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트너 (5) >
사립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친구가 없었다.
대입시험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던 학풍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학생의 개인사엔 관심 없이 입시 실적에만 몰두하는 교사들도 그런 분위기에 한몫했으리라.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교사들도 학생 개개인에게 관심을 두거나 편애하는 이는 없었다. 일부 학생을 문제 학생으로 분류해 매타작을 하는 교사는 있었지만.
“그거 좋은 생각인데? 역시 반장감이 되는구만?”
이번에 만난 담임 교사는 달랐다.
학생들의 고요한 반발에도 불구, 진혁의 수작은 교사의 편애를 등에 업고 무사 통과되었다.
‘예스! 좋았어.’
진혁은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과거에도 고등학교 시절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빛처럼 흘러갔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기숙사에 틀어박혀 공부만 해서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버린 건 사실이다.
어쩌면 그땐 정 둘 곳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옆에 앉은 이승훈에게 시선을 주었다.
‘짜식-.’
이 덩치 큰 씨름선수 겸 모범생은 수학 교과서를 펼치고 연신 중얼거렸다. 공부도 적성이라지만 이승훈은 운동선수의 끈기 같은 것인지, 의자에 한 번 엉덩이를 붙이면 머리에서 쥐가 날 때까지 책을 파고들었다.
과거에도 머리가 좋다는 건 알았지만 우등생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진혁을 만나 또 하나의 적성을 찾고 달라진 거다.
진혁의 과거와 현재, 두 개의 생을 형상화한다면 숫자 ‘8’이나 알파벳 ‘X’와 비슷하지 않을까. 두 문자는 전혀 닮지 않은 듯하지만 하나의 접점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접점이 이승훈이다.
전생에도 중학교부터 마지막까지 인연이 닿아 있었던 친구. 비록 서로의 양상은 달라졌을지라도, 이번에도 시작점이 같은 친구.
중학교에서 이승훈을 만난 덕분에 두 개의 생이 스치듯 교차했으며, 고등학교를 함께 다니게 되어 본격적으로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전혀 다른 양상으로.
뭐, 혼자만의 감상일 뿐이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때도, 지금도 내 옆에 있네.’
이제는 절친의 위치를 최미경이 차지해버렸지만, 이승훈은 두 번의 생을 통틀어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툭-.
산뜻한 기분을 담아 가볍게 쥔 주먹으로 이승훈의 어깨를 쳤다.
화들짝 놀란 친구가 진혁을 보았다. 선량하고 총기 넘치는 눈빛으로.
“이? 왜 그려, 회장?”
“열심히 하라고.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아-, 마침 잘 됐구먼. 여기 보먼 연립이차방정식이 쪼금-.”
이런 건방진 신입생을 보았나.
“진도 내에서.”
아직 진도를 나가지 않은 목차는 묻지 말라는 뜻이다.
오직 진혁만이, 교과목 진도를 앞지를 수 있다.
1등 못잃어.
***
드르륵-.
“쉬는 시간에 미안하다.”
쉬는 시간이 되었지만 1학년들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교실 앞뒤로 2, 3학년 선배들이 빼곡하게 들어왔으니까.
그 중엔 여학생들도 다수 보였다.
3학년 여학생 한 명이 교단에 올랐다.
“일학년 후배들 잠깐 주목해줄래?”
처음 고등학생이 된 친구들도, 두 번째인 진혁도 영문을 몰라 눈을 굴렸다.
칠공주 같은 건가?
설마 삥뜯으려는 건 아니겠지?
“고등학교에 왔으니 우리 학교에 어떤 학생부가 있고 어떤 서클이 있는지 알아두면 좋겠지? 그래서 소개도 하고 홍보도 할 겸 온 거야. 긴장 풀고 편하게 앉아서 들어-. 우선 선도부부터 할까?”
여학생의 소개를 받은 남학생이 연단에 올랐다.
반듯하게 다린 빛바랜 네이비색 교복이 나 3학년이요 하고 우쭐거리는 듯했다.
“나는 작년까지 선도부장을 했던 고을이다. 선도부원을 뽑고 있어. 선도부는 학생으로서 품위를 지키고 바른생활을 하도록 교우들을 지도하는-.”
그때였다.
킥킥-. 으허허-.
순둥이 이승훈이 책상을 탕탕 두드리며 웃었다.
이름이 특이해서 저러는 모양이라고 친구들은 생각했다.
표정을 굳힌 선도부원들이 노려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이승훈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야, 야. 너 왜그래?”
“선배님 얘기허시는디 허파에 바람 좀 조절햄마.”
학급 친구들이 걱정스레 이승훈을 말렸지만, 친구가 왜 웃는지 아는 진혁은 팔짱을 낀 채 창밖만 응시했다. 참을 수 없는 한심함에 한숨을 내뱉으며.
‘바른생활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중학교 화장실에서 담배나 피우던 놈이.’
그렇다.
진혁과 마찰을 빚었던 그 고교생이 3학년이 되어 은퇴를 앞두고 1학년생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찾아온 것.
으허허-.
“진혁아, 이래서 세상이 재밌다구 허는 모냥여-.”
이승훈이 저렇게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건 옆에 있는 진혁을 믿어서 그런 것이겠지. 웃는 음성은 유쾌했으나 입가에는 한심하다는 조소가 배어 있었다. 아무리 사람 좋은 이승훈이라도 가증스러움은 견딜 수 없었으리라.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 선도부원들이 이승훈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승훈의 소속이 신경 쓰이는지 나쁜 말은 애써 참는 눈치였다. 씨름부라는 소속이 아니라도 체격만 놓고 보면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녀석이기는 하다.
“야, 인마. 아무리 씨름부여도 그렇지, 일학년이 우리 선배님 얘기허시는디 글케······.”
드르륵-.
잠자코 듣던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실의 모든 눈이 진혁에게 쏠렸다.
이승훈에게 한소리를 하려던 녀석이 진혁을 알아보고는 주춤 물러섰다.
진혁이 누구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눈앞에서 보니 실로 위압적이지 않은가.
교단의 고을도 그제야 진혁을 알아보고 당황한 눈치였는데, 너그러운 진혁은 내심 이해했다. 키도 더 자라고 복장도 바뀌었으니······ 아니, 그래도 그렇지 몰라볼 수가 있나? 그런 눈썰미로 선도부를 한다고?
‘마음 같아서는 개쪽을 주고 싶지만 참아야지.’
교복을 입었더니 중학교 때보다 몸가짐이 반듯해지는 느낌이었다.
눈앞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2학년생에게 예의 바르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선도부 하는 일이 뭐라고요?”
“품위 유지, 바른 학교생활 지도-.”
휘유-.
굳이 말씨름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이들도 어차피 해오던 관성대로 하는 일일 테니.
“질문이 더 있습니다. 선도부는 누가 만든 건가요?”
“어······, 아마 옛날 학생회 선배들이 만들었을걸? 관심 있니?”
부드러운 말투에 안심했는지 2학년생이 제법 상냥하게 굴었다.
그러나 진혁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그럼 학생회에서 없애는 것도 가능하겠네요?”
“그렇지. 학생회 임원 회의를 거치면 학생부 신설이나 폐지가 가능해. 민주적이야.”
민주적인 거 좋지.
교내 경찰이라도 된 양 아침부터 다른 학생들의 두발과 복장을 단속하고 등교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문을 걸어 잠그던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엎드려뻗쳐도 시키고.
가장 일찍 등교하는 진혁은 중학교 때부터 지켜보며 벼르던 중이었다.
내년에 당장 선도부부터 없애야겠구먼. 들리지 않도록 중얼거리고는 이승훈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만 웃어라.”
“이이-, 그려. 내가 사춘기가 왔능가 한 번 터지먼 오줌마냥 멈출 수가 웁써. 아이구-, 선배님덜 죄송허유-.”
에라이 조슬찬 같은 놈아.
피식 웃은 진혁은 교단의 고을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끊어서 죄송합니다. 계속하시죠.”
어차피 다른 부장들의 소개도 들어야 할 테고, 동아리 소개까지 듣자면 쉬는 시간이 짧을 터였다. 시간을 지연시키면 결국 애꿎은 친구들만 피해를 보게 된다.
담배 끊으라는 것보단 말 끊는 게 났잖여? 키득거리는 이승훈의 옆구리에 툭- 팔꿈치를 꽂았다. 그러는 진혁도 웃고 있었다.
그다지 재미도 없는데 웃는 친구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친구가 웃으니 저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
미술부, 합창부, 십자수 써클, 시화클럽, 기타 동아리 등등.
고등학교쯤 되니 취미 동아리가 다양했다. 공학이라는 특징이 그 다양성에 반영되었으리라.
남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여자 선배들이 홍보하러 온 이유도 있을 테고.
“우리는 나중에 시화전도 열 거야. 그림 그리고 시도 쓰고-.”
진혁이 듣기에도 동아리라는 게 신기하고 낯선데 친구들은 오죽할까.
“누나 예뻐요-!”
“누나, 몇 학년 몇 반이세요?”
“누나아-, 남자친구 있어요?”
뭐, 젯밥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지만.
누나, 누나누나누나-.
에라이 염병택 같은 놈들아.
그래도 확실히 남학생만 있던 중학교보다는 공기가 더 부드러웠다.
중학교 때는 오종대였던가? 맞짱 뜨자며 쳐들어오는 놈도 없고.
드르르- 콰아앙-!
점심 시간이 되자 다른 녀석이 쳐들어왔다.
“손진혁 어딨냐!”
저 새낀 또 뭐야아······.
“누나랑 밥 먹으러 가자!”
최미경 여고생이었다.
***
이승훈이 태어나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날이다.
최미경 여고생 때문이었다.
뒷문을 막고 목놓아 손진혁을 외치는 최미경에게 모든 학생의 이목이 쏠렸을 때, 등 뒤로 신우성이 나타났다.
그런데 저 도토리만 한 여학생이 겁도 없이 신우성과 드잡이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야! 내가 먼저 왔다고오-! 네가 전세 냈어? 덩치 크면 다야?”
“아니, 그렇다는 건 아닌데. 그냥 길 좀 비켜달라고 그런 거야아······.”
드잡이라기보다는 순진한 신우성을 향한 최미경의 일방적인 행패였다.
이승훈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겁 없이 남학생 반에 쳐들어와서는 목에 핏대를 세우는 저 여인은 간이 부었단 말인가? 아니면 간이 없나? 체격이 작아서 간이 들어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걸까?
“말로 하면 되지 왜 미는데! 너 인마 내 친구가 누군지 알아? 너 손진혁 알아? 내가 인마 걔 어릴 때 쉬하고 지퍼에 고추 껴서 울 때 빼준 사람이야!”
아니, 저 미친놈이?
최미경의 악다구니를 발판 삼아, 까맣게 잊고 있던 진혁의 흑역사 하나가 자동으로 되살아났다.
‘시발. 그냥 과학고 갈걸 그랬나 봐······.’
키키키키킥-.
학급 친구들이 일제히 진혁을 보며 눈매를 둥그렇게 말았다.
‘쥐구멍 어딨냐. 아오 빌어먹을 콘크리트 건물. 구멍도 없네.’
내게 강 같은 평화.
눈을 질끈 감은 진혁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험상궂게 찡그려진 미간이 진혁의 속내를 대변했다.
신우성은 목소리도 높이지 않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내가 미안하게 됐어. 밀려고 그런 게 아니라 내 배가 어쩌다 보니······.”
신우성의 배가 최미경의 등에 닿은 모양이었다.
고깃집 아들에 중량급 씨름선수의 배가 나오지 않기도 힘든 일이다.
사태를 진정시킬 사람은 진혁뿐이었다. 울상이 되어 어물거리는 신우성을 달래는 동시에 싸움닭 같은 최미경을 말려야 했다.
“그만해. 같이 가면 되지.”
화해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씨름부라는 말에 최미경이 못이긴 척 용서했으니까.
“인사해. 태양 형 동생이야.”
“와아-.”
“진짜여?”
신우성의 눈이 선망으로 반짝였고, 이승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승훈의 표정을 살핀 진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긴, 누가 믿겠나.
‘나도 안 믿겨.’
최태양과 최미경은 체격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난다.
어린 시절의 진혁과 유진이만큼이나.
“야아-. 진짜지 그럼 가짜겠-니이?”
발끈하려던 최미경의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진혁은 최미경이 갑자기 나긋해진 이유를 알 듯했다.
‘승훈이가 태양형이랑 분위기가 비슷하지.’
수염 자국 없이 허여멀건 얼굴도, 떡대도.
최미경 여고생은 지금 이승훈을 보며 오빠를 떠올렸을 거다.
그런 짐작도 하는 걸 보면 손진혁도 많이 인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이름 뭐야?”
“난 신우-.”
진혁은 재빨리 신우성의 팔을 잡아 말을 끊었다.
그래야 신우성이 덜 쪽팔릴 테니까.
지금도 최미경은 이승훈만 보고 있잖아.
“이승훈인디?”
“어디 살아?”
최미경은 다른 친구들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 급식실로 향하며 대놓고 이승훈을 취조하기 시작했다.
“자취 허는디?”
“그래? 너, 라면 잘 끓여?”
“그거 뭐 어렵다구 그런다니? 물 끓이구 면이랑 스프 늫구······.”
전복두 늫구, 가리비랑 미더덕두 늫구, 꽃게두 한 마리 늫구, 우럭두 있으믄 늫구, 우럭 간은 꼭 들어가야지······. 어촌계장식 라면 레시피를 읊는 이승훈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최미경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흐음-.
팔짱낀 채 뒤를 따르던 진혁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승훈이 저 새끼 저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