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94화 (194/338)

< 느림보 (4) >

지능이 두 자릿수 되는 사람이라도 책의 지시대로 입력하면 결괏값을 얻어낼 수 있다. 창의적인 개발은 어렵겠지만 예문 따라 하면 그만인 작업이 일 축에나 들던가.

그럼에도 진혁은 매번 이 예제로 코딩을 시작한다.

「Hello, World!」

‘안녕.’

볼 때마다 새로운 문장.

새로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 이보다 감격적이고 낭만적인 인사가 또 있을까.

이제 낭만 타령은 뒤로 하고······.

노느니 염불한다고, 그냥 C++ 교재를 보며 독학을 하는 거다.

친구도 있고 동생도 있는데, 운동한다며 혼자 하루 종일 쏘다니는 건 경우가 아닌 것 같았다. 이들과 한 공간에 머물기 위한 진혁 나름의 노력이었다.

나중에 써먹기 위해 예열하는 의미도 있었다.

지식이 아니라 머리를.

‘머리가 이상하게 안 돌아가.’

뇌가 늙는 기분은 딱히 없는데 말랑해지고 사고가 어리숙해지는 느낌이랄까.

몇 달 전부터는 집중력이 흐트러지더니 근래에는 머릿속에 먹물을 부은 듯, 방금 읽은 문구도 다시 읽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한때는 치매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진혁아, 담화린이랑 한비광은 언제 결혼할까?”

이제는 아예 드러누워 이불까지 덮은 최미경이 시선도 옮기지 않고 물었다. 두 팔을 뻗어 허공에 펼친 만화책이 팔작지붕 같다.

“글쎄······? 한 30년 걸리지 않을까?”

모니터를 주시하던 진혁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히익-. 30년? 야, 차라리 저주를 해라!”

최미경, 이 허술한 말미잘 같으니. 얘가 뭘 모르는 소릴 하네.

최신화까지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종종 전개를 확인했었다. 젊을 때는 1권부터 읽기도 했었지.

‘나도 완결 못 보고 넘어왔어······.’

보유했던 주식 흐름이 어떤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만화 스토리쯤 기억 못 할까. 아무튼 그 만화는 그때도 완결이 나지 않았었다.

토도도독-.

「#include 」

결말 궁금해 죽겠네. 새 파일을 만들어 첫 줄을 입력하며 진혁이 중얼거렸다.

“진혁아, 매번 그거 입력하던데 그건 무슨 소리야?”

“표준 라이브러리 함수 매크로 정의, 상수, 여러 입출력 함수가 포함된 헤더 파일이라고-.”

책에 나와 있네. 진혁은 책을 짚던 검지로 옆머리를 긁적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책에 있는 대로 읽어주는 게 가장 좋다.

“꼭 써야 하는 거야?”

“음-. 예를 들자면 이건 창고 같은 건데-.”

진혁은 모니터의 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걸 입력해 두면, 간단한 명령어를 입력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원하는 결괏값을 출력해주는 거래. 창고에 보면 낫이랑 삽, 절구 이런 거 있잖아. 내가 달라는 걸 꺼내주는 식-.”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하던 진혁은 입을 다물었다.

최미경은 듣고 있지 않았다.

드러누워 멍한 눈으로 만화책만 넘기고 있잖아.

‘저 말미잘 같은······.’

묻지나 말든가.

진혁은 다시 모니터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런데 뭐 할랬더라?

‘아오-. 저 최미잘 때문에 까먹었어.’

*

청소년들의 임시 아지트가 되었지만 두더집은 명색이 SSS 직원들의 근무처. 진혁 남매와 최미경만 있는 건 아니다.

[우우우- 우우- 우우우- 우우-.]

“-빠러유 슈또 솔다띄-.”

훌쩍-.

정체불명의 노래를 따라 부르던 장진남의 어깨가 들썩였다.

최미경 언니 옆에서 귤을 까먹던 유진이가 잽싸게 네발로 기어갔다.

“삼촌 울어요오?”

“나 떨고 있나오?”

왜 저래.

드라마가 주부들만 망치는 게 아니다.

아, 장진남은 주부로 편입시켜도 되려나?

“강우석은 왜 그랬을까오?”

“최민수 사형 구형한 거요?”

만화책을 뒤적이던 최미경이 호응했다.

고개를 끄덕일 뿐, 장진남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종영한 드라마를 녹화해서 몇 번이고 돌려 보는 사람도 이해불가지만 지나치게 몰입하는 사람도 참······.

“고현정 너무 안 됐어요. 혼자 살아야 하잖아. 누가 눈에 차겠냐고요-. 박상원 지인-짜 못됐어. 정의로운 척은 지 혼자 다 하더니 친구를 죽여 버리냐. 지는 조민수랑 결혼도 했잖아. 박태수랑 고현정은-.”

종알종알-.

허어-, 최미경까지.

진혁도 부모님과 함께 종종 드라마를 본다.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부모님이 좋아하시니까.

그래도 지나친 몰입은 현실감각에 부정적인 영향을······.

“음-, 음-. 삼촌이랑 박태수랑 싸우면 누가 이겨요?”

아, 유진아. 너마저.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아이의 입에서 귤즙이 주르륵 떨어졌다.

장진남은 앞치마 자락으로 유진이의 입술을 닦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이겨오. 확실해오.”

키보드를 두드리던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은하게 풍기는 기운을 볼 때, 도사견 두 마리를 합한 전투력을 능가하는 사람이다.

‘드라마 속에서도, 밖에서도 진남 삼촌이 이길 거야.’

몰입하는 사람 이해 못 한다더니, 진혁은 속으로나마 저들의 대화에 참여했다.

그렇게라도 어울리는 거지.

하루 한 번씩 돌려본 게 벌써 열 번도 넘었다는데.

장진남이 모래시계를 볼 때마다 진혁의 시계도 흘러간다.

***

2월도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최미경 청소년은 두더집에 행차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준비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손님도 찾아왔고.

“와-, 오빠 교복이 진혁이한테 이렇게 잘 맞네?”

“좀 헐렁한 것도 같고······.”

“그냥 입어. 우리 오빠는 교복 입은 시간보다 빤쓰만 입고 샅바 맨 시간이 더 길어서 완전 새 거야.”

“그렇긴 하네.”

책에 이어 교복까지 물려받았다.

즐거운 경험이다. 진혁에게 부담될 정도는 아니지만 교복은 비싼 편인데 돈도 굳었다.

옆으로 누워 TV를 보는 최태양의 등에 비스듬히 기댔던 유진이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형은 몇 살이에요오-?”

유진이는 최태양을 여전히 형이라고 불렀다.

아기 때부터 입에 밴 버릇이 쉬 고쳐지지 않는 탓일 테지.

“이제 스물두 살 되겠네.”

“올해도 천하장사 할 거예요오?”

“하하하-.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냐. 작년엔 운이 좋았어.”

“운도 실력이라고 용락 삼촌이 그랬는데요오?”

최태양은 바로 누워 두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눈을 껌뻑이며 유진이가 한 말을 곱씹는 눈치였다.

“내 생각에, 운은 실력이 아니야. 절대로.”

그리 말해 놓고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왜요오?”

“음······. 뭐랄까. 운이 끼어들어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건 실력이 부족했다는 뜻 아닐까? 준비가 철저하지 못한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는 거라고 봐.”

“음······.”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으로 미간을 잡은 걸 보니 유진이는 최태양의 말을 암기하는 눈치였다. 또 친구들 앞에서 사용하려나.

진혁이 의외라는 눈으로 최태양을 보았다.

항상 유쾌하고 운동 외에 머리 쓰는 걸 싫어하는 사람인데, 저 형이 저렇게까지 고민하는 걸 보니 한층 어른스러워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철이 드는 시기가 있다지.’

최태양은 아마도 그게 지금 아닐까.

사람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경험은 언제나 신선하다.

“야-. 뭐해? 교복 벗고 책이나 싸자. 아스테이지 챙겨왔지?”

“으응-.”

최미경이 벽걸이 달력을 내왔고, 진혁은 준비해온, 두꺼운 비닐 같은 아세테이트 필름을 꺼냈다.

매년 최미경과 함께 해온 일이라 분업도 확실했다.

“히익-! 너 책 왜 그렇게 많아?”

“아, 이거? 누나한테 물려받은 책도 싸려고.”

아깝잖아.

책을 얼마나 열심히 넘겼는지 황가영이 사용했을 기존의 달력은 여기저기 해어지고 너덜거렸다.

“예전엔 한 번 닳으면 떼어 버리더니 이제야 물건 귀한 걸 알았나 보네?”

진혁은 눈만 꿈벅였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어떤 물건은 더 마음이 가더라.

“넌 애가 항상 이렇게 느려.”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최미경은 어깨를 으쓱일 뿐 자세히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달리기도 못하는 게 누구더러 느리대?’

슥슥- 사아악-.

최미경이 능숙한 솜씨로 달력을 오리고, 책 모양에 맞게 접으면. 유진이는 잘라둔 테이프를 고사리손으로 하나씩 건넸다.

그렇게 싼 책을 진혁이 필름으로 한 번 더 싸는 거다.

뭐, 이렇게 하면 이중 포장이라 책을 오래도록 깨끗하게 볼 수 있다는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정을 준다는 게 이런 거겠지.’

최미경이 아니었다면 책을 이렇게 관리한다는 것도 모르고 살 뻔했다.

“허휴-. 야, 손진혁 손이 뭐 그렇게 굼떠?”

“어, 어. 열심히 하고 있어. 넌 좀 쉬어.”

되게 뭐라고 하네.

제 집이라고, 지 오빠가 옆에 있다고 유세하는 건가? 지가 유세라여?

진혁이 꼼지락거리며 책을 싸는 동안, 최태양은 다시 옆으로 돌아누워 TV를 봤고 최미경은 흡족한 표정으로 새 교과서를 넘겼다.

“뽕-쎄.”

“오-. 유진이가 불어를 하네?”

“우리 오빠가 알려줬어요오-. 크리스마스 전까지요.”

“크리스마스? 그건 왜?”

왜는 뭐가 왜냐.

그냥 그즈음까지 프랑스어 교과서를 함께 봤다는 뜻이지.

최미경은 동생이 없어서 아이들의 언어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에헤헷-. 그런 말도 못 알아듣는 바보가 누구더러 느리다고······.’

이게 뭐라고 깨소금맛이냐.

진혁은 피식피식 웃으며 계속 굼뜬 손을 놀렸다.

“언니, 이건 므-슈라고 읽어요오-. ”

“아, 이게 무슈구나. 스펠링이 이상한데? 왜 엠 오 엔이지? 오빠, 오빠.”

최미경이 최태양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TV를 보다가 어설피 잠이 들었던 듯, 최태양이 화들짝 놀랐다.

“어? 왜?”

“이거 왜 무슈라고 읽어?”

“······그냥. 그렇게 읽는 거니까.”

정확한 대답이었으나 최미경은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손유진이 팔짱을 끼고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알아요. 그거 우리 오빠랑 천길롱 해비지가 알려줬어요오-.”

“그래? 왜 그런 건데?”

“언니는 뿌랑쓰 수도가 어딘지 알아요?”

“파리?”

“그치요오? 그럼 미국 사람들은 파리를 뭐라고 부르는지 영어 시간에 배웠지요?”

“패뤼스?”

“오오오-.”

뭐가 오오오냐.

저 건방진 손유진을 어쩌면 좋을꼬.

그래도 최미경은 기분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무슨 뜻인지 대충 알겠다.”

“더더더 들어봐요오. 뿌랑쓰 사람들은 빠리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뭐-, 비슷하지 않을까?”

“빠-히.”

오-. 지켜보던 진혁은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었다.

민용락에게 부탁해 구한, 프랑스 원어민 회화 테이프에서 들은 것과 유사한 발음이었다.

“이건 천길롱 해비지가 해준 말인데요오-, 완벽하지는 않아도 발음을 완벽에 가깝게 구현한 문자는 한글뿐이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이건 오빠가 해준 말인데요, 발음으로 단어를 외우는 건 좋은 암기방법이지만, 발음이 다르다고 그 어휘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이면 안 된댔어요.”

“음······, 유진이 너무 똑똑한 소리 하는 거 아냐?”

최미경이 신기한 생물 구경하듯 유진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나 유진이의 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할리우드나 헐리웃처럼 같은 말이라도 지역이나 문화권,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을 수 있으니까요. 발음에 지나치게 의미를 두는 건 잉글리시 본위의 편협한 사고를 가진 자들의 멍청한 버릇이래요.”

못 들은 척 책을 싸면서도 진혁은 머릿속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저 어린 녀석이 오빠가 설명한 그대로 종알대잖아. 그런데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걸까.

최미경의 오므라든 미간 따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유진이는 신나서 떠들었다.

“어설프게 영어 배운 사람들이 암것두 모르면서 혀를 굴리고, 알파벳이 사용된 모든 언어에 영어 기준의 잣대를 들이미는 우를 범한다고도 했어요. 나라마다 언어가 다르고, 같은 영어 단어라 해도 나라마다, 사람마다 발음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라고요. 그거 다 헛똑똑이들이 허영심 때문에 똑똑한 척하는 거라고, 영어 잘하면 뭐하냐고-, 음, 음. 영어보다 중요한 게 자료분석, 논리적 사고, 그다음에 의도대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래요오-.”

아, 유진아.

그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료분석, 논리적 사고, 상황판단이 중요하다고 가르치기는 했지.’

그런데 유진이는 암기력이 엄청나구나. 저걸 다 외워서 말한다고? 진혁조차 갖지 못한 능력이었다.

다만 상황판단능력이 부족해 보였다.

아니면 그냥 눈치가 없는 것이거나. 아, 같은 말인가?

케흠-.

최미경이 헛기침을 했고.

최태양은 자는 척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공부 못한다고 동생에게 무시당했던 설움이 일거에 해소되었으니까.

흐음-.

가자미눈을 뜬 최미경도 유진이를 따라 팔짱을 꼈다.

마치 두 여자가 노려보며 싸우는 듯한 그림이 완성되었다.

‘유진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러지?’

진혁은 송아지처럼 눈을 꿈뻑였다.

매번 느끼지만, 최미경과 함께 있을 때는 눈만 깜빡이는 일이 잦다.

어쨌거나 유진이 이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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