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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218화 (218/338)

< 사점死點 (6) >

역시 라면은 유익한 간식이다.

칠흑 같은 어둠을 헤매는 의식을 또렷하게 만들잖아.

‘두구 엘릴. 그놈 이름이야.’

유진이가 오빠 방을 찾아 벽을 더듬어 잠꼬대를 할 때 들었던 이름이다.

그래서 기억한다.

유진이가 중얼대는 모든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미묘하게 변하는 성조의 영향으로 두구 엘릴이 이름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감사히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아!”

건더기를 빠짐없이 먹고 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은 유진이가 배를 통통 두드렸다.

“오빠가 치울게. 정원이랑 여기 있어.”

“녜, 에헤헤-.”

식사를 마치고, 깨끗이 비워진 냄비와 그릇을 주방으로 옮겼다.

“흐음-. 이름 알았다고 달라질 건 없고······.”

정원이가 먹다 남긴 라면을 장군이에게 주며 중얼거렸다.

그냥, 말 그대로 이름만 알게 된 거다.

알래스카에 김상덕이라는 사람이 산다더라-, 하는 것처럼 아주 먼 남의 일이다.

진짜 소득이라면 힘을 비워내는 방법을 깨달은 거겠지.

‘무의식을 걷어내고 의식적으로 불어내면 되는 거야.’

라면을 식히려 후우- 입바람을 부는 것처럼 말이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몸이 시키는 대로 호흡하다 보니 방법을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비상시에 유진이가 뽑아가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대비하느라, 자면서도 그 방식으로 호흡하게끔 완전히 체화한 탓이 컸을 터였다.

그건 마치, 과거 좀비처럼 출근하는 사람들의 습성과 비슷하지 않을까. 피로가 쌓여 멍한 상태로 침대를 벗어나고, 씻고, 옷을 입고, 넥타이와 가방까지 챙기는데 스마트폰과, 사원증, 무엇 하나 빠뜨리는 것이 없는. 자신조차 기억 못 하는데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습성 말이다.

‘의식하면서 숨을 뱉으면 돼. 굳이 힘을 어딘가에 사용하지 않아도.’

처음 과거로 돌아왔던 아홉 살에도 몸속에 쌓인 찌든 때를 빼듯 비워냈었다. 그리고 새로이 채웠지.

이론은 준비되었다.

이제 실습에 옮기면 되는데 방법을 깨달았으니 급할 건 없다.

설거지를 마친 진혁은 잠시 하찮은 고민에 휩싸였다.

‘가마솥은 한잠 자고 일어나서 닦을까?’

배도 부르고, 마루에서 꾸벅꾸벅 조는 동생들도 신경 쓰였다.

개들이 있다지만 마루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플 테니까.

“아이고오-, 우리 정원이 졸려? 누나랑 말래에서 코잘까요?”

지금도 마루에서는 애늙은이 손유진이 동생을 어르고 있다.

저 역시 식곤증 때문에 상체를 앞뒤로 흔들며.

마루를 ‘말래’라고 부르는 걸 보면 유진이는 사투리에도 충분한 자질을 갖춘 듯하다.

***

카아아-.

라면을 해치우고 찬밥까지 말아 배를 불린 세 용사는 마루에 퍼질러져 낮잠을 즐겼다. 유진이는 오빠의 오른팔을, 정원이는 형의 왼팔을 차지했다.

행운이는 유진이가 잠든 틈을 타 벌레가 많은 퇴비장을 뒤적이러 날아갔다. 아무리 작은 뱁새라도 먹이활동을 해야 생존할 수 있으니.

벽걸이 선풍기가 선사하는 미풍에 제비 새끼들 방정과 매미 소리가 자장가로 녹아들었다.

“어이그-, 이 녀석들. 잘하는 짓이다.”

발소리도 없이 나타난 한유영이 진심 어린 칭찬을 늘어놓았다.

점심때가 지나도 오지 않기에 찾아 나선 것인데, 개들이 흙집 마당 경비를 서고 있어 아이들을 찾기가 수월했다. 경비라기보다는 개들도 흙바닥 그늘에 널브러진 것이었지만 찾았으면 된 거지.

한유영은 나란히 누워 세상모르고 잠든 아이들의 입가를 엄지로 문질러 닦았다. 라면 국물이 말라붙어 꼴이 참으로 아름다운 지경이었다.

“우리 장군이가 내 새끼들 지키느라 고생이 많네.”

주둥이에서 라면 냄새를 풍기는 개들도 쓰다듬어 치하했다.

부엌으로 들어간 후에는, 가마솥 안에 남은 끊어진 라면 가락과 스프 건더기, 약간의 국물을 보고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엄마 몰래 숨어서 먹느라 그런 거야?”

다시 마당에 나서서, 세 아이를 보았다.

한유영의 행복이 거기에 누워 단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산 증거, 앞으로 남길 역사.’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만 누구나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름 따위 남겨서 얻을 게 무엇인가. 어차피 스러질 생명이라면, 이름에 연연하느니 후손을 정성껏 보살펴 세상에 단단히 서도록 돕는 것이 어미의 업이라 생각했다.

‘예쁘기도 하지.’

곧 성인이 될 맏이와, 아직 말도 익히지 못한 막내. 그 가운데 어디쯤에 적절히 자리 잡은 딸. 엄마 고생할까 봐 약속이라도 한 듯 긴 세월을 사이에 두고 태어난 아이들.

훗날 죽음과 대면하기 직전까지 의지가 되고 살아있는 보람을 안겨줄 생명들이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엄마가 코를 실룩거렸다.

“계속 건강하고 착하게 살자. 알았지, 내 새끼들?”

라면 후폭풍으로 퉁퉁 부은 아이들의 뺨을 한 차례씩 매만졌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비슷하게 생긴 녀석들이지만, 팅팅 부어서인지 오늘따라 그놈이 그놈 같고 사이즈만 다르다.

홑이불을 덮어주고 발길을 돌렸다.

선풍기 틀고 자면 위험하다던데 괜찮으려나.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

다시 살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시골의 여름이다.

아무리 기온이 높아도 습하지 않다면 그늘에 머무는 것만으로 충분히 쾌적하게 보낼 수 있다. 과거에는 너무 옛일이었고, 도시에 거주하다 보니 몰랐던 사실이다.

“아이구-, 우리 애기. 쉬 한 번 뽀지게 했네-.”

먼저 깬 진혁은 퉁퉁 불은 정원이 기저귀부터 교체했다.

유진이와 정원이는 낮잠을 어찌나 달달하게 자는지 고양이처럼 몸을 늘여 기지개를 켜면서도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저귀를 둘둘 말아 한쪽에 치워두고 다시 주방으로.

아궁이 앞 턱에 걸터앉았다.

후우우우우-.

숨을 빼면 힘이 빠져 나간다.

마실 때는 그저 뇌에 산소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만, 평범한 폐호흡 동물들처럼 가볍게 들이쉬었다.

‘느껴진다.’

보이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의식 너머 또 다른 의식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자연에서 얻은 힘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아마 조일헌 부친의 에로맨스 뒷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갔을 때였을 거다.

거푸 막걸리를 들이켜는 천길룡이 숨을 이렇게 뱉었다.

푸우우우우- 하고.

그때는 이야기의 결말에 집중하느라 노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넋두리처럼 뱉던 말이 이제야 와닿았다.

- “너무 마시면 내가 아닌 게 되는 겨.”

뭐, 술을 두고 했던 말일 수도 있지만 세상 이치라는 것이 그렇지 않던가.

거스름 없는 진리는 어느 구석에 끼워도 들어맞는 법이다. 물처럼, 공기처럼 아무 곳에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가, 기울어져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중력과 기압차에 의해 다시 움직인다.

푸우우우우-.

따다다다닥-.

내뱉은 입김이 닿자, 장작이 다 타버린 아궁이 속, 재에 깔려 웅크렸던 불씨가 화려하게 살아나 아궁이 밖으로 넘실댔다. 그저 이적이라는 말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 현상. 불쏘시개조차 없는데 타오르는 불길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위험하다. 장소를 옮겨야겠어.’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는데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면 집을 홀랑 태울 듯했다.

은밀한 짓을 하기에 좋은 곳이 있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설화에도 나온다.

비밀은 대나무숲에 토해내라고.

우선 동생들부터 집으로 옮기고.

***

옛날에는 경성부라 불렸다.

바뀐 것은 이름뿐이 아님에도, 반세기를 훌쩍 넘겨 서울을 찾은 천길룡은 그다지 놀라지 않는 듯했다.

선글라스를 반쯤 내리고는 눈을 치켜떴다.

자존심상, 차마 목을 뒤로 꺾어 올려다보지 못했다.

“티리비서 간간히 본 건물이구먼.”

“직접 보니 어떠십니까?”

“삭막하오. 저것들이 다- 감옥이 아니면 뭐란 말이오?”

자랑스레 물었던 유명선의 얼굴을 어색한 미소가 급습했다. 천길룡이 어떤 위인인지 잠시 잊은 자의 낭패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차가 보행인구 많은 곳에 접어들며 천길룡의 관심사는 거리의 사람들로 이동했다.

“처자들 차림새는 참으로 좋소. 허어-, 내가 육십 년만 젊었어도······.”

유명선도, 운전하던 SSS 요원도 입술을 안으로 포갰다.

참아야 한다. 웃으면 핀잔이 날아들지 모른다.

“그래도 옷차림은 단정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방예의지국인데 말입니다.”

“아, 이 양반아 동방예의지국은 개뿔이-.”

시골에서 함께 지낼 때처럼 여상하게 말하려던 천길룡은 운전석과 조수석의 인물들을 곁눈질하고는 볼륨을 낮췄다. 유명선의 체면이라는 것도 있으니.

“그게 다 저 근본 없는 황사놈들이 우리를 낮잡으려 남긴 글귀 하나에서 시작된 말이오. 이제는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을 이겨 먹는 일에 써먹는 게지.”

“호오-. 자세히 말씀 좀 해주십시오.”

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려나?

유명선이 천길룡을 향해 몸을 틀었다.

“이름이란 바람을 담고 있지. 오래 살아라, 부자가 되어라 여러 가지 뜻을 갖는단 말이외다.”

“예, 바람을 담아 짓는 게 보통이지요.”

“그놈들이 우리 조상들을 좋게 볼 리가 만무하거늘, 동쪽에 사는 너희 오랑캐는 우리에게 예를 취하도록 하라-. 이런 뜻에서 우리에게 이름을 붙였다는 게 맞지 않겠소?”

듣기에 궤변이었다.

하나 예전처럼 두뇌 회전이 빠른 것도 아니고, 사학에 깊이도 없는 유명선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엑스 세대니 뭐니 하지만 결국 사람인 것을, 늙은이들이 보기에 도통 모르겠다는 이유로 미지수로 정의해서는 안 되는 게요. 저들 입장에서는 저게 자연스러운 일인데 말이오.”

운전석 요원의 고개가 눈에 띄도록 끄덕여졌다.

“이름이라는 게 그렇더이다. 멸칭이라 하지. 욕하고 싶은 놈에게는 별명이랍시고 더러운 걸 가져다 붙이고, 어여쁜 놈은 그럴듯한 호칭을 붙여 포장을 한단 말이오.”

정지신호에 멈추었던 차가 움직이고 시작하고, 천길룡이 새로 눈에 들어온 건물을 가리켰다.

“저놈들이 그런 짓을 잘하지. 개망나니 같은 놈들에게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서 사회적으로 써먹지 않더냔 말이야. 무슨 현상이니, 무슨 단체니 하면서 말이오.”

유명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건성으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 선배님은 그럴듯하면서도 그럴듯하지 않은 말을 참 재미나게 늘어놓는 재주가 있지 않나.

“저기 좀 보시오.”

천길룡이 한 줄로 선 시민들을 가리켰다.

“저기에 혼돈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뭐 사재기라도 하려는 사람들로 보지 않겠소? 그리고 저쪽에-, 저 뭐 하는 짓들인지는 몰라도 사진 한 장 박아서 질서라 명명하면 모르는 이의 눈에는 저게 곧 질서로 보인단 말이오.”

천길룡이 가리킨 곳은 할인행사를 벌이는 매장이었는데, 하나라도 더 집으려는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뒤엉킨 채 팔을 뻗고 있었다.

“허허-, 오늘 말씀은 조금 어렵습니다.”

“함께 벗하여 늙어가는 처지에, 다 아시는 이야기일 텐데 겸양하실 이유가 없소. 오호라, 어려울 수도 있겠구랴. 우리 유 회장님이야, 사위에게 세상을 물려주고 시골 애송이들에게 등을 내어주는 분이시니 그런 버릇이 없을 테니.”

“그래도 어렴풋이 이해는 합니다.”

“암, 암. 알아듣지 못하면 멍청이가 되는 게요. 저 운전하는 냥반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소.”

운전대를 잡은 SSS 요원은 감히 룸미러를 힐끗거리지도 못하고 상체를 곧게 세웠다.

“말로써 간단히 뭔가를 단정하는 건 좋지 않다는 뜻도 되겠군요.”

“그렇지, 그렇지. 이름 붙이는 순간 거기에 갇히는 거여-. 다른 곳을 보지 못하는 게지.”

“하기야, 저것도 다 한때 아니겠습니까?”

“당연한 말씀 아니겠소. 굳이 늙은이들 틀에 가둘 필요가 없는 게요.”

“예. 저들이 규칙이 되는 세상이 곧 오겠지요.”

“내 말이. 우리가 가고, 그들도 또 늙고. 그렇게 한 세대가 흘러가는 게지. 그래서 메뚜기도 유월이 한철이라 하는 것 아니겠소?”

“좋은 변화가 올까요?”

“변화에 좋고 나쁜 것이 어디 있겠소. 세상을 놀이터로 보는 유 회장이야 바라는 변화가 있겠으나,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대다수는 변화가 앞문으로 오든, 뒷문으로 오든 무슨 상관이겠느냐 말이오.”

“변화란 참으로 느린 것 같습니다.”

“당연한 게지. 사람은 갑자기 죽지 않고 서서히 늙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니겠소?”

“허허허-. 우리가 죽어야 변화가 온다는 말씀 같습니다.”

“그렇지. 죽음이 곧 변화지.”

타버린 잿더미를 뚫고 싹을 틔우는 나무처럼.

진지한 대화를 나눈 것도 잠시, 천길룡의 눈동자가 허망하게 굴렀다.

에잉, 좋은 구경 다 지나갔네. 세단이 인적 드문 거리에 들어서자 입맛을 다셨다. 그놈의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화두에서 시작된 문답 때문에 젊은 처자들을 오롯이 눈에 담지 못했다.

“허허허-! 선배님께서는 아직 청춘이신가 봅니다.”

“청춘은 무슨. 임금님 좆이 당나귀 좆이외다-.”

쩝!

천길룡이 다시 한번 강하게 입맛을 다셨다.

으허허허허허!

차가 들썩일까 염려될 정도로 유명선이 파안대소했고, 운전하던 SSS 요원도, 조수석의 권제학도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서울 구경은 이쯤 하는 게 어떻소? 차에 오래 앉았더니 산수 바람이 그립구먼. 기분도 요상한 것이-.”

“어찌 그러십니까?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 그런 거 아녀어-.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 그러오.

에어컨을 폭풍처럼 가동 중인 차 안인데, 천길룡의 구레나룻에 한 줄기 땀이 흘렀다.

***

쏴아아아아-!

폭풍.

그래, 대개 난폭하고 세차게 바람을 폭풍이라 부른다.

바람도, 구름도 없는 화창한 날씨, 천길룡의 대나무숲에 폭풍이 몰아쳤다.

아마 천길룡이 집에 있었다면, 살려달라는 영靈들의 외침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길룡은 여기에 없다.

가부좌를 튼 청소년과 발바리 한 마리뿐.

흐읍-, 푸우우우우-!

폭풍의 중앙에서, 매섭게 눈을 뜬 진혁이 밀도 높은 숨을 토해냈다.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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