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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208화 (208/338)

< 행운 (5) >

홍기준과 유세라의 지원을 등에 업었다는 사실 자체로 세상 누구도 받지 못한 특혜를 누리고 있다. 이미 세상이 색안경을 끼고 볼 텐데, 제 입으로 피해자라 칭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진혁은 여전히 호흡을 고르면서도 또박또박 말했다.

“이번에는 적당히, 시끄럽지 않을 정도의 잡음만 나는 게 좋겠어요. 선수들을 위한 일이라고는 해도, 알은 서서히 깨야죠.”

단단한 알을 갑자기 깨버리면 그 안에 움튼 세계도 죽어버릴 뿐이다.

소음과 공해에 노출되어 사라져버린다면, 그 세계 하나만 바라보던 꿈나무들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이겠나. 박지범이라든가, 공주 합숙 때 만난 녀석들처럼 운동만 아는 친구들 말이다.

연맹에 누가 있든, 무슨 일을 하든 알 바 아니다.

그들을 비난할 생각도,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다.

진혁 또한 범인의 하나로, 꽉 막힌 행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뿐.

‘의지가 없는 거겠지. 아니면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거나.’

턱을 쥔 민용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듯했기에.

“앞으로 많은 대회가 남았는데 이렇게 계속 부딪치고 반목하게 된다면 서로 피해만 입을 거예요.”

“그렇겠지. 연맹은 선수보다 구닥다리 규정을 중시한다는 욕을 먹을 테고······.”

SI스포츠는 국가를 무시한다는 비난을 사게 된다.

연맹에 대한 비난은 일부에서, 단발성에 그치고 말 것이다. 여론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러나 세인체육재단은 영원히 묻힐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비난의 화살이 세인그룹으로 번지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시끄러워지는 건 진혁도 원치 않았다.

그저, 제 요구가 받아들여지길 바랄 뿐.

“자유참가는 추진하지는 마시고 대회가 끝난 후에 액션만 취해주세요.”

“추진 안 하면?”

“이번 대회에 아예 참가하지 않아야 소문이 힘을 받을 테니까요.”

“그도 그렇네. 기자 몇에게만 슬쩍 흘리면 되겠지?”

후우우-.

길게 숨을 뱉어 호흡을 고른 진혁이 씨익 웃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역시 말이 잘 통하잖아.

과거에는 해외법인장을 거친 연륜 덕분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타고난 재능 같다. 잔머리가 없으니 모사로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참모 정도로 보는 게 적당하겠지.

‘연맹과 선수가 엇박자 행보를 보인다는 소문을 적당히 흘리고······.’

그 외에 다른 필요한 일이 있을까, 빠뜨린 퍼즐은 없을까 고민했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할 듯했다. 세상에 알려진다는 것만큼 강력한 무기도 없으니.

선수보다는 연맹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규정을 뜯어고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듯했다.

‘나야 뭐, 끝내 안 통하면 선수 안 하면 그만이고. 누군가는 득을 보겠지.’

세상에 들어가 인간으로서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 세상은 말 그대로 인간 세상일뿐, 작은 체육계로 국한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진혁과 유세라의 노림수가 일치한다는 점이 다행이랄까. 동반자끼리 뜻이 다르면 곤란하니까.

마침내 생각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아요.”

“오케이.”

진혁은 텅 빈 곰짐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민 대리님도 모르세요?”

“나도 SSS 내부 기밀은 모르니까.”

이 사람들이 다 어디에 불려 다니는지, 몇 달째 수시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잠시 돌아왔다 싶으면 하루 이틀 머물다가 다시 사라지고, 짧으면 3, 4일, 길 때는 일주일 넘게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래도 최소 인원은 남으니까 괜찮지 않니?”

“안전 때문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요.”

문석일도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에게 들은 대답은 훈련을 위해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는 말뿐이었다.

추측을 싫어하는 진혁으로서도 그들의 행보를 추측할 수밖에 없는 노릇.

아마도 홍기준에게 건넨 과거 사고를 막기 위해 움직이는 건 아닐까. 특별한 사건 사고 소식 없이 잠잠한 언론을 보면 나름대로 일리 있는 가정이었다.

가끔 삭도의 인원이 차출되는 걸 보면 뉴보스파처럼 홍기준이 은밀히 추진하는 일도 있을 테고.

아무튼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정든 SSS 삼촌들이 몇 달째 뜸하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제가 낙동강 오리알 된 기분이네요······.”

“나도 그래. 진남이 형이랑만 놀려니 내 말투도 이상해지는 것 같오.”

토요일을 맞아 이동호와 수영을 하다가 휴식을 취하던 유진이가 끼어들었다.

“저 그거 알아요. 오리알은 삶으면 맛있어요.”

“응. 그렇지.”

그건 그런데 이럴 땐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진혁이 이마를 긁을 때 유진이가 짝-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알이라고 하니까 생각났어요. 오빠한테 보여줄 거 있어요!”

아무래도 오늘 운동은 여기까지 해야 할 듯했다.

***

화창한 4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일찌감치 운동을 마친 진혁은 거실을 지켰다.

“응아, 응아-. 애아빠 바부우-부부붑-.”

투레질하며 잠투정하는 정원이를 안고서.

유진이가 꼼짝 말고 기다리랬거든.

점심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는 정원이는 소고기 죽으로 간식도 해결한 후에 기저귀를 묵직하게 만들었다.

진혁은 기저귀를 처리하고 아기를 물로 깨끗이 씻겼다.

정원이는 개운하면서도 노곤한지 형 품에 안겨 팔다리를 흐느적거렸다.

“자장- 자장-. 우리 애기-.”

상체를 좌우로 흔들며 두 돌이 되어가는 동생을 다독일 때, 유진이가 뭔가를 들고 나타났다.

“오빠, 이거예요.”

“흐음······.”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다용도실을 나선 유진이가 품에 안은 물체를 본 진혁의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옛날 시골 어머니들은 논밭으로 참을 나를 때 지푸라기나 수건을 말아 똬리를 만들어 머리에 얹고 다녔다. 어떤 이는 똬리를 ‘또애’라고도 불렀는데, 아무튼 지금 유진이가 가져온 수건이 그 똬리처럼 말려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유진아, 그거 어디서 났어?”

청록색? 비취색? 그런 푸른색을 닮은, 작은 알이었다.

모양과 크기가 대체로 메추리알과 비슷했다. 조금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어제 장군이랑, 홍시랑, 천마랑, 광마랑, 검마랑- 헥헥-.”

개가 많으니 일일이 이름을 대는 것도 힘겨운지 유진이가 장군이처럼 혀를 빼물었다.

“저수지 갔다가 만났어요.”

“그랬구나······.”

그래, 개들을 데리고 저수지에 갔다가 알을 만났구나.

“오빠, 있잖아요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똬리를 오빠 앞에 내려놓고, 그 앞에 앙증맞게 꿇어앉은 유진이가 어제의 모험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봄바람은 성인뿐 아니라 아이의 가슴에도 바람을 불어넣는다. 허파에 봄바람이 가득 들어차면 체력을 촉매로 이용하여 산화시키는 것이 인지상정. 손유진은 학교를 마치고 홀로 모험에 나섰다. 다섯 마리 개가 호위했으니 온전한 싱글 플레이로 보기에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버스 길 옆으로 널찍하게 조성된 코스모스 길을 따라 걸었다.

아빠에게 업혀, 오빠 손을 잡고 나들이 다니던 길이다.

“검마야-. 코스모스는 아직 애기예요. 가을이 되면 키도 이-만큼 커지고 꽃도 피어요.”

여린 코스모스 이파리에 코를 대고 벌름거리는 검마를 교육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빠가 명상을 하던 숲을 만나, 저수지로 향하는 숲길을 따라 내려갔다.

매일 구봉산에 오르는 오빠가 매일 달리기를 하는 길이다.

“으으으-. 쐐기 무서워.”

아직 4월인데, 초여름 전령인 털복숭이 친구들이 나뭇잎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 자주 다닌 길이라며 아는 체하려는 듯 앞장선 장군이를 따라 씩씩하게 걸었다.

“장군아, 오빠가 내년부터는 나도 구봉산 데려간대.”

헤헤헥-?

잠시 뒤돌아본 장군이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앞서 걸었다.

내리막이 끝나고 평지를 만나자 숲길도 끝나고 네모 반듯한 논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내기를 앞두고 편평하게 정비하고 물을 받은 논에는 하늘이 담겨 있었다. 마치 초대형 거울인 양.

“까아아-. 논에 구름이 많다! 구름이 움직여!”

손유진이 태어나기 전부터 논길을 지키는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멍멍이들과 말린 망둥어를 나눠먹었다. 손유진의 입맛엔 약간 비렸지만 모험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식량이다.

“구워 먹을걸 그랬낭? 찹찹”

저수지에 다다르니 물 냄새 머금은 바람이 앞머리를 어지럽게 흩었다.

“우와아-! 물 많다!”

작년 늦가을에 마지막으로 방문했었으니 벌써 두 개의 계절이 지났다.

추풍에 삭고, 물에 녹았던 수초와 갈대가 만개한 봄을 맞아 풀빛 생명을 뽐내고 있었다.

하늘과 물을 담았던 커다란 눈망울에 묘한 광경이 잡혔다.

“장군아, 저게 뭘까?”

헤헥?

장군이는 유진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며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황톳빛과 초록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갈대숲, 그 한복판에서 커다란 새가 입에 보석을 물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매를 닮았으나 날개를 제외하고는 몸이 흰빛이었고 부리와 눈은 갈매기를 닮았다. 그 새가 입에 문 것은 보석이 아니라 청록색 알이었다.

“어어-? 얘!”

손유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는 거라고 배웠지만 저건 경우가 아닌 듯했으니.

커다란 새가 알을 삼키려 하고 있었다.

어미인지, 이모인지, 고모인지 몰라도 알을 삼키다니!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새끼 새가 무슨 죄라고!

“먹지 마!”

까아아아아악-!

태풍이 불어닥친 듯한 고함의 기파에 갈대숲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월월! 월워월!

유진이의 고함을 따라 장군이가 맹렬히 짖기 시작했다.

푸드덕! 퐁당-!

갑작스런 훼방꾼의 등장에 새는 알을 떨어뜨리고 날아가버렸다.

*

진혁은 동생이 들려주는 어제의 이야기를 들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짓을 한 건지 고민하는 동생 때문에.

“유진이 잘못한 거 없어.”

기특한 녀석이다.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 떳떳하지 못하다 여기면서도 오빠에게 이실직고하지 않나.

뭐, 자연 생태계에 간섭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는데, 유진이 또한 자연의 일부 아닌가. 진혁이 보기에는 공교롭게도 그때 그 자리에 유진이가 있었고,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다큐멘터리 감독도 아닌데 개입 좀 하면 어때서?

“물에 빠진 걸 유진이가 가져왔다고?”

“홍시더러 가져오라고 했지요. 오빠가 위험하다고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해서요.”

“들어가지 않은 건 정말 잘했어.”

유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알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색상은 뻐꾸기 알과 비슷했지만 크기는 그보다 작았다.

‘뻐꾸기 알은 아니야.’

삼키려던 놈이 뻐꾸기겠지.

유진이가 설명한 생김새와 벌이던 짓으로 미루어 다른 용의자를 떠올릴 수 없었다. 뜸부기는 논을 휘젓고 다닐 뿐, 다른 새의 알을 훔쳐먹는 놈이 아니고.

서울 촌놈 아빠는 어린 진혁을 데리고 다니며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광 가이드처럼 들려주었는데, 그중에 뻐꾸기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뻐꾸기는 완연한 봄이 된 4월에서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 사이에 알을 낳는다. 지금도 문밖을 나서면 낮시간 내내 온 동네에서 뻐꾸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뻐꾸기라는 놈은 영악해서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데, 품고 기르는 수고를 남에게 떠넘기는 습성 탓이다. 탁란을 하는 과정에서 둥지에 이미 있던 알을 삼키는데, 숫자를 맞춰 원주인의 의심을 덜기 위해서라고 아빠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이 얘기를 열 살 봄에 논에 가면서 들었지 아마.

“오빠, 근데 이거 무슨 알이에요?”

“아마, 뱁새 알일 거야.”

혼내기는커녕 위로하는 오빠에게 적잖이 용기를 얻은 유진이가 관심을 알로 돌렸다.

이렇게 작고, 무늬가 없으며 청록색을 띄는 알을 낳는 조류는, 진혁이 알기로 이 동네에서 뱁새가 유일하다.

“참새 알은 아니에요? 근처에 참새떼가 막 날았다 앉았다 했어요.”

“그게 뱁새일 거야. 참새랑 닮았거든.”

야, 그런데 이걸 어떡하나?

다시 가져다 둘 수도 없다.

둥지가 한두 개도 아니고, 제대로 돌려준대도 사람 냄새를 맡은 어미가 둥지를 비우면 다른 알도 버려지게 될 거다.

“근데 이거 살아 있나?”

한쪽 눈을 감고 햇빛이 들어오는 거실 창에 알을 비췄다.

그런다고 내부가 보일 턱이 없지만.

“음······, 이래선 모르겠네.”

“살았어요. 심장이 뛰어요.”

“아, 그래?”

유진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버스에서 뛰는 오빠 심장도 알아보는 눈인데 이 순간 누굴 믿을까.

닭장 달걀 틈에 슬쩍 섞어둘까, 에디슨처럼 품어볼까.

한 손으로는 잠든 정원이를 안고, 한 손으로는 알을 쥐고 고민에 빠졌다.

“제가 품고 다니면 어때요?”

“그러다 깨지면 어쩌려고?”

덜렁이 손유진이 알을 품고 학교에 다닌다고?

뻐꾸기에게 구출한 알이라는 걸 깜빡하고 호로록- 삼키지 않으면 다행이다.

지난번에도 오빠에게 우유를 주겠다며 주방에 갔던 녀석이 입가에 우유를 묻힌 채 돌아오지 않았나. 빈 컵만 들고.

“오빠, 암탉에게 부탁하면 어때요? 걔들 알 잘 품잖아요.”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닌데, 오골계 때문에 신경이 쓰이네.”

지금 대장이 닭 존슨 주니어 23세인가, 24세인가. 아무튼 닭 존슨이란 녀석들이 그냥 둘 리 없다. 제 짝이 낳은 달걀까지 깨 먹고 쥐와 뱀까지 잡아먹는 놈들인데 새알이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아아-, 오빠도 모르면 우즈캐지요? 우리 행운이 알에서 못 나오겠다.”

“이름이 행운이야?”

아직 나오지도 않은 새에게 이름부터 짓는 유진이도 참 어지간하다.

“응, 응. 지금 생각해낸 이름이에요. 파란색이라 파랑새인 줄 알았죠오-. 행운의 파랑새. 그리고 음, 음. 운 좋게 발견했으니까요. 그래서 행운이.”

“좋은 이름이네. 이 알이 유진이한테 행운을 주면 좋겠다.”

우리 유진이에게 행운을 안길 알인데 이대로 썩게 둘 수는 없지!

정원이를 조심스럽게 담요 위에 내리고는 무릎걸음으로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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