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트너 (3) >
***
널찍한 운동장에 꽤 많은 신입생이 모였다.
어동초등학교는 폐교 수순을 밟기는커녕 증축을 거쳐 2층짜리 학교로 탈바꿈했다.
[저희 어동국민학교는 일천구백이십칠 년 어동한문사숙으로 설립된 이래······.]
뭐, 오래됐다는 자랑이 하고 싶은 모양이다.
일제강점기에 학술강습소 인가를 득하고, 해방 후 태양공립학교 어동분실 인가를 득하고 1960년에 비로소 어동국민학교로 승격이 되었고, 어쩌고저쩌고.
[지난해 지역 유망기업 제너럴 패밀리와 협약을 맺어 대도시에서만 시행되던 급식을 군 최초로 실시하게 되었으며-, 증축한 교실에서 방과 후 수업과 돌봄 교실을 운영하여-.]
신입생이 40명에 육박하고, 많지는 않지만 전학생이 지속 유입되는 상황인데 폐교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멍청한 일일 것이다.
[······ 이것으로-, 어동국민학교 제 육십팔 회 신입생 입학식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선생님 인솔에 따라 각 반으로 이동해 주세요-. 참관을 원하시는 학부형들께서는 복도에서 지켜봐 주시고······.]
이제는 하얀 타이즈와 노란 옷을 입지 않는 친구들이 담임 교사를 따라 교실로 이동했다.
다른 친구들은 다리가 짧아 계단을 하나씩 올랐지만, 손유진은 용감한 대장답게 두 칸씩 성큼성큼 밟았다. 늘 그랬듯 손유진의 좌우에는 김호진과 이동호가 함께했다.
두근두근-.
드디어 학생이다!
손유진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만세는 동생이 태어났을 때만 부르는 거라고 오빠가 그랬어. 엄마랑 아빠가 밤에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 더는 동생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데, 그렇다면 만세는 이제 외치지 못하는 건가 봐.
“반가워요. 앞에 있는 선생님 이름은······.”
젊은 삼촌 선생님이 하는 말을 귀담아들으며 교탁 옆에 쌓인 물체를 유심히 살폈다.
저건 그냥 책이 아니다.
무려, 교과서라고 부르는 책이다.
키가 큰 탓에 맨 뒤에 앉았음에도 손유진의 예리한 시력은 물체의 정체를 정확히 식별했다.
툭-.
드디어 선생님이 교과서를 묶은 끈을 잘랐다.
그와 함께, 한껏 치솟은 손유진의 기대치를 반영하듯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뒤에서부터 한 친구씩 나와서 가져갈까?”
교과서를 받아 자리로 돌아온 손유진은, 다른 친구들처럼 바로 책가방에 넣지 않고 표지에 삐뚤빼뚤 글자를 그렸다.
「손유진」
이럴 때 감격적? 감동적이라고 표현하는 거겠지.
두근두근-.
‘내 교과서예요.’
열심히 공부해서 공학자가 되어야지.
공학자가 되면 아빠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
울렁거리는 기분 탓일까, 통통한 손으로 쓰다듬자 책이 부끄럽게 떠는 듯했다.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놀라 눈을 강하게 깜빡일 때, 선생님이 교탁에 뭔가를 펼쳤다.
두꺼운 초록색 책뚜껑 때문에 딱딱해 보이며, 폭이 책의 절반쯤밖에 안 되는 탓에 길쭉해 보이는 녀석.
‘오오-, 저건 출석부!’
이번에도 손유진의 예리한 통찰이 들어맞았다.
“내일부터 학교에 오면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거예요. 지금부터 연습을 할 테니까,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면 손을 높이 들고 대답하자.”
“네에에-.”
앳된 음성이 교실을 가득 메우자, 흐뭇해진 선생님이 벙글거렸다.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손유진은 기억력이 비상하다.
누군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가 그대로 반복하는 능력이란, 비상하다는 말로 형용하기 부족한 비범함이다. 아직 어린 탓에 응용력이 부족한지라 때와 장소, 의미를 가리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특출난 건 사실이다.
- “유진아, 유치원에서는 선생님이 부르시면 어떻게 했지?”
지난밤, 어항 물고기에게 밥을 주던 아빠가 그렇게 물었다.
표정이 진지했고, 이 아빠가 웬일로 손유진만 따로 불러서 조용히 말했기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오빠가 종종 유진이에게만 속닥이는 말이지만, 아빠는 좀 바보 같다.
그럴 땐 ‘네’하고 대답하는 건데 그 쉬운 걸 몰라서 묻잖아.
- “‘네’하고 대답했어요오-.”
- “학교에 가면 그렇게 대답하면 안 돼.”
더 심각해진 표정으로 아빠가 고개를 저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였다.
당연히 손유진은 당황할 수밖에.
- “그럼 뭐라고 해요오-?”
- “학교에선 말이지······.”
오오?
아빠로부터 의외의 사실을 배운 손유진은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유치원을 나서면 험난한 세상이 기다린다는 아빠의 말도 평소와 달리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
후우우-, 이상하게 긴장이 된다.
이미 얼굴을 안다는 듯, 자상한 미소를 그린 담임 교사가 호명한 아이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강건우.”
“네에-.”
“김철수.”
“네에-.”
처음 보는 얼굴. 다른 곳에서 유치원을 나온 녀석들 같다.
허여멀건 얼굴이나 말투를 봤을 때 어딘가 도시적이야.
“김호진.”
“예에-.”
저 바보 같은 김호진. 예에-라니. 서태지냐?
“남주영.”
“네.”
저 녀석도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쨌든 아직 유치원생이군.
야, 대답 그렇게밖에 못 할 거면 유치원 1년 더 다녀라.
손유진은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제 차례를 기다렸다.
참된 학생은 출석 부를 때 어떻게 대답하는지 시범을 보여주마.
내가 바로 한국대학교라는 곳을 수석으로 졸업한 아빠를 둔 손유진이다.
“손유진-.”
담임 교사가 맨 뒤에 앉은 손유진을 응시했다.
여전한 미소로, SSS 삼촌들처럼 자상한 눈빛으로.
드디어!
손유진은 선생님의 눈을 피하지 않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이제 파리를 쫓듯 팔을 허우적, 거드름 피우며 느슨하게 대답하는 거다.
“왔어요오-.”
순간,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친구들의 시선이 손유진을 향했다.
복도에서 웅성거리던 어른들의 음성도 잦아들었다.
학생답고 어른스러운 대답에 감동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한데 표정이 이상했다.
유치원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괴상한 생물 보듯 하잖아. 병아리반이었던 친구도, 코끼리반, 기린반이었던 친구도 마찬가지.
“으허허허허허! 맞지! 왔으니 왔다고 말하는 게여-.”
복도에서 지켜보던 천길롱 해비지만이 손유진을 이해하는 듯했다.
정원이를 안은 엄마는 벌게진 얼굴로 눈을 감았고, SSS 삼촌들도, 다른 친구들의 엄마나 아빠들도 치아를 드러냈다.
“애아빠아- 우우나- 바부우우우-!”
정원이는 삿대질하며 아빠와 누나를 싸잡아 놀렸다.
그제야 손유진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회사에 있을 아빠가 배를 잡고 웃는 모습이 그려지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저도 모르는 새 꽉 쥐어진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빠를 향한 분노는 아니었다.
‘울면 안 돼.’
손유진 인생 최초로 쪽팔림을 경험한 날이다.
최미경 언니네서 울었던 날, 오빠가 그랬다.
아기들이나 우는 거라고.
손유진은 이제 아기가 아니다. 오빠는 여전히 아기라고 부르지만 아무튼 아니다.
후우-.
울컥 올라오는 정체 모를 감정을 억눌렀다.
‘오빠 보고 싶다요.’
다행히 선생님은 혼내지 않고 사람 좋게 웃었지만, 손유진은 그 모습에 더욱 부끄러웠다.
“자, 다음은- 이동호?”
“왔쓰-.”
“‘네’라고 해야지.”
“네. 왔어요.”
이동호, 짜식.
제법 의리있는데?
“진도준.”
“네. 와, 왔어요-.”
얼씨구?
***
동생을 무릎에 앉힌 진혁은 하염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손으로는 유진이의 고사리손을 다독이며.
유진이는 삐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진짜요? 오빠도 그랬어요오?”
으음-.
대답인지 으르렁거림인지 모를 소리를 낸 진혁은 고개만 끄덕였다.
어쩔 수 없이 차오르는 분노를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장군이가 없던 시절, 마당에서 혼자 구슬치기를 하는데 아빠가 심각한 표정으로 불렀었지.
- “진혁이 잘 들어. 학생은 출석 부를 때 ‘왔어요-’ 하고 대답하는 거야. ‘네’ 하는 건 자발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인 사람들이 하는 대답이야. 성공한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견지해야 하는 자세란다. 알겠니?”
어린 진혁은 어려운 말을 마구 남발하는 아빠 앞에서 고개만 끄덕였었다. 흐르는 콧물을 훔치며.
- “유치원을 졸업하는 순간 세상은 혼자 사는 거야.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해. 누가 때리면 한 대 더 때리고, 누가 불러도 고분고분 대답하면 얕보이는 거야. 우리 아들, 할 수 있지?”
젊은 아빠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기에 반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유진이와 달리 크게 외향적이지 못한 성격도 어른 말에 토를 달 용기를 주지 않았고.
게다가 그때만 해도 진혁에게 조언을 해주는 유일한 남자였으며 놀이 파트너였기에, 아빠에 대한 진혁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예’ 라고 대답하는 친구들을 보며 한참을 고민했었다.
나도 저렇게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아빠가 시킨 대로 하는 게 맞는 걸까.
“에히히히히히-. 나도 오빠처럼 했다아-!”
역시 얘는 이상하다. 그게 그렇게 즐거울 일인가?
유진이는 모처럼 만세 자세를 취했다.
까불이 동생이 무릎에서 떨어질까, 진혁은 유진이의 허리를 든든하게 붙잡았다.
‘아휴-. 그게 왜 생각이 나냐. 내 흑역사인데.’
아주 먼 과거의 일인데 최미경 여고생의 한 마디에 떠올라버렸다.
그래도 진혁은 서운함 없이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어어버버버-. 자기야아아악-!”
짜아악-.
퇴근한 아빠 등에서 폭죽이 터졌거든.
*
폭죽 소리에 화들짝 놀란 것도 잠시, 유진이가 공책을 꺼냈다.
“오빠, 받아쓰기 해요오-.”
내일부터 정식 교육이 시작될 텐데, 얘는 누굴 닮아서 학구열이 불타는 걸까?
개구쟁이였던 진혁은 혼자 딱지치기를 하고, 구슬치기를 했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동생의 청을 무시할 수는 없지.
운동에도, 공부에도 파트너가 있다는 건 즐겁고 동기부여가 되는 일이다.
홀로 공부하고 운동하는 진혁만큼 그 사실을 절감하는 이도 드물 터였다.
“응아-. 맘마. 맘맘맘맘마아-.”
식탁 옆 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퍼먹던 정원이가 형을 불렀다.
순둥이 정원이도 눈치는 있어서, 아빠를 정신교육 중인 엄마 대신 형을 찾는 거다.
손바닥이 형을 향하도록 두 손을 포개 ‘주세요’ 자세를 취한 아기 손이 앙증맞다. 얼굴에는 밥풀이 덕지덕지 붙었는데, 그것만 떼어 먹여도 두 숟가락은 나올 듯했다.
“아이구, 우리 정원이 맘마 더 달라고? 유진아, 잠깐만.”
정원이 얼굴에 붙었던 밥풀은 진혁의 입으로 사라졌다.
아기에게는 새 밥을 퍼서 보리차를 말아주어야 한다.
엄마가 씻어둔 묵은지를 아삭한 부분만 가위로 작게 잘라 밥 위에 올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신기한 녀석이야.’
아직 두 돌도 되지 않은 녀석이 자립심이 어찌나 강한지 누가 먹이려 하면 고개를 가로젓는다. 초등학교 등교 첫날 거리낌 없이 ‘왔어요’라고 대답할 듯한 자립심이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숟가락질로 스스로 밥을 퍼먹는데, 흘리는 양도 많지만 용케도 먹는 양이 더 많았다.
“자-, 이제 유진이 받아쓰기를 해볼까?”
어차피 진혁은 선행 학습으로 고교 1학년 과정까지 마쳤기 때문에 제 공부가 급하지 않다. 그리고 한참 나이 많은 맏이로서 동생들과 함께 뭔가를 하는 것만큼 행복한 시간도 없었다.
유진이가 건넨 바른생활 교과서를 펼쳤다.
“의자에 앉았습니다.”
“탐스러운 열매”
“소리를 질렀어요.”
“인형을 만들었다.”
“친구야, 괜찮아?”
“잔치가 벌어졌어요.”
“내가 할게.”
“끝없이 넓은 초원.”
학교 받아쓰기 시험은 열 문제일 텐데, 유진이는 욕심쟁이여서 스무 문제나 진행한 후에야 공책을 내밀었다.
“오빠가 채점해 주세요오-.”
“그래, 어디 보자.”
어차피 문제를 읊으며 채점을 염두에 두고 빨간 색연필의 살구색 옷을 벗겨 놓은 상태였다.
“채점하는 동안 유진이는 잠깐 다른 거 할래?”
“네-.”
유진이는 아빠가 가져온 이면지 뒷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저게 세일러 문 노래 가사였나?
취향 독특한 장진남이 녹화한 만화영화를 겨우내 함께 보더니 주제가를 배운 모양이다.
「받아쓰기
어동국민학교
1학년 1반 18번 손유진」
유진이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채점을 시작했다.
“전화도 할 수 없는 밤이 오면 자꾸만 설레이는 내 마음-.”
“맞고, 맞고, 이것도 맞고-.”
동그라미의 연속이었다.
유진이는 「친구야, 괜찮아?」 의 쉼표도 정확하게 찍었다.
여덟 살짜리가 문장부호 활용법까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데 뭘 더 가르칠 게 있을까.
“음-, 이건 애매하네.”
“밤 하늘 저 멀리서 빛나고 있는 꿈결 같은 우리의 사랑- 왜요오?”
유진이는 화들짝 놀라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췄다.
“‘끝없이’는 부사라서 하나의 어절로 써야 하거든. ‘끝’과 ‘없이’를 붙여야 해.”
“아, 그렇구나. 뛰어, 뜨이어쓰기는 아직 어려워요오-.”
어려운 게 정상이다.
진혁은 유진이가 펼친 교과서 페이지의 수준이 너무 높다고 생각했다.
한글을 읽고 쓰는 것만도 대단한데 겨우 여덟 살인 녀석이 띄어쓰기까지 챙기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우리 유진이, 띄어쓰기 못해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으니까 혹시라도 받아쓰기 틀려도 상심하지 마.”
“아, 그래요? 받아쓰기 못해도 돼요?”
“잘하면 좋겠지만 못한다고 큰일나는 거 아니야. 그래도 맞춤법은 지키는 게 좋아. 의자에 앉다, 아프지 않다 구분하는 거 말야. 오빠가 늘 강조하는 거지만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드물어요. 그래야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는 거거든.”
사각사각-.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달싹여 사각거리는 걸 보면 유진이는 오빠가 한 말을 또 외우는 모양이었다.
이것도 외워 봐라.
“띄어쓰기는 잘못된 규정이 문제지, 말이나 글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띄어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고. 하지만 교육을 받고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맞춤법은 지키는 게 좋겠지.”
한글은자음과모음을가로세로로묶어서쓰는방식을사용하는모아쓰기글자다.때문에띄어쓰기를하지않아도글을읽고쓰는데아무런지장이없는우수한특성을지녔다.영어처럼가로로풀어쓰기를하지않으면판독이불가능한문자와는수준이근본부터다르다.그래도가독성을위해최소한의띄어쓰기는하는게좋다. 라고 숨도 쉬지 않고 말하려던 진혁은 너무 짓궂은 것 같아 참았다.
왜냐하면.
“으으음-.”
유진이 미간 소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