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운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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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의 매니지먼트인 SI스포츠는 법률대리인으로서 주니어아시아육상경기대회에 소속 선수의 불참을 통보했다.
이유는 학생의 학습권 보장.
‘운동권’만을 주장하며 일관된 논조를 펼치던 육상연맹은 전혀 뜻밖의 강적을 만난 셈이다. 선수의 장래가 달린 주니어 태극마크를 거부했으니.
- 이사장님, 그렇게 감정적으로 판단하실 일이 아닐 텐데요? 선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호호호-. 협박으로 들리네요?”
웃음과 별개로 유세라의 음성은 차분하고 단호했으며, 겨울 공기보다 건조했다. 기선제압을 위해 초반에 강한 어조로 말하는 유세라의 오랜 화법이었다.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자만이 활용할 수 있는 거만한 화술이지만, 제대로 사용한다면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예방할 수 있다. 지금처럼 나이와 연륜을 믿고 능글맞게 구는 상대를 대할 때가 대표적이다.
당황한 상대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 다시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유세라가 말을 이었다.
“저희 재단의 정무적 판단입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남편이 회장으로 있는 그룹에서 귀 연맹에 기부하는 돈이 연간 얼마인지-, 어디 보자······.”
사락사락-.
보는 사람도 없는데, 유세라는 통화하다 말고 문서를 뒤적이는 시늉을 했다. 메모지를 엄지와 검지로 비비적대며.
- 아, 최대 후원사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최대 후원사. 최대 후원사 회장의 배우자가 이사장으로 있는 재단 선수가 국가대표가 되면 특혜니 뭐니 말이 나오지 않겠어요? 게다가 아직 1학년이고 나이도 어린데 말이죠. 저희 재단은 귀 연맹의 입장 또한 고려해서 결정했답니다. 호. 호. 호.”
그냥 던진 말이다. 조롱하듯 가공된 웃음은 덤이고.
아이 시발! 기분 상해서 우리 선수 못 보내!
······ 라고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훨씬 점잖으니까. 이 또한 남편에게 배운 대로 행하는 정치적 발언이었다.
- 아, 이것 참. 이사장님께서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기록경기에서는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선수 개인이 전부기 때문에-.
“말씀 잘하셨네요. 선수가 전부인데 그 선수가 일탈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시험 좀 보겠다는 걸로 합숙 이탈 시 선수 자격 박탈 운운한 건 귀 연맹입니다. 선수의 미래 운운하며 협박한 것도 연맹이구요. 저는 선수를 대리해서 아주 기본적인 요구를 했을 뿐인데 같은 말만 반복하시더군요. 입장 변화가 없는 상대와는 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지 않겠습니까?”
- 이사장님-, 운동권이라는 신성한 것은 그렇게 쉽게 단정할 문제가 아닙-.
“잘. 들으세요.”
유세라가 목에 힘을 주자, 어린아이 타이르듯 말하던 수화기 건너편의 노회한 음성이 즉시 사그라들었다. 퍼스트레이디조차 면담을 거듭 거절하는 유세라를 만나기 위해 비공개 회담을 청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런 사람 앞에 숙이지 않고 연맹의 규정을 내세우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면 대단한 용기일 것이다.
잠시 뜸을 들인 유세라의 가슴에 새로운 공기가 들어찼다.
이제 아빠부터 남편까지, 두 명의 회장에게 들은 멋들어진 말을 할 차례다.
“모든 정책은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수가 뛰어나서 선발하고자 한다면 고루한 생각을 뜯어고칠 필요도 있다고 봐요. 특혜를 달라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학생이 시험을 보겠다는 게 특혜입니까?”
-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규정이라는 것이, 저희 원로들도 같은 환경에서 운동을 해왔습니다.
“옛날 체육인들이 헐벗고 굶주리며 체육계를 이끌어왔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합니다만, 글쎄요. 헐벗고 굶주린 일 외에 선배 체육인들께서 뭘 하셨는지, 솔직히 체육인에 한 발쯤 걸친 저로서는 잘 모르겠어요.”
음성과 말투는 담담했으나, 듣는 입장에서는 분노를 유발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화를 낼 수도 없을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닌 유세라니까.
“노 선배들께서 행사장에 얼굴을 비추시고, 연단에 서서 격려사를 하시고. 그 외에 후배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제가 재단을 준비하며 많은 자료를 살피고 정책적 노력을 연구했습니다만, ‘이런저런 노력을 했다’라고 나온 자료는 있지만 어떤 결과물을 내놓았는지 보이지 않더군요.”
- 으음······.
저쪽에서 숭늉 마시는 소리를 낼 때, 유세라가 결정타를 날렸다.
“정부와 사회 각계에서 적지 않은 투자와 후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엘리트 체육이라고 이름 붙인 곳조차도 그 수혜를 받지 못한 모양이더라고요.”
정곡을 찌르는 작심 발언이었으나 유세라의 음성은 잔잔했다. 타고난 경영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듯 표정에는 여유마저 넘쳤다. 지금도 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지 않은가. 상대를 힐난하는 사람의 표정이라고는 볼 수 없는 자애로운 미소였다.
- 그야, 육상과 체육계의 발전을 위해서-.
그는 이번에도 말을 끝맺지 못했다.
“걸출한 스타가 먹고살 걱정 때문에, 유학비용 마련을 위해 티비 프로그램을 전전하는 등 외유에 넘어가요. 스타 선수도 그 모양인데 다른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코치직이 박봉이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아, 그런데 실업팀을 몇 개나 유치하셨나요? 외국 말고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육상 실업팀이 있기나 한가요?”
그저 말로써만 상대의 기를 죽이는 게 아니다.
겉보기에는 늘 여유롭고 나사 풀린 듯 행동하지만, 유세라는 확실한 준비를 마치고서야 전쟁에 나서는 장수였다.
“육상과 체육계의 발전을 도모하신다면 사고방식을 유연하게 바꾸는 게 어떨까요? 지금도 그래요. 이미 공식 입장을 공문으로 보냈는데 전화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만 봐도 상대를 어떻게 여기는지 알 것 같군요. 엄연히 담당자가 있는데도 이사장을 바꾸라는 요구 또한 저희 재단을 무시하는 듯해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스스로를 ‘고객’이라 칭하며 대기업 로비에 찾아와 사장을 찾는 진상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직군에 따라 맡은 업무가 있고 주어진 권한이 있는데 말이다.
- 아이-, 저-.
“저는 할 일이 많은 사람입니다. 회장님이시니. 특별히. 직접. 통화에. 응해드렸다는 점.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뚝-.
과감하게 전화를 끊은 유세라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눕히듯 기댔다.
분이 풀리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후아-. 떨려라. 홍기준은 정치인들한테도 거의 매일 이렇게 말한다는 거잖아?”
역시 내 남편.
공문을 발송하기 전, 유세라는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부친 유명선에게 조언을 구했더랬다.
- 너는 천하의 모사를 옆에 두고도 시골 내려온 애비를 찾는 게냐?
- “그래서 싫어?”
- 아니, 싫은 건 아니고오-. 나보다 기준이가 낫다는 소리다.
- “알았어. 끊어.”
- 아니, 얘-.
뚝.
뭐야, 남편한테 물어보라는 소리잖아.
그래서 홍기준이 시킨 대로 했다.
선수가 원하는 대로 지원해주기.
처음에는 별것 아닌 일이라 여겼다.
어느 한쪽이 양보하면 해결될 일이니까.
“웃기는 놈이야. 기말고사 땡땡이치면 좋은 거 아닌가?”
한데 진혁의 고집은 완강했다.
‘운동권’과 규정만 들이대는 육상연맹 또한 말이 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로 같은 말만 반복하는 아이와 어른들 사이에서 유세라만 기가 빨린 꼴이다.
그렇다고 축 처져 있을 수는 없는 노릇.
통하지 않는다고 포기했다면 유세라는 유명선 회장에게 백화점도, 호텔도 받지 못했을 거다.
“짜식들이 까불고 있어. 나 유세라야! 자-, 다음은-.”
아시아경기대회 규정을 살피기 위해 페이지를 넘기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답지 않게 눈을 가늘게 뜬 채였다.
스읍-.
“이 시끼들이 나 이용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없어.
유세라는 절대로 이용당할 사람이 아니야.
이용한대도 상관없다.
어차피 유세라도 진혁의 실력과 남편의 지위를 이용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으흐흥-, 내 돈으로 사업하는 사람은 없어요오-.”
서류를 뒤적이며 콧노래까지 불렀다.
국제대회 성적만큼 확실한 재단 홍보 수단은 없을 터였다.
그러자면 간판선수, 다시 말해 스타플레이어가 필요하다. 최초 체육재단과 매니지먼트 구상을 소개하며 홍기준이 떡밥으로 던진 스타 말이다.
그 선수가 입상을 하면 해외 유수의 스포츠기업이 스폰서 제안을 해올 것이다. 광고 제안도 들어오겠지. 들어오지 않아도 걱정은 없다. 세인전자 광고만 두어 개 찍어도 돈이 되는데 뭐가 걱정이냐. 남편을 이용하겠다는 계획은 바로 광고 수입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복덩이가 이런 복덩이가 없어.’
독일과 미국의 전문가에게 문의한 결과, 진혁의 성장세는 동양의 주니어 선수로 보기 어려울 정도라는 결과를 회신받았다.
스타트 동작부터 피니시 자세까지 흠잡을 곳도 없다고.
남편의 말대로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고, 방해 받지 않고 쑥쑥 커야 한다.
유세라에게 명예를 안겨다 줄 파랑새니까.
***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그리고 직접 나서기 껄끄러운 일에는 법률대리인을 이용하는 게 최고다.
“네. 잘 해결됐네요.”
민용락에게 경과를 전달받은 진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격렬한 자체 훈련의 여파로 전신에서 땀을 흘리면서.
국가대표로 선발 후 시험 때문에 훈련지를 이탈하게 되면 제명될 것이 뻔했다. 과거에도 그런 선수들이 꽤 있었다고.
실사례를 거론할 필요 없이, 조직이나 단체라 불리는 곳을 지배하는 논리 자체가 그랬다.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개인의 일방적 희생을 요구한다. 아무리 폐쇄적인 삶을 살았다 한들, 진혁이 그런 생리쯤 알지 못할까.
한데 애초에 참가하지 않았으니 제명될 걱정은 덜었다.
‘차라리 잘 됐어.’
어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유세라가 적극적으로 진혁의 입장을 대변했고, 홍기준이 적절히 엄호를 했다.
- 오빠! 군대 가면 내가 때려줄 거야! 검도, 복싱, 태권도 하는 친구들 다 같이 데려가서 혼내 줄 거라고! 알았어요?
캬르릉-.
사춘기라더니 차라리 성난 고양이였다.
뜬금없이 전화를 건 홍수정이 협박 어린 말과 함께 부모의 대화를 들려주지 않았다면 유세라의 각성 배경에 홍기준이 있었다는 사실이 묻힐 뻔했다.
“힘들어 보이는데 운동 끝나고 다시 얘기할까?”
연신 가슴을 들썩이는 진혁을 보며 민용락이 걱정스레 물었다.
“휘유우-, 괜찮아요. 익숙해요.”
그리 대답하고는 물로 입을 헹구며 민용락에게 눈짓을 보냈다.
“경기 규정에 기준 기록 통과한 선수는 국가대표가 아니어도 참가할 수 있다고 되어 있어. 여기 경기위원회 사무국에서 보내준 자료 보면-.”
「······ who have achieved ······ record can participate even if ······ not from the national team.」
호흡이 거칠고 체력이 떨어진 탓에 글귀가 흐릿하게 번져 보였지만 요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어차피 민용락이 요점을 짚어주는 중이고.
“‘시즌 최고기록이 곧 대회 참가 자격이다.’ 아, 여긴 너도 아는 내용이지? 국가대표여야만 참가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실 이런 규정은 나도 처음 봐. 최대한 많은 선수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는데, 예전 대회 규정에서 갑자기 달라졌다는 거야.”
눈을 비빈 진혁은 민용락의 손가락이 짚은 부분을 살폈다.
「기준 기록을 달성한 선수는 스포츠 정신에 입각해 국가와 종교, 신념과 무관하게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다. 단, 일체의 비용은 본인 부담.」
국가나 협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실력이 되면서도 참가하지 못하는 이유가 별첨에 달려 있었다.
‘비용이라면 항공권에 체류비용일 테고, 컨디션 관리에 집중해야 할 선수는 그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다가 퍼지겠네.’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진혁은 비용과 스케줄관리를 맡아 줄 사람이 있으니 걸림돌 축에도 들지 못하는 조건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규정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
“이사장님은 차라리 잘 됐다는 눈치셔. 연맹을 낙동강 오리알로 만들 수 있으니까.”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응? 자유참가 선수로 나가려는 거 아니었니?”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힘겨루기로 보여서도 안 되고, 제가 피해자로 보여서도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