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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92화 (192/338)

< 느림보 (2) >

“어허허허허-. 으흐흐흐흑-. 끅끅-.”

누군가 멀리서 장진남을 보았다면 뽀글 파마한 여자가 쪼그려 앉아 우는 줄 알았을 거다. 그 정도로 장진남의 리액션은 격렬했다. SSS 중 가장 감수성 풍부한 사람인 동시에 음담에도 반응하는 남자였다.

앞치마로 눈물을 훔친 장진남이 김인랑을 흘기듯 보았다.

“험! 총각이 그런 얘기하면 못 써오. 혹시라도 제수씨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오. 순진한 아가씨 같던데.”

“넵! 시정하겠습니다!”

놀라운 태세전환이었다.

두 남자는 언제 시시덕거렸냐는 듯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한유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으니까.

장진남이 열심히 뒤적인 덕에 말미잘 색이 고르게 변했다.

말미잘 볶음의 1단계, 질겨지지 않도록 약한 불에 살짝 익히는 과정이 끝난 것이다.

“고춧가루 주세오.”

“가루가루! 고춧가룻!”

“파.”

“파아앗!”

“마늘.”

“당신마늘!”

에휴-. 저 삼촌도 어지간히 까불이다. 김인랑을 곁눈질한 진혁은 작은 한숨으로 어이없는 속을 달랬다. 최태양을 보며 한숨을 쉬던 장군이도 이런 심정이었겠지. 칡뿌리를 뽑겠다고 나섰다가 나가떨어졌을 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보글보글-.

솥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국물이 어찌나 많이 불어났는지, 그 많던 말미잘이 거의 잠기듯 자취를 감춘 것이다.

‘말미잘 볶음이랬는데 탕이 되어 버렸어.’

하늘까지 닿을 듯 모락모락 솟는 김을 헤치고 진혁이 솥을 들여다보았다.

“물이 정말 많이 나오네요. 와-! 맛있는 냄새.”

“그러게오. 냄새가 정말 좋아오.”

놀랍기는 말미잘 요리가 처음인 장진남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간을 할 차례다.

장진남은 두툼한 손으로 천일염을 추가했다.

그리고는 손으로 부채질하듯 피어오르는 김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냄새를 맡는 거다.

“냄새는 왜요?”

“나는 간을 이렇게 봐오. 냄새로 알 수 있어오.”

오-. 대단하다.

진혁도 후각이 예리한 편이지만 맛은 혀로 봐야 하는데, 냄새로 간을 본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두어 번 냄새를 맡은 장진남은 국자를 이용해 간장을 둘렀다.

“어? 진간장으로 해요?”

장진남이 담백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진간장에 조미료가 포함돼 있어서 감칠맛 낼 때는 이게 좋아오.”

와, 많이 배운다.

근육질 UDT OB에게 진간장의 장점과 요리에 대해 배우게 될 줄이야.

“이제 재료는 다 썼어오. 눌어붙지 않게 저으면서 졸이기만 하면 돼오.”

“네. 그럼 저는 정리를-.”

진혁은 재료를 담았던 양푼과 양념 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정리하는 진혁의 곁으로 김인랑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열심히 솥을 뒤적이는 장진남의 등을 가리켰다.

“야, 장 선배 꼭 아줌마 같지 않냐?”

“쿡-.”

아까는 말미잘을 놓고 장진남과 시시덕대더니, 이번에는 장진남 차례인가 보다.

대놓고 웃지도 못하는 진혁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진혁도 마침 그런 그림을 연상하던 중이었다. 뽀글 파마 머리의 근육질 주부를.

후루룹-. 국물 맛을 본 장진남이 중얼거렸다.

“다 들리거든오?”

“앗! 넵! 시정하겠습니다! 나쁜 뜻은 없었습니다!”

시정하겠다는 사람 치고는 너무 즐거워 보였다.

탕! 탕!

마침내 장진남이 국자에 묻은 양념을 솥에 부딪쳐 털어냈다.

요리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음-. 다 된 거 같네오.”

고소하면서도 매콤한 향이 후각은 물론 위장까지 자극했다.

진혁은 저도 모르게 솥 위로 코를 디밀어 킁킁거렸다.

‘크으-. 냄새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장진남은 주걱으로 잘 익은 말미잘을 하나 건져 올렸다.

그리고는 결과물을 손으로 집어 들어 몸을 돌렸다. 누가 봐도 시식할 사람을 찾는 요리사의 몸짓이었다.

“용감한 진혁이가 맛을, 어?”

순간이동을 사용한 게 아닐까.

용감한 겁쟁이 진혁은 이미 몇 걸음이나 멀어져 있었다.

‘좋지만 싫어!’

냄새는 좋지만 촉수 괴물의 정체를 아는 이상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인랑이가 맛 좀 봐오.”

“넵!”

후우-후우-.

강심장 김인랑은 볶은 말미잘을 몇 번 불어 식힌 다음 용감하게 입에 넣었다.

호더더더더-. 뜨거-. 쩝쩝쩝-.

‘먹······을 만한가?’

진혁은 가늘게 뜬 눈으로 김인랑을 유심히 관찰했다.

“끄으음······. 흐끄음-.”

앓는 소리를 낸 김인랑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갔다.

씹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아래턱도 결국 정지했다.

‘역시 맛이 이상한가 봐!’

튀어야 한다.

그때였다.

꿀꺽 삼킨 김인랑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줌마······, 하나만 더 주세요.”

***

찬바람을 피해 식탁에 둘러앉았다.

요리한 장진남도, 함께 고생한 까불이 김인랑도.

자칭 ‘식탐 없는 남자’ 장진남인데, 쉬지 않고 놀리는 수저가 매서웠다.

“와아-. 이렇게 맛있는 건 난생 처음이애오.”

“조리장님이 맛있게 해주신 덕분이죠. 많이 있으니 댁에 좀 가져가세요.”

손광연과 김인랑은 말미잘 볶음을 곁들여 밥을 퍼먹느라 말을 잊은 듯했다.

진혁은 유진이와 거실 바닥에 앉았다.

“유진이, 아-.”

“오아앙-.”

“어때?”

“스으읍-. 매운데 너무 맛있어요오-.”

매워서인지, 맛있어서인지 유진이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동생이 오물거리는 모습을 감상하는 자체로 흐뭇하고 행복하지만 진혁의 젓가락은 쉴 수 없다.

‘나는 큰 거 하나 먹을까?’

세상 어디에도 없을 맛이라는 조일헌의 평가는 정확했다.

구체적이지 못한 표현이었으나 그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을 듯했다.

‘비교할 맛이 없다.’

유진이가 씹기에도 전혀 질기지 않고 두께 덕분인지 오독오독한 식감도 제법 괜찮았다.

그러나 유진이가 먹기에는 양념이 매웠다.

진혁은 양푼에 밥을 넣고, 볶은 말미잘을 가위로 잘게 잘라 올렸다. 듬뿍.

거기에 김가루를 얹고 참기름을 둘러 비비는 거다. 자작하게 남은 국물도 몇 숟가락 빼놓을 수 없지.

닥닥닥-.

거실에서 들리는 전투적 사운드가 한유영의 귀를 사로잡았다.

양푼을 사이에 둔 남매가 거실에 퍼질러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이 저렇게 보기 좋을 수가. 거지 꼴이지만 갯벌에 다녀온 시골 아이들이 꾀죄죄한 게 흉은 아니다.

진혁이 말미잘을 잡게 된 계기는 이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또 하나의 행복을 낳았으니 한유영은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닥닥닥-.

동생에게 먹일 생각으로 양푼 바닥에 남은 밥풀을 긁는 덩치 큰 아들의 모습도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얼씨구? 지 입으로 들어가네?

“유진이 맘마 더 먹을래?”

“아니요오? 배부른데요?”

“그래. 오빠도 배부르다.”

“오빠, 말미잘이 또 잡으러 가요오-. 너무 맛있어요오-.”

매워서 습습-거리면서도 유진이는 거푸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진혁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 가자. 겨울에도, 봄에도 가자.”

입가에 묻은 양념을 혀로 훑는 진혁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아무래도 다음번에는 미나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다.

어후 배불러-. 배를 두드리던 손광연이 거실로 고개를 돌렸다.

“아빠가 반대하는 건 아닌데, 그러다 말미잘 멸종되는 거 아냐?”

“다른 동네도 돌아다니면서 잡으면 되죠. 일헌이 성 말로는 청포대에 씨알 좋은 말미잘이 많대요. 승훈이네 동네도 말미잘은 거들떠보지 않아서 지천이래요.”

“청포대 해수욕장? 거긴 모래땅인데 먹을 수 있나?”

마찬가지로 말미잘 볶음에 감동한 장진남이 진혁을 거들고 나섰다.

“오늘 손질하는 법 제대로 익혔으니 괜찮아오. 배 가르고 소금으로 빨면 돼오.”

흠-. 손광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잊을 수 없는 맛이긴 해. 너무 맛있다.’

참새구이에 군침을 흘리던 서울 촌놈 손광연도 홀딱 반하게 만드는 맛이었다.

그래도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라면 연안 자원을 보전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돈이 된다고, 맛이 좋다고 닥치는 대로 잡아들인다면 과연 10년, 20년 후 무엇이 남을까.

누구보다 갯벌을 사랑하고 낚시를 좋아하는 손광연이 쉬는 날에도 밖에 나가지 않고 가족과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유 중 하나였다. 저 하나 참는다고 자원이 절약될까 싶지만 그래도 말로만 아끼는 데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보이는 게 어디냐.

‘말미잘 번식도 연구해봐야겠다.’

보호도 중요하지만 먹는 걸 포기할 순 없으니까.

별도로 설립한 수산자원연구소에서 기후 변화와 남획에 대응해 연안 어종 양식기술도 연구 중이었다. 정부 기금이 투입되지 않은 최초의 민간기업 독자 연구였다.

수산자원 보호를 위한 관련 법안이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하지만, 단속 의지 없이 법으로 금지하는 건 기둥 없는 울타리나 마찬가지다. 관에서는 단속하는 시늉도 하지 않으니 차라리 남획에도 보존되도록 개체수를 늘리자는 구상이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걸 알기에.

“오빠. 다음에는 더 많이 잡아요오-.”

“아하하, 그래. 오빠가 열심히 잡을게. 유진이는 부지런히 찾아.”

잡아오는 양이 적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스르릉-.

마당에서 솥뚜껑 여는 소리가 들렸다.

두더집 식구들은 벌써 두 냄비를 해치우고도 부족한 모양이다.

‘지들도 양심이 있으면 잡는 거 거들겠지.’

낚시 가면 허탕만 치는 녀석들이 우리 아들이 잡아온 건 잘만 먹더라.

그어억-. 아이고 배불러.

근데 왜 심장이 세게 뛰고 피가 끓는 거 같냐. 요즘 피로가 과하게 쌓였는지 동면하는 파충류가 된 듯 무기력했는데 신기하다.

‘명현현상과 비슷한데?’

진혁이가 대여섯 살 때였으니 손광연은 서른 살 즈음이었나.

손광연은 심하게 앓았다. 방바닥에 누워 있자면 몸이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탈력이 심했고, 고열과 냉한 때문에 한유영의 손에서 물수건이 떠나지 않았었다.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도시인에서 촌사람으로, 학생에서 농부로 체질이 변하느라 앓는 거라는 이웃의 추측만 있었을 뿐이다.

‘맞아. 그때랑 비슷해.’

아무튼 말미잘을 먹은 후 몸이 덥혀지고 힘이 솟는 느낌은, 시름시름 앓던 중 김순복이 달여준 한약을 먹고 벼락같이 부활할 때와 흡사했다.

***

휘이이잉-.

새해 벽두부터 바다와, 들, 산에서 강한 겨울바람이 불어닥쳤다.

폭설에 강풍까지. 동장군은 미치도록 가물고 더웠던 여름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맹렬한 기세를 뽐냈다.

그 지랄 떨지 않아도 겨울인 거 다 아는데.

‘단군 할아버지는 재주도 좋으시지.’

군밤장수 모자를 쓰고 싸리비로 마당을 쓸던 진혁은 일면식도 없는 단군 할아버지를 향해 혀를 찼다. 진혁만의 푸념은 아닐 것이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계절에 맞는 옷과 신발을 구비해야 한다. 그건 도시와 시골을 가리지 않는다.

환절기도 빼놓으면 섭섭하지. 얇은 걸칠거리를 깜빡하는 순간 감기라는 녀석이 몸에 들러붙는다. 난방과 냉방을 모두 챙겨야 하는 건 어떻고.

‘재주라면 재주여.’

어떻게 터를 잡아도 이런 땅을 고를 수가 있을까.

순간의 선택으로 후세를 개고생시키는 건 시조부터 이어온 민족 전통인 모양이다.

그 덕분에 단열 잘 되는 집과 바닥 난방을 고안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후손들을 고생시키는 근시안적 개척자라고 해야 할지.

‘분명 날씨 좋은 가을에 터 잡으셨을 거여어-.’

수천 년 살 곳인데 최소한 1년은 꽉 채워서 살아보고 결정했어야지.

그래도 적극적으로 비난할 마음은 없다.

불편하긴 해도 공기 좋고 경치도 훌륭하니까.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기후에 적응하느라 사람들도 지랄맞, 아니 파이팅 넘치는 거겠지.

“아이고오-, 허리야.”

뻐근한 허리를 쉴 겸, 장갑을 꼈어도 언 손을 녹일 겸 잠시 상체를 세웠다.

미끄럽지 않도록 마당부터 버스 길까지 눈을 치운 후였지만, 단군 할아버지가 찜하신 땅은 이를 비웃듯 재차 눈을 뿌렸다.

뽀드드드득-.

육중한 차체가 눈을 밟는 소리에 언덕길로 눈을 돌렸다.

김인랑의 차가 빙하처럼 스르륵 내리막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김응녀 가족을 손님으로 모셔오는 운행이다.

귀한 손님이라는 듯 서서히 굴리는 바퀴가 조심스럽다.

덜컹-.

손광연과 한유영이 조심스럽게 현관을 열고 나왔다.

“엄마, 우리 애기들은 안 깼어요?”

“응. 기절했어.”

손광연과 한유영이 김응녀의 가족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진혁의 관심은 오직 엄마의 표정에만 쏠려 있었다.

‘하와이 여행에서 돌아오셨을 때랑 비슷하네.’

정확히는, 오랜만에 만난 엄마를 향해 달려가던 유진이를 닮았다.

그래, 엄마가 행복하면 됐지.

아빠가 그랬다.

피가 섞여야만 가족이 아니라고.

“진혁아-.”

차에서 내린 황가영이 손을 흔들었다.

마당 쓸던 군밤장수가 이모와 누나들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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