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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206화 (206/338)

< 행운 (3) >

*

다시 수로를 찾아 조릿대 이파리로 만든 배를 띄웠다.

유진이는 아까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고 얌전히 앉아 흐뭇한 눈으로 바라만 보았다. 살랑이는 바람을 따라, 멈춘 듯 조용히 움직이는 물결을 따라 고요히 떠가는 나뭇잎 배를.

조그만 녀석이 흐뭇하게 미소짓는 모습이 인자한 어머니 같다.

“오빠, 저것 좀 보세요. 이파리가 비행기 같아요.”

농수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수면에 하늘이 고였고, 느릿하게 구름이 흐르는 가운데로 나뭇잎 배가 수줍은 파문을 일으켰다.

“진짜 예뻐요. 정말 배처럼 생겼어요.”

유진이 옆에 쪼그려 앉은 진혁은 나뭇잎 배보다 동생을 눈에 담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렇지? 시냇물에 띄우면 졸졸졸 따라서 떠내려가. 오빠도 유진이만 할 때는 이렇게 앉아서 구경했어.”

“미경 언니랑요?”

유진이가 오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혁은 동생의 작은 머리통에 손을 얹어 한차례 쓰다듬었다.

“응. 이제는 유진이랑 보고 있네. 정말 좋다.”

“저거 타고 싶어요오. 뿅- 작아지면 탈 수 있을 텐데.”

아이다운 상상력이다.

‘나도 그런 생각 많이 했었지.’

엄지공주처럼, 아니 그보다 작아져서 저 배 위에 타서 바다에 닿고, 대양을 항해하는 상상. 그러다 풍랑을 만나 소인국에 가서 뜬금없이 공주를 구하고 용을 무찌르는 모험으로 가득한 망상.

이제는 그게 불가능한 일임을 알기에 더 아련한 꿈의 나래가 되었다.

“나중에 배 만들면 수로 따라서 수정 언니네 할아버지 만나러 가요.”

“그러자.”

바다로 나가는 모험은 어렵겠지만 그 정도는 가능할 거다.

수로 끝은 방조제에 닿고, 방조제를 따라 걷다 보면 연수원이 나오니까.

“유진이, 요즘 연수원 자주 놀러 가니?”

“오늘도 김호진이랑 같이 다녀왔어요. 할아버지가 음, 음- 과자랑 주스랑 주셔서 먹고 왔어요. 장군이랑 뽀미 노는 것도 구경하다가 왔어요.”

“잘했네. 자주 인사 드려.”

유명선은 내려오며 뽀미를 데려왔다.

어느 아침, 홍시를 쏙 빼닮은 리트리버가 마당에 들어서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잘못 본 게 아닌가 생각했다. 웬 고급스럽게 생긴 개가 시골에 어울리지 않게 핑크색 리본을 달고 왔으니까. 한데 미친 듯이 달려가 부대끼는 장군이를 보고는 뽀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공기 좋고 뛰어놀 곳 많은 시골에서 살라는 뜻으로 유세라가 보낸 것이었다.

우습고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대장견 장군이가 다른 개 앞에서 재롱부리듯 까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건 마치, 차가운 직장 상사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콧소리를 내며 수줍게 구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의 충격에 비할 수 있으리라. 과거 팀원들이 진혁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빌자면 그렇다.

‘잘된 일이야.’

가끔 자면서 낑낑대는 장군이를 보면 뽀미를 그리워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홍기준의 가족이 휴가를 보내러 오게 되면 뽀미도 데려오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몇 년째 휴가를 함께 하지 못해 흐지부지 계획으로만 남았지만.

그런데 이제 뽀미가 시골에 왔으니 두 녀석은 가까이 살며 해로할 듯하다.

‘수정이 얼굴 못 본 지도 꽤 됐네.’

이것저것 다 해보며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정작 홍수정과 보낸 시간은 많지 않았다.

유명선도 내려왔으니 이번 방학 때는 볼 수 있으려나.

***

온종일 결재서류를 검토하고, 사장단, 임원진과 회의를 하고, 면담을 원하는 정부 부처 관계자를 만나고. 홍기준의 하루는 48시간이어도 모자랄 듯했다.

그렇다고 체력 단련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 곧 다시 찾아올 중년기를 대비하자면 하루도 거를 수 없는 일과였다.

후욱-. 푸우우-.

엉거주춤 앉으며 숨을 들이쉬고, 숨을 참은 채 잠시 버티다가 천천히 다리를 펴며 숨을 내뱉었다.

저택 1층 체육관에서 스쿼트를 하는 홍기준의 시야에 유세라가 잡혔다.

어두워진 정원 덕분에 통유리가 거울 역할을 하니 뾰로통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저러시나?’

유세라가 샐쭉한 얼굴을 만드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집에서는 말괄량이 같은 사람이 저러니 눈치 빠른 홍기준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콰앙-!

스미스 머신에 중량물을 걸치는 굉음에 유세라가 화들짝 놀랐다.

손에 붕대를 감고 줄넘기하던 홍수정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아잇! 깜짝아! 아빠! 살살 좀 내려놔! 애 떨어지겠네!”

“얘! 넌 쪼그만 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키는 엄마랑 별 차이 없거든?”

저 여자들이 또 시작이다.

“저 아빠는 벤치프레스 할 때도 쾅쾅 내려놔서 내가 얼마나 놀란다구! 가슴도 엄마보다 크면서 얼마나 키우려고 저래?”

“엄, 어머, 얘 좀 봐? 못하는 소리가 없어!”

허리에 손을 얹은 유세라가 딸을 잡아먹을 듯 도끼눈을 떴다.

그렇지.

아무리 사춘기라지만 이럴 땐 엄마가 단단히 혼내야 한다.

사춘기 위에 갱년기 있다는 걸 보여줘라, 유세라!

아직 갱년기가 오려면 멀었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스포츠음료를 들이켠 홍기준은 아내에게 맡긴다는 마음으로 잠자코 지켜보았다.

“야! 너, 너어-. 어, 엄마가 아빠보다 가슴 커!”

휘유-, 그럼 그렇지.

괜히 맡겼다.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훔친 홍기준이 한 발짝 나섰다.

“그만. 수정이도 엄마한테 버릇없이 얘기하지 마. 당신도 딸하고 너무 똑같이 싸우지 말고.”

“응, 여보.”

“응, 아빠.”

으르렁거리던 두 마리 암사자가 홍기준의 한 마디에 잠잠해졌다.

마치 말려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와 딸에게 번갈아 눈길을 준 홍기준이 피식 웃었다.

그래, 이 정도 재미는 있어야 돌아와 개고생하는 보람도 있는 거지.

전생엔 두 사람 눈치를 보느라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팔짱 낀 유세라가 딸을 한 번 째려보고는 홍기준에게 다가왔다.

“무슨 보디빌더도 아닌데 그렇게 무겁게 해?”

“익숙해지면 중량 올리고 그러는 거지. 나한테 할 말 있어? 뭔데 그래?”

“티 났어?”

흐흣-.

귀엽다. ‘날 좀 보소’ 하고 서 있던 사람이 아닌 척하기는.

“얘기해 봐.”

“하아-, 오빠. 나 있잖아-.”

대뜸 이마를 짚으며 오빠 소리를 꺼낸다.

이 여자 또 아쉬운 소리 하려나 본데.

*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홍수정의 줄넘기하는 소리, 훅훅- 내뱉는 숨소리 때문에 대화에 집중하기가 어려웠기에.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육상연맹을 조지-, 혼내주라고?”

“아니, 뭐······. 혼내달라기보다는 그냥 한 대 툭 친다는 생각으로······.”

그리 말하며 유세라가 허공에 잽을 날렸다. 복싱하는 홍수정을 지켜보며 배운 동작이다.

말해놓고도 뻘쭘했는지, 유세라는 검지로 귀밑머리를 빙빙 말았다.

아직 체열이 식지 않아 벌건 얼굴로 홍기준이 팔짱을 꼈다.

‘애매한 문제다.’

요점은 간단했다.

손진혁이 주니어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는데, 아시아대회에 출전하기 전 대표팀 훈련에 참가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 한데 진혁은 기말고사 기간과 겹친다며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일반인이 볼 때는 그런 간단한 문제를 왜 고민하느냐 할 수도 있다.

시험은 시험대로, 시합은 시합대로 나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테니.

“아, 있잖아-. 내가 그래서 알아봤는데 육상뿐만 아니라 다른 종목도 마찬가지인 거야. 아주 지독한 멍청이들이더라니까?”

“이유도 똑같아?”

“응!”

유세라의 고개가 위아래로 강하게 움직였다. 목 삐끗할라.

“운동선수는 운동권이 먼저라는 거야! 아, 미친 거 아니냐고! 운동권이라는 게 있어? 운동할 권리? 그건 권리가 아니라 강제하는 거잖아. 막말로 비인기종목에서 그렇게 학창시절 포기하고 운동해서 떵떵거리며 사는 선수 누가 있는데? 없어. 우리나라에는 단 한 명도 없어.”

잘 풀려야 티비에 나와 에어로빅하는 거지. 제 언성에 놀란 유세라가 말끝을 흐렸다.

유세라의 고성에, 근접 경호원과 집안 도우미들이 눈치를 살폈으나 홍기준은 태연하게 턱만 만졌다.

“솔끼키! 아오-.”

유세라가 턱을 좌우로 풀었다.

낮에 사무실 책상 위에 엎어져 잤더니 턱이 약간 어긋난 듯했다.

“솔직히! 합숙한다고 뭐가 달라져? 육상, 수영 이런 선수들이 합숙 후에 기록이 나아지냐, 몸이 좋아지냐? 대표팀 가면 코치니, 감독이니 하는 사람들 붙어서 지들 스타일 주입하느라 정신없잖아. 그리고 또, 응-, 음······.”

“기회다 싶어 길들이려 들 테지. 그러면서도 제 파벌만 편애할 테고.”

“어, 맞아!”

“철저히 정치적이지.”

홍기준이 애매하다 생각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홍기준에 비하면 한 줌도 되지 않지만, 이미 권력화 이익집단화한 단체. 존재 자체로 정치세력화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글쎄······? 나도 어느 정도 들어서 체육회가 그쪽에 끈이 있다고는 알고 있는데 지금 정치 얘기하려는 건 아니었어.”

홍기준이 정치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유세라가 어물거렸다.

“유세라야.”

“응?”

뒷머리를 긁적이던 유세라가 꺼벙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양복 입은 정치인들을 말한 게 아니야. 먹고, 자고, 싸고, 숨 쉬는 모든 게 정치야. 그 본질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관심을 두지 않으면 싼 걸 비싸게 사 먹고, 비 맞으며 자고, 더러운 공기로 숨 쉬고 구정물을 마시면서도 누구의 잘못인지 알지 못해.”

사나운 암사자 유세라가 자세를 고쳐 반듯하게 앉았다.

유식한 남편 입에서 나중에 써먹을만한 말이 나오는 중이었으니까.

“기업도 정치고, 스포츠도 정치야. 그 목적이 뭐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뿐이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되면 밖으로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 나오고 그땐 정치세력화했다는 비난을 피하지 못해. 어떤 집단도.”

“당신은 정치랑 담 쌓고 살면서 어쩜 그렇게 잘 알아?”

“알아야 피할 수 있는 거고, 알아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거야. 모르면서 욕만 하는 놈들은 늘 당한 후에 속았네, 배신당했네 떠들지만 나는 적당히 이용하잖니.”

“나 지금 어려운 거 같은데?”

남편이 아니라 아빠랑 사는 거 같네. 그리 덧붙이며 이마를 긁적이는 유세라의 눈빛이 자못 측은해 보였다.

슬퍼서가 아니라 머리 아파서.

“선수 육성이라는 순수한 목적을 벗어나 파벌을 만들고 밀어주기를 하게 되면 지도자끼리, 선수끼리 다툼이 생기고 그런 마찰이 반복되면 사람들이 염증을 느끼게 된다는 소리야.”

“아휴-. 그래서 요, 요점이 뭐야? 나 머리 아프다.”

“진혁이는 그 안에 들어가선 안 돼.”

“왜?”

유일한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홍기준은 말을 삼켰다.

“그럼 어떡해!”

남편의 침묵이 답답한 나머지 유세라가 앙탈부리듯 목청을 키웠다.

소속 선수의 선전을 발판삼아 재단과 매니지먼트를 홍보하려던 계획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시안게임도 나가야 하고, 나가서 메달도 따야지. 한 번 밉보이면 다신 안 뽑아줄지도 모르잖아. 걔 군대 보낼 거야?”

유세라는 어느새 운동을 마치고 온 홍수정을 보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진혁 오빠 군대 갔으면 좋겠어?”

“남이사?”

어깨를 으쓱인 홍수정은 그대로 사라졌다.

“저, 저 인정머리 없는 녀언-석이. 누굴 닮아서-.”

분해 죽겠다는 듯 울그락불그락하는 유세라에게 홍기준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군대 다녀오면 수정이도 성인 되겠네.”

“야! 홍기쭌!”

하하하하하!

홍기준이 화통하게 웃었다.

얌전했다가 성질부렸다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게 유세라의 매력이다.

“군대? 제 놈이 가겠다면 보내면 그만이지만······. 국군체육부대가 있잖아.”

“장난하지 말고.”

유세라는 남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따지듯 말했다.

홍기준의 표정은 진심이 아니었기에.

아직 뜨거운 커피로 입술을 적신 홍기준이 표정을 굳혔다.

“이 나라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사람 한 명 군대 빼는 게 일 축에나 들까. 어설프게 가진 놈들도 그 짓거리를 하는데.”

“당신은 그런 거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당신도 열심히 해. 내 손으로 직접 싫어하는 짓 하는 거 보기 싫으면.”

“무, 무슨 말이 그, 그러냐? 내가 뭘 더-.”

일희일비하지 말고, 다른 세력에 휘둘리지 말고 선수가 하고 싶다는 대로 지원하란 말이다. 홍기준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 순간 아내는 대표로서의 독립성을 잃게 될 테니.

홍기준은 존재 자체로 이미 인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내는 그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속셈을 알 턱 없을 것이다. 알아서도 안 되고.

목에 수건을 걸치고, 남은 커피를 모조리 입에 들이부었다.

“끄흐흠-! 아무튼 지금 내가 도와줄 것도 없고, 도와줄 수도 없어. 당신도, 진혁이도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야.”

“알았어······.”

유세라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피곤한 얼굴이었으나 서운한 빛은 없었다.

‘홍기준 저거, 죽어라 해보고 그래도 내 선에서 해결 안 되면 도와주겠다는 소리겠지?’

딸과 별것 아닌 일로 으르렁거리지만 유세라는 머리 나쁜 암사자가 아니었다.

어휴, 편하게 가려다 설교만 들었다. 두통은 덤이고.

두통엔 커피가 즉효지.

나도 홍기준처럼 원샷. 치얼스-.

푸화악-!

“으앗! 뜨거 씨-.”

방정맞게 입술을 때리며 자리를 박찼다. 당장 실행에 옮길 계획을 점검하며.

활동적인 재단 이사장으로서, 백화점과 호텔 최고경영자로서 할 일이 많다.

‘몰래 찬물을 끼얹을까?’

일단은 샤워하고 있을 딸에게 가서 화풀이부터 해야겠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쫄깃해지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이게 사는 맛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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