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운 (9) >
***
회사원에게만 월요병이 있는 게 아니다.
과거에는 늘 학교와 기숙사에서 책만 파서, 집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몰랐는데, 집에서 통학을 하니 고등학생에게도 월요병이 있었다.
진혁으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고 늙는 건지, 젊어지는 건지. 왜 이리 졸리냐.’
버스에서 내려 터덜터덜 걸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최미경이 처질까, 속도를 맞추며.
최미경 얘는 집이 코앞인데도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좀비처럼 걷는다.
“으아아암-. 5일만 더 학교 가면 일요일이다.”
월요일부터 일요일을 바라보며 희망을 품다니, 최미경은 언제 봐도 지나치게 낙천적인 생물이다.
“야, 진혁아. 근데 일요일보다 토요일이 더 좋지 않냐? 일찍 끝나고 야자도 없잖아.”
그건 진혁도 인정하는 바였다.
토요일에는 유진이와 바다에 갈 수 있고, 정원이를 목말 태워 뒷산에도 다닐 수 있으니까. 뭐, 삼촌들은 맥주 마시며 TV로 야구도 보고 내기도 하는 모양이던데 그깟 공놀이 뭐가 재밌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유진이랑 노는 게 훨씬 즐거운데.
“나는 있지-, 그래서 토요일이 제일 좋아. 일요일은 아침부터 아쉽잖아.”
난 일요일 좋던데.
진혁은 친구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 아침에 엄마랑 아빠한테 카네이션 달아드리고 왔는데 이런 건 뭐하러 하냐고 하시면서도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우리 오빠는 그런 거 할 때마다 얼굴이 시뻘게지고 그랬거든 큭큭큭-. 덩치는 산만 해가지고.”
그래서 딸이 좋다고 하나 보다.
‘그 형도 부끄러워서 그랬겠지.’
진혁은 최태양의 심정을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도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런 것도 챙기는 걸 보면 섬세한 사람이다. 그런 오빠라서 최미경이 오빠 바라기가 된 게 아닐까.
진혁도 돌아온 후 한 번도 거르지 않은 행사다. 부끄럽지만 건강히 살아계신 게 어디냐며 매년 용기를 내어 꽃을 달아드리거나 꽃바구니를 드렸는데, 부모님은 멋쩍어하면서도 그렇게 행복해하실 수가 없었다.
이제 동생도 컸으니 올해부터는 유진이가 대표로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애교 많은 딸이 더 낫지 않겠나 하는 판단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 “단결!”
까불이 유진이는 대단한 임무를 부여받은 용사처럼 오빠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경례는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야, 부매니저. 내일 아침에 보자.”
“쉬어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버티던 진혁은 겨우 입을 떼며 친구에게 손을 흔들었다.
최미경네 마당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할 때였다.
헤헤헥-. 어둠을 가르는 축축한 개소리.
저런 소리를 낼 생물은 단 하나뿐이다.
좁은 밭둑길을 따라 발바리가 마중나오고 있었다.
“짜식, 오늘은 뭐하다 늦었대? 너 요즘 자주 늦는다?”
장군이는 마중 나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늘 버스 길까지 나와 있던 녀석이 이제야 나왔잖아.
어디 아픈 게 아닐까, 유진이를 시켜 살펴보게 했지만 장군이는 건강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았는데 노환 때문에 반응이 늦는 건 아닐까, 수의사 박부로에게도 보여줬다. 그런데 박부로는 장군이를 볼 때마다 같은 반응을 보인다.
- “허이구-, 얘는 걍 사잔디? 29년 경력 동안 이렇게 건강한 똥개는 뭇봤어-. 이 윤기 나는 갈기털 좀 봐라. 나보다 오래 살 겨어-.”
장군이가 아무리 강한들 환갑도 안 된 박부로보다 오래 살 수야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바람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기에, 진혁은 저무는 생명이 더 서글프다. 그래서 장군이의 작은 변화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누가 뭐래도 가장 소중한 친구니까.
장군이의 양볼을 우스꽝스럽게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너, 인마. 요즘 왜 변했어? 어디 아픈 것도 아니라며?”
월-!
“앞으로 잘해. 걱정하게 만들지 말라고.”
월-!
대화도 통하지 않는데 길게 말해서 무엇하랴.
장군이도 개견적인 볼일이 있었겠지. 뽀미와 놀다가 집에 늦게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당부를 덧붙였다.
“어디 아프면 깨갱하란 말이야.”
그때였다.
헤헤헥-.
“욱! 비린내!”
진혁이 코를 쥐고 물러섰다.
헤헤헷-.
“아놩- 이새낑-.”
천마 시켜서 물고기 잡아먹느라 늦는 거였구먼!
낮에는 어른들이 뭐라고 하니까 어두울 때 상습적으로 수로의 물고기를 꺼내 먹는 모양이다.
장군이의 소행이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그려졌다.
“잘하는 짓이다-.”
헤헤헷-.
장군이가 모처럼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렸다.
기분이 극도로 좋을 때만 하는 행동이다.
칭찬 아녀 인마.
***
“다녀왔습니다.”
“어서와-.”
“오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응아-, 애아빠 바부우-.”
소파에 앉아 있던 부모님도, 부화기 앞에 엎드려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던 유진이도, 엄마 앞에서 짝짜꿍을 하던 정원이도 진혁을 반겼다.
진혁은 저도 모르게 빙구처럼 웃었다.
‘월요병이 사라지는구나.’
늘 보는 광경이지만, 저를 보며 웃는 가족이라니. 이 얼마나 달콤한 자양 강장제인가.
“여기 앉아 봐. 오늘 유진이가 편지를 써 왔는데 너 오면 개봉하려고 아직 안 뜯었어.”
남편과 큰아들이 집에 오면 함께 열어볼 생각으로 기다린 엄마의 인내심도 참 대단하다. 저 손바닥만 한 핑크색 종이봉투를 들고 한나절을 서성이셨겠지.
봉투를 개봉한 한유영이 낭랑한 목소리로 편지를 낭독했다.
「엄마 아빠 귀하께.
어동학교 1학년 1반 18번 손유진
엄마 아빠 안녕하세요. 저는 어동학교 1학년 1반 18번 반장 손유진입니다.
별로 할 말은 없지만 선생님이 편지를 쓰라고 하셔서 이렇게 연필을 듭니다.
저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릅니다.
오빠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이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랑 아빠랑 결혼하면 좋아요?
안녕히 계세요.
손유진 올림.」
끅끅-.
아빠는 소리 내어 웃지도 못하고 주먹으로 거실 바닥을 퉁퉁- 치며 뒹굴었다.
엄마도 입술을 꾹 깨물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 모습이었다.
“에헤헤-. 왜 웃지요?”
착한 유진이는 쑥스러워하면서도 뭔가 서운한 기색이었다. 얼굴에 걸린 미소가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하다.
동생의 표정을 살핀 진혁이 가만히 유진이를 안아 위로했다.
‘너무하시네. 뭐가 우습다고 이렇게 웃는 거여?’
과거에도 회사에서, 현생에도 학교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았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데 눈물 콧물 쏟으며 웃는 사람들.
초딩 말장난과 일맥상통하는, 일명 아재 개그가 대표적이었다.
아이들 말장난은 귀엽기라도 하지.
도대체 어느 대목이 재미있다고 다 큰 어른들이 낄낄거리는 걸까. 진혁이 보기에는 지능 낮은 사람들의 못난 유머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래서 끝내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물론, 유진이 편지가 말장난이라거나, 부모님이 아재 개그에 반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유진이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부모님이 약간, 아주 약간 원망스러웠을 뿐.
눈물을 훔친 한유영이 유진이를 다독였다.
“하이고오-. 유진아 미안해. 엄마가 너무 웃었네. 오빠가 여덟 살 때 썼던 편지랑 너무 비슷해서 웃었어요.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고 하나 봐.”
으응?
유진이 뺨을 쥐고 어루만지던 진혁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아, 그래서 웃으신 건가? 오해할 뻔했네.
“아, 배 아프다. 아빠도 그래서 웃었어. 할 말은 없지만 쓰라고 해서 쓴다니 이게 편지에다 할 소리냐고. 진혁이랑 똑같네, 똑같아. 크크크큭-.”
아빠는 뒤집어진 개구리처럼 아예 주방 바닥에 누웠다.
헤에-.
진혁의 미소도 동생처럼 어색하게 변했다.
‘그런데 내가?’
몰라.
전혀 기억나지 않아.
네버.
***
쯔즈- 디딕-.
스승의 날 새벽, 2주간 거실에서 서식하던 손유진은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무슨 소리지요?’
잠이 덜 깬 탓에 눈이 떠지지 않았으나 귀는 쫑긋거리며 소리가 나는 곳을 향했다. 마침내 소리가 나는 곳을 찾은 손유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심 봉사 저리 가라 할 개안이었다.
“오오?”
파란.
마치 물결이 치듯, 미약한 진동이 비취색 수면에 퍼졌다.
분명 손유진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알 속의 생명에게도 파란이었다.
알껍데기를 부수기가 힘에 부치는지 머리로, 부리로, 두드리다 쉬다를 반복했다.
‘어쩌지? 너무 약하네요.’
그토록 열심히 뛰던 심장은 박력을 잃어갔고, 기지개를 켜던 몸은 알로 돌아가려는 듯 둥글게 웅크렸다. 목을 가누지 못하니 머리도 바닥을 향했다. 힘이 다한 것이다.
그때였다.
손유진의 어깨에 듬직한 손이 얹혔다.
“유진이가 도와줄래?”
차분하고 낮은 음성, 등교 준비를 마친 손유진의 오빠였다.
“그래도 돼요오?”
“유진이도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오빠가 도와준 거 기억한다며. 혼자 힘으로 나오기 힘들 때는 밖에서 도와도 되는 거야.”
저 새도 어미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지 않을까.
명확한 거절 의사를 밝혔다면 몰라도, 도움을 청할 힘조차 없는 존재는 도와도 되는 게 아닐까. 응급처치할 때처럼.
진혁은 그리 생각했다.
“그럼 행운이를 위해서-.”
손유진은 부화기 문을 열었다.
매일 알 굴리기를 할 때처럼 여전히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이다.
“이걸로 해봐.”
손유진은 오빠가 건넨 아이스바 막대기를 잡았다.
톡- 토독-.
혹시라도 새가 다칠까, 조심조심 두드렸다.
“잘 안 돼요오-.”
“힘주는 것보다 빼는 게 더 힘들어. 어떤 일이든 그래.”
일기를 쓸 때도 어려운 말, 멋있는 말보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쉬운 표현을 쓰도록 노력하라던 오빠였다. 그걸 두고 힘을 빼고 쓰는 거라 했었지.
오빠의 격려에, 심호흡한 손유진은 의지를 다지려 입술을 꽉 물었다.
톡- 톡- 톡-.
스케치처럼 행운이가 그려둔 균열을 따라 두드리기를 몇 차례.
끼- 끼이-.
조각난 알껍데기가 떨어지며 드디어 행운이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잘했어. 계속해.”
등 뒤에 한쪽 무릎을 꿇은 오빠는 동생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조용한 목소리로 격려를 이어갈 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등 뒤에 오빠가 있다.
손유진에게 이보다 더한 응원은 없을 터였다.
숨을 멈추고 다른 손도 부화기 안으로 넣었다.
“그래, 이제 손으로 벗겨내도 되겠다.”
오빠의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껍데기를 천천히 열어젖혔다.
거룩한 순간이다.
손유진의 심장이 거세게 뜀박질하고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직접 구하고, 생명으로 세상에 나오게 했으니. 어떤 감동적인 묘사가 있어 이 어린 마음을 대변할 수 있을까.
끼- 끼이- 까아아-.
반투명한 홍색의 몸체에 왕방울만 한 눈두덩. 마침내 알에서 온전히 탈출했으나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새가 입을 쩍 벌리고 힘겹게 울기 시작했다.
아기 새가 놀랄까, 손유진이 나직이 물었다. 새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였다.
“오빠, 이제 어쩌지요?”
“이거 먹여. 하루 치는 될 거야.”
손유진은 오빠가 건넨 것을 고분고분 받아들었다.
핀셋과 깡통에 든 실지렁이였다.
아, 오빠는 미리 준비해두고 있었구나.
“와-, 씹지도 않고 마구 삼켜요.”
“그러네.”
이빨이 없으니까 그렇다는 설명은 필요 없을 터였다.
유진이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
유진이는 지금 감동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거다.
“이십오 도 정도면 되려나?”
혼잣말을 중얼거린 오빠는 37도로 설정되어 있던 부화기 온도를 낮추고 책가방을 멨다.
“잘했어, 손유진.”
머리를 쓰다듬고 집을 나서는 오빠를 보며 손유진은 생각했다.
‘오빠한테는 편지를 안 썼네요.’
어버이날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어버이나 마찬가지인 오빠인데.
마침 스승의 날이니까 오늘 써야겠다.
오빠와는 자주 주고 받는 이메일을 활용하는 게 좋겠지!
“행운아, 많이 먹어.”
학교 다녀오면 오빠한테 편지를 쓰고, 벌레를 잡으러 다녀야겠다.
손유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
늘 같은 제목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이메일을 확인하던 진혁은 습관처럼 동생이 보낸 메일을 열었다.
「My dearest, 오빠」
말머리를 살핀 진혁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 들어찼다.
오, 처음부터 뭔가 색다르고 진심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잖아?
‘이건 뭐······.’
내용도 색달랐다.
평소에는 학교에서 뭘 먹었고, 날씨가 어땠고, 누구랑 누가 싸워서 말렸다는 내용이었는데 말이다.
「안녕하세요. 이 편지는 영국의 수도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년에 192번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7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해서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주셔야 합니다. 복사를 해도 좋습니다.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아, 유진아.
오빠에게 이래야 했니?
영국의 아무개는 이 편지를 보낸 후 며칠 뒤에 복권에 당첨되었고,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이 편지를 그냥 버리고 3일 후 암살되었다는 내용이 뒤를 이었다.
‘좋은 뜻으로 보냈겠지.’
그 어린 것이 뭘 알고 이런 만행을 저질렀으랴.
아무튼, 손진혁은 이런 미신 같은 편지에 혹할 만큼 녹록한 남자가 아니다.
‘이 편지를 보내면 7년간 행운이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3년간 불행할 것이다······.’
······ 전생의 손진혁이 녹록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지금도 보라지. 마음에 걸리는 글귀 때문에 진혁의 눈동자가 갈등에 휩싸이지 않았나.
지킬 것이 많은 사람,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은 갈바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법이다. 행운의 편지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어디 보자.
이메일을 보낼 만한 사람이 누가 있나.
우선은 마이 베스트뿌렌 최미경 양아치부터-.
토다다다-.
세인컴타자연습 1천 타를 상회하는 진혁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현란한 트리플 악셀을 땡기기 시작했다. 복사, 붙여넣기를 하면 그만이지만 직접 쓰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또 없지.
「이 편지는 영국의 수도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으흐흥, 이 양아치. 내가 보내는 행운서신을 받아랏!
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