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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200화 (200/338)

< 파트너 (4) >

***

검푸른 하늘을 떠받친 묵빛 대지를 가르며 달려오는 광휘의 헬리오스.

눈부시게 라이트를 밝힌 새벽 첫차를 본 진혁의 감상이었다.

부지런한 시골 사람들보다 먼저 움직이는 저 버스의 운전기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

‘오-, 고등학생 돼서 그런가? 나 쫌 쎈치해진 듯.’

우우웅- 쿠구구구-.

태양보다 먼저 아침을 열며 달려오던 버스가 속도를 줄였다.

‘헤헤-. 버스 타고 등교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책가방과 운동복 가방.

두 개의 가방을 메고, 아직 차가운 새벽공기에 느릿하게 입김을 뿜던 진혁이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교복을 입고 첫차에 오르는 걸음이 낯선 세계에 발을 들이는 이방인처럼 조심스럽다. 그러나 다리에는 힘이 넘쳤고, 얼굴엔 도전자의 흥분 어린 미소가 걸렸다.

“안녕하세요.”

“으허엄-. 그려. 오래 살구 볼 일이네.”

눈곱도 떼지 못한 버스 기사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운전석 위에 매달린 시계를 확인했다. 내가 시간을 잘못 알고 늦게 출발했나, 하는 눈빛이다.

별일은 별일이다.

첫차에 승객이 오르는 일도 드물었지만 학생들은 대개 다음 차로 나가니까.

“아적 어두워서 찬찬히 가께잉?”

“네.”

당연히 버스 안에는 기사와 진혁 둘뿐, 친구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시간이다.

이 버스를 타고 나가 학교 앞에서 내리면 7시쯤 되려나.

“춘디 히타 틀어주까?”

“편하신 대로요.”

한겨울에도 자전거로 통학하던 몸인데 썰렁한 버스가 대수인가.

찌뿌듯한 몸이 거슬릴 뿐이다. 등교 첫날이라고 매일 하던 아침 운동을 걸렀더니 온몸이 간지럽고 종아리와 허벅지에서 심장이 뛰는 듯한 박동이 느껴졌다.

엄마 때문이었다.

어젯밤의 일이다.

폭죽의 후유증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는지, 고통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함인지. 손자국이 남은 아빠의 등에 푸라민안티를 바르고 나온 엄마가 진혁을 불렀다.

*

“손진혁.”

왔어요-. 아, 이게 아니고.

“네.”

단 한 번도 이렇게 부른 일이 없는 분인데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적어도 진혁이 보기에는 그랬다. 아마 철부지 남편을 진압한 기세가 남은 탓이려니.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자, 한유영이 용건을 밝혔다.

“내일부터 버스 타고 다녀. 운동도 좋지만 야자도 빼먹지 마.”

진혁은 조심스레 숨을 들이쉬었다.

이 엄마가 왜 갑자기 엄한 엄마 코스프레일까.

하나, 부모 마음을 자식이 들여다보는 게 가당키나 한가. 오해 방지를 위해서라도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게 제일이다.

엄마, 왜요오?

어머니께옵서, 어찌하여 그런 하명을 하고 계시온지······.

텔 미 와이.

뭐라고 여쭈어야 엄마가 상처받지 않으실까, 진혁은 상상의 대본을 펼쳤다.

그러나 한유영이 한발 빨랐다.

“도로가 좋아져서 차들이 쌩쌩 달리잖아. 어두울 때 다니다가 우리 아들 위험해질까 봐 그래. 그리고 친구들하고 어울려야지, 집에서 가족과 어울리는 건 주말로 충분해. 이제 아빠도 사업하시느라 평일엔 보기 힘들잖니.”

합숙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친구들을 배웅하던 아들의 쓸쓸한 모습이 한유영의 뇌리에 너무 강하게 남았다. 이제 아빠보다 커버린 아들, 어차피 품에서 떠나보내야 할 자식이라면 사회화 시기에 맞춰 풀어주는 게 옳지 않을까.

“사람은 그런 거야. 자라면 자란 만큼, 넓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과 어울려야지. 사람 속에서 살아야 인간이랬어. 좁은 집에만 있으면 생각도 좁아져요.”

지금 사는 집이 좁지는 않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똑똑한 아들이니 알아들었겠지.

‘치마폭으로 감싸는 것도 이제 그만해야지.’

뭐······.

열 살쯤부터는 엄마에게 안긴 기억도 없고, 제 할 일 알아서 해온 아들이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말재주 없는 엄마는 아들이 서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타일렀다.

“그럴게요.”

머뭇거림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진혁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이놈 보게?

야, 그렇다고 그렇게 칼같이 대답하냐.

한유영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남편이 농사를 지을 때도, 사업을 시작한 후로도 항상 엄마 곁을 지키던 아들인데 기다렸다는 듯 떠나려 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생각해보면 진혁이 있었기에 유진이도 무사히 낳을 수 있었고, 집을 비울 때도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하와이도 다녀왔지.

하휴-. 까닭 모를 한숨과 함께 팔이 저절로 뻗어나갔다.

“아이구- 내 새끼. 언제 이렇게 컸니.”

진혁의 뺨을 쓰다듬으며, 한유영은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진혁의 머리를 깎던 날처럼.

진혁은 내심 갸웃거렸다.

엄마가 그러라고 하시니 군말 없이 따르겠다는 건데, 혼자 엄한 척했다가, 감동 먹었다가.

‘엄마 벌써 갱년기 오셨나?’

갱년기엔 뭘 드시면 좋은지 일헌이 성한테 물어봐야겠다.

***

씨름부 훈련장에서 옷부터 갈아입었다.

교복에서 운동복으로.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났던 날-.”

매일 이용하던 곳인데도 이상하게 어색한 기분이 들어 노래를 흥얼거렸다.

운동복을 입고 손가락부터 발끝까지 스트레칭을 하면, 그다음엔 가볍게 운동장을 달린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신분이 바뀌었을 뿐, 진혁의 하루에는 변함이 없었다.

훅훅-.

밧줄을 오르내리고, 턱걸이를 하고, 씨름선수용 튜브를 당기고.

파바박-.

홀로 단거리 기록을 측정하고.

쿨다운을 위해 느린 속도로 운동장을 달리고, 마무리로 손발을 털며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적적하네.’

이럴 때 외롭다고 하던가.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한기 가득한 공기로 폐를 채우고 볼을 부풀린 채 학교를 둘러보았다.

숙직 교사가 일어났는지 교실에 하나둘 차례대로 불이 켜졌고, 교복 차림의 고등학생들이 등교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정경이었으나 평소와 다른 점을 깨달은 진혁은 다소 풀죽은 얼굴이 되었다.

‘병택이랑 슬찬이가 없어서 그렇구나.’

지난가을을 기점으로 육상선수를 그만두었지만 염병택과 조슬찬은 친구가 심심할까, 종종 함께 달리거나 벤치에 앉아 구경을 했다. 좋은 녀석들이 부리는 감동적인 오지랖이었다.

‘누나도 없어.’

뒤늦게 인연이 닿은 황가영이 아침마다 찾아와 수다를 떨며 대화의 재미를 가르쳐 주기도 했지.

대학교 개강은 아직이겠지? 기숙사에 들어갔다는데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으려나. 친구들 이쁜가······. 이쁘겠지. 여대생이니까.

‘왜 이래!’

진혁은 급히 고개를 저어 급발진하는 뇌를 멈춰세웠다.

함께 달려도, 혼자 달려도 누군가 지켜봐주고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진혁에게 큰 위안이었다. 그건 마치 또 다른 자신이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함께 달리는 기분이랄까.

쩝-.

강하게 입맛을 다셨다. 애틋함인지 서운함인지 애매한 감정을 털어버리고자.

감상에 젖어 위축될 수는 없는 노릇, 이 또한 스스로 극복해야 할 일이었다.

‘뭐, 내가 좋아서 하는 운동이니까.’

결국 노력도,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의 몫이다.

코치도, 파트너도 없는 선수생활이 시작되었다.

***

7개 학급 중 1반부터 3반까지는 여학생, 4반부터 7반까지는 남학생 학급이다.

그리고 입학 성적순으로 학급을 배치한다

입학시험과 체력장, 중학교 내신에서 만점을 획득해 당연히 수석으로 입학한 진혁은 4반이었다.

하지 못한 아침 운동, 자전거에 쏟아붓지 못한 에너지를 적당히 태우고 교실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다른 자리에 앉고 싶어도 체격이 허락하지 않는다.

홍기준이 선물한 CD플레이어로 음악이라도 들을까 하다가 관두었다.

부지런한 신입생들이 하나둘 교실에 들어서고 있었으니까.

‘달라져야지.’

진혁은 친구들에게 일일이 손을 흔들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외면하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닌가.

“어서 와라.”

“안녕?”

그래도 중학생보다는 제법 머리가 컸다고, 학급 친구들은 쭈뼛거리지 않고 반갑게 호응했다.

뒷문을 꽉 채우는 덩치도 들어왔다.

이승훈 어서 오고.

중학교 1학년 때에 이어 고등학교에서도 같은 반이 되었다.

“여어-, 회장. 일찍 온 겨? 오늘두 운동헌 겨?”

이승훈이 진혁의 덜 마른 까까머리에 눈길을 주었다.

“어서 와라. 씨름부는 언제부터 훈련이지?”

“어, 니열부터랴.”

“하숙집은?”

이승훈의 집은 진혁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에 있다.

애초에 중학교도 그 지역에서 다녀야 하는데 순전히 씨름 때문에 태양중학교에 진학한 거였고, 이승훈은 중학교 때부터 하숙 생활을 해야 했다.

“자취방으루 구했어. 학교이서두 세끼 먹을 수 있구 저녁은 회식 자주 허니께 고등학교부터는 자취헐라고. 나처럼 많이 먹는 눔이 하숙허는 건 민폐여.”

이승훈이 중학교 때까지 챙겨주시던 하숙집 할머니가 겨울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한창 클 때고 힘쓰는 운동하는데 잘 먹어야 한다며 배가 불러도 계속 먹이는 분이었다고.

유학생으로 여길만한 타지역 학생도 이제 거의 없는 탓에 읍내에 하숙을 치는 집도 거의 남지 않았다고 한다.

“핵교 근처는 자취방이 비싸서 산 밑이 저기 워디여-. 해간 그짝이루 방 잡었지.”

중형 어선을 보유한 어촌계장이면 부자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승훈은 운동하는 아들 때문에 아버지가 고생이라며 알뜰한 모습을 보였더랬다.

‘짜식, 착해 빠져 가지고.’

그런 심성이라 이승훈은 체육 시간에 따로 철봉에 매달리거나 진혁과만 어울렸다. 부딪치기라도 하면 친구들 다친다며.

두툼한 손으로 구레나룻을 긁는 이승훈의 모습에서 최태양이 비쳐 보였다.

“아침은 어떻게 했니?”

“급식실이서 먹었지. 할무니가 아침마다 끓여주시던 북엇국은 아니어도 먹을만혀. 많이 먹는다고 뭐라 허지두 않구.”

이승훈은 진혁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중학교와 달리 1인 책상이라 관계는 없지만 둘이 나란히 앉는 것만으로 교실이 꽉 차 보였다.

“창가 자리로 옮기자.”

“이이-, 그게 좋겄네. 우덜이 여기 앉으먼 애덜 답답혀-.”

창틀에 팔을 기대고, 그 팔로 턱을 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또한 중학교 3년 내내 취하던 자세라 새롭지도 않다.

새로운 것이라면 동급생들일 테지.

남학생 200명 중 태양중학교에서 온 녀석들이 120명쯤 된다고 했다.

태양중학교 졸업생이 370명 정도였으니 250명 넘는 인원이 고등학교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떠난 것이다. 대도시나 인근 도시, 혹은 시골로. 그 말은 입학생의 40% 인원은 다른 지역 중학교 출신이라는 뜻이었다.

전생과 다른 학교에서, 낯선 인물들과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중학교 때보다는 철이 들었을 테니 조용하겠지?’

과연 그럴까.

진혁의 바람을 무시하듯, 평화가 깨지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웅성웅성-. 교실이 꽉 들어차며 뜨거운 소요가 시동을 걸었다.

“쎅쓰! 쎅쓰!”

와씨, 놀래라.

중학교 때 그 새낀가?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진혁이 눈을 굴려 섹무새를 찾았다.

다른 새끼네.

빗자루로 검술 대결을 펼치는 신입생들도 빼놓을 수 없지.

“천마대멸겁!”

“독사탐와!”

에휴-, 미친놈들 진짜.

*

담임 교사 진행 하에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진혁은 할 말이 많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었고.

“손진혁입니다.”

오오오-. 짝짝짝-.

그저 연단에 올라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 큰 호응이 따랐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침 일찍 와서 친구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고 태양군에서 아버지 손광연보다 유명해진 상태였으니.

“용감한 시민이다!”

“우유 잘 마실게!”

자기소개가 끝나면 반장을 뽑는다.

어딘가 그렇게 강제하는 매뉴얼이라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지만 새 학기에는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결과도 당연했고.

‘이제 반장 안 하면 이상해.’

자기소개 때는 이름만 밝히고 내려왔는데, 당선인사는 좀 길게 했다.

“사건 사고 없이, 아프거나 방황하는 친구 없이 즐거운 학창시절로 남기를 바랍니다. 반장이 아닌 친구로 남도록, 학창시절의 긍정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도록 저 또한 노력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력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앞으로 매 수업 선생님에 대한 인사는 당번이 돌아가며 하는 것으로······.”

으응?

저게 권력을 나누는 거야?

일 떠넘기는 거 아니고?

웅성거리는 친구들을 보며 진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영악한 새끼들, 안 속네?’

통찰력이 남다르잖아.

역시 고등학생이라 이건가.

눈치만은 진혁보다 빠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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