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겁쟁이 (6) >
볼수록 참 수더분한 사람이다.
덜 마른 머리를 벅벅 긁는 황가영을 보며 진혁은 그리 생각했다.
“운동 다 했어?”
“네. 오늘도 일찍 나왔네요?”
“수험생이잖아. 이거 대추차야. 마셔.”
“감사합니다.”
황가영은 요즘 누나 노릇을 하느라 바쁘다.
수험생인데 공부에나 신경 쓰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매일 보온병에 달콤한 차를 담아왔는데, 먹는 걸 좋아하는 진혁은 차마 거부하지 못했다. 운동 후 먹는 거라곤 오렌지주스와 바나나가 전부였는데 선택지가 늘어 반갑기도 했고.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지.’
호릅-. 크으- 죽인다.
모락모락 김을 풍기는 향긋하고 달콤한 대추차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뱃속이 따뜻해지며 체온을 한층 올려주는 것이, 추울 땐 이만한 회복 물약이 없다.
유행이 살짝 지난 연갈색 떡볶이 코트를 걸친 황가영이 진혁의 옆에 앉았다.
“안 드실 거예요?”
“응. 난 괜찮아.”
황가영은 단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엄마가 힘드니 군것질이나 장난감 따위 욕심내지 말자고 어릴 때부터 언니와 약속했다고 들었다. 그런 자매의 세월이 포개지며 저절로 욕심에 무감각해진 것 같다고. 성장 환경에 영향을 받아 일찍 철이 든 아이를 보는 듯했다. 조슬찬처럼.
“수능이 한 달 조금 넘게 남았네요.”
“응. 너무 좋다.”
“시험 보는 게 좋아요?”
“아니?”
고개를 홱 돌린 황가영의 눈이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다 끝나잖아. 아아아-, 나 정말 지겨웠거든.”
“학교는 정했어요?”
“얘는? 점수 나온 다음에 정해야지. 나는 누구처럼 시험 봤다 하면 1등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점수 맞춰 가야 해.”
황가영이 털털하게 웃었다.
아, 그게 맞는 거지.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해지며 알게 된 황가영은 진혁이 돌아와서 만난 사람 중 가장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의외로 대화도 잘 통한다.
홍기준의 가족은 너무 딴 세상 사람 같았고, 아빠는 너무 복잡하고.
엄마가 그나마 냉정하지만 연령 때문인지 세대 차이 비슷한 게 느껴졌더랬다.
여러 방면에서 진혁에게 의존적인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 있지-, 그래두 우리 언니 다니는 학교는 갈 수 있을 거 같아.”
황가영도 서울 상위권 대학에 진학할 실력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등록금 때문에 지방의 국립대를 목표로 한다고.
“전공은 뭘로 결정하려고요?”
별것 아닌 내용인데도, 질문을 던지자 가슴에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이 또래다운 화두라는 깨달음 때문이리라.
늘 도색잡지의 일본 누나 타령하는 염병택, 등유 가격이 올라 걱정이라는 이승훈이 그나마 진혁에게 의존하지 않고 대화하는 수준이었다. 한데 그들의 화제는 진혁에게는 관심 밖이었고 해결책을 필요로 하는 문제도 아니었다.
“난 뭘 하는 게 좋을까?”
혼잣말처럼 질문을 던진 황가영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손진혁이 누군가의 고민을 듣고 상담을 해준 일이 있던가?
떠올려 본들 그럴듯한 기억이 솟아오를 리 없다.
진혁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는 의외로 잘 통했으나 연장자가 고민 상담을 청하는 일은 없었고, 사회에서 만난 나이 적은 친구들도 그건 다르지 않았다.
‘이 누나는 나한테 정서적 의존 뭐 그런 건가?’
친분이 쌓인 사람들은 이렇게 고민도 털어놓고 하는 거겠지.
하고픈 일이 있어도 섣불리 뜻을 펼칠 수 없는 황가영의 환경도 영향을 미쳤을 거다.
진혁이 고개를 돌리자, 황가영은 뭘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언니는 의상디자이너가 꿈이었는데 그냥 성적 맞춰서 간 거거든.”
황가윤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꿈이라도 있었으니까.
한데 황가영은 꿈이라는 것조차 없다고 했다.
“나 있지, 세상을 아는 게 너무 없다? 학교랑 집만 왔다 갔다······.”
그렇겠네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흔한 독서실조차 다니지 않았고, 수험생이 된 후로는 다락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다고.
“우주공학이나 로봇공학 같은 거 어때요?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소재공학, 금속재료공학도 좋을 거 같은데. 기계공학도 있고.”
“와! 말만 들어도 되게 멋있다!”
이렇게 표정이 다양한 사람인 줄 몰랐다.
어떨 땐 유진이보다 더 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근데 학원 같은 거 안 다녀서 컴퓨터도 다룰 줄 몰라.”
“학원에서 뭘 배우겠어요? 어차피 공부는 자기가 하는 건데.”
오-. 황가영이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자신도 학교 수업이나 참고서에 의존하지 않고 교과서와 기출문제로 독학하다시피 했으니 일견 그럴듯하게 들렸다.
“친한 아저씨가 그러는데요, 회사 업무에 필요한 건 회사에서 배우는 거래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 뽑을 거면 뭐하러 신입을 매년 뽑느냐고 하던데요? 그럴 거면 차라리 경력직만 뽑는 게 낫다고.”
“그런 회사는 좋은 곳이겠네.”
“사람을 키우고 만드는 건 사회의 역할이라고 했어요. 좋은 회사는 말귀 알아듣고, 사용하는 용어 이해하는 수준만 돼도 전문가로 만들어 쓸 수 있어야 한다고요. 사람이든 회사든 실패할까 봐 겁쟁이처럼 이것저것 너무 따지다가 뒤처지는 거래요.”
“그런 좋은 말해주는 아저씨도 알고 좋겠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사람보다 기업이 우선이 세상에서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거 아닌가? 중얼거린 황가영이 단발머리를 긁적였다.
그 아저씨 손진혁인데.
철없는 이상주의자였지. 그래도 그룹 오너의 묵인 아래 여러 실험을 할 수 있었고, 자신만의 인사 철학이랄 수 있는 지론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매번 성공한 건 아니었다. 회사에서, 주위에서 아무리 받쳐줘도 기본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끝내 도태되었으니.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보상이 확실하고 매력적이라면 아무리 몽총이라도 어떻게든 사람 노릇을 하려 덤벼든다는 것.
“근데······ 그거 취직 잘 될까? 우주- 뭐 그런 거?”
먹고는 살아야지······. 황가영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세상은 문과가 지배한대.
“그거 취직 엄청 잘 될 거예요. 앞으로 세인전자나 테크니카에서 고액 연봉 줄 거예요. 지금도 이공계만 뽑잖아요.”
다른 기업은 겉보기에 활황인 경기를 틈타 관리직과 영업직을 대규모로 채용하고 있었지만 가장 잘 나가는 세인그룹은 엔지니어 확보에 기를 쓰고 있었다. 학력을 따지지 않았으며 실무 인턴 제도를 두어 옥석 고르기에도 열심이었다.
지금이야 문과가 잘 나가겠지.
하지만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언제인들 계열이나 전공이 중요한 시대가 있었던가. 동일한 출발선에서 선수로서 달리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개인역량이 전부다. 거기에 하나 얹자면 취득이 어려운 자격증 정도랄까.
“그래? 근데 집에서 너무 멀리 가면 곤란한데. 이 동네에는 그런 회사 없잖아.”
엄마 때문이겠지.
대화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황가영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바탕에 김응녀가 있었다.
마치 진혁이 그러는 것처럼.
“이모는 이제 장사 않고 쉬실 거라면서요.”
“그건 그런데. 언니도 있으니까······.”
아, 황가윤은 김인랑과 결혼하면 이 동네에 정착하려나?
김인랑이 시골에 푹 빠져 있으니까 아무래도 그렇게 할듯했다.
다시 만나고, 늘 새롭게 깨닫는다.
이 세 모녀가 서로 얼마나 아끼고 의지하는지.
‘내가 도와줄게요.’
진혁은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아무리 특별한 관계로 묶인 사이라 해도 인생은 결국 각자 살기 마련, 의존하기 시작하면 균형이 틀어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의지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진혁이 선뜻 호언하지 못하는 건 책임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황가영이 깍지 낀 손을 뒤집어 팔을 쭉 폈다.
“해 뜬다. 아이고고-. 종일 앉아서 책만 보니깐 관절이 다 안 좋아.”
“운동장 한 바퀴만 같이 걸을래요?”
“그으-래.”
황가영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고, 진혁도 똑같이 따라 했다.
도와주겠다 공언하지 않은 이유.
그저 나란히 걷고 싶어서다.
의지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어렵사리 되찾은 이번 인연에는 누나로, 친구로 옆에 남아주기를 바랐다.
***
이상저온이 사라지고 예년의 가을 날씨를 찾았다.
겨울을 코앞에 둔 상황이다 보니 오히려 포근하게 여길 지경.
유진이는 오랜만에 아빠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러 나갔다.
아빠는 여전히 동네 풍경 감상하는 일을 즐겨서 시간 날 때마다 산책을 다녔는데, 유진이는 보나 마나 마을 어귀 가게에서 콜라를 사달라고 애교를 부리고 있겠지.
유진이와 마찬가지로, 정원이도 겁이 없었다.
긴 다리를 쭉 뻗은 진혁이 태우는 비행기에도 무서워하기는커녕 재미있다고 소리를 질러댄다.
“애아빠빠빠빼뿌우우우우-!”
어찌나 신이 났는지 정원이는 거실 상공에 높이 떠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애아빠가 어쨌다는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정원이는 도대체 언제 말하게 될까?’
유진이는 24개월도 되기 전에 말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게 빠른 건지 느린 건지는 진혁도 알지 못한다. 아기가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건 유진이가 처음이었으니까.
“저는 언제부터 말했어요?”
“기억 안 나.”
안경을 코에 걸치고 뜨개질을 하던 한유영이 코바늘로 머리를 긁었다.
담백하다. 이 세상 담백함이 아니다.
그 이상 담백하면 싱거워서 맛이 없을 것 같은 대답이었다.
엄마도 가끔 보면 별 고민 없이 사시는 것 같은데, 황영모의 악행을 시대의 소음으로 여기시는 것도 어쩌면 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닐까.
에휴-.
식탁을 사이에 두고 엄마와 마주 앉은 곽향림이 뜬금없이 한숨을 쉬었다. 진혁을 흘끗거리는 걸 보니 늦게 한 결혼이 아쉬운 모양이다.
“그래도 진혁 엄마는 좋겠다. 다 큰 아들도 있고.”
“일찍 결혼해서 그렇죠, 뭐.”
일찍 결혼해서 일찍 낳은 게 아니잖아요, 나 만들고 나서 결혼했잖아요. 진혁은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욕망과 싸워 당당히 승리했다. 요즘 걸핏하면 주둥이가 뇌보다 먼저 반응하려 든다.
‘아침마다 가영이 누나랑 대화하면서 수다의 재미를 알아버렸어.’
역시, 수준이나 취향이 맞는 상대와의 대화는 말하는 재미를 주는 듯했다.
아빠나 홍기준과도 같은 눈 높이에서 대화가 가능하지만 선천적으로 형성된 관계의 제약은 말 그대로 무형의 억압을 가했기에 또래와 어울리는 재미를 얻기 힘들었다.
“언니네는 애기 계획 있어요? 조 박사님 나이가 있는데 괜찮으신지······.”
곽향림은 조일헌과 여덟 살 차이인가 그렇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마흔. 건강하게 살았고 관리를 했다고 해도 20세기에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른 거겠지만.
“응. 노력 중이야. 우리 신랑 나이는 있어도-.”
뜨개질하느라 분주히 놀리던 손을 멈춘 곽향림이 진혁을 곁눈질하고는 한유영을 향해 상체를 숙였다. 중요한 말을 하려는 거구나. 한유영도 상체를 숙여 귀를 가까이 댔다.
사각사각-.
‘힘은 좋아.’
‘오-, 그래요?’
저기요오-, 다 들려요.
예전엔 부모님이 속닥이는 소리를 듣지 못해 돈가스 사태에 미리 대처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때보다 청력도 훨씬 좋아졌다.
그런데 힘이 좋다니, 일헌이 성 요즘 천마 가루 드시나?
거실에 누워 정원이를 비행기 태우면서도 진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비결이 있어요? 진혁 아빠는 사업 시작하고부터 영-.’
우와아-. 우리 엄마도 저런 말을 하시는구나.
경악성을 토해내지 않았지만, 어찌나 놀랬는지 진혁의 눈은 동생 정원이보다 커졌다.
역시 비슷한 처지, 비슷한 수준의 대화 상대가 중요한 거였어.
하긴, 아들에게 상의할 일도, 옆집 최미경 청소년에게 하소연 할 일도 아닐 터였다. 김순복은 밥 많이 먹이라는 말이나 해줬겠지. 보리밥 세 공기 먹고 만들어진 게 최태양이라는 말을 듣고 엄마와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비결이 뭐 있겠어? 그냥 뭐, 삽 들고 하루종일 돌아다니잖아. 그게 다 남자들 허벅지 힘으로 가는 거야.’
‘역시 사업하느라 체질이 변해서 그런 건가?’
오호라.
그 전에는 쓸만했나 봐요?
‘아! 진혁 엄마. 그거 좋더라.’
“그거요? 뭐요?”
큰 눈만큼이나 한유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이고, 어머니. 그게 그렇게나 반가우실까.
‘말미잘.’
‘말미잘?’
말미잘?
그 촉수 달린 괴물?
한유영과 진혁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말미잘을 먹어본 한유영은 효력에 대한 내용이 금시초문이어서, 진혁은 그 괴물을 먹는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애아빠빠빠빠빠! 얍빠!”
형의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정원이가 호통을 쳤다.
그 난리에 진혁의 얼굴 위로 아기 침이 후두둑 떨어졌지만 진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유진이는 오빠 등에 쉬도 갈겼었는데 뭐. 지금은 정원이에게 최고의 비행 경험을 선사하는 게 중요하다.
‘말미잘이 남자한테 좋다고 누가 그러더라고? 그래서 언제 바다 갈 때 잡아오랬거든?’
주방과 거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지금 이 순간, 곽향림을 제외한 사람이 입을 열면 그 사람은 대역죄인이 되는 거다.
‘그냥 요만큼 잡아왔길래 그거라도 요리해서 먹였어. 그랬더니······.’
‘그랬더니?’
꿀꺽-.
진혁은 침을 삼켰다. 고막을 면도칼처럼 벼린 채.
대바늘을 내린 곽향림이 엄지를 세워 한유영 앞으로 들이밀었다.
‘좋아아-. 죽여어-, 아주.’
허어-. 한유영은 대단한 비밀을 알아낸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면서였다.
그만큼 곽향림의 ‘좋아’ 사운드가 찹쌀풀처럼 걸쭉했다.
진혁의 눈치를 살핀 한유영이 바짝 당겨 앉았다.
“오늘 일요일인데 조박사님 뭐하세요? 바다 안 가신대요?”
“농사꾼이 일요일이 어딨어? 안마을에 로타리 치러 갔어. 고구마가 어찌나 잘 됐는지 고구마순이 무슨 칡 줄기 같다는 거야. 사람 손으로 걷는 게 도저히-.”
“진혁아?”
곽향림이 떠드는 동안 한유영이 나긋한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진혁은 정원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한 채 엄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미잘 잡아올까요?”
“으응?”
아차! 엿듣기 모드였는데.
한유영과 곽향림이 놀란 토끼처럼 상체를 곧추 세웠다.
그렇게 작게 얘기했는데 다 들렸다고?
허험-. 에흠-.
두 여자의 헛기침 소리만이 정적을 대신했다.
난감하고 곤란하기 짝이 없는 상황.
“애아빠빠빠! 애아빠- 바부우-!”
애아빠 바보라고 옹알거리는 정원이만 신났다.
그래, 아빠가 조금 바보 같기는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