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림보 (6) >
잠시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정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제 생각을 묻는 것인데 진혁은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못한 주제였다. 제3자를 관찰하고 미루어 생각하는 일에 미숙하기도 했고.
“오빠가 보기에는요오?”
저러다 눈이 하나로 합쳐치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미간을 꼬집어 당긴 유진이가 보챘다.
돈이 되지 않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답은 필요가 없다. 이미 아빠도 고려한 가설일 테니. 지식과 통찰이 비슷한 사람 간의 대화에서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건 상대를 무시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수준차가 현격한 상대를 배려하기 위한 이유도 있겠으나, 대개 요점보다 서사를 먼저 푸는 이들은 보잘것없는 지식이나 정보를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이 큰 경우가 많았다. 이른바 인정욕구라고 하던가.
수준 낮은 자에게 뭔가 설명하는 것도, 다 아는 얘기를 듣는 것도 피로한 일이었다. 한 세월 살았던 진혁이 대화를 즐기지 않는 이유였다.
물론, 가족과의 대화는 예외다.
“제 생각에는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잖아요?”
“음-.”
이번에는 손광연이 턱을 쥐었다.
먼저 고민을 마친 진혁이 중얼거리듯 자신 없는 목소리를 냈다.
“아는 만큼 보이니까, 연구자들은 계속 소재개발이나 연구 쪽으로 파는 거고요.”
“으흠-. 그럴듯해. 하나를 파고들면 세부적으로 끝도 없이 깊이 파는 괴짜들이 많지. 그런 사람들이 천재 소릴 듣기도 하고.”
“그런데 따지고 보면요. 애정이나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알고 싶어서 공부하게 되고, 공부하면 또 그만큼 알게 되고. 결국 아는 만큼 보게 되고······.”
호오-. 손광연이 바람소리로 호응했다.
“그것도 그렇네? 발명가들이 그렇게 탄생하잖아. 비전문가에서 전문가가 되는 경우라······. 애초 접근 계기가 다르니 기존 전문가와는 다른 길을 걷는 게 가능하겠네.”
“아빠처럼 관심을 갖고 시작한 사람들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빠의 말대로, 그런 사람들이 엉뚱한 발명가가 되는 거겠지.
시작이 늦고 전문교육을 받지 않고도 혼자 힘으로 세기의 발견을 하는 사람들.
실제로 찾아보면 그런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재능을 펼치지 못해 묻히는 사람은 더 많았을 테고.
이 또한 많은 사례를 알고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떠오를 듯 말 듯, 떠오르지 않는 이름에 입술만 오물거렸다.
‘머리가 돌이 되려고 이러나?’
흐리멍덩한 진혁의 눈동자가, 유진이가 가림막으로 사용하는 동화책 제목을 포착했다.
「토끼와 거북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 오빠를 앞에 두고, 동화책으로 입을 가린 유진이가 열심히 중얼거렸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애정, 관심, 공부, 아는 만큼, 발명가, 비전문가, 전문가······.’
이 꼬맹이에게는 시간이 거북이처럼 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진이는 한 단어도 빠뜨리지 않고 되뇌었다.
*
손광연은 경영자로서 사업 전반을 두루 살피고, 직원들을 챙기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짧은 하루를 쪼개고 나누어 연구에도 몰두하고 있었다.
방탄까지는 아니어도 척추와 무릎 등 관절부를 보호할 수 있는 안전 장구를 만들고 싶었다. 강화플라스틱보다 가볍고 단단한 소재로.
나아가 기술과 노하우가 축적되면 방탄복과 방탄헬멧도 개발할 수 있을 거라 전망했다. 최종 목표는 궁극의 내연성을 갖춘 소방복과, 방탄 성능을 갖춘 전투복이었다. 물론, 세인그룹의 지원이 있기에 연구가 가능한 분야였다.
“아빠아-?”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유진이가 손광연의 팔을 잡아끌었다.
“애정이 있으면 전문가가 되는 거예요오?”
“무조건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훌륭한 성장동력이 될 수 있지. 근데 왜? 우리 유진이도 애정을 둔 일이 있니?”
“음······, 아니에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딸이지만 독특한 녀석이야. 손광연은 고개를 홱 돌리는 딸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평소에도 어린 유진이의 질문에 최대한 성의껏 답변을 하는데, 유진이는 간혹 아빠의 물음을 무시하곤 한다.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아들을 응시했다.
“하다 보면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농부 입장에서는 많이 힘든 게 농삿일이지만, 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농부가 하는 일은 많지 않아.”
농사꾼들이 들으면 경을 칠 발언이지만 진혁은 잠자코 들었다.
마른 세수를 하는 아빠에게서, 뜻한 일이 현재의 역량을 아득히 초월함을 깨달은 자의 무력감이 스며 나왔으니.
“파종하고 밭 갈고 수확하는 노동이 힘든 만큼 모두 자기 공이라고 생각해. 일조량, 바람, 습도, 미생물 이런 애들이 키워주는 건데 말이지. 막상 가뭄만 들어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잖아. 하늘이나 보며 한숨 쉬고, 원망하고······. 경영의 관점에서 농부의 역할은 결국 씨 뿌리는 일이 전부야. 키우는 건 우주가 해.”
회고하듯 느릿느릿 늘어놓는 말속에 자조가 적잖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좌절하고 포기한 자의 비웃음은 아니었다.
“씨를 뿌렸으니 세상이 돕고, 언젠가 결실을 맺겠지. 다소 늦더라도. 그 수확물은 젊은 사람들이 가졌으면 좋겠다.”
아빠는 착한 사람이다.
잠시 머무는 곳에 쓰레기 하나 남기려 들지 않았고, 무엇 하나 헛되이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지금도 개인적 보상보다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살리고자 하는 진혁의 의지는, 과거의 슬픔 때문이 아니라 아빠를 닮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진혁은 아빠가 보호장비 구상을 들고 왔을 때 의아했다.
농공단지에 입주한 기업 경영도 제대로 하자면 벅찰 텐데, 별도의 부지에 세인케미컬, 세인바이오와 합작으로 연구소를 짓고, 온갖 이상한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진혁의 머리에서 나왔지만 손광연은 유독 보호장비에 심력을 쏟고 있었다.
무릎 보호대를 만들어 자전거로 통학하는 진혁에게 착용시켜 테스트를 하고, 건틀릿처럼 생긴 장갑을 끼게 하고, 안전모라기에는 방탄 헬멧처럼 생긴 모자를 씌우기도 했다.
그때마다 진혁은 간단한 테스트 보고서를 작성했다.
지금도 손광연은 진혁이 작성한 척추 보호대 보고서를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역시 우리 아들이야. 유식한 걸 내가 아는데도 글은 참 쉽게 쓴단 말이지.”
아들을 치켜세운 손광연이 개선요청사항이 적힌 부분을 검지로 짚었다.
“아, 진혁아. 그거 뻣뻣했어? 관절 유연성을 더 확보하라는 뜻이구나?”
“네. 상체를 숙일 때 좀 늦게 따라오더라고요.”
후방낙상 시 척추 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보호대로써······. 자빠져도 척추가 다치지 않도록 해준다는 뜻이다.
항공 점퍼처럼 생긴 옷 중앙에 납작하고 길쭉한 기둥처럼 보호대를 삽입한 것인데, 관절 이음새가 뻑뻑해 활동에 제약이 따랐다.
이미 존재하는 상품이었으나 손광연은 더욱 강화되고, 사고 시 인체에 가해지는 충격을 기성품보다 획기적으로 완화하는 장비를 만들고자 했다.
“아빠. 탕성? 탕선? 아, 탄성이 부족해서 뼈가 아프다고 써 있어요오-.”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문구로 작성된 덕분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유진이도 어딘가를 검지로 짚었다.
손광연은 진혁의 그런 면을 두고, 배려가 몸에 배어서 그렇다고 했다.
진혁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런 거 아닌데.’
늦은 밤, 피로가 적잖이 쌓인 눈으로 손광연이 이마를 긁었다.
그럼에도 자리를 뜰 생각은 없었다.
매일 아이들과 나누는 대화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일, 귀하게 챙기는 시간이 없었기에.
“우리 회사도 보고서는 최소화하되, 꼭 필요한 경우에는 쉽게 쓰라고 했어. 나는 이해한다 쳐도 다른 직원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거든. 그래서인지 연구원이나 엔지니어들이 회의나 보고 때 지들만 알아듣는 말을 사용하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올라올 때가 있어. 주석이라도 제대로 붙이면 좋을 텐데.”
“공학자들이 그런 면이 좀 있다고 하더라고요.”
과거, 서버 및 데이터베이스 유지보수를 맡긴 외주업체 직원과 대화하다가 열이 오르는 경험을 했던 진혁이다.
“아빠, 공학자가 뭐예요오?”
“응, 과학자 같은 거예요.”
유진이가 아빠의 주의를 끌어간 틈을 타, 진혁은 잊힌 스트레스에 몰입했다. 꾸벅꾸벅 조는 정원이의 머리가 식탁에 부딪히지 않도록 챙기며.
진정한 전문가는, 전문용어를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평범한 말로 바꿔 설명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막말로, 0과 1만으로 구성된 기계어를 사용할 게 아니라면, 함께 호흡하며 발맞춰 일하는 인간이라면 말이다.
물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고집은 아니었다. 프로라면 견지해야 할 자세가 아닐까 하는, 비즈니스맨의 보잘것없는 철학적 접근이었을 뿐이다.
“유진아, 이거 봐봐. 이게 오빠가 쓴 거고, 이건 거래처 엔지니어가 쓴 거야.”
“우와-! 우리 오빠 글씨랑 아빠 글씨랑 비슷해요!”
알파벳 모음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용어는 자기들끼리나 사용하면 될 일이다. 세세한 실무에나 적용될 논리 또한 그들만 알고 있으면 그만인데, 실무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쓸데없이 전문용어를 남발하거나 장황하게 설명을 하곤 했다.
물론, 통상적으로 널리 쓰이는 약자 따위를 문제 삼는 건 아니다.
“아빠, 이건 모라구 쓴 거예요오? 씌-, 엪-, 에스-.”
“아빠도 잘 몰라······.”
“사장님이가 모르면 우즈캐요오-?”
“미, 미안해······.”
그건 서비스 마인드나 배려심의 결여라는 말로써 단순히 표현하는 것에 그칠 일이 아니었다. 대체용어를 찾을 지식과 융통성이 부족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역량이 안 된다는 의미거나, 현학적 태도의 다른 모습일 뿐이었다.
‘민용락 부장님은 차라리 외국인과 대화하는 게 낫겠다고 했었지.’
그건 때로 지역색을 지나치게 드러내며 출신 지역의 사투리만 고집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보다 아득히 무거운 피로감을 선사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인간을 불신하고 혐오했다 한들, 이유 없이 욕설을 뱉지 않았던 진혁조차 회사에서 분노케 만드는 존재가 있었으니. 실속 없이 필요 이상의 겉치레에 물든 사람들과, 위에 설명한 사람들이었다. 진혁은 그들을 속으로 ‘몽총이’라며 흉봤다.
물론 진혁은 그 모든 과정을 자신의 강퍅한 성격이 타인을 협소하게 재단한 탓에 벌어진 감정의 흐름으로 여겼다.
‘내가 이기적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런데 진혁만의 문제는 아니었나 보다.
그 사람 좋은 아빠조차 짜증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나.
진혁은 일찌감치 제너럴 팜 채용 면접 요건에 과거의 경험을 이식했다.
관리자가 많지 않고, 보안 등급이 높은 연구개발자와 직접 소통할 사람은 손광연 단 한 명뿐이다. 하여, 아빠가 지금처럼 소통 문제로 스트레스 받는 걸 줄여주고 싶었다. 사람 좋은 아빠는 싫어도 싫은 소리를 못할까 봐.
팀장 시절에는 ‘계약업체 선정 및 협업표준서’ 라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그런 사람들이나 업체를 철저히 거르고, 세인그룹의 돈을 원하는 업체는 소통 역량을 필수로 갖추도록 유도한 기억이 있다.
협업 표준서를 기준으로 뽑은 사람들 덕분에 확실히 커뮤니케이션에 드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효율을 꾀하는 기업 입장에서도,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선호하지 않는 현업 담당자 입장에서도 환영받은 결정이었다. 사족이지만, 그렇게 채용하거나 선정된 업체 사람들이 인상도 좋고 성격도 좋았다. 그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외골수도, 편협한 자도 아니라는 의미였으니.
“아빠, 이건 무예요오? 채. 용. 공. 고?”
“직원이 필요하니 우리 회사로 오세요- 하는 거야.”
제너럴 팜은 인력난에도 불구, 진혁의 채용 기준을 받아들여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직원을 우선 채용 중이었다. 말이 커뮤니케이션이고 소통이지, 결국 말을 얼마나 쉽고 조리 있게 하느냐의 문제였다. 진혁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손광연 역시 그럴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인사에만 진혁의 의견이 반영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제너럴 설립부터 경영까지 진혁의 입김이 닿지 않는 구석이 없었으니.
“오는 사람이가 없어요오?”
“있긴 한데······.”
“한데?”
“사람 급하다고 쉽게 뽑으면 우리와 맞지 않는 사람이 들어와서 기존 직원들이 힘들어질 수도 있어.”
여러모로 아들과 통하는 아빠였다. 저 어린 유진이에게 자상하게 설명하는 것도, 리더로서 전체를 고려하는 것도.
성향이 맞는 사람과 대화하고 함께 일한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홍기준처럼 월급을 주지는 않지만, 진혁은 아빠와 일 얘기를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건 유진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사람이를 뽑는 게 급해요오?”
“급하지는 않아.”
“안 급한데 왜 뽑아요오?”
“이공계 전문가가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시골이라 사람이 안 오려고 해.”
“아빠가 하면 안 돼요오? 이공계?”
“아빠는 머리가 굳어서 틀렸어······.”
큭-.
눈을 가늘게 뜨고 어렵사리 과거를 회상하던 진혁은 아빠의 셀프 디스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굳은 게 아니라 다른 생각에 매립된 탓으로 보이는데요.
아들의 반응이 비웃음으로 비쳤을까, 손광연이 이번에는 셀프 리스펙트를 시전했다.
“이공계 지식에 깊이는 없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풍부한 상상력이 있지. 휴머니즘으로 가득한.”
그렇지. 아빠는 유머 감각도 있고 휴머니즘도 갖추셨지.
방귀 가스 매장량도 풍부하고.
상상력뿐만 아니라 아빠의 아이디어에 깃든 마음도, 사연도 알고 있다.
아무리 둔하고 느려터진 진혁이라도, 이 아빠가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보호장비를 개발 중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내일 일찍 출근하려면 아빠 먼저 자야겠다.”
홍기준처럼 전문 경영진과 보좌진을 거느리지 못한 중소기업 사장은 직접 챙겨야 할 일이 많다.
“주무세요.”
“아빠, 안녕 주무세요오-.”
의자에서 일어선 유진이가 포갠 손을 배에 얹고 허리를 접었다.
“그래. 유진이도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일찍 자요오-.”
“녜-, 에헤헤-.”
손광연은 형 무릎에 앉아 고개를 까딱이며 조는 순둥이 막내아들을 안아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지친 몸을 뉘러 방에 들어서는 아빠의 등이 쓸쓸해 보였다.
사랑하는 이의 무력감은 의도치 않게 묘한 힘을 발휘한다.
늦게나마 그 속내를 짐작하게 된 아들로서, 품지 않던 욕심을 부리게 만들지 않나.
달캉-.
닫히는 문을 보며 진혁은 다짐했다.
‘제가 꼭 찾아드릴게요.’
아빠가 슬퍼할까, 부러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진혁은 DMZ 어딘가에 묻혀 계실 할아버지를 찾아 할머니 옆에 모시겠다는 계획을 일찌감치 세워둔 터였다.
그늘진 구석 없이 가족의 든든한 우산이 되어주는 한 남자를 위해.
그러자면 권력이 필요하다.
홍기준 정도 되는.
어쩌면 그 이상의 힘.
「너도 알겠지만 위쪽 놈들 핵고집 때문에 전 세계가 압박으로 일관 중이다. 돈을 푼다면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 절대라는 건 없으니까. 그럼에도 정치판과 시민의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내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 네 과제는 너를 위해 남겨두마. 읽고 지워라.」
홍기준의 이메일에서 건질 만한 내용은 ‘읽고 지워라’ 뿐이다.
다해줄 것처럼 굴더니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못한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시간이 빨리 흐른다지만 진혁은 조바심이 났다.
부사수로 온 회장 외동딸이 대형사고를 쳐도 묵묵히 수습할 뿐 다급히 굴지 않던 성격인데, 부모님을 생각하면 침착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흐르는 시간을 따라 부모님도 늙으실 테니.
자식이 사람 구실 하는 건 느리고, 부모님의 노화는 빠르다.
그 말은 현재의 행복이 영원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오빠, 오빠. 이거 보세요오-. 느림보 거북이가 이겼대요오-.”
진혁은 말없이 웃으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건 동화속에나 존재하는 거야.
“오빠. 다음에 낮잠 자세요오-. 저도 이길래요.”
소설보다 더욱 소설 같은 게 현실이지만, 현실은 절대 동화 같지 않더라.
“네? 네? 알았냐구요오-.”
오빠는 토끼가 아니야.
애들은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