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트너 (2) >
얼빠진 얼굴을 한 유명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천길룡이 팔을 휘적였다.
“내 일찍이 국수 좀 얻어먹을까 싶어 저저- 저기 가다 보면 나오는 장로 예배당을 열심히 나갔단 말이지-.”
천길룡이 걸음을 옮겼기에 유명선이 따랐다. 천길룡이 건넨 명아주 지팡이로 열심히 땅을 짚으며.
저 선배는 입을 열었다 하면 사소한 얘기도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지 않나. 흥분되고 호기심 동할 일 없는 노년에 좋은 재미가 생겼으니 어찌 포기할 수 있으랴.
“아, 처음에는 성경책도 주고 찬송가도 주고 십자가도 주더라고-.”
“아, 예.”
“근디 작년부텀인가 점심에 국수를 안 주는 거여어-. 헌금이 부족하다나 어쨌다나-.”
“아이고 저런······.”
“국수야 저기- 지넥이네 가면 노상 얻어먹을 수 있는 거라 아쉬울 것 없던 차에 읍내 성당이라는 곳에 가보지 않았겠소?”
“아하. 그러셨군요.”
헥헥-.
느릿하게 걷는 천길룡인데도 그 걸음을 따르기가 쉽지 않아 유명선은 호흡이 가빴다. 그런 와중 기이한 감각이 관자놀이를 찔렀다.
‘내 몸이 이상한 겐가?’
제 체중이 느껴지지 않았고, 무릎의 통증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야말로 괴이한 경험이었다.
구름 위를 걷는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나온 말이 아닐까.
“짜장면을 사주는 게여. 이 늙은이는 헌금인지 현금인지 하지도 않는디 말여-. 아주 잘 배운 인간들 아닌가 말이오. 허허허! 허고, 그 사제란 냥반도 보니 나와 처지가 비슷하더란 말이지. 독수공방이라더먼-. 으허허허허!”
“아, 어허허······.”
독수공방이라는 말을 하며 천길룡은 배를 잡고 웃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아 따라 웃었지만 유명선이라고 즐거울 리 없었다.
그래도 내려오면 천길룡이 있으니 외롭지는 않을 듯했다. 그렇다면 천길룡의 말대로 연수원을 조건부로 개방하는 방법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선배님. 혹시······ 성당은 두시고 절은 어떠신지?”
나이가 들며 장이 약해진 유명선은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도 마시오. 저기 보이는 구봉산 중턱에 작사라는 절이 있는데 말여-. 똥 빠지게 올라갔더니 국수만 주더이다. 뭔 늠의 절에서 국수를 주냔 말여어-. 힘들게 올라갔으면 고깃국에 쌀밥 정도는 줘야 할 게 아니냔 말이오-. 겨우 그거 먹고 산을 타라고? 불법을 행하고 도를 구한다는 놈들이 아주 돼먹지 않은 것덜이란 말이오.”
이 선배님은 초탈해도 너무 초탈해서 세상의 법칙을 발아래 두고 계시구나.
뭐라 토 달기 어려워 유명선은 입을 다물었다.
“언제 내려오실 게요?”
“4월쯤이 아닐까 합니다.”
“오시면 내 가볍고 튼튼한 지팽이 하나 만들어 드리리다. 이 늙은이 사는 곳에 쓸만한 대나무가 아주 많거든.”
“이걸 주시는 게 아니셨는지······?”
“큰일 날 소릴 허시는구먼.”
그거 사람 잡아먹는 지팽이여 이 냥반아. 천길룡이 혀를 끌끌 찼다.
“헌데 선배님께서는 주말 외엔 외부 행사가 없으신지-.”
“그저 콧바람이나 쐬며 죽을 날 바라보는 늙은이가 행사랄 게 있겠소?”
“허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정정한 모습이라 기가 찼으나 유명선은 굳이 대거리하지 않았다.
허허롭게 웃는 천길룡의 눈빛이 자못 쓸쓸했기에.
그러던 천길룡의 눈이 반짝였다.
“아, 맞다. 입교식이라는 행사에 가볼 참이오.”
“오-, 입학식이라시면······.”
“유진이라는 놈이 있는데 핵교에 들어가는데 꼭 오라더이다.”
내 친히 행차해야지.
딴 놈도 아니고 유진이라는데.
“아, 손 사장네 여식이니 회장께서도 아시겠구먼.”
“아하하-, 알다마다요.”
천하의 유명선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쌍싸대기를 올려붙인 녀석 아닌가.
그 꼬맹이가 벌써 학교에 간다니, 시간이 너무 빠르다.
아이는 자라고, 늙은이는 더욱 늙어가고.
- “그러는 해비지는 몇 살이나 먹었지요?”
어허허허허-.
유쾌한 만남을 떠올리자 흉통을 동반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
“얼룰룰루-. 깍꿍!”
“까아아-! 꺽꺽꺽-!”
유진이도 그랬지만 정원이도 잘 웃는다.
까꿍짓을 하면 눈이 사라지도록 웃고는 유심히 형의 얼굴을 살피는데,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더 해보라는 표정을 짓는다.
‘재롱을 더 떨어 보라는 얼굴이야.’
예쁜 아기는 뭘 해도 예쁜데 특히 우는 모양도 예쁘다.
그래서 엄마는 진혁이 아기일 때 일부러 약을 올려 울리기도 했다고.
진혁도 동생들을 얼러 보니 울리는 재미, 데리고 노는 재미가 아주 그만이었다. 그래도 아기 데리고 놀 때는 골탕 먹이는 재미가 최고다. 지금처럼.
“얼룰룰루-. 깍-!”
“까아-.”
그러나 정원이는 호락호락한 아기가 아니었다.
형이 까꿍짓을 멈추자 웃으려다 급히 정색을 하잖아.
“애아빠 바부우! 얍뺘빠!”
찹찹-!
“아야야-.”
대충했다가 매서운 아기 손에 주둥이를 난타당했다.
까불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뜻이겠지.
화끈거리는 입술을 뻡뻡-거리며 달래는데 유진이가 공책을 들이밀었다.
“오빠아-. 이건 왜 지읒을 써요?”
유진이가 내민 공책을 보니 삐뚤빼뚤한 솜씨로 글씨 연습을 하고 있었다.
글씨라기보다는 괴발개발 그린 고대 문자 같았지만,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는데 눈으로 보고 따라 쓰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의자에 앉아라」
왜 지읒을 쓰는 거지?
진혁은 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모르니까.
아주 가물가물한 과거가 되었지만 어찌 저 글자를 잊을 수 있을까.
여덟 살 손진혁이 받아쓰기에서 틀린 유일한 글자인데.
“음. 유진아. 그건 그냥 외우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히응 안 써요? 아, 히읗.”
“의자나 바닥에 앉을 때는 무조건 니은과 지읒을 같이 쓰는 거야. 오빠도 한 번 틀려서 그냥 외웠어.”
“오오? 오빠도 틀려요오?”
누가 뒤통수를 친 것도 아닌데 유진이 눈이 쏟아질 듯 커졌다.
“오빠도 그거 헷갈려서 ‘않다’로 썼다가 틀렸었거든. 한 번 틀린 후로는 안타, 안따 이렇게 발음으로 외웠어. 그렇게 하니까 절대 틀리지 않더라. 그래서 실패도 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하나 봐. ”
실패까지는 아니어도, 때론 틀리는 것도 괜찮더라.
엉뚱한 길에 들어섰다가 되돌아 나오는 수고에서도 얻는 게 있고, 잘못 푼 문제에서도 수리를 배울 수 있더라고.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수가 완벽의 협력자 정도는 되지 않을까.
“유진아, 너무 빨리 배우지 않아도 돼. 때 되면 다 익히게 되니까.”
급하지 않게 가도 된다는 걸 예전에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삶을 즐기는 법도 익히고, 세상을 더 많이 배웠을 텐데.
아무튼, 어릴 때는 천천히 걸으며 즐겨도 된다.
진혁은 유진이가 무리하지 말고 신나게 뛰어놀며 자라길 바랐다.
“저는 빨리 배워서 오빠처럼 보고서 쓸 거예요.”
이 고집쟁이가 그러겠다는데, 진혁은 달리 설득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유진이도 좋아하고, 진혁도 좋아하는 이마 비비기로 애정을 표현할 뿐.
이렇게 이마를 맞대고 비비면 유진이는 까마귀처럼 까아아- 소리를 내며 즐거워한다.
“우리 유진이, 내일 입학식 잘하고.”
“오빠도 같이 가면 좋은데······.”
역사적이고 기념비적인 동생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진혁은 참석할 수 없다.
진혁의 입학식도 한날한시에 다른 장소에서 치러지니까.
공교롭게도 아홉 살 차이가 나는 탓에, 오빠와 동생이 고등학교와 초등학교에 동시 입학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진혁은 고등학교 입학식에 최미경의 가족과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누구 입학식에 가야 하나 고민하는 부모님에게 당연히 유진이를 챙겨야 한다고 말해둔 터였다.
몇 번을 생각해도 고민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나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인데 뭐.’
맞붙었던 이마를 떼고 유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와-. 유진이 언제 이렇게 컸냐.’
그 갓난아기가 초등학교 입학이라니.
초등학교로의 개칭은 내년이니 유진이는 마지막 ‘국민학교’ 입학생이 되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정원이도 햇수로는 세 살이나 되었다.
“애아빠아악! 바부우우우아아악-!”
투우웅-!
평소엔 얌전한데 아찌곰만 보면 파이팅 넘치는 남자 아기이기도 했다.
내지르는 기합을 들어보면 아찌곰을 아빠라고 가정하고 혼쭐내는 것도 같고.
“애부우-.”
아찌곰을 패대기친 정원이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누나가 애지중지하는 아찌곰과 레슬링을 벌여 테크니컬 폴승을 거둘 정도로 자랐다.
저러다 아찌곰 옆구리 또 터지겠는데.
***
부우웅-.
선팅이 전혀 되지 않은 검은색 중형 세단이 느릿느릿 시골길을 달렸다.
짙은 남색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최미경 여고생이 뒷좌석에서 꾀꼬리 목소리를 뽐냈다.
“엄마, 입학식은 왜 늘 삼 월 이 일이야?”
“그거이 뭐여-, 그··· 어제가 만세운동 기념일 아닌감? 독립운동두 했으니께 학상덜두 집구석이서 놀구 자빠졌지 말구 핵교 가서 공부나 해라-. 그런 소리 아닌감?”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해 낸 이유였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듯 김순복이 피식피식 웃었다.
“피-, 그게 뭐야. 학교 가기 싫다아-. 두더집에 놀러 가고 싶어.”
“꺼불지 말구 공부나 열심히 혀어-. 우리 진혁이만큼은 바라지두 않으니께.”
제 이름이 나오자 조수석에서 잠자코 듣던 진혁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니, 왜 가만 있는 사람을 들먹이시나. 부담스럽게스리.
“허이구 우리 지넥이 타니께 차가 꽉 차네이-. 지넥이는 좋은 차 타다가 이런 차 타서 워쩐다니?”
“아빠. 그런 소리 말어. 얘는 자전거 타고 다녀서 이것도 호강이여-.”
최장환의 말도, 최미경의 말도 맞다.
버스를 타고 갈 생각이었는데 승용차를 얻어 타는 게 어디냐.
진혁은 최장환의 차를 타는 게 처음이다.
호주 홀덴사 1900cc급 엔진을 얹은 후륜 자동차인데 조수석에 앉으니 안락하고 승차감도 빼어났다.
“차가 정말 좋아요. 왕자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네요.”
“에헤이-, 좋기는 무스은-. 아- 그래두 이게 준대형으루 나온 구르마라 탈만 혀. 에비에스두 달린 차여 이게에-.”
역시 자가 운전자들에게는 자동차 칭찬을 빼놓을 수 없지.
진혁도 그 정도 센스는 갖춘 사람이다.
“기름두 겁나게 먹어. 십이 쩜 팔 키로 나온다구 차 뒤에 딱지두 붙었는디 십키로나 나올라나-.”
수동 3단 기어를 넣으며 최장환이 앓는 듯 차 자랑을 늘어놓았다.
남자들이란.
하나 장점만 늘어놓는다면 그는 한국 남자가 아니다.
“후륜이라 그른가아- 겨울이 땡땡허게 빙판 졌을 때는 걍 돌멩이라두 밟으먼 궁뎅이 살라앙- 살랑 흔드는디 얼굴이 피가 다 빠져버렸지이-. 에비에스구, 에스비에스구 간이 다 소용웁더라니께에-.”
결점을 넘어 흉이 될 만한 사실도 스스로 밝힐 줄 알아야 한다.
“이 아부지 아니구 딴 눔이었으믄 골로 갔을 겨어-.”
결국은 자기자랑으로 마무리하지만 말이다.
폭설에 이은 결빙으로 슬라이딩을 경험한 최장환이 그때를 회상하며 웃었다.
남자의 모험담엔 관심없다는 듯 최미경 여고생이 툴툴거렸다.
“예비 소집 했으면 됐지 무슨 입학식을 또 한다고 그러는지, 참 불편한 나라야.”
최미경이 투덜거리자 김순복이 딸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야, 이년아. 학상이 핵교가 허자는 대루 허먼 그만이지 뭘 앙아작거려싸?”
“엄마! 진혁이도 있는데 이년이 뭐야, 이년이!”
“넘두 아닌디 진혁이 있는 게 워뗘서!”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다투는 김순복과 최미경의 모습에 진혁의 광대가 도드라졌다. 예전 같았다면 잘못한 일도 없이 눈치를 보고 지레 겁을 집어먹었을 텐데, 이제는 저들의 행동이 자연스럽고 평범한 일상의 하나라는 것쯤 아는 까닭이다.
‘정겨운 사람들이야.’
최미경은 엄마와 친구처럼 지낸다.
바다와 들에도 함께 다니고 대중목욕탕에서 등도 밀어준다고.
굳이 목욕탕에 다니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지만 열탕과 냉탕을 오가는 재미를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유진이도 곧 그렇게 하려나?’
유진이 역시 곰짐이나 집에서 목욕이 가능한 환경이지만, 최미경의 말처럼 재미라는 게 있으니까.
“옴마랑 아빨랑은 누덜 내려주구 의료원 좀 댕겨올 테니께 뻐쓰 타구 들오너라이?”
“예, 태워주시는 것만도 감사해요.”
언제 다퉜냐는 듯, 김순복이 최미경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허이구, 우리 딸두 인쟈 고등학상이랴. 시상이 어쩜 이르케 시간이 빨르다니. 인쟈 쭘 있으믄 시집간다구 허겄네.”
“별소릴 다하네. 난 결혼 같은 거 안 할거라고오-. 독신주의 몰라? 엄마랑 살 거야.”
제딴에도 감격스러운지 최미경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왔다.
이년아, 이 옴마가 늙어서두 니 빤쓰 빨게 생겼다니? 구시렁거리듯 핀잔하는 김순복의 목소리에 진혁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쿡-.
‘독신주의 좋아하네. 너 은행원이랑 결혼했었어, 인마.’
제 인생 제가 결정한다지만 그 샌님은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남의 인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나쁜 짓인 것 같고.
최미경 여고생이 조수석 시트를 툭툭 쳤다.
“진혁아. 입학식 끝나고 반 들렀다 나온댔지?”
“응. 그렇게 들었어.”
말이 입학식이지, 예비 소집 때 만난 담임 교사와 학급 친구들 얼굴 한 번 더 보는 게 끝이다.
“햐-. 손진혁이 여자였으면 중학교도 같을 뻔했네. 아주 동반자여어-.”
한동네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제외하고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니게 된 친구. 이 정도면 동반자라 칭해도 될 듯했다.
입학식 끝나고 최미경 동반자랑 햄버거나 먹을까, 아니면 짜장면을 먹을까······.
소소한 고민을 하는데 뒤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야아-. 어흐흥. 첫날이라고 또 이상한 짓 하지 마라아-.”
“이상한 짓? 내가 뭘?”
“너 국민학교 첫날 어땠는지 기억 안 나?”
뭔 일이 있었다니?
그리 물으려던 진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와씨-. 생각났다.’
하여간 아빠가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