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운 (8) >
***
학교를 마친 손유진은 버스에 앉아 안절부절못했다.
“반장, 왜 그려? 쉬 매려운 겨?”
“그런 거 아냐.”
집에 가서 행운이를 뒤집어줘야 한단 말이다.
제때 뒤집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5일 넘게 반복한 일인데도 도무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 “오빠, 행운이 안 뒤집으면 우즈캐 되지요?”
- “그건 나도 몰라.”
모른다는 말로 간단히 넘어가는 오빠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그리고 오빠가 모른다는 건, 어떤 무섭고 슬픈 일이 생겨도 대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손유진은 똑똑한 동생이라서 그런 고차원적인 사고도 가능하다.
“근디, 반장. 어버이날 편지 쓴 겨?”
“아, 맞다. 숙제도 있네.”
“뭐라고 쓰야 헌다니-. 걱정이여. 이 시상은 근심이 너무 많어-.”
그러게.
뭐라고 써야 할지 걱정이네.
아직 한글을 쓰지 못하는 친구들은 선생님이 대신 써준다고 했다.
선생님이 쓰면 그걸 보고 똑같이 베껴 쓰면 된다고.
문제는, 그러기 위해서는 편지 내용을 선생님께 미리 불러드려야 한다는 거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혼자 쓰는 게 낫다. 글을 쓸 줄 안다면 말이다.
“어버이날이 월요일이니까, 토요일날 학교에서 같이 써보자.”
“이이, 그려. 그게 좋겄어. 햐- 나는 연필만 잡으먼 머리가 아퍼서.”
아, 김호진은 그래서 아직 이름밖에 못쓰나 보다.
머리 아파서.
머리 나빠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내일이 어린이날인데도, 어린이들은 숙제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
손유진은 버스에서 내리기 무섭게 집으로 내달렸다.
“학교에 안녕히 다녀왔습니다아-!”
신발이 휙휙- 날고 가방이 내던져졌다.
쿠웅-!
슬라이딩할 태세로 부화기로 달려간 손유진은 무릎으로 착지했다.
“오오-.”
손유진의 눈망울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볼수록 신비하고 영롱한 빛을 자랑하는 행운이 때문이다.
다행히 행운이는 무사했다.
손유진의 눈에는 팥 알갱이보다 작은 심장이 벌떡벌떡 뛰는 게 보였다.
“헤헤-. 우리 행운이 답답하지? 내가 뒤집어줄게.”
“엄마가 점심 먹고 한 번 굴렸는데?”
“그래도 또 할래요. 환기시켜서 음- 그 머지? 신선한 공기도 주라고 했어요오-.”
“오호호-, 그래.”
한유영은 눈이 사라지도록 웃었다.
어차피 이 집에서 손유진의 고집은 진혁 외의 누구도 당하지 못한다.
조심스럽게 부화기 문을 열며 손유진은 곰곰 생각했다.
많이 굴릴수록 건강하지 않을까? 곰짐에서 운동하는 삼촌들 보니 몸을 자꾸 뒤집더라고.
알을 뒤집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화기 안에 손을 넣으면 따뜻한 기운이 손을 타고, 팔을 따라 얼굴까지 올라오는데, 그 온기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처럼 포근해서 기분을 행복하게 만든다.
행운이를 뒤집었으니 이제 다른 일과를 소화할 차례다.
“정원이랑 산책 다녀올게요-.”
“차 조심하고, 돌부리 조심해요. 엄마도 금방 따라갈게.”
정원이는 힘이 넘치는 남자 아기라서 엄마 혼자 보살피기 힘들다고 하셨다.
그래서 착한 손유진이 매일 동생 손을 잡고 집 근처 나들이를 다닌다.
아빠와 오빠가 손유진에게 그렇게 했듯이.
“정원아, 이건 망초야. 데쳐서 나물로 무쳐 먹으면 맛있어.”
“마또-.”
“어허- 그냥 먹으면 안 돼요. 날로 먹으면 써요오-.”
“떠어-.”
어제도, 그제도 가르친 내용이지만 반복해서 가르쳤다.
손유진도 그렇게 세상을 배웠으니까.
“마또 떠어-.”
“옳지-.”
누나와 있을 때는 제법 말문이 트이는 정원이였다.
오빠의 심정을 알 것 같다.
반짝이는 눈으로 누나를 뚫어져라 보는 아기를 보고 있자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 된 것 같고,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 된 듯하다.
“망초는 여름 되면 하얗고 노란 꽃이 피는데, 달걀처럼 생겨서 달걀꽃이라고 불러요.”
“꼬오-. 다가꼬오-.”
매일 같은 말을 하는데도 정원이는 지겹지도 않은지 열심히 따라 했다. 누나가 하는 말을 흉내 내며 입에 말이 조금씩 배는 것이겠지.
손유진이 오빠를 따라 하며 말을 배운 것처럼.
부우웅-.
버스 소리가 들리면 정원이는 그 방향을 가리킨다. 버스가 나타날 때마다 한결같이 하는 행동이었다.
“응아, 응아아-.”
“오빠는 아직 올 시간 안 됐어. 어두워져야 와요오-.”
“으응으응-. 으빠 으응-. 응아-.”
정원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래, 정원이한테는 오빠가 아니고 형아지요?”
그런데 행운이한테 나는 누나인가, 형인가?
동생을 이끄느라 의젓하던 손유진이 엉뚱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오래 간직할 의문은 아니었다.
오빠가 그랬다.
당장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오래 고민하지 말라고.
지금은 정원이에게 집중할 때다.
“그건 냉이-.”
“내이-.”
“저건 초승달-. 와아-. 낮에 나온 초승달이다.”
“토드따아-. 오아-.”
“아? 달이 아니라 구름이네.”
“구움-.”
“정원아, 저기 봐봐요. 조각구름이야.”
“조가꾸움-.”
“비행기 날아간다.”
“비유웅-. 응아- 비유웅-.”
정원이는 비행기라는 말을 들으면 형부터 떠올린다. 그만큼 형이 비행기를 자주 태워줬으니 당연한 일일 테지.
“이건 클로버-.”
“크르르-.”
동생이 걷는 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클로버가 퍼져 있는 언덕에 앉았다. 양지바른 곳이라 다른 곳보다 색이 진한 풀밭이다.
손유진이 지금보다 어릴 때, 홍수정과 여기서 자주 놀았다. 오빠라는 든든한 우산의 보호 아래.
오빠는 클로버꽃으로 홍수정과 손유진에게 반지를 만들어 끼워주고, 왕관을 씌워줬다.
모든 순간이 특별하지만 유독 행복하게 기억되는 장면이 있다. 손유진에게는 푹신하고 시원한 클로버밭에 앉아 오빠, 언니와 놀던 순간이 그랬다. 막내라는 이유로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으니 그럴 수밖에.
아, 옛날이여-.
“크르르-, 크르르-.”
정원이는 부드러운 클로버 감촉이 좋은지 손으로 매만졌다. 억세게 쥐어 한 움큼씩 뜯어내기도 했는데, 손유진은 말리지 않았다. 저도 그렇게 감촉을 느끼고 손을 움직이며 조금씩 자랐으니.
아이들 간식으로 삶은 고구마와 동치미를 챙기느라 뒤늦게 따라온 엄마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유진아-, 엄마랑 네잎클로버 찾아볼까?”
네잎클로버라······.
행운의 상징으로 통한다고 그랬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친구들은 쉬는 시간이면 네잎클로버를 찾겠다며 운동장 외곽에 쪼그려 앉아 더듬곤 한다.
“유진이는 왜 안 찾아? 엄마가 찾아줄까?”
정원이와 함께 풀밭을 뒤적이던 엄마가 물었다. 시선은 클로버에 고정한 채였다.
손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오빠가 그랬다.
오빠와 손유진은 더이상 행운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고.
더 바라는 건 과욕이며, 과욕은 화를 부른다고.
이미 차고 넘치는데 더 가지려 하면 탈이 난다고.
배불리 먹고 더 먹다가 배탈이 나는 것처럼.
손유진을 보면 늘 웃는 오빠였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곤 했다.
무슨 말인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어쩌다가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배탈 나면 기분 안 좋아.’
배탈은 손유진도 쉽게 고치지 못한다.
***
주니어대회 출전 문제는 진혁의 뜻대로 일단락되었다.
부모님은 아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겠느냐며 말을 아꼈다. 유세라가 진혁의 의견에 말을 보태지 않았기에 출전을 강요하는 사람도, 아쉬워하는 사람도 없었다.
“야, 아깝다. 비행기 타는 거잖아. 싱가폴? 싱가포르? 거기서 한다며.”
최미경만 빼고.
최미경 여고생은 갑자기 부지런해져서 진혁과 함께 첫차로 등교를 하는 중이다. 토요일도 예외는 없었다.
그 속셈이 훤히 보이는 짓이지만 그러려니 해야지 뭐.
“기말고사 기간이랑 훈련 기간이 겹츠-.”
“야, 근데 승훈이는 안 피곤할까?”
이 자식이 애초에 관심도 없으면서 물어본 거였구나.
자연스럽게 이승훈으로 화제를 돌리기 위한 떡밥이었다.
“피곤하겠지-.”
“우리 여름방학 때 승훈이네 놀러 가자.”
“나는 동생들이랑-.”
“같이 가자아-. 거기 버스 타고 혼자 가기는 너무 멀더라. 차부까지 나가서 완행으로 갈아타야 한대. 연약한 여자 혼자 위험하지 않겠냐?”
진혁은 최대한 불온하지 않은 시선으로 최미경을 훑었다.
‘연약해 보이기는 하네.’
성깔이 드러- 에이, 아니다.
아무튼, 쥐면 부러질 듯한 친구다.
“봐서······.”
“오예! 같이 가기로 한 거다?”
봐서 결정한다고······.
앵알앵알-.
집에서는 유진이에게, 버스에서는 최미경 여고생에게 고막 테러를 당하는 삶.
‘다시 자전거 타고 다닐까?’
어제는 어린이날이라고 동생들과 놀아주는 최미경이 고마웠는데, 이제 보니 아쉬운 소리 하려고 그런 거였나 봐.
*
학교에 도착하면 최미경은 씨름부 훈련장을 찾는다.
교육실의 책상과 의자를 닦고 간단히 정리를 하는 거다.
사실, 씨름부 훈련장은 관리가 잘 되어 최미경이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아이고오-, 허리야. 이 가녀린 몸으로 내가 고생이 많다.”
바퀴 달린 의자를 밀어 넣으며 최미경이 엄살을 부렸다.
최미경이 편한 일을 최대한 힘겹게 처리할 때, 진혁은 넉가래로 모래를 밀어 모래판을 편평하게 골랐다.
‘나까지 이게 뭔 고생이냐.’
친구가 혼자 고생할까 봐 거들기로 한 것인데, 어지간한 일은 진혁이 거의 다 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최미경이 팔 걷고 나선 덕분에 씨름부 선수들은 훈련장 관리에 더욱 신경을 썼다. 합숙소 청소도 더 말끔하게 하는 중이고.
“매니저님 안녕-.”
“헤헤-, 선배 안녕하세요.”
“미경아, 이리 줘. 내가 할게.”
“야, 됐어. 선수는 훈련에 집중하라고오-.”
동급생 선수가 안절부절못해도 최미경은 완강했다.
빗자루를 들고 훈련장을 한 바퀴 도는 게 최미경의 유일한 운동인데 빼앗길 수 없지. 갈대 이삭을 묶어 만든 갈목비를 이용해 모래판 밖으로 밀려난 모래를 다시 안으로 쓸어 넣으며, 최미경은 연신 미소 공장을 가동했다.
‘가증스럽군.’
진혁은 최미경의 변신에 혀를 내둘렀다.
‘짜식들이, 힘든 일은 내가 다 하는데 나한테는 관심도 없어!’
진혁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훈련을 돕는 게 싫어서는 아니다.
‘왜 내가 부매니저냐.’
유사 이래 최미경보다 낮은 직책을 맡아본 일이 없거늘.
도대체 고등학교 씨름부에 매니저가 웬 말인가 싶지만, 활기를 불어넣는 최미경 덕분에 선수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최태양의 동생이라는 사실 때문에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진혁이 대회 출전을 위해 학교를 비웠을 때의 일이다.
최미경은 씨름부 성부현 감독을 찾아가 매니저가 있어야 선수들이 훈련에 집중할 수 있다며, 씨름을 많이 알고 애착을 가진 매니저가 필수라고 열변을 토했다.
틈틈이 일본 만화깨나 탐독한 성부현은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가 최미경의 매니저 입단을 승인했다. 부재중인 손진혁이라는 부매니저도 함께.
왼팔에 노란 완장을 차고 세탁물을 뒤적이던 최미경이 목을 길게 뽑았다.
“야! 이승훈, 신우성! 니들 빤쓰 얻다 뒀냐?”
“아, 아녀. 빤쓰는 우덜이 직접 빨으야지. 세탁기두 있는디-.”
“그 빤쓰 말고 인마! 씨름 빤쓰! 빤쓰에 이름 써있는데 니들 이름만 없잖아.”
“아, 맞다. 깜빡허구 안 끄내놨네이-.”
“쯧쯔-. 뽕알 떼놓고 장가갈 놈 저거.”
매니저가 아니라 할머니 모시고 사는 거 같네이-. 웅얼대는 이승훈 뒤로, 선배 선수들이 킥킥거리며 지나갔다.
학기 첫날부터 최미경에게 된통 당한 신우성은 최미경이 무슨 말을 하든 토를 달지 않았지만, 이승훈은 괜히 한마디 보탰다가 구박을 당했다.
“세탁기루 빨 테니께 걍 두라먼?”
“야, 인마. 명색이 매니저인데 세탁기 버튼이라도 눌러야 할 거 아녀어-! 짜식이 툭하면 누나한테 까닭 없는 소리하고 자빠졌어.”
“까닭 웁는 소리허구 자뻐지는 게 모래판에 자뻐지는 거보담은 훨 낫지······.”
이승훈은 그냥 최미경과 몇 마디라도 더 나누려고 저러는 거다.
아마, 신우성만 빼고 모두가 아는 사실일 것이다.
“이승훈. 연애는 그쯤하고 와서 몸 풀어라.”
“예-, 주장. 가유-.”
“열심히 해 인마. 부상당하지 않으려면 스트레칭을 잘해야 해.”
멀어지는 이승훈의 뒤통수에 잔소리를 날린 최미경이 세탁 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책가방을 집어 들고 진짜 목적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후아-. 이제 들어가서 공부해야지.”
모래판을 빙 둘러선 선수들이 넓게 벌린 다리를 구부려 고관절부터 스트레칭을 시작하면 최미경은 교육실로 들어가 자습을 한다.
학교에서 가장 조용하고 쾌적한 곳이 씨름부 시청각 교육실이다. 대형 TV로 교육 방송도 들을 수 있어서 최미경이 애용 중이었다.
최태양의 동생이며, 손진혁의 소꿉친구에 씨름부 매니저라는 권력.
최미경의 인생은 너무나 쉽게, 잘 풀려나갔다.
‘영악한 자식.’
교육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본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눈을 슬며시 감은 채였다.
매니저는 무슨 매니저냐.
저건 차라리 독서실 총무보다 땡보직 아닌가.
진혁은 스트레칭을 마친 씨름부 선수들을 이끌고 함께 운동장으로 나섰다.
최미경이 제멋대로 부매니저로 임명한 것도 모자라, 임무까지 부여한 탓이다.
「매니저: 총괄.
부매니저: 훈련장 관리, 선수 훈련 보조, 선수 컨디션 점검.」
무슨 업무 R&R이 이따위냐.
진혁은 따져 물으려다가 참았다.
어차피 운동 시간이 겹치는 데다 진혁 개인의 프로그램 소화 시간은 길지 않고, 모두 낯익은 선수들이라 서먹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짜증이 나는 건 나는 거다.
‘내가 최미경 꼬붕이라니······.’
2회차는 나름 주도적으로 살았는데 갑자기 최미경에게 머리끄덩이를 잡혔으니.
‘싫다고 하면 속 좁은 놈이라고 흉볼 거 아니냐고.’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2열로 맞춰선 씨름부 선수들을 보며 훈련 시작을 알렸다. 표정이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가볍게 열 바퀴 뜁니다.’
“시부레!”
······ 말과 생각이 바뀌어 나왔다.
차차착-!
언제 시시덕댔냐는 듯, 입을 꾹 닫은 씨름부 선수들이 일제히 발을 모으며 차려 자세를 취했다.
“아, 아니. 저기요-, 그게 아니라······.”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바짝 얼어붙은 선수들을 보니 이미 늦은 듯했다.
와씨, 나만 쓰레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