. 날 닮았어.’

그럼 누굴 닮을 줄 알았냐. 이상한 깨달음이었다.

엄마와 아빠에게는 틱틱대지만 홍수정은 집안 일꾼들에게 싹싹하게 군다.

나아가 동생에게 하는 걸 보면 천사가 따로 없다.

외부인의 시선에는 절대 사춘기 인성으로 비치지 않을 몸가짐이지만, 경험자이자 엄마의 눈에는 달랐다.

‘역시, 사춘기가 확실해. 사춘기 주제에 저런 가증스러운 모습이라니. 쟤 같은 불여우가 또 있을까?’

내 딸이지만 여자는 참으로 복잡한 생물이다.

벽에 걸린 거울을 원수처럼 째려보며 대치상태를 유지하다가, 딸에게 들킬세라 살금살금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

곰짐에 설치된 전화기 앞에서 도둑놈처럼 두리번거리는 진혁을 민용락이 불렀다.

“진혁아-. 훈련시간 됐다.”

“앗! 네넵!”

저 때문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 그게 바로 민폐 아닌가.

뭘 눌러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진혁은 오늘도 숫자 네 개만 찍고 급히 전화를 끊었다.

‘음성 남기는 건 역시 부끄럽구먼.’

휴대전화가 있는데 다른 이동통신수단이 필요할까 싶었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 경우가 다르다. 급히 연락할 때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테니.

최미경이나 이승훈처럼 몰래-대놓고 연애하는 녀석들에게도 필수겠지.

「널 위해 세상이 천천히 가는 거다. 읽고 지워라.」

홍기준이 넌지시 알려주기로, 그래도 과거 세상보다는 삐삐 보급이 앞당겨졌다고 했다. 2년 정도랬나?

처음에는 인간 혐오 때문에 자신의 노력과 땀이 밴 문명의 이기를 전파하기를 꺼린다더니, 진혁으로 하여금 전에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도록 하려는 뜻도 있다고.

‘뭐······, 감사는 한다.’

기숙사 외에 연고가 없던 과거, 비상연락을 위해 삐삐를 사용했었다.

진혁은 ‘38317’, ‘00235’ 따위 암호 삐삐를 많이도 받았는데, 해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학교 친구들에게 뜻을 물어 배웠다.

그때는 암호질하던 녀석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헤헤헤-. 재밌더.’

장난전화를 걸 때처럼, 쌀보리 게임을 할 때처럼 은근히 심장이 쫄깃해지는 맛이 있다. 지금은 쉬운 것 외에 기억나는 암호가 몇 개 없어서 좀 아쉬울 정도.

아직 암호가 유행하지 않으니 진혁은 삐삐 암호의 선구자가 되려나?

‘수정이도 내가 보냈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얘가 통 답신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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