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트너 >
***
진혁은 홍수정보다 유세라와 통화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마저도 일주일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수준이지만.
“아, 수정이 또 운동해요?”
- 말도 마. 누굴 닮았는지 아주 미쳐가지고 요새는 듀스 춤인지 뭔지 배운다고 다니는데······. 겨울 지나면서 키는 얼마나 컸는지 아니? 지금 나랑 비슷할걸? 아니다, 나보다 큰가? 친구들은 어찌나 많은지 허구한 날 데려와서는······.
안부나 물으려 전화했던 진혁은 수화기에 영혼을 적출당하는 환상에 휩싸였다.
고막 테러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 바꿔줄 테니 좀 기다릴래? 근데 부르기가 여간 무서운 게 아냐. 얘가 사춘기가 왔는지 얼마나 공격적이냐면······.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살려주세요.
이미 홍수정과 통화하는 것인지, 유세라와 통화하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인데 누구와 더 통화한단 말입니까.
- 근데 수혁이랑 놀 때는 천사가 따로 없다? 수혁이가 요즘에는 누나 소리를 제대로 하니까 얘가 거기에 홀딱 넘어가서 아주 세상에······.
“예······. 아하, 그렇구나······.”
- 자세한 건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자.
“예······.”
뚝-.
하아-, 하얗게 불태웠다.
통화는 용건만 간단히 30분.
어차피 재단 이사장과 선수가 직접 소통할 일은 많지 않다.
계약도 직원을 통하면 될 일인데, 개인적 친분이 있으니 직접 진행한 거였다.
필요한 이야기는 민용락을 통해 하면 그만, 그런 일을 맡아 내려온 사람이니까.
“삼촌이는 배가 아찌곰이를 이겨요-.”
“뭐라도 곰인형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 다행이야.”
진혁의 방에서 손유진을 무릎에 앉힌 민용락이 긍정 마인드를 뽐냈다.
긍정을 넘어서는 낙천이다.
과거에도 진혁은 민용락의 저런 성격을 높이 샀다. 염세적 성격을 절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인간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진혁의 성격은, 민용락을 만나며 조금씩 변했었다.
성격뿐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올챙이배라는 점도 유사하다. 민용락 부장은 젊을 때는 날씬했다고, 사나이로서 거친 세상이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못하는 바람에 술배가 나온 것이라 항변하고는 했는데, 이제보니 순 뻥이다.
“결혼하시기 전에 뱃살 빼는 거 도와드릴까요?”
“아유-, 난 그런 거 싫어. 생긴 대로 살래.”
민용락은 운동과 관련된 주제보다 사업 관련으로 진혁을 찾는 날이 많았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육상 훈련으로는 손진혁에게 참견할 사람이 없을 테니 지원에만 집중하라는 지시를 유세라에게 받은 터였다.
하여, 진혁이 민용락에게 요청한 업무는 각종 자료 조사와 경제 생태계 동향 파악이 전부였다.
야심 차게 준비 중인 연구소 인력 관리도 함께.
“대리님, 삭도 연구소 인력 충원 문제는 어떻게 됐어요?”
“물색 중이래. 쉽지 않은가 봐.”
당연히 쉽지는 않겠지.
유배에 가까운 생활을 해야 하는데 오려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라는 예상은 했다. 보트가 있다지만 악천후라도 닥치면 섬을 벗어나지 못한다. 삭도 근무 조건의 장점이라고는 완벽에 가까운 안전과 높은 보수 정도였다.
사람과 부대끼는 걸 싫어하는 은둔형 외톨이 과학자에게 어울리는 곳이 삭도였다.
“완벽히 혼자 사는 거야, 거기는.”
“혼자 살면 심심하겠어요오-.”
민용락의 무릎 위에서 붕어빵을 야금야금 뜯어먹던 유진이가 끼어들었다.
“그러엄-. 혼자는 심심하지. 그런데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야.”
“왜 그러지?”
유진이는 반짝이는 유리 조각을 발견한 병아리처럼 갸웃거렸다.
가족과,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좋아하는 아이. 틈만 나면 삼촌들과 개들과 뛰어노는 에너지 충만한 여덟 살. 아직 어린 유진이는 고독을 즐기고 방해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동생의 입가에 묻은 팥앙금을 엄지로 훔쳐낸 진혁이 다시금 민용락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서울에 연구소를 두는 건 어려울까요?”
“빌딩 하나 헐고 새로 짓는다면 뭐 어렵겠어? 돈이 문제지.”
그놈의 돈, 돈. 도오온-.
“그 정도 규모는 내가 요청할 케이스가 못돼. 부회장님은 나도 어려워. 알지?”
“네.”
어려운 이야기는 어차피 진혁이 직접 해야 한다.
개인적인 부탁을 하는 건 어렵지만, 사업과 관련된 일이라면 홍기준에게 당당히 요구하는 사람이 진혁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사람들이 튀어나오는 걸까? 학력도 중졸 이런 사람들이 막 거미처럼 생긴 이상한 기계 같은 걸 들고 올림피아드 담당자를 찾아오고 그런대. 지난달에는 경운기로 물로 가는 엔진을 개발한 사람도 왔었어. 아, 아홉 시 뉴스에 나왔으니까 너도 봤겠네.”
“재능을 쓸 일이 없어서 묻혀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세상의 눈높이에서 보자면, 그들은 에러였다.
지나치게 고도화된 시스템은 안전과 안정에 매립된 나머지, 특출난 재능을 에러로 인식한다. 사람이 제 입맛에 맞는 사람을 키우고 통제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 안에서, 시스템이 요구하지 않는 능력을 지닌 탓에 피었다가 스러지는 재능이 얼마나 많을까.
과거의 진혁은 외우고 또 외워 그 제도 안에서 살아남았을 뿐, 스스로 뛰어나서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암기력에 더해 이해력이 좋았고 업무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감 능력이 있었을 뿐이다.
결국은 시스템 안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깨닫고 순응한 거다. 약간의 기연을 안고, 노골적인 편애를 등에 업은 채. 덕분에 진혁의 성년은 결코 불우하지도, 불운하지도 않았다. 품에 안은 공허함이 지나쳐 인생이 만족스럽지 않았을 뿐.
“삭도 인원은 몇 명이나 되어야 만족할 거니?”
“만족을 위한 건 아니에요. 많을수록 좋으니까 계속 뽑으려는 거예요.”
연구 인력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인간을 대체할 로봇을 개발하는 데 걸릴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인력을 늘리려는 것이다.
‘10년으로 당길 순 없을까.’
시간은 빠르고 인간은 느리다.
해외로 눈을 돌릴 것 없이,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허망한 사고로 사람이 죽어나간다.
“사람은 내가 계속 찾아볼게. 일반적으로 기업 채용 형식을 취하면 그런 괴짜들은 찾을 수 없어. 몇 번 해보니까 방법을 알 것도 같고.”
“수소문해서 찾아가는 거요?”
“으흐흥. 그렇지 뭐. 영업한다고 생각하고 돌아다니면 편해. ‘미래를 팔 테니 당신의 재능을 주시오’ 하고 작업하는 거야. 의외로 순진해서 그 방법이 잘 먹혀. 에스 형님들이 사람 찾는 일에 빠삭해서 내가 직접 찾아 헤매는 것도 아니고. 진혁이는 돈이나 땡겨 와.”
이보다 믿음직한 파트너가 또 있을까.
과거에도 저보다 직급 낮은 팀장의 오른팔이 되어 궂은일 마다하지 않던 민용락은 그 면모를 유감없이 선보였다.
“괴짜가 뭐예요오?”
“별나다는 뜻이야.”
유진이의 방해공작도 이제 익숙해서, 적절히 대답해주며 대화에 집중하는 경지에 올랐다.
“돈은 걱정하지 마세요. 서울에 연구소를 마련하는 것도, 인력 충원하는 것도 제가 계속 푸시 할게요.”
돈 문제는 이미 지난해 홍기준과 합의를 마친 상태였다.
20년, 30년 후를 위해 투자를 해달라 했고, 홍기준은 미국 뉴욕에 위치한 글로벌 투자사를 끌어들여 돈을 쏟아부었다.
「RB Partners」
민용락에게 부탁해 RB를 조사한 진혁은 까무러칠 뻔했다.
어떤 의미인지, 무슨 단어의 약자인지 모를 RB.
이 몬스터급 투자사는 세계 유수 기업의 지분을 보유한 것은 물론, 수년 전부터 국내기업의 지분을 야금야금 확보하고 있었다. 대정, 세인, 서경···. 공개된 대기업 대부분이 RB의 그물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빼어난 정보력을 이용해 공개되지 않은 기술을 개발한 기업을 거듭 삼키고 있었다. 그중에는 미래에도 끝내 알려지지 않고 사장된 기술도 다수였다.
물론, 글로벌 투자사의 광폭 행보가 놀랄 일은 아니다.
진혁이 대경한 이유는 RB의 대표자 이름이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Steve Sohn」
진혁이 과거에 사용했던 영어식 이름이다.
엄마 한유영을 기리기 위해 패밀리네임에 일부러 ‘h’를 삽입한 것까지 그대로였다.
대표자가 왜 Raymond Hong이 아닐까.
홍기준은 왜 진혁이 과거에 사용하던 이름을 사용했을까.
왜 괴물 투자사를 차리고 큰돈을 서슴없이 풀었을까.
왜-.
처음엔 자신을 감추기 위한 홍기준의 임기응변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럴 의도였다면 굳이 진혁의 이름을 사용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홍기준은 담백하게 답했다.
「내기 보상 4천만 원. 그리고 매달 지급하는 달러가 어디로 갔을지 상상해보렴. 돈? 돈은 방목해야 번식하고 인간보다 오래 살거든.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굳이 품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고 말이다. 읽고 지워라.」
겨우 4천만 원을 종잣돈으로 그런 일을 벌이다니, 말도 안 되는 설명이었다.
보나 마나 세인그룹 자본으로 차려서 넘긴 모양새구먼 핑계도 좋다.
이 아저씨는 내게 뭔가 빚을 졌나? 아니면 뭔가 짐을 지우려는 의도를 가졌거나. 그런 의심을 품은 진혁이 이유를 물었으나 홍기준은 회신하지 않았다.
‘이 아저씨가 내 메일을 읽씹했어.’
알아서 판단하라는 뜻일 게다.
또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 뭘 묻느냐는 무언의 핀잔.
홍기준이 보인 그간의 행적을 떠올리며 진혁이 찾은 답은 하나였다.
그럼에도 입에 담거나 진지하게 생각지는 않았다.
‘사람 일 모르는 거잖여.’
그렇다고 부담되거나 싫은 건 아니다.
가족을 위해 권력자가 되겠다는 야심이 어느새 가슴에 싹텄으니.
‘할아버지 찾고, 대정 조지고-.’
대정과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면서도 홍기준은 진혁의 과제를 따로 남겨두겠다 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걸핏하면 세상이 언제 망할지 모르니 연연하지 말고 즐겁게 살라는 충고도 남겼다.
‘적어도 30년은 멀쩡할 세상이 왜 망한다는 거여어?’
하여간 노인네들 근심은 알아줘야 한다.
그래서 노파심이라는 말이 있는 거겠지.
늘 조력자 역할을 자임하며 반 발짝 물러나 있는 걸 즐기던 홍기준 회장은 돌아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진혁은 그런 홍기준의 의도를 친구와 그 아들을 위해 더러운 일을 자기가 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필요하면 뉴욕에 다녀올까? 알비라는 회사 더 조사해 올 수 있어. 무슨 수작이라도 있을지 모르잖아.”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래······.”
다분히 아쉬워하는 민용락이었지만 진혁은 못 들은 척했다.
이 양반이 회삿돈으로 비행기 타고 싶어서 수작을 부리잖아.
“삼촌, 누요어크 가고 싶어요오?”
“아니야. 괜찮아.”
RB Partners의 정체가 진혁을 위해 준비된 화수분임을 아는 이상 간섭하거나 경계할 이유가 없다. 운영은 현지에 있는 투자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되고, 관리 또한 그들 머리 꼭대기에 앉은 홍기준이 맡는 게 더 효과적이다.
Steve Sohn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세운 홍기준이 축재로 얻으려는 게 뭘까. 기업으로써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외연적 의미 말고.
「때가 되면 알려주마. 왜 그랬는지. 지금은 보이는 대로만 믿어라.」
온갖 편법이 가능한 세상인데 회귀자 홍기준에게 그게 수작축에나 들까 싶지만, 수완도 궁금하다.
‘그런 사람들 보면 재주도 좋아.’
손진혁처럼 시스템 준수가 체화된 수동적 원칙주의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갈 수 없는 게 약은 자들의 요령이었다.
당사자들은 이를 융통성이라 칭하겠지만.
***
“유 회장께서 융통을 좀 하시는 게 좋겠구랴-.”
천길룡이 대나무 낚싯대로 해안가를 가리켰다.
세인그룹 인재개발원.
대지 면적만 축구장 3개에 달하는 면적을 울타리처럼 둘러싼 단층 건물이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고즈넉한 시골 정경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손광연의 고집 때문에 일부 사무동만 3층으로 건축했을 뿐, 가지런히 줄지어 선 단층 건물이 야트막한 산과 해안선에 절묘하게 숨어들었다.
“대체로 보아서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않겠소?”
“예. 아무래도 외부인은 출입이 통제될 수밖에 없겠습니다.”
“손 사장이 땅을 내어준 이유가 있을진대, 지역민에까지 차폐를 하려 든다면 저곳은 연수원이 아닌 감옥이 되는 게요. 섬이나 다름없지.”
유명선은 연신 식은땀을 훔쳤다.
현장 시찰을 위해 자식들과 손광연에게도 비밀에 부치고 내려온 길인데 천길룡에게 된통 걸렸다.
“내 알기로 유 회장께서 저 안에 거하실 거라 들었소. 외롭지 않겠냐 말이야.”
연수원이 완공되면 유명선은 그 안에 머물며 신입사원을 비롯한 직원들 대상으로 강연을 하며 여생을 보낼 계획이다. 개인 의료시설을 갖추고 의무팀과 경호팀까지 꾸렸으니 이제 몸만 내려오면 그만이다. 그룹 경영은 이미 사위에게 일임한 터였으나 형식적으로도 완벽한 은퇴를 의미했다.
“그 안에 갇혀서 동물원 사자처럼 늙느니 들락날락하며 자유롭게 사는 게 회장도 좋지 않겠소?”
“허면 이 후배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제아무리 그룹 회장인들 세상사에 초탈한 노사老士를 어찌 이겨 먹을 수 있을까. 말이라도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권력이란 통하는 자에게나 힘을 발휘한다. 유명선도 풍파를 넘고 견디며 세상을 관조하게 된 인물, 그 정도 꾀는 있었다.
한발 물러서는 유명선의 모습에, 승자의 미소를 걸친 천길룡이 곰방대를 손바닥에 탁탁 털었다.
“회장께서는 신앙생활을 하시오?”
“없습니다만, 어찌 그러시는지-.”
“그럼 내려오시는 대로 이 늙은이와 벗하며 성당이나 다닙시다. 오호호-. 동반자가 되는 거요. 아니, 내가 뭐 고급 차 얻어타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오-. 엣흠!”
“성당······이요?”
의문을 표하는 노 회장의 눈가에 주름이 크게 잡혔다.
손광연에게 듣기로 신선 같은 양반이라던데 웬 성당 타령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