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트너 (6) >
최미경은 신기한 생물이다.
걸음마를 시작한 최미경 영유아는 매일같이 아장아장 걸어 진혁을 찾아왔다. 조막만 한 손에 든 비닐봉지에는 늘 튀밥이나 센베이 따위 건과자가 담겨 있었는데, 경천동지할 악천후가 아니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친구를 만나러 왔었다.
진혁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함께 손을 잡고 유치원에, 학교에 다녔다.
최미경은 사회인이 되어 다시 진혁을 만났을 때도, 유부녀가 되어 종종 얼굴을 볼 때도,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며 즐겁게 웃었다. 한데 그 눈빛은 한없이 슬펐으니, 갑자기 연이 끊긴 소꿉친구가 측은해서였을 것이다.
일견 고집스럽고 깐깐해 보이지만, 제 마음에 들면 쉽게 마음을 열고, 한 번 마음을 준 대상에게는 끝없이 애정을 쏟는 영혼.
‘그래서 그 샌님 차버리지 못하고 결혼한 거겠지. 마음 약해서 이혼도 못 하고.’
진혁은 그런 최미경과 봄에는 삘기를 뽑고, 찔레 순을 꺾어 먹고, 여름에는 버찌나 산딸기를 따러 다녔다. 가을에는 무화과를 따먹고 개암을 찾아 산을 헤맸다. 겨울에는 눈사람을 만들고, 썰매를 타고, 볼이 빨갛게 얼면 아궁이 앞에 함께 쪼그려 앉아 감자를 구웠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의 개구쟁이 최미경 어린이는 팬티만 입고 보자기를 망토처럼 두른 채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는데, 따라가던 진혁이 넘어지면 다시 돌아와 일으키고 까진 무릎에 침을 발라주던 친구였다.
두 번째 생이 시작되고, 점차 나이가 들어도 시골 친구들의 그런 일상은 변치 않았다. 진혁은 입학 전날까지도 최미경과 두더집에서 놀았으니까. 어린 날로 돌아온 진혁이 신체와 맞지 않는 정서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최미경과 최선을 다해 어울린 건 아마, 그런 친구를 위한 보답이었을 거다.
진혁은 묘한 심정으로,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장 소중한 친구 둘이 나란히 걷는 모습을.
“와아-. 너네는 라면에 별거 다 넣네? 우리 오빠는 계란도 안 풀어주는데. 아아- 우리 오빠가 라면 자주 끓여 줬는데.”
그래, 최태양이 집에 올 때면 저 양아치는 눈이 퉁퉁 부은 채 돌아다녔지.
진혁은 그때마다 참외배꼽 눈이라고 놀리고 달아나는 놀이를 했었다.
닭 존슨보다는 최미경의 주력이 나은 편이라 훈련 파트너로 쓸만했으니까.
“그려? 아, 근디 느이 오빠 싸인 좀 받아다 줄 수 있간?”
이제는 얼굴이 붉게 물든 이승훈이 어물거렸다.
저 새끼 저거, 사인은 관심 없는데 괜히 말 한마디 더 붙이고 만날 구실 만들려고 수작 부리는 것 같은데?
역시 이승훈. 씨름선수도 선수라 이건가.
최미경이 팔을 높이 들어 이승훈의 어깨를 툭 쳤다.
“허-, 짜식. 그건 일도 아니지 인마. 우리 오빠 씨름 빤쓰도 하나 줄까?”
“어? 진짜?”
“야, 말만 해애-. 무슨 색 좋아하니?”
“나는 그 머여-, 퍼런색.”
바다에 있는 고장답게 태양군의 상징인 색상이었고, 때문에 운동선수들 유니폼도 파란색이 지배적이었다.
“야! 내가 무지개색으로 다 구해줄게!”
아무리 봐도 생경한 광경이다.
‘쟤들 옛날에도 같은 고등학교 다녔는데.’
과거의 이승훈은 최미경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최태양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다고. 최미경이나 이승훈 모두 얌전하고 조용하게 고등학교를 다닌 탓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고, 최태양이 젊을 때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납득 못할 것도 없었다.
‘나 때문에 친해졌네.’
주변인으로서 이보다 뿌듯할 수가 없다.
최미경에게 핀잔을 들은 신우성도 어허허- 웃는 걸 보니 마음의 상처 같은 건 없는 듯해서 다행이다.
“너 주특기 뭐야?”
“나는 들배지기.”
“야, 남자는 잡치기지이-! 우리 오빠 잡치기 하는 거 봤어? 아주 잡치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 아니냐? 작년 추석 시합 때 그 뚱땡이를 확!”
“어어-!”
어설픈 몸동작으로 씨름 동작을 흉내 내다가 비틀거리는 최미경을 이승훈이 넘어지지 않도록 받쳤다. 순간, 삼류 로맨스에서나 볼 법한 시선 교환이 이루어졌는데, 이 되바라진 녀석들 입꼬리가 올라간 모습이 꽤나 얄밉다.
뚱땡이라는 말에 제 배를 어루만지는 신우성만 표정이 씁쓸했다.
그림이 아주 드럽게 좋구먼. 조용히 따르던 진혁이 중얼거렸다.
야, 근데 태양형 잡치기 내가 가르쳤다.
손진혁만큼이나 눈치 없는 신우성도 뭔가 낌새를 차렸는지 진혁에게 귓속말을 했다.
‘회장, 쟤들 눈맞은 거 같아.’
참 빨리도 알아본다.
신우성 이 녀석은 손진혁보다 눈치가 느린 거의 유일한 사람일 거다.
진혁은 무언의 고갯짓으로 동의를 표했다.
신우성도 제법 머리가 컸다 이거겠지. 눈치가 느리니 어쩌니 해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통찰 아닌가.
깩깩-.
으허허-.
좋을 때다.
‘어후-, 시끄러워.’
아무래도 밥은 신우성과 둘이 먹어야 할 것 같다.
깩깩깩-!
으허허허허-!
최미경과 이승훈은 뭐가 좋은지 시시덕대며 앞서 걸었다.
둘이 함께 걷는 그 모습이 마치······.
에잉-, 아니다.
***
팔짱 낀 손유진은 한 손으로 턱을 쥐었다.
평소답지 않게 눈이 예리하게 빛나며 책상을 노려보는데, 책상에 벌레라도 있나 싶지만 시선의 목적지엔 종이 한 장뿐이다.
「우리 가족 소개」
학생으로서 기념비적인 첫 과제물이라니.
이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이냐.
“집에 가서 엄마나 할머니께 부탁드리는 거야. 선생님이 ‘이거 숙제 해오래요.’ 하고. 알았지?”
“네에에-.”
1학년 1반 코흘리개 친구들이 씩씩하게 외치는데도 손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가늘게 뜬 눈으로 숙제를 노려볼 뿐.
흐음-. 직접 하면 안 되는 걸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응? 유진이, 왜?”
“꼭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교사의 표정은 금세 미소로 바뀌었다.
1학기가 시작하고 겨우 2주가 지났을 뿐이다.
학생마다 성취의 차가 커서 바른생활 교과서를 유창하게 읽는 아이가 있는 반면, 아직 읽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다. 쓰기 실력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직접 할 수 있는 사람은 직접 해도 돼.”
네 마음 다 안다는 듯한 담임 교사의 대답에 손유진이 씨익 웃었다.
그러다가 광대가 올라오도록 한쪽 뺨을 찡그렸다.
‘아야-. 왜 이빨이 아프지요?’
턱을 움직여보고, 혀로 건드려 봤지만 방금 전의 통증은 재발하지 않았다. 어디가 아픈지 알아야 치료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통증 부위를 찾고 싶어도 느긋하게 여유 부릴 수도 없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점심 맛있게 먹고, 내일 보자. 자, 반장!”
반장은 차렷, 경례를 해야 하니까.
“차려어-. 선생님께 경례-.”
그리고 더 중요한 일도 있지.
“반장, 오늘 하이라이스래.”
밥 먹으러 가야 한다.
“야, 이동호. 근디 하이라이스는 왜 하이라이스여어?”
“나도 몰라.”
김호진과 이동호는 아직 어려서 모르나 보다.
재밌는 장면만 모은 게 하이라이트.
맛있는 음식만 모은 건 하이라이스.
손유진은 똑똑한 반장이라 그런 것도 안다.
- “암만 맛있어두 거 한데 죄- 모으먼 그건 개밥이지이-. 요새 도시 것덜은 뷔페인지 많이 간다더먼 그거 한 접시에 다 모아 봐라, 모냥이 어떤가. 개밥여어- 개바압-.”
어디선가 쪼롱이 아저씨 목소리가 들리는 건 기분 탓이겠지.
아무래도 그 아저씨와 너무 자주 어울린 것 같아요.
거리두기를 해야겠어요.
교실을 나서기에 앞서, 손유진은 청소도구함부터 열었다.
“진도준이 사 분단장이지?”
“응. 우리는 청소하고 갈게.”
오전 4교시 수업만 진행하는 1학년은 유치원생들과 마찬가지로 밥만 먹고 집으로 간다. 방과후 수업을 신청해서 참여해도 되지만 아직 마음에 드는 과정이 없어서 신청하지 않았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는데 그런 건 하지 않는다고.
급식실을 향해 씩씩하게 걷는 손유진 곁으로 짝꿍 이동호가 따라붙었다.
아직 다리가 짧은 이동호가 힘겹게 보조를 맞추며 물었다.
“반장, 오늘도 집에 그냥 갈 거야?”
“응. 이동호도 우리 집에 가자.”
집에 가면 엄마도 있고 삼촌들도 많은데 돌봄 교실에 머물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 없이 학교에 머무느니 차라리 곰짐에서 삼촌들과 수영을 하고, 홍시, 검마와 뛰어다니는 게 더 즐겁다.
“이동호도 수영 배워라.”
“그럴까? 엄마가 수영복 사주실까?”
“어린놈이 발가벗고 수영하면 어때서?”
“그런가······?”
이동호의 귀에는 손유진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시골에 이사 온 후 만난 친구들은 팬티 한 장 걸치고 뛰어다니더라. 심지어 여자아이도.
“나두 배울랴-. 쟈번이 곰지미 체육관 가서 반장 수영허는 거 보니께 바다이서 물장구 치는 거랑은 달르더먼-. 아주 걍 멋있더라니께?”
이동호와는 달리, 손유진을 경쟁자로 여기는 김호진도 가세했다.
“같이 밥 먹고 노란 버스 타고 가자.”
“그래. 나는 좋아. 반장네 집 놀러 가면 멍멍이도 많고, 집에 갈 때는 삼촌이 데려다주시니까.”
“허이구-. 이유가 뭐 필요 있다구 글케 길게 말헌다니. 남자는 입이 무거우야 된댜. 손유진네 오빠마냥.”
뭐래. 저도 말 많구만.
어이없다는 듯 김호진을 힐끗거린 손유진이 팔을 뻗어 친구들을 제지했다. 급식실 입구에서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도록.
“왜 그려?”
“유치원 동생들 먼저 들어간 다음에 들어가자.”
“이이-. 그러야지. 부자유친이여어-.”
천길룡에게 풍월깨나 배운 김호진이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고.
어려운 말이라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사실만으로 하루가 짧게 느껴졌다.
수업 시간도 중학교보다 5분이 더 긴 데다 정규수업도 많은 탓이다. 곧 4월이 되어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면 진혁은 동생들과 놀아줄 시간이 거의 없을 듯했다.
“음-. 이게 유진이가 직접 숙제한 거라고?”
“네!”
씩씩하게 대답하는 유진이 뒤편으로,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던 엄마가 흐뭇하게 웃었다. 직접 목격한 사람으로서, 엄마로서 딸이 어지간히 대견한 모양이다.
“엄마가 숙제 좀 보자니까 보여주기만 하고, 작성은 손수 하겠다더라. 오빠보다 지독한 공붓벌레가 되려나 봐.”
아니, 어머니 지독하다뇨.
아무리 직계존속이라지만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네.
코를 실룩거린 진혁은 유진이가 내민 숙제를 살펴보았다.
「우리 가족 소개」
- 가족을 소개하고 잘하는 것을 써 보아요.
민용락에게 배운 영어를 뽐내고 싶었을까, 맨 위에 제법 깔끔한 솜씨로 영어 단어를 적어둔 게 눈에 띈다.
「PARTNER」
‘패밀리가 아니고?’
유진이가 눈을 빛내고 있었기에 진혁은 속으로만 의문을 표했다.
유진이가 직접 작성했다는 첫 줄부터 범상치 않았다.
진혁은 보조개가 파이도록 입술을 꾹 닫아 웃음을 참았다.
지렁이가 날아가는 듯했던 글씨체는 제법 다듬어져 있었지만······.
「아빠: 손광연, 방구를 잘 껴요.
엄마: 한유영, 손이 매워요 아빠가 무서워해요.」
문석일, 양강욱, 장진남, 민용락을 비롯해 정상태와 강헌창, 김인랑의 이름도 있었다. 문석일이 잘하는 것으로는 ‘선글라스를 잘 쓴다’. 양강욱은 ‘아빠를 잘 도와준다’. 주신영과 김상호 등 자주 보이지 않는 요원들의 이름도 삼촌 목록에 올라 있었다.
「오빠: 손진혁, 잘 알려줘요.」
뭘?
이것저것 자상하게 설명한다는 뜻이려니.
그래도 오빠인데 너무 짧게 쓴 거 아닌가? 좀 서운하려고 하네.
「동생: 손정원, 잘 웃어요.
동생: 장군이, 침을 잘 흘려요.」
글쎄, 유진이는 장군이를 동생으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장군이는 생각이 다른 것 같던데.
홍시와 천마, 광마도 당당히 동생 목록에 올라 있었다.
「동생: 홍시, 나만 따라다녀요.
동생: 첨마, 물고기를 잘 잡아요.
동생: 광마, 겁이 많아요.
동생: 검마, 귀엽어요.」
그렇게나 탐을 내더니 남의 집 개 검마까지 족보에 올려 놓았다.
“으음-.”
이걸 가족 소개로 제출해도 되려나?
뭐, 큰 의미 없는 숙제겠지만 선생님 입장에서는 이상하게 받아들일 것 같은데.
“뒷장도 있어요오-.”
“더 있어?”
사락-.
유진이가 종이를 뒤집었다. 글자를 크게 그리다 보니 공간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형: 최태양, 동화책을 잘 읽은다. 어부바를 잘해요.」
얼씨구?
남의 집 개뿐만 아니라 귀한 아들까지 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