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림보 (3) >
*
“집 정말 좋다.”
“큰데도 아늑해.”
집에 들어선 황가윤과 황가영의 입은 닫힐 줄 몰랐다.
시골에 이런 저택이 있을 줄 몰랐다는 그들의 표정에서, 황량한 절벽에 서 있는 중세 성에 발을 들인 듯한 이질감마저 읽혔다.
그저 놀랍고 신기하다는 그들의 반응이 진혁은 낯설었다. 저는 갖지 못했던 감정이었으니. 사소한 정을 누리는 친구를 소소하게 부러워할 줄이나 알았지, 물질에는 딱히 감탄하지 않는 냉소적인 결의 소유자 아니었던가.
“언니, 이거 입어 봐.”
“아휴-, 애들 챙기느라 바쁠 텐데 뭐 한다고 나까지 챙긴다니-.”
그리 말하면서도 한유영이 뜬 카디건을 받아든 김응녀는 적잖이 감동했다. 김응녀가 여고에 다니던 시절 직접 머리를 빗겨주고 뜨개질을 가르친 그 꼬맹이가 아이 셋의 엄마가 되어 언니를 챙긴다.
“내 팔자가 이제 피려나 보다······.”
“언니 그거 주책이야. 그런 소리 하지 마요.”
“그려, 그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는 손광연에게 황가윤이 머뭇머뭇 다가갔다.
“저-, 사장님.”
“어허. 이모부한테 사장님이 뭐야?”
잠든 정원이 손을 만지작거리던 손광연이 짐짓 노한 기색을 띠었다.
황가윤은 제너럴 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낙후된 지역기업, 지원자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그의 선택이 고마워 손광연은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황가윤을 채용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기뻐하는 아내를 본 후 더더욱 고마웠다.
“저-, 이모부. 면접 때 듣기는 했는데 궁금한 게 있어서요.”
“응. 뭔데? 말해 봐.”
“읍내에 있는 사택이요. 가족도 같이 살 수 있는 거예요?”
어허헛-. 손광연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살아야 가족이야. 당연히 엄마랑 동생도 입주해야지.”
정말 잘됐다. 동생의 손을 꼭 쥔 황가윤이 중얼거렸다.
“우리 회사, 복지도 제법 괜찮아. 세인그룹보다 좋을걸?”
당연한 일이었다.
제너럴 팜의 복지제도는 지금보다 미래의 세인그룹에 근무하던 진혁이 설계했으니까. 홍기준조차 손광연에게 자문을 구하는 형편이었다.
“아파트라서 생활도 편할 거야. 아파트 주차장에서 출퇴근 버스도 출발하고.”
가윤이는 인랑이가 출근시켜주는 날이 더 많으려나? 갸웃거린 손광연이 스웨터를 쓰다듬으며 어쩔 줄 모르는 김응녀를 보았다.
“처형도 이제 편하게 사세요.”
“아휴-. 감사하고 면목 없고······.”
김응녀는 끝내 말끝을 흐렸다.
잠든 유진이를 안은 진혁은 소파에 앉아 그저 감상만 했다.
적당한 긴장 속에서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심장이 조금 간질거리네.’
거북이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벌이는 경주를 보는 듯, 손에 땀을 쥐는 지루함도 느꼈다. 의외로 답답하지 않은 건 저들의 심리가 어떤지 엿보이는 까닭이리라.
저 모습이 바로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평범한 인간들이렷다.
집을 구경하는 자매의 표정에서는 어떤 시기심도 찾을 수 없었다. 제너럴 팜 견학을 가서 신기해하던 유진이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관찰하는 사람이 즐거울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잘 정리된 것 같다.’
저들을 볼 때마다 안심하면서도 이제야 안도하는 이유.
누구 하나 저를 경계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홀로 몇 번을 고민하고 걱정했다.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 진혁으로 하여금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꾼으로 작용했기에.
‘내 성격이 문제지 뭐.’
김응녀 가족에 대한 의혹도, 의심도 더는 생기지 않았다. 마음도 편안했고, 정수리에서 경고를 보내는 일도 없었다.
엄마가 그러기를 원하시는데 반대할 이유도 없고, 이제 이들을 완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했다.
*
작동 오류를 일으킨 로봇처럼 어항 근처만 빙빙 돌던 황가영이 옆으로 다가왔다.
소파에 앉은 황가영이 유진이의 이마를 쓸었다. 그리고는 눈치 보듯 두리번거린 후 진혁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아파트면 비싸지 않나?’
조심스레 묻는 황가영의 눈동자가 겁에 질린 듯 흔들렸다.
어이그, 이런 촌 누나 같으니.
진혁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급히 삭였다.
수능을 치르고 이제 곧 대학에 진학할 사람인데도 겁쟁이 소녀 같은 모습은 여전했다. 그나마 방학하기 전까지 아침마다 오누이의 정을 쌓았기에 진혁을 편하게 여기는 듯했다.
하긴, 이제 스무 살이 된 사람이 세상 물정 알면 얼마나 알겠나. 과거의 진혁도 그 나이 때는 발 붙인 세계의 크기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황가영을 배려해 진혁도 나직하게 말했다.
‘시골이라 땅값도 얼마 안 되고, 아빠 아는 분이 사장으로 계시는 건설회사에서 지었대요.’
세인건설의 사장은 다른 사람이지만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고 공사대금이 안 들었다거나, 파격적으로 적게 들어갔다는 뜻은 아니다. 홍기준은 사비를 보태줄지언정 거래는 투명하게 하는 사람이니까.
진혁은 그저 황가영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
‘지방에는 사택 제공하는 회사 많아요. 어떤 회사는 서울에 있는데도 사택을 주기도 해요.’
아주 일부이긴 하지만, 특별대우로 그렇게 하는 회사가 있었다.
‘너 되게 많이 안다.’
당연히 많이 알지.
제 이름으로 된 오피스텔을 갖기 전까지는 사택에서 살았으니까.
사택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아파트였다. 홍수정 전무가 진혁을 위해 따로 구해준 집이었으니. 회삿돈으로.
어른들이 따로 다과를 즐기는 동안, 황가영은 잠든 유진이와 정원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정말 예쁘다. 너무 좋아.”
친동생은 아닐지라도 친척 하나 없다가 이모가 생기고 동생들이 생겨 너무 좋다고 했다. 언니가 취직한 덕분에 다방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도. 이제 황가영은 방학 때마다 아파트에 머물며, 명절에 찾을 친척이자 이웃이 생겼다.
“다른 친구들을 부러워한 적은 없었거든. 그래도 생기니까 너무 좋다.”
“입학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어요.”
“말 된다.”
진혁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거기에 더해 저만이 가졌던 앙금도 씻긴 듯 사라졌으니 금상첨화라 해야 할까.
“근데 유진이는 되게 곤히 잔다. 정원이는 팔다리를 막 꿈틀거리는데.”
“유진이는 아침부터 눈사람 만들었거든요.”
“이 날씨에?”
“날씨 이렇지 않았으면 안 잘 거예요. 힘이 남아돌아서요. 오늘은 바람 때문에 많이 지쳤나 봐요.”
진혁은 식탁 앞에 앉아 유자차를 홀짝이는 김인랑을 힐긋 보았다. 저 삼촌은 유진이와 놀아주다가 몸살이 났다는 말을 안 한 모양이네. 남자 자존심 같은 건가?
“유진이는 아직 일곱 살이라는데 이렇게나 길쭉하네?”
“저 학교 들어갔을 때보다 키도 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요.”
유진이는 오빠가 3학년 올라가던 해보다 신체조건이 좋다.
잘 먹고, 잘 자니까 그런 거겠지.
집안 형편도 진혁이 어렸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게 폈고.
“애기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어서 신기해.”
진혁은 빙긋 웃었다.
태어난 날부터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았음에도 아이들의 성장은 믿기지 않는다.
‘눈도 못 뜨고 먹고, 자고, 싸기만 하던 놈이 언제 이렇게 컸냐.’
뒤집고, 배밀이를 하고, 두 발로 서고. 언제 섰냐는 듯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학교에 보낼 때가 되어서 그런 걸까, 동생이 성장한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돌아와 기록한 영상이 많아질수록, 재생 시간이 길어질수록. 과거의 기억은 흐릿해지다가 어느 순간 그 입체성을 상실했다.
멀고도 먼 나라의 잊혀진 비사처럼, 진혁의 전생은 사건이라는 점과 시간이라는 선만 남은 건조한 타임라인으로 변했다.
아홉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이제 진혁의 필름은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넘어가는 새해 첫날 뭐 했더라?’
신문 돌렸나?
흑백 필름을 더듬는 진혁의 정신을 황가영의 목소리가 다시금 오늘로 끌어당겼다.
“유진이는 이렇게 큰 비결이 있어? 키 큰 게 너무 부럽다.”
“활기차거든요. 성장판을 마구 자극하나 봐요.”
유진이는 요즘도 탈진할 때까지 뛰어다닌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훌쩍 크려는 모양이다.
곤히 자던 유진이가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진혁과 황가영이 숨을 들이쉬었지만, 이들 때문에 잠을 방해받아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으으으-. 미자야 미야네요오-.”
촉수 괴물에 시달리는 악몽이라도 꾸는가 보다.
유진이가 말미잘 볶음을 많이 먹긴 했지.
진혁은 12월에도 군밤장수 모자를 쓰고 말미잘을 잡아야 했다.
아빠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미잘이 온 가족의 입맛을 사로잡아버려서.
초인적인 육체 능력을 너무 보잘것없이 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달리 힘을 쓸 곳이 있는 건 아니었다.
괴물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하는 모험이 없는 세상, 온 대륙을 전역戰域화 하여 영토확장이나 왕권 다툼 따위 야만의 전쟁도 벌이지 않는 시대.
적당함을 넘어서는 난폭한 힘은 사족을 뛰어넘는 군더더기 다름 아니다. 그가 곧 괴물이고 타도 대상이 될 테니.
“우애애-. 미숙아아아-.”
진혁은 거대한 말미잘 촉수에 잡혀 버둥거리는 유진이를 상상하고는 피식 웃었다. 악몽을 꿀까 두려워 꿈조차 경계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코믹한 상상이라니.
‘아이고, 한 번 꽂히니까 계속 연상하게 되네.’
김인랑의 차를 타고 돌아가는 김응녀 일가를 배웅한 후에도 진혁의 상상은 계속되었다.
말미잘 1개 사단에 쫓기는 똥꼬 빌런 손유진.
“미자야아- 미야네요오-. 오빠 도와주세요오-.”
아, 유진아.
네 꿈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
안 돼.
못 도와줘.
돌아가.
“으어어어어-.”
유진이는 소파에 누운 채 허공에 팔을 뻗어 허우적거렸다.
그래도 예쁜 동생이 버둥거리는데 손은 잡아주도록 할까?
조그만 손을 쥐자, 유진이도 손에 힘을 주었다.
뽀아앙-.
“에헤헤-.”
음냐-.
야. 너 자는 거 아니지.
와씨! 냄새 대박.
***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겨울방학의 장점이 뭘까.
방학이 길다는 것? 보충수업이 없다는 것?
“방학숙제 없으니까 너무 좋다. 히히히-.”
연말에도, 연초에도.
방학을 맞은 최미경 청소년은 두더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성능 좋은 컴퓨터가 여러 대나 있어서 게임도 하고, 진혁에게 배운 인터넷도 할 수 있어서 여기가 천국이다.
“진혁아. 망가 쩜 제이피지? 이거 다운 받아도 되는 거야?”
까만 배경의 모니터에 형광연두색의 프레임, 그 안에 빨간색 텍스트.
몸을 기울여 최미경의 모니터를 살핀 진혁은 급히 최미경 청소년의 마우스를 빼앗았다.
어서 엔터키를 누르라는 듯 깜빡이는 프롬프트가 악마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렸다.
“그, 그거는 그 머야. 그- 안 좋은 거야.”
“왜? 만화라는데?”
그런 만화 아니야!
진혁도 이게 뭘까 싶어 다운로드받았다가 몇 날 며칠 밤을 그 머야, 심란하게 뒤척이며 아무튼 그랬다.
비록 흑백이었지만 염병택이 좋아할 만한 만화였다.
진혁은 칠흑보다 짙은 번뇌에 사로잡힌 심신을 명상으로 달래야 했다. 내게 강 같은 평화만 줄기차게 되뇌며.
다행히 .JPG가 아니더라도 최미경 청소년이 놀거리는 수두룩했다.
“시노비 지겹다. 여기부터 어려워져.”
그러면서 그 게임 맨날 하더라.
“노래방 반주 너무 촌스럽다.”
그러면서 매일 부르더라.
최미경은 X세대 청소년답게 가요톱10 상위권 곡을 모조리 섭렵하고 있었는데, 목이 쉴 때까지 노래를 부르는 열정을 보였다.
그래도 최미경의 노래는 듣기 좋아서 진혁도 하던 일을 멈추고 듣곤 했다.
최미경이 솔로 플레이만 하는 건 아니다.
함께 놀아줄 사람도 많으니까.
타타타타다다닥-!
민용락과 테트리스를 할 때는 키보드를 부수는 소리가 들린다.
“막대기! 막대기이이이! 막대기 내놔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쏘련 놈들 다 죽어버려어어!”
“어휴, 귀먹겠다.”
민용락은 실제로 왼쪽 청력이 약해져서 여자친구와 통화할 때 오른쪽 귀를 사용 중이다. 자리를 바꿔볼까도 생각했지만 한쪽 귀라도 건사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 자리 교체는 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즐기며 시간을 보내면, 최미경은 마지막 과정으로 넘어간다.
엎드려 만화책을 보던 최미경이 잠긴 목으로 민용락을 불렀다.
“큼- 크흠-. 크홰앰-. 용락 삼촌, 영 점프 또 없어요?”
그 목소리가 마치 왜가리 울음소리 같았다.
“지금 보는 게 최신판이잖아.”
“아, 아깝다.”
두더집에는 민용락이 거르지 않고 구비해 두는 만화책과 잡지도 방 하나에 가득이다.
추운 겨울날, 뜨끈한 방바닥에 엎드려 귤을 까먹으며 만화책을 보는 행복을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이거 먹으면서 해오-.”
“우와! 삼촌 최고!”
장진남이 떡볶이나 튀김 등 청소년이 좋아할 간식까지 제공하니 두더집의 중독성은 가히 비교할 만한 것이 없었다. 여름철 손목시계 가죽줄의 냄새에나 견줄 수 있으려나. 킁킁- 계속 맡게 되던 그 냄새.
‘설마. 두더집이 PC방의 원조인가?’
진혁이 얼토당토않은 의심을 할 정도로 최미경은 두더집에서 행복해 보였다.
숙식마저 해결할 기세로 두더집에서 뒹굴거리다가 낮잠을 자는 날도 많았다. 친구가 있으니 하루도 빠짐없이 놀러 오고, 편하게 먹고 자는 거다. 겨울잠 자는 곰탱이처럼.
물론, 그 옆에는 오빠 껌딱지 유진이가 있었다.
토도독- 키보드를 두드리는 오빠 옆으로 유진이가 엉금엉금 기어왔다.
“오빠, 프, 프- 프로그래밍 해요오?”
“음-. 말하자면 그래.”
프로그래밍 언어 교재 펴 놓고 키보드 두드리면 그게 곧 프로그래밍 아니냐?
아님 말고.
“무슨 프로그래밍이에요?”
“그······.”
Hello, world!
책에서 시키는 대로 입력하면 저 말이 나온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