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점死點 (7) >
솨아아아- 솨솨솨-!
존재는 이름을 따라간다던가, 대나무숲을 뒤흔드는 거센 바람에도 장군이는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그야말로 장군감만이 보일 수 있는 기개였다. 지금도 보라지, 풍압에 수염이 접히고 주둥이가 팔락거리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눈을 뜨려 애쓰지 않나.
끼이이잉-.
낮잠 자던 중 따라와 이게 뭔 개고생인가 싶지만 장군이는 앞발로 땅을 단단히 딛고 강풍을 버텨냈다. 어쩌면 진혁이 아등바등 애쓰는 상태라 지켜주기 위해 제 녀석도 기를 쓰는 것일지 모르겠다. 지금도 진혁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지 않은가.
쏴아아아아-!
태풍에도 바람이 이보다 드세지는 않으리라.
다행히도 꺾여 쓰러지는 대나무는 없었지만, 꼿꼿이 서 있는 개체를 찾기가 어려웠다.
‘너무 강한데?’
의도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은밀히 숨어서 해괴한 짓을 하기에 좋은 장소라서 찾은 대나무숲이다.
한데, 그야말로 평지풍파를 몰고 온 꼴이 되었다.
그저 천천히 호흡을 뱉어 힘을 빼려 한 것인데, 한 번 빠져나가기 시작한 기운은 마중물을 만난 지하수처럼 격렬하게 솟구쳤다. 구멍 뚫린 댐이 일시에 무너지듯, 오공을 넘어 안구를 포함하는 칠공에서 개방된 힘은 모공을 타고 새어 나오더니 피부를 투과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세포 하나하나로 분명히 느껴지는 기파였다.
처음에는 두려웠다.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힘이 기다렸다는 듯 폭렬하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털을 바짝 세우고 경계하던 장군이의 기세가 누그러지는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안전하다는 뜻이니까.
힘 조절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아무튼, 틈틈이 들러 보아 달라 부탁한 천길룡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폐허가 되면 곤란하다.
‘이제 의도대로 조절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피부로 느껴지던 폭풍이 서서히 잦아들며 진혁의 주위에는 미풍조차 불지 않았다. 다만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는 반시계방향의 태풍이 계속 몰아쳤다. 태풍의 눈에 들어앉은 형세랄까.
이제 태풍과 진혁의 접점은 입이 아닌 정수리였다.
새로이 깨달은 순간이다. 홍수정과 수박 서리하던 날 달빛에 반응해 전율했던 상단전이 힘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장군아, 이리 들어와.”
그냥 두었다가는 팔락거리는 저 녀석의 수염이 남아나지 않을 듯했다.
깨왜왜왜왤-!
마침 장군이가 붕 떠올랐다.
“들어오라고 인마.”
팔을 뻗어 장군이를 낚아채 무릎 위에 올렸다.
자유로이 말하고 움직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개벼룩 옮겠네.
*
솨아아-. 사라락-.
바람이 멎자 숲 상공을 단검처럼 맴돌던 대나뭇잎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신체에 별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딱히 피로한 느낌도 없었고, 시력이나 체력의 저하도 없었다.
그리고 대나무숲도 건재했다.
뭐, 주위 대나무들이 회오리치듯 기울긴 했지만 이 정도는 이해해주시겠지.
직접 본들 누가 저지른 짓인지 알기나 할까?
“흐음. 힘 조절은 대충 잘된 거 같네.”
절로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대나무숲을 보호하기 위해 심장을 윽박지르듯 짓누른 효과가 발한 점도 그렇지만 숲이 부서질까, 천길룡이 놀랄까 염려했다는 마음가짐 자체로 스스로 많이 변했다고 여겼다.
“가자 장군아.”
헤헤헥-.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장군이가 앞장서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부스스스스-.
바람 한 점 없는데, 진혁이 벗어나자 기지개를 켜듯 대나무숲이 수선을 떨었다.
“응?”
해괴한 일이다.
음산하게 일던 소요가 진혁이 돌아보자 잠잠해졌으니.
해괴한 일을 벌인 주제에 그렇게 평하는 것도 우습지만 바람 한 점 없는 천지에 대나무숲이 부산을 떠는 것이 의아할 수밖에.
“신기한 숲이야. 뭔가 있긴 있나 봐.”
그래서 종종 봐달라고 하신 건가?
언덕을 내려가 다시 숲을 살폈으나 움직임 없이 고요했다.
그런데.
“하이고오-. 대나무밭이 꽈배기처럼 비틀렸네.”
안에서 보기에는 일부만 그러했는데, 외부에서 보니 전체가 뒤틀렸다.
그 모습을 보니 떠오르는 게 있다.
“꽈배기 먹고 싶다.”
가마솥에 튀겨 설탕 잔뜩 묻힌 엄마표 꽈배기는 최고지. 엄마한테 만들어달라고 해야겠다. 진혁은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가벼운 발놀림으로 사뿐사뿐 달리기 시작했다.
사고뭉치가 사라지자 대나무숲에 다시금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허물 벗은 이무기가 진저리를 치는 듯했다.
***
이미 안면이 있었고 이런저런 왕래가 있던 터라 유세라와 홍기준은 천길룡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손님으로 대했다. 어차피 유명선이 미리 양해를 구한 터였고, 유명선이 가까이에서 마크하다시피 응대하니 따로 챙길 일도 없었다.
천길룡이라는 위인이 워낙 자유분방해서 간섭을 싫어하기도 했고.
“어르신, 뭐 하세요?”
“아니, 난 그저 아이스께끼 따위가 있을까 싶어서 그랬소.”
자유로운 영혼이라지만 조리사가 참견하는 통에 천길룡은 냉장고도 편하게 뒤적이지 못했다.
일하는 사람만도 열 명이 넘는데 손님 대접에 소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집안일을 살피는 직원들은 천길룡을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다.
천길룡은 오자마자 요리사부터 경호원까지 맥을 짚고 침을 놓았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경험을 했다.
침을 맞고 냉한을 흘리다가 얼굴이 몰라보게 좋아진 사람, 눈 밑 그늘이 사라지고 안색이 환하게 핀 사람, 시큰하던 손목이 나은 사람······.
“어르신 언제까지 계신대요?”
“사 일쯤 계신다던데. 유 회장님이 언제까지 계실지 궁금해야 하는 거 아냐?”
일꾼들 수군거림의 주제도 천길룡이었다.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온 홍수정을 본 천길룡이 눈을 크게 떴다.
지난해에 보았을 때보다 한층 성숙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호오-, 공주가 더 공주가 되었구나.”
홍수정은 가볍게 고개만 숙인 후 제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딱히 불만스러운 얼굴은 아니었으나 그 표정이 밝다고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쟤가 버릇없이-.”
“허허, 그냥 두시오. 그럴 때인 것 같으니.”
“그래도 할아버지 손님이신데 손도 좀 잡아드리고 그러지 참······. 죄송합니다, 어르신. 놀이공원에 이박삼일로 다녀오느라 피곤한 모양이에요.”
“아니오, 아니오. 맥은 짚지 않아도 되겠구랴. 이 집에서 아비보다 건강해 보이니.”
“그, 그럴까요?”
속내를 들킨 유세라가 말을 더듬었다.
“한눈에 보아도 몸에 기운이 넘치지 않소? 젊음이야말로 최고의 영단이지.”
“아직 열두 살이라 젊다고 하기도 뭐 하네요. 호호.”
“허허허, 그렇구먼.”
개구쟁이처럼 휘어진 유세라의 눈매를 보며 천길룡이 한발 물러섰다.
젊다는 표현이 부적절하진 않을 것이나, 요즘 세상에서 쓰임이 다른 줄 진작 알고는 있었다. 혈기 따위가 왕성한 한창때를 뜻으로 한 말인데, 말이란 사람마다 이렇게 얼굴을 달리하니 옛사람이 양보할 수밖에.
*
천길룡이 서울에 머문 지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홍 회장은 오늘도 늦으려나 보오?.”
“네. 머리에 김이 나도록 일을 하는데 쓰러질까 걱정이에요.”
“타고난 수명과 전성기가 긴 사람이니 염려치 마시오.”
“말씀만 들어도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유세라가 홍수정의 방으로 올라가고, 천길룡은 홀로 정원을 내다보았다.
그간 머물며 들은 유명선과 홍기준의 대화를 곱씹으며.
‘세상이 어지러워진다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안다 하여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전문적인 내용이라면 더더욱. 천길룡은 그저 분위기만 감지할 뿐이다.
천길룡을 신경쓰지 않고 조용조용 나누는 대화 속에 무수히 많은 뼈와 칼날이 들어 있었다. 그게 서로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세상이 어지러워진다는 것인지, 홍 회장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겠다는 것인지도 애매했다. 유난히 반짝이는 눈을 보며 세파에 휘둘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확신만 재차 얻었다.
‘그나저나 손 사장 사업은 무탈할 것인고?’
은거 도인이라 하나 천길룡도 마을 주민의 한 명.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이웃사촌 손광연의 사업이 타격을 입을까 걱정이다.
‘집 떠나면 온갖 번뇌에 사로잡힌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로구먼.’
정착 후 처음으로 자리를 비운 터라 대나무숲도 염려된다.
엊그제는 관자놀이가 따끔거리는 것이, 이 말썽꾸러기 잡귀 놈들이 무슨 사고를 친 건 아닐까 불안한 나머지 편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은 별다른 기별이 없어 다행이지만.
‘아이구-. 내 걱정부터 하세. 측간을 좀······.’
머무는 내내 거하게 대접 받으며 채워넣기만 했더니 배가 너무 묵직했다.
***
비우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가.
몸이든, 마음이든.
진혁은 비움으로써 채운다는 말을 실감했다.
비록 그것이 다른 곳에서 나온 말일지라도.
훅-후웁-.
유진이와 정원이의 감시하에 곰짐을 돌았다.
벌써 며칠째 반복된 훈련, 데드 포인트를 넘어서는 일이 이리도 즐거울 줄이야.
“끄으흐흐읍-.”
격통이라는 말로써 묘사할 수 있을까.
심장을 무딘 칼로 가르는 듯한 이 괴로움을.
숨을 쉬고 있으나 결코 호흡이라 할 수 없는 상태. 생존을 위해 기계적으로 일하는 심폐가 아니었다면 산소 부족으로 일찌감치 쓰러졌을 터였다. 미지의 힘을 빼고 평범한 인체로 돌아온 진혁은 그 과정을 몇 번이고 경험했다. 산소공급이 끊긴 뇌는 죽음의 공포마저 안겼다.
최초의 사점을 겪으며 죽음의 문턱에서 진혁이 얻은 교훈은 바로 뇌였다.
흐으읍-흐읍-.
‘코로 강하고 길게 들이쉬는 거야.’
뇌에 산소를 빨리 공급하는 것이 진혁이 찾은 방법이었다.
코로 강하게 들이쉬면, 맑은 물에 먹물이 퍼지듯 뜨겁고 답답했던 머릿속에 차가운 공기가 들어찬다. 그리 하면 뇌가 알아서 명령을 내린다. 허파는 더욱 정결하게 산소를 거를 것이며, 심장은 보다 크게 팽창하라고.
터질듯한 얼굴을 하고 달리면서도, 진혁은 죽을 고비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해보았다. 그건 어쩌면 정말로 죽을 고비라는 뜻이 아니라, 이 순간이 변화와 성장의 계기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우주에 비견되는 인간의 뇌가 스스로 설정한 계기. 두려우면 감히 넘지 말라는 뜻으로 말이다. 이봐, 더 성장하고 싶으면 죽을힘을 다하라고!
데드 포인트를 넘으면, 김요한에게 들었던 것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고비를 넘었다는 안도가 밀려왔다. 아마도 김요한과 운동의 강도가 달라 그런 것일 테지.
유진이가 멀리 보이는 오빠를 향해 두 손을 입에 모아 나팔처럼 만들었다.
“오빠아-! 정원이 물놀이 해도 돼요오?”
멀리 트랙을 달리던 진혁은 엄지와 다른 손가락을 모아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쟤는 오빠 운동하는 거 지켜본다더니 그새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네.
아기 정원이는 아기답게 자연체로 누나 옆에서 방방 뛰고 있었는데, 어서 물에 들어가고 싶은 눈치였다.
‘오늘 운동은 이쯤 할까?’
운동도 좋지만 동생들을 안전하게 보살피는 게 먼저니까.
곰짐에는 여가를 즐기는 마을 주민이 꽤 되기에 SSS 요원이 안전요원으로 상주하지만, 직접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가족의 일이란, 으레 그렇듯 내 손을 타야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다.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민용락에게 먼저 갔다.
민용락은 가늘게 뜬 눈으로 측정 장비와 분석용 모니터를 번갈아 주시하고 있었다.
“어때요?”
“마지막으로 일 킬로미터 달린 결과를 지금 보는 중이야. 최고속도는 시속 삼십칠 킬로, 평균속도는 시속 이십구 킬로. 음, 여기 보이지?”
민용락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짚었다.
불규칙적으로 휜 곡선와 우상향하는 직선이 만나는 접점이었다.
“시속 삼십오 킬로. 오차는 있을 거야. 자전거도 아닌데 그 속도로 계속 달리는 건 쉽지 않겠지. 여기가 아마 이백 미터 구간 같은데, 이 수준을 유지해야 해. 데이터상으로는 이 속도로 삼백 미터를 꾸준히 달릴 수 있어야 십 초 내에 에너지를 올인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가능하겠어?”
“네. 감만 잡으면 될 거 같아요.”
이미 진혁은 새로운 도전으로 흥분한 상태였다.
온전히 제 몸의 힘으로 달리고, 또 달려 결국 목표한 기록을 달성했을 때의 쾌감. 시험에 모두 아는 문제가 나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을 맛본 터였다.
‘될 때까지 하면 되지.’
샤워를 마치고 손짓으로 유진이를 불렀다.
유진이는 정원이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수건을 둘러 아기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가운처럼 어깨에 두른 거니. 고추가 다 보이잖아.
“샤워하고 올 테니까 기다려.”
“녜-. 에헤헤.”
동생들과 더 어울리려는 이유는 또 있다.
내일이면 보충수업을 위해 학교에 나가야 한다.
보충수업이라 이른 오후에 마치기는 하지만 종일 집에 머물 때보다 아쉬울 수밖에.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후 먼저 풀장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잠영으로 수영장 중앙까지 갔다가 동생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엉아한테 와, 울애기-.”
“응아아-! 따이-!”
정원이는 겁도 없다.
다이빙이라고 외치고는 겁도 없이 태초의 내추럴 바디로 물에 뛰어들었다.
그만큼 형을 믿는다는 뜻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