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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204화 (204/338)

< 행운 >

으음-.

장진남이 굵직한 음성을 덧붙여 고개를 끄덕였다.

손진혁은 지도교사 없이 소속사의 지원을 받아 홀로 훈련하는 선수니까.

진혁처럼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정도는 아니었어도, 장진남 또한 파트너 없이 고된 무술 훈련을 반복해봤기에 그 외로움을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근데요오-. 우리 오빠가 그러는데 기록 단추가 쉽지 않대요.”

“그래오. 이번 성적도 작년 기록과 비슷하다고 하더라고오.”

장진남은 굳이 손유진의 표현을 정정하려 들지 않았다.

알아들었으면 됐지.

손가장.

이제는 장원처럼 되어 버린 손광연 일가의 영역에 양강욱이 붙인 명칭이다. SSS 요원들끼리는 이곳을 손가장으로 부른다.

아무튼, 진혁이 기록 단축을 어려워한다는 건 손가장 안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말수 적고 졸린 눈을 하고 다니지만 진혁은 주위 사람들에게 다정하다. 조심스러운 행동 어디에도 괴력을 숨긴 사람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는 애틋함이 묻어 나온다.

그래서 더 경악스럽다.

잔소리하는 이도, 돕는 이도 없는데 그 지옥 같은 훈련을 홀로 감내한다는 사실이.

야간자율학습까지 마치고 저녁 늦게 학교에서 돌아오면, 손진혁은 3km를 전력으로 질주하고 뱃속에 든 것을 게워낸다. 장이 뒤집어질 정도로 고통스럽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것이다.

맑은 물로 입을 헹구고 다시 1km를 전력 질주, 그리고 직전에 마신 물을 게워낸다.

선 자세에서 손을 짚고 엎드리기를 반복하는 운동인 ‘버피’로 호흡을 턱까지 끌어올린 후 다시 달린다. 트랙 위에 대자로 뻗을 때까지.

그 일을 매일 반복한다.

‘프로의 길이겠지.’

그렇게 달려도 기록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날이 바뀌면 진혁의 얼굴은 여상하게 돌아와 있었다. 고집스럽게 닫힌 입술과 졸린 눈으로 학교에 다녀오고, 동생들과 놀아준다.

이미 초인적인 극기를 경험한 SSS 요원들조차 진혁이 운동할 때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보는 것만으로 고통스럽다며. 종종 함께 달리던 김인랑이나 강헌창도 진혁을 애써 외면하는 중이다.

“삼촌도 우리 오빠처럼 혼자 요리하니까 심심하지요?”

“유진이가 있어서 하나도 안 심심해오.”

이제는 두더집 업무도 익숙해지고 단순해져서 장진남이 하는 일은 국을 끓여두고 냉장고에 반찬을 채워주는 정도다. 밥은 요원들이 직접 해서 각자 차려 먹으니까.

하루 중 두더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고, 출근하면 탐험하듯 동네를 다니며 소소하게 관찰하고 채취하는 게 전부인데 심심할 일이나 있을까.

“응응, 있죠. 인랑이 삼촌이는 박재순 아저씨가 버리고 간 집을 수리해서 살 거래요.”

“들었어오. 흙집이 노인네들한테 좋거든오. 인랑이 어머님이 관절이 안 좋으신데 잘 고쳐서 살면 괜찮을 거예오. 이 소나무 순도 인랑이 어머님 드릴 효소 만들려고 따는 거예오.”

부우웅-.

멀리 버스 소리가 들리자 손유진과 장진남의 귀가 약속이라도 한 듯 쫑긋거렸다.

“아! 오빠다! 오빠 왔다아아!”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몸을 틀기 무섭게, 손유진은 숲을 벗어나 날듯 질주하기 시작했다. 손유진이 최미경의 집 방향으로 달리자, 숲으로 숨었던 다섯 마리 개가 튀어나와 뒤따랐다.

만류하려던 장진남은 손을 내렸다.

무슨 꼬맹이가 저렇게 빨리 달린단 말인가.

“흐음-. 이 시간엔 빈 버스가 많은데 오빠 없으면 어쩌려고 저러나······.”

혼잣말할 때는 말투가 이상하지 않은 장진남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

대회에 나가면 오빠를 볼 수 없어 아쉽지만, 대회가 끝나고 돌아올 때는 좋다. 며칠 만에 보면 더 반갑고 가슴이 더욱 강하게 뛰니까.

“오빠아아아아-!”

“읏챠-! 우리 애기! 오빠 오는지 어떻게 알았어?”

“버스에서 심장이 뛰어요오!”

오빠에게 안겨 하늘 높이 솟은 유진이가, 팔을 활짝 벌려 눈이 사라지도록 웃었다.

‘버스에서 심장이 뛴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아······.’

예전에도 물어봤지만 유진이는 저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며 설명을 하지 못했다. 똑똑한 동생에게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게 있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더 채근하지 않았다.

“유진아, 삼촌도 왔어. 아이고 멀미 난다.”

올챙이배 민용락이 비틀거렸다.

“배 울렁거리면 운전하면 된대요. 운전하는 사람은 멀미 괜찮대요오.”

“그래. 면허부터 따면······.”

머리가 좋아 필기 합격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그놈의 기능시험이 번번이 민용락의 발목을 잡았다.

SSS 요원들이 곁에 붙어서 지도를 해주었지만 민용락의 공간지각능력은 차마 인간의 수준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사람 좋은 장진남조차 ‘차라리 장군이에게 운전을 가르치겠다’며 고개를 저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우리 애기 뭐 하고 있었어?”

“진남이 삼촌이랑 산에서 놀았어요오-.”

진혁은 유진이를 한 팔로 받쳐 안고 집으로 향했다.

“우리 오빠, 많이 심심했어요?”

“아하하-. 괜찮아. 막상 끝나면 금방이야. 사 일이나 비웠는데 하루밖에 안 지난 느낌이야.”

4일. 길가의 풀은 더 자랐고 봄볕은 더 뜨거워졌다.

오빠 없이 학교를 다닌 유진이는 더욱 어른스러워졌다.

‘나만 그대로네.’

그저 즐거워서 힘든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지만,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체력이 넘칠 때 달려도, 지쳤을 때 달려도 기록은 0.1초 차이.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올랐다 해도, 보이지 않는 사슬이 스프린트에 제약을 거는 기분이 썩 유쾌할 리 없었다.

어쩌면 체질적인 한계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떠들어대는 동양인의 한계 말이다.

진혁은 그런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인체는 목적에 맞게 얼마든지 성장시킬 수 있고,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고 믿었다. 스스로가 산증인이기도 했으니까.

‘내 육체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나······.’

쓸쓸하고 무력한 통찰이지만 아쉬울 건 없다.

오빠 뺨을 쥔 유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봐주는데 무슨 욕심이 더 있으랴.

“오빠, 어제는 왜 마이크에 얘기 안 했어요?”

“응. 수정 언니네 엄마가 기자들 막아줘서.”

홍기준이 기자들을 압박했는지 많이도 찾아왔지만, 남은 경기가 있다며 유세라가 선수 보호를 핑계로 접근을 차단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이는 그 부부의 신경전을, 진혁은 편안한 마음으로 무시했다.

홍기준의 속내를 알 듯했기에, 그저 유세라에게 감사하며 경기에 집중했다.

“근데 유진이 손에-. 으이그- 지지-.”

“에헤헤-. 지지 아니에요오-. 끈적이는 거예요.”

“그래.”

대회의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엄습했고 금싸라기 같은 주말이 흘러가버렸지만 유진이와 어울리는 시간 자체가 휴식이다.

“오빠는 피곤해서 쉬어야지요?”

“응? 왜?”

서운해하는 듯한 동생의 표정을 살핀 진혁의 눈이 이내 고사리손에 쥐어진 소나무 순을 발견했다.

소나무 순?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유진아, 오빠랑 뱃놀이하러 갈까?”

***

송순松筍.

따뜻한 바닷바람과 봄볕을 만나 3월말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4월이면 어른 손가락보다 길게 자라고, 이른 곳은 4월, 늦는 지역은 5월이면 꽃가루를 온천지에 날리는데, 도시인들에게나 불청객이지 시골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며 살았다. 어쨌거나 자연의 일부이며 계절을 알리는 전령 아닌가.

소나무 순이 잘되어야 소나무도 우거지고, 그 나무가 지게로, 뽕설기 잡이 막대로, 땔감으로 활약하게 된다. 풍년을 예고하는 메시지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때문인지 행운의 상징으로 통하기도 했다.

소나무 순이 너무 많이 말라 죽는 해에는 사람이 많이 죽는다며 신성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톡-, 톡-.

진혁의 한 손에는 유진이 손을 잡고, 한 손에는 잘 자란 송순을 한 움큼 모았다.

“오빠도 효소 만들어요?”

유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오빠가 뱃놀이 가자더니 산으로 왔잖아.

지지라더니 소나무 순도 잔뜩 땄어!

“이걸로 뱃놀이를 할 거야.”

“우즈캐요?”

더욱 커진 유진이의 눈이 요동쳤다.

오늘내일하는 것 같더니 이 오빠가 드디어 미쳤나 봐요.

“자아-, 이제 물 있는 곳으로 가자.”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좋겠지.

놀거리가 많아 여태 이 재밌는 걸 보여주지 못했으니 유진이가 의문을 표할 만하다.

수로변으로 이동해 널찍한 계단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잘 봐. 이걸 물 위에 살짝 올려두면-.”

진혁이 순 하나를 물 위에 띄웠을 때.

“오오오오오-!”

유진이가 팔짝팔짝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소나무 순이 물 위를 쏜살처럼 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흐르는 게 아니라 박차고 나가는데, 송순 절단면에서 나온 송진이 물과 만나 일으키는 반발력 덕분이었다.

“우즈캐 그러지요오?”

“여기 잘라진 곳에 송진 흐르는 거 보이지?”

“녜녜-.”

보입니다요.

유진이는 신기한 장면을 볼 때면 이렇게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굽신거리곤 한다. 오빠에게 분유를 얻어먹을 때처럼.

“이게 기름처럼 물을 미는 거야. 서로 섞이지 않거든.”

“정말, 정말? 물에 무지개색 남았어요오!”

꺅꺅-.

송순 보트가 수면 위에 만든 무지개색 기름띠를 보며 유진이는 연신 소리를 질렀다.

소나무 순이 전진만 했다면 그저 그랬을 텐데, 배가 지나며 남기는 시각적 효과가 그만큼 신비로웠다.

“오빠는 이거 우즈캐 알았어요오?”

“어릴 때 미경이 언니랑 이러고 놀았지.”

“아하! 이제 저도 해볼래요오-.”

호기심 강한 아이가 어찌 얌전히 있을 수 있을까. 유진이는 빼앗을 기세로 오빠에게 달려들었다.

“오빠가 줄게. 유진이는 손이 작아서 다 못 잡아요.”

진혁은 손에 든 소나무 순을 유진이에게 하나씩 건넸다.

어차피 동생을 위한 자리인데 도우미 역할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에헤헤헤헤-! 오빠 저거 보세요! 추월했어요! 오빠처럼 빨라요!”

진혁은 계단에 걸터앉아 그저 바라보았다.

방방 뛰며 즐거워하는 동생을.

유진이 손에서 송순 보트가 여섯 개째 떠났을 때였다.

푸확!

“깍!”

멀리 가다가 수초에 부딪힌 송순 하나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물속의 무언가가 집어삼킨 듯했다.

광포한 소음에 놀란 유진이가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다행히 물에 빠지지는 않았다.

“물속에 괴물이 살아요!”

아이고, 귀 아파라.

소리 좀 그만 질러라 이놈아.

“가물치인가 봐.”

“가물치가 소나무를 먹어요오?”

“아마······ 뭔가를 보호하려는 거 아닐까?”

진혁은 생태학자도, 낚시꾼도 아니어서 놈들의 습성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조일헌에게 듣기로, 가물치라는 놈들은 5월경이면 알을 보호하기 위해 수면을 노려보다가 뭔가 지나가면 모조리 삼킨다고 했다.

아직 5월이 되지 않았으나 속도위반한 놈들이 있을 수도 있잖아.

아님 말고.

“누가 배스를 풀었을지도 모르지.”

길쭉한 수로.

사유지라고는 하나 모두에게 개방된 공간이다.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지만 상류나 하류에는 낚시꾼들이 등장한다.

미국에서 들여온 배스라는 녀석도 가물치처럼 먹성이 좋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놈 짓은 아닐까.

손광연은 수로에서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지 주시해달라 SSS 요원들에게 일렀을 뿐, 낚시객들을 통제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주말이면 아내와 경호원과 더불어 수로변을 거닐며 쓰레기를 줍는 것으로 산책을 대신하기도 한다.

‘사람을 내치지 말라는 거겠지.’

아빠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고.

아무튼 물속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포식자 중 하나라고 여기는 게 합리적일 듯했다.

“오빠, 배스가 뭐지요오?”

“외래어종이야.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물고기.”

“이민 왔어요?”

“비슷해.”

끝없는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에게 뭐라고 설명하는 게 좋을까.

사람이 들여온 거니까 강제이민?

“생태계교란종이라고는 하는데-.”

설명하려던 진혁은 말을 멈췄다.

‘생태계교란이라······.’

자신을 묘사하는 말처럼 들린 까닭이다.

비록 힘을 숨겨두고 사용하지는 않지만, 범인의 범주를 아득히 넘는 육체만으로도 충분히 그럴듯하지 않은가.

쩝-.

씁쓸함에 입맛을 다셨다.

“생태계교란. 어려워요. 그거 나쁜 거예요?”

“글쎄······. 배스가 나쁜 게 아니라 들여와 놓고 무책임하게 관리한 사람들이 나쁜 거 아닐까? 걔들도 생명인데 토종 물고기 보호한다며 마구잡이로 죽이는 것도 오빠가 보기에는 성숙한 자세 같지 않네. 토종 물고기도 결국엔 잡아다 먹으면서 말이야.”

“배스는 어느 나라에서 이민 왔어요? 우리도 가서 교란하면 되지 않아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이의 셈법은 이처럼 단순해서 이해하기 편하다.

“아마 가물치가 하고 있을 거야······. 거긴 가물치 천적도 없대.”

가서 개판 치고 있을걸?

눈에는 눈, 배스에는 가물치.

똔똔이여. 다른 전문용어로 뭐라더라? 퉁친다던가?

“오아-. 멋있어요.”

유진이는 가물치의 복수가 심히 흡족한 모양이다.

점입가경.

점점 커지는 입이 가물치의 경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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