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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205화 (205/338)

< 행운 (2) >

유진이에게 물과 송진이 만드는 보트쇼를 선보이려던 것인데, 꿀렁거리는 파문 아래 물속의 뭔가가 소나무 순을 삼킨 것을 계기로 남매의 대화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아이에게는 법이 필요 없다.

법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한 대 맞으면 한 대 때려야 된대요.”

“그······.”

햐,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하나.

진혁은 멍청하게 변한 얼굴을 옆으로 뉘였다.

분명 조일헌이 그렇게 가르쳤겠지.

아니면 아빠가 그랬을 수도 있겠다.

“가물치가 가서 때려준 건 잘한 일이에요.”

“공식적으로 수입한 거니까 우리가 맞았다고 볼 수는 없는 거야.”

“왜 수입했어요오?”

“그······.”

아이고 머리야.

유진이의 무한질문신공은 도무지 당할 자가 없을 거다.

진혁조차 동공이 풀리기 시작했는데 그 누가 감당할 수 있으랴.

“네? 왜 수입했어요?”

“단백질 공급······ 하려고 그랬다는 거 같던데.”

“오오? 배스 맛있어요?”

“오빠도 안 먹어봤-는데요.”

누가 얘 좀 말려줬으면. 진혁의 눈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예쁜 건 예쁜 거지만 그와 별개로 혼을 쏙 빼놓잖아.

그러나 안타깝게도, 손유진은 오빠만큼이나 눈치가 없는 아이였다.

“우리 나중에 배스 먹어 봐요.”

“그래. 오빠가 잡는 법 배워서 요리해줄게.”

멧돼지보다는 잡기 쉽겠지?

“근데 배스는 뭐 먹어요?”

“입이 커서 삼킬 수 있는 건 다 먹는대.”

“히익-. 그럼 우리나라 물고기 다 없어지겠어요.”

그 질문엔 확실히 답해줄 수 있지.

과거에 우연히 접한 기사가 흥미로워서 논문까지 찾아 읽은 기억이 있다. 세월에 몸을 맡기고 흘려보낸 시간과 사건은 가물가물한데, 흥미 있게 관찰한 사건은 부분적으로나마 또렷이 기억나는 것도 재미있다.

“음-. 생명이 가진 가장 큰 능력은 바로 적응력이야. 사람도 추울 때는 옷을 두툼하게 입고, 더울 때는 시원한 곳을 찾잖아? 우리나라 물고기들이 먹히지 않으려고 덩치도 커지고 헤엄치는 속도도 엄청 빨라져서 결국 살아남을 거야. 그렇게 되면 배스는 먹을 게 없어서 다슬기나 작은 가재 같은 애들 주워 먹다가 점점 작아지고. 어떻게 보면 적응력이 자연이 준 가장 큰 무기인 동시에 행운 아닐까?”

멸망이 와도 적응 잘하는 생물은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잖아.

바퀴벌레처럼.

강준치라는 놈이야말로 토종 물고기를 무지막지하게 먹어 치워대는 놈인데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든 욕을 배스가 먹고 있다던가. 그런 걸 보면 배스도 참 운이 없다.

“유진이랑 오빠도 적응했잖아.”

돌연변이인데 정상인인 것처럼. 이건 위장이라고 봐야 하나?

배스야 어찌 되었든, 자연이라는 우주가 알아서 균형을 잡을 텐데 진혁이 심각하게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자신 또한 생태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서, 회귀라는 가장 큰 행운을 얻은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배스를 변호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으으음-.”

유진이가 또 미간을 짚었다. 적응, 무기, 행운 중얼거리며.

또 어딘가에서 써먹으려는 모양이다.

진혁은 잠자코 기다렸다. 동생의 미간이 펴질 때까지.

외울 것을 다 외워서 그런 듯했지만, 어른스러운 유진이는 심각한 오빠의 표정을 살피고는 말을 돌렸다.

“오빠아-. 저는 모터보트보다 노 젓는 배가 좋아요.”

“음? 모터보트?”

갸웃거리는 진혁의 눈에, 송진으로 끈적거리는 동생의 손이 들어왔다.

아, 유진이는 물을 차고 나가는 송순을 모터보트로 여기는 모양이다.

“노 젓는 배라면 오빠가 또 아는 게 있지!”

진혁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계단 위에서 얌전히 대기하던 장군이와 홍시도, 트랙에서 등 찜질을 하던 천마와 광마도 벌떡 일어섰다.

“아이고, 이놈들. 우리 유진이 지키느라 고생이 많다. ······ 응?”

이동하기에 앞서 개들을 격렬하게 쓰다듬던 진혁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혀를 길게 빼고 꼬리를 떨어져라 흔드는, 이제는 성견과 비슷해 보이는 블랙탄 때문에.

헤헤헥-.

그런데 검마 너는 왜 계속 따라다니는 거니?

니네 집에 감마.

***

헤헤헥-.

수로변 트랙은 단단해서 앞발로 아무리 긁어도 땅바닥처럼 파이지 않는다.

그래서 장군이와 부하견들은 밤마다 이 시뻘건 트랙에서 몸을 비벼댄다.

그렇게 하면 가끔 따닥- 하며 벼룩인지 진드기인지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게 아주 환장할 정도로 고막을 행복하게 하거든.

지금도 천마와 광마는 뜨끈한 트랙에 몸을 비비며 눈깔을 뒤집어 까고 있다.

그렇게 좋냐 개새끼들아. 누가 보면 미친개로 알겠네.

그러나 장군이는 손왕왕의 친구로서 그 안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아무튼 지켜봐줘야 한다. 거대해진 아이가 노는 모습을.

그래서 위풍당당하게 얌전히 앉아 혀를 빼고 있다.

충성심이나 헌신, 뭐 그딴 거 아니다.

그런데 홍시는 장군이 딸이니 그렇다 치고, 갑자기 굴러들어온 저 까만 놈도 제법 장군이 흉내를 내고 있다.

월-.

고양이보다 조금 클 때였으니 개 도둑 사건 때부터였지, 아마.

저 검마라는 녀석이 장군이네 집에 기어들어온 게 말이다.

손앵앵의 사랑을 듬뿍 받는 녀석이다.

홍시, 천마, 광마, 그리고 검마.

장군이는 손앵앵의 부하가 아니기 때문에 사랑 따위 관심 없다.

월-.

만져주면 좋지만 싫어.

장군이는 민감한 개라서 그런 복잡한 감정도 표현할 줄 안다.

아무튼 검마 저 놈이 처음부터 장군이네 집에서 산 건 아니다.

처음 며칠은 장군이네 찾아와서도 끼잉끼잉 눈치를 봤더랬다.

맹견들이 도사리고 있으니 근본 없는 잡종으로서 당연한 반응일 터.

한데 모두 알다시피 장군이는 너그러운 개다.

그래서 허락했다.

흙바닥에 떨어진 사료를 주워 먹는 걸.

월-.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점점 그릇에 있는 사료까지 먹는 거다.

누렁이는 도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냐.

그렇게 사료나 주워 처먹던 검마가 찾아와 머무는 날이 점점 길어졌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

지금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검마 놈이 계속 눌러산다는 거다.

장군이집 1층은 홍시, 천마, 광마 세 녀석으로 꽉 차는데 검마까지 기웃거렸다. 처음에는 마당에서, 그다음은 처마 밑에서, 그다음에는 1층에 머리만 욱여넣고. 검마는 그렇게 장군이네 집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덩치가 장군이보다 커진 후에도 계속.

월-.

어느날 검마가 앵알거렸다.

맹견의 호연지기를 배우고 싶으니 거둬달라나?

아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리고, 몇 달을 눌러살다가 이제야 허락을 구하는 개 같은 경우라니.

헤휴-.

하아- 씨.

지금 있는 놈들도 똥오줌 못가려서 돌겠는데 더 받아달라니.

그래서 받아줬다. 장군이 아들로.

뭐, 번식에 관심 없던 차에 그렇게라도 번식을 하면 되는 거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손앵앵이야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손왕왕까지 검마를 편애하는 것 같다.

으르르-.

시부럴-.

물어다 버리기에는 이미 장군이보다 커져버려서 버릴 수도 없다.

장군이 새끼라고 생각하니 귀여운 것도 같고······.

장군이는 너그러운 개라서 참을 줄도 안다.

“아이고, 이놈들. 우리 유진이 지키느라 고생이 많다.”

드디어 손왕왕이 집에 들어가려는 모양이다.

역시 장군이 친구 손왕왕!

장군이부터 만져주는구나!

마지막으로 검마를 만져주던 아이가 대가리를 장군이처럼 갸웃거렸다.

“응? 검마는 왜 너네 집에 안 가고 여기 있니?”

아, 안돼.

검마는 이제 내 새끼란 말여!

월-.

검마야, 이 큰 사람 놈에게 잘 보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어미와 생이별이다!

헤헤헥-.

알았다고 대답했다.

근본없는 녀석이지만 말귀는 알아들어 다행이다.

***

일요일이 사라진 건 아쉽지만 유진이와 함께 걷고, 목청껏 부르는 노래를 듣는 건 행복한 일이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 동네 처녀 바람 나았네에-.”

유진이는 좌뇌와 우뇌가 각각 따로 일하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회동을 하는 듯하다. 지금도 진혁이 알지 못하는 노래 두 곡을 자연스럽게 믹싱하지 않나. 유진이는 작곡가를 해도 잘할 것 같았다.

“우리 유진이, 오빠랑 있으니까 그렇게 좋아?”

“네! 학교 다니는 날은 이케 환할 때 오빠랑 못 다니잖아요오-.”

그저 떠보려고 물어본 것인데 상세히 설명하는 걸 보니 진심인 모양이다.

흐뭇하게 웃은 진혁은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동생 손을 잡고 탱자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망둥어 건조대를 만들 때, 조슬찬과 메기 낚시를 할 때 사용한 조릿대 군락이 있는 곳이다. 활동반경 넓은 장군이조차도 진혁과 함께일 때만 오는 걸 보면, 조릿대 군락에 바짝 붙어 조성된 탱자나무 때문에 개들도 잘 찾지 않는 듯했다.

“오-, 검마는 용감하네?”

뾰족하고 단단한 가시가 울타리를 이룬 탱자나무가 무섭지도 않은지, 검마는 유진이보다 앞장서서 걸었다. 위험요소를 미리 살피는 용감한 개처럼.

검마는 몇 걸음 앞서가다가 뒤돌아서서 혀를 빼물고 꼬리를 흔들기를 반복했다. 여기까지는 안전하니까 와도 된다는 듯이.

장군이와 다른 부하견들은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다가오는 걸 고려하면 검마는 진정 놀라운 행동을 보인 것이다.

“검마, 자주 놀러와. 맛있는 거 많이 줄게.”

헤헤헥-.

장군이가 더 기뻐하는 듯한 건 기분 탓이겠지.

“고기럴 잡으러 산으러 갈까아나아-.”

오빠와 함께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유진이는 쉬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이러다 목이 쉬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다.

‘나도 저랬나?’

개구쟁이로 살긴 했어도 노래는 부르지 않은 것 같은데.

나란히 걷던 유진이가 오빠 손을 흔들며 올려다보았다.

“오빠, 다음 시합은 언제예요?”

“응. 아마 9월쯤?”

“와! 방학 때는 시합 안 가는 거예요?”

“그럼. 방학 때는 우리 유진이랑 물놀이해야지.”

“와아! 신났다아-! 수박도 먹고 참외도 먹어요!”

어허허허-. 그래. 다 먹어서 멸종시켜 버리자.

진혁은 아직 오지도 않은 방학을 떠올리며 깡총거리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진정시켜야 했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탱자나무 울타리를 향해 미끄럼을 탈 테니까.

1년에 3개 대회 참가.

SI스포츠와 계약한 내용이다.

참가할 대회는 전국규모 이상의 대회에서 진혁이 선택할 수 있다.

본선 출전 자격은 상반기 대회는 전년도 최고기록, 하반기 대회는 상반기 최고기록으로 갈음하기에 별도의 예선을 거치지 않아도 되다.

문제는 국제대회다.

인천에서 열린 이번 경기에서 진혁은 쟁쟁한 2, 3학년을 제치고 아시아주니어대회 대표 자격을 득했다. 한데 대회를 위한 합숙훈련 기간이 1학기 기말고사 기간과 겹친다.

- “시합 때문에 수업 빠지는 일수도 적지 않을 텐데 시험까지 안 볼 수는 없어요. 친구들이 시험 볼 때 함께 보고 싶어요.”

유세라에게 그렇게 일러둔 터였다.

어차피 코치도, 파트너도 없이 개인 훈련을 하는 선수가 합숙 훈련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백번 양보해서 팀워크나 소속감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면 참가할 의사는 있다. 회사원들도 먹고 마시기 위해 떠나는 워크숍이라는 걸 하니까. 그렇다 해도 시험은 양보할 수 없다. 1등에 대한 욕심도 아니고, 시험을 치를 때 드는 짜릿함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시간을 함께 걸어야 한댔어.’

어린 동생도 아는 사실을 오빠가 모른다면 과연 평범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집과 학교에서 특별대우는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받고 있다. 육상선수라는 특성상 이해한다 해도, 흔치 않은 대우인 것만은 확실하다.

- “일단 내가 협상해볼게. 안 된다면 어쩔 거니? 네 의견이 우선이야.”

진혁은 미처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으니. 어쨌거나 거리낌 없이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고, 제 일처럼 나서는 대리인을 두었다는 건 선수로서 복 받은 일이다.

“오빠, 대나무로 배 만드는 거예요?”

“아니. 오늘은 이파리로 만들 거야.”

“대나무 이파리로 배를 만들어요?”

“오빠가 보여줄게.”

일반 대나무 이파리로도 배를 만들 수 있지만 조릿대는 일반 대나무보다 이파리가 길고 넓적하다. 그래서 더 큰 배를 만들 수 있지. 대나무 이파리를 구하자면 천길룡의 집까지 가야 하는데 조릿대가 가까이에 있다는 건 행운이다.

툭-.

이파리 하나를 떼어내자, 하늘을 향해 짱짱하게 선 조릿대가 좌우로 요동쳤다.

“이렇게 접는 거야. 이쪽도, 이쪽도.”

진혁은 조릿대 이파리 양쪽을 접었다. 접힌 끝부분이 가운데에서 살짝 겹치도록.

“이제, 접은 곳을 세 갈래가 되도록 조금만 찢는 거야. 가운데를 심만 남도록 가늘게 찢으면 돼. 얼마큼 찢냐면······.”

재미있다.

어릴 때 하던 짓을, 아주 오랜만에, 동생을 데리고 하자니 저도 모르게 광대가 솟았다. 집중해서 손을 꼼지락거리느라 입술을 비집고 혀도 빼꼼 나왔다.

“이렇게 찢어서 양 끝 찢은 애들끼리 만나게 하는 거야. 가운데는 그냥 두면 이렇게 튀어나와서 배처럼 되지.”

접어 찢어 틈이 생긴 한 쪽 끝에 다른 쪽 갈래를 집어넣자, 대나무 이파리가 오므라들며 카누처럼 변했다.

“오오오-?”

유진이는 오늘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한다.

눈이 작아질 틈이 없고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시간이 없지 않나.

“저도 해볼래요.”

“응. 손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진혁은 직접 이파리를 따려는 유진이의 허리춤을 잡고 버텼다.

비탈진 곳으로 동생이 뒹굴지 않도록.

‘옛날에 수정이 갈대 꺾을 때 생각나네.’

그때도 이렇게 수정이 허리를 잡고 버텼지.

유혈목이라는 뱀 때문에 한바탕 난리도 쳤고.

지금은 유혈목이가 아니라 아나콘다가 나온대도 걱정할 이유가 없다.

다섯 마리 개가 호위하듯 빙 둘러 앉았으니까.

‘그런데 검마는 왜 집에 안 가는 거지?’

볼수록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검마는 진혁이 학교에 갈 때도 장군이네 집에서 자고 있었다.

누렁이가 걱정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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