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트너 (7) >
장점을 무려 두 개나 적은 걸 보면 유진이는 최태양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진혁은 동생의 오자를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회사였다면 정정 요구를 하거나 직접 수정했겠지만 동생도 직접 깨닫고 익히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할아버지: 천길롱, 인사를 잘해요.
아저씨: 쪼롱이, 아는 개 많아요.
언니: 최미경, 잘 놀아줘요.
언니: 홍수정, 요정처럼 예뻐요.
언니: 황가윤, 대학을 나왔어요.
언니: 황가영, 대학에 들어갔어요.」
허이구, 많기도 하다.
이름 옆에는 한 명도 예외 없이 특징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절로 웃음이 나오는 내용이었다.
홍수정을 잊지 않고 기록한 점도 기특하기 짝이 없다. 근래에는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어린 날 함께 보낸 즐거운 시간의 영향이 그만큼 큰 모양이려니.
「친구: 아찌곰, 말이 없어요.」
개도 족보에 올랐는데 아찌곰이라고 올리지 못할 일인가. 한데 잘하는 것을 쓰라고 했는데 말이 없다니. 짧은 문장에서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유진이는 아찌곰이랑 대화가 되면 좋겠어? 말 상대가 부족해?”
“아니요오? 부족하지는 않은데 아찌곰이는 듣기만 하니까 답답할까 봐서요.”
그래, 유진이는 가끔 아찌곰에게 이것저것 말하고는 반응을 살피듯 뜸을 들이곤 했다. 무생물에게도 정을 주고 인격을 부여하는 아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유진이 옆에 얌전히 앉은 아찌곰을 보았다.
정원이의 만행으로 새하얗던 몸 여기저기에 때가 탔고, 생채기가 나서 헝겊으로 기웠지만 아찌곰은 행복해 보였다. 웃는 얼굴이어서 그렇겠지.
“유진이는 가족이 왜 이렇게 많아?”
“응응, 있잖아요오-. 천길롱 해비지가 그러는데요오. 시간을 함께 걷는 사람이면 가족이래요오-. 생의 동반자.”
그 할아버지는 온 세상을 가족으로 여기는 분이라 그런 설명도 가능하겠네.
정서적 혼란기에 천길룡의 영향을 받은 진혁도 나름대로 공감이 되는 말이었다. 아빠 손광연이 타인을 대하는 태도 또한 그러했고.
“그래서 제가 오빠 콤피타로 사전을 찾아보니까 동반자가 영어로는 파트너래요.”
아, 그래서 Family가 아니고 Partner라고 적은 거였구나.
깊은 깨달음이 밀려왔다.
다음 가족을 확인한 진혁은 말을 잃었다.
「친구: 두구 엘릴, 잘 웃어요.」
두구 엘릴?
입에 붙지 않는 이름에, 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인형 이름인가?’
아니면 만화캐릭터일지도 모르겠다.
제 덩치보다 큰 아찌곰만 질질 끌고 다니지만, 유진이 방에는 홍기준의 가족과 SSS 요원들이 선물한 인형이 한가득이다. 아마 그중 하나의 이름이겠지.
“유진아, 이건 누구야? 인형이야?”
“응, 으응-. 인형인가? 그게 저도 몰라요.”
“모르는데 어떻게 썼어?”
“기억이 안 나서요오-.”
알지도 못하고 기억도 안 나는데 이름은 어떻게 썼고, 잘 웃는다는 건 어떻게 아는 거냐. 학교에 입학한 유진이지만 앞뒤 안 맞는 말을 하는 건 여전했다.
똑똑하다 해도 아직 어린 동생과 대화하는 건 큰 인내심을 요구한다. 비단 나이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동갑인 조슬찬도 걸핏하면 엉뚱한 곳으로 화제를 돌렸으니. 성향이나 집중력의 문제겠지.
‘뭐, 나도 모르니까 더 묻기도 뭐하네.’
들어본 듯한 이름인데 기억나지 않는 건 진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법 심각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오빠를 유진이가 툭툭 쳤다.
“저 숙제 괜찮아요오-? 잘 했어요?”
“응. 아주 잘했네.”
등을 다독이고, 머리를 쓰다듬고.
유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이마 비비기도 빼놓으면 안 되지.
“헤헤.”
유진이도 아빠처럼 품이 넓은 아이다.
이웃과 개들, 기억나지 않는 인형까지 가족으로 올린 걸 보면 분명하다.
이런 아이에게 오류를 짚어주는 일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아니. 그냥 두는 게 좋아.’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그렇게 자라는 아이.
마치 거대한 자연처럼.
‘역시 유진이가 나보다 훨씬 낫다.’
진혁은 숙제가 구겨지지 않도록 공책에 끼워 유진이에게 건넸다.
공책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유진이가 물었다.
“오빠, 저 콤피타 해두 돼요오?”
대자연도 컴퓨터는 좋아한다.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실 때까지만이야.”
“에헤헤-. 녜에에-.”
*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닌데 유진이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것저것 들여다보는 걸 좋아했다.
오빠에게 물어 DOS 명령어를 입력한 후 신기해하기도 하고.
“오빠, 도스에서 화면 깨끗하게 하는 게 무예요오?”
“씨엘에스.”
“‘친’이라고 나오는데요?”
“한영키 눌러야지.”
“아하-!”
톡-. 토독-.
검지만을 이용한 독수리 타법으로 입력하는 모습도 귀엽기 짝이 없다.
“오빠 파일 숨기는 말이 무예요오?”
“어트립 띄우고 에이ㅊ-. 유진이 뭐 숨기려고?”
“오빠가 숨긴 거 보려고요오-.”
그건 안 된다 이놈아!
일부러 DOS에서 숨긴 파일을 왜 찾으려는 거냐.
아마 유진이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오빠를 떠보기 위해 묻는듯했다. 지금도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잖아.
이럴 땐 배 째라는 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오빠는 숨기는 거 업, 없어.”
“그래요오? 우리 반 노희영도 집에 콤피타가 두 대나 있는데요, 노희영 오빠들은 이상한 거 숨겨놓고 본대요.”
“오, 오빤 이상한 거 안 봐.”
오빠는 이상하지 않은 걸 본단다.
“지네나 찾아야겠다.”
“지뢰.”
“지로에-.”
세인에서 개발한 운영체제의, 윈도우와 흡사하게 구현된 화면에서 마우스를 딸깍여 지뢰 찾기도 했다. 끝없이 중얼거리며.
“으음-. 이걸 밟으면 터지니까······. 이 옆에 두 개가 있다고오? 그럼 여기는 안전해요오-.”
한 번은 뭘 하는지 궁금해서 기웃거려보니 이메일을 읽고 있었다.
“헬-로 데어? 디어? 영어네요오······.”
오빠가 이메일을 하는 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자기도 하겠다기에 계정을 만들어준 것인데 정말로 이용할 줄이야. 이메일을 주고받는 사람은 홍수정과 진혁뿐이었지만, 여덟 살짜리가 이메일을 이용하고 메일을 주고받을 친구가 둘이나 있다는 게 어디냐.
“오빠, 왜 ‘이메일을 보내라’고 할 때는 영어로 ‘이메일 투 미’라고 않고 ‘이메일 미’라고 해요오?”
스팸의 원형이랄까,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는 장난 메일을 본 날이었을 거다.
침대에서 정원이에게 비행기를 태우던 진혁의 뇌가 일시 정지했다.
질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동생이 영어를 읽는 걸 넘어 번역까지 하고 있어서. 게다가 문법 질문까지 하잖아.
그래도 질문에는 답을 해줘야지.
“그······, 이메일이 타동사로 쓰일 때는 ‘누구에게 이메일을 보내다’라는 뜻이어서 전치사 ‘투’가 필요 없을 거야.”
“아아-.”
쟤 설마 이 설명도 알아들은 건가?
미간을 잡은 걸 보니 암기해두었다가 나중에 되새김질하려는 모양인데?
어쨌거나 대단한 재능이다. 몇 번이고 곱씹어서 결국은 자기 지식으로 만드니까.
민용락이 한글과 알파벳, 숫자 등을 가르치는 걸 보긴 했지만 유진이 학습 진도는 너무 빠른 듯했다.
“유진이 설마 거기다 답장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앗-, 아, 안해요오-. 읽을 줄만 알아요오.”
말은 왜 더듬는데?
그런 것까지 오빠 따라하냐?
뭔가 미심쩍었지만 진혁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유진이가 조심해야 할 것만 알려주고 나머지는 직접 경험하도록 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결제 같은 것만 안 하면 되지.’
유진이가 일찌감치 글을 깨친 것도 민용락의 오지랖 때문은 아니었다. 엄마도, 진혁도 굳이 글자를 가르치려 들지 않았는데 유진이가 가르쳐 달라 조르는 통에 힘없고 배만 나온 민용락이 어쩔 수 없이 가르친 것이었으니.
“응아-. 비융- 비융-. 아부! 아부! 아부우우-!”
“아윽! 윽! 윽!”
형 배 위에 앉은 정원이가 팔다리를 파닥거리며 방방 뛰었다.
이제 저한테 관심을 돌려 비행기를 태우라는 뜻.
동생이 둘이나 되니 한 녀석에게 집중하기가 만만치 않다.
유진이에게 얻은 가르침대로 시간을 함께 걷는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가족이고 형제니까.
“어, 어. 그래. 자- 난다-!”
“까아아-. 응아- 비유웅-.”
정원이는 언제쯤 발음이 또렷해질까?
비융이 아니라 비행기라고 가르쳤는데도 이 모양이다.
정원이가 의도한 게 아님을 알면서도, 들을수록 기분이 이상한 건 어쩔 수 없다.
오빠가 다시 정원이에게 집중하자, 모니터 앞에 앉은 유진이가 손을 놀렸다. 돋보기안경만 없을 뿐, 눈을 가늘게 뜨고 한껏 웅크린 자세가 영감님 같다.
톡- 토독-.
‘아, 유진아. 답장 안 한다며.’
하여간 징그럽게 말 안 들어!
그래도 뭐라고 쓰는지 궁금해서 슬쩍 훔쳐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어동학교 1학년 1반 18번 손유진입니다. 저는 영어 아직 몰라요. 론돈에 안 살아요. 잘못 보내신 것 갓ㅌㅏ······.」
역시 친절하네. 우리 유진이.
상대방이 한글을 알아볼지는 모르겠지만.
“히익-.”
토다다다닥-.
잘못 입력했을 때 기겁하는 것도, 백스페이스를 신경질적으로 누르는 것도 오빠를 닮았다.
***
같은 태양인데 왜 계절마다, 달마다 그 온기가 다를까.
온기에서 열기로 바뀌는 건 몇 번의 바람이면 충분하다.
바람과 볕으로 계절을 느끼는 건 도시인이나 농부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도시에서 내려온 상남자 장진남도 그랬다.
바람을 따라 날아왔던 황사가 잠잠해지고, 잠시 환상적인 봄 날씨가 이어지는 듯하다가 송홧가루가 날리기 시작했다.
“음흠흠흠-. 에헷취핵!”
꽃가루 알러지 때문에 코가 시뻘게지도록 재채기를 하면서도, 장진남은 새로 돋아난 소나무 순을 채취하느라 바쁘다. 오늘은 버스 길 옆 뒷산이 장진남의 작업장이다.
끓여 식힌 설탕물에 송순과 솔잎을 함께 재워 효소를 만들 생각이다.
조일헌에게 배운 것인데 소나무 순은 류머티즘과 손발 저림, 근육 연화에 좋다고 했다. 솔잎은 오장을 편케 해주고 발모 효과도 있다고. 머리가 훌러덩 까진 남자들이 들으면 돈다발을 들고 찾아올 정보였다.
‘6개월만 푹 발효시켜서 먹으면 더이상 파마를 하지 않아도 된다!’
줄어든 머리숱 때문에 속살을 감추느라 뽀글 파마를 했던 것인데, 동네 아이들이 ‘히맨 아줌마’라고 놀려서 속상했다. ‘장고 아저씨’라고 불러주는 이동호가 고마울 지경.
척척박사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요리를 즐기는 상남자로서 온갖 식자재가 널린 곳에 왔으니 이런저런 시도를 해봄직하다.
지난가을 말미잘 요리의 효과도 톡톡히 본 터였다. 정신까지 치유해주는 듯 뛰어난 맛도 맛이지만······.
‘우리 셋째 출생 예정일이 언제더라?’
······ 아무튼 장진남은 결혼 이래 가장 사랑받는 남편이 되었다.
검마까지 다섯 마리 개의 호위를 받으며, 장진남의 짝꿍 손유진이 곁을 지켰다.
할짝- 손유진이 송홧가루를 혀로 핥았다.
“찹찹-. 단맛이 나요오-.”
“에이-, 그래두 송홧가루는 먹지 마오-. 지지예오.”
“가루가 이파리나 솔방울보다 약효가 좋다고 응, 응 쪼롱이 아저씨가 그랬어요오-.”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네오.”
조일헌이 하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줘서 기억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데, 손유진은 하나도 빠짐없이 암기하고 있는 듯했다. 어려서 집중력이 좋은 덕분이겠거니.
“장군이랑 홍시도 먹어봐라요오-.”
흐헤헥!
착한 손유진이 소나무 순을 디밀었지만 장군이와 홍시는 재빨리 숲속으로 내뺐다.
이럴 땐 순둥이 도베르만 광마뿐이다.
“응? 광마 어디 갔지요?”
다섯 마리나 되던 개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다니, 송홧가루의 약효가 뛰어나긴 한 모양이다.
“우리 오빠 올 때 됐는데에?”
“진혁이 오늘이 대회 마지막날인가오?”
“네! 이백 미터 결승만 하고 온다고 했어요오-.”
시간상으로는 이미 결승을 치르고 이동 중일 듯했다.
“참 대단한 진혁이예오. 삼학년보다, 어른보다 빠르다니.”
“키도 삼학년보다, 어른보다 크잖아요오.”
“그건 그래오. 나보다도 커오.”
10초 38이랬나?
어제 100m에서 고등부 신기록을 수립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등부를 뛰어넘어 일반부에 근접한 기록이라고.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손광연 사장은 또 바비큐 파티를 벌였다. 주인공 없는 파티였지만 모두 즐거워했고, 장진남 뒤에 숨어 콜라를 마시던 손유진도 행복해 보였다.
아홉 시 뉴스가 끝나고 스포츠뉴스에 오빠가 깜짝 등장했을 때는 비명도 질렀다고 한유영에게 들었다.
“으응- 그런데요오- 우리 오빠 심심하대요.”
“용락이가 같이 갔는데두오?”
“친구 없대요. 선생님도 없대요.”
오빠가 안쓰러운 걸까, 손유진의 눈동자가 슬픈 빛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