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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88화 (188/338)

< 겁쟁이 (5) >

***

무덥고 건조했던 여름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듯 유난히 쌀쌀한 가을.

예보에도 없던 소나기가 내릴 때마다 기온이 몇 도씩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쏴아아-.

“텨텨텨!”

급식실에서 점심을 해결 후 친구들과 밧줄을 타던 진혁은 한바탕 쏟아지는 비를 피해 씨름장 처마로 몸을 피했다.

조슬찬과 염병택이 쪼그려 앉아 조슬염병 대담을 시작했다.

“상기 전학 간다구 하늘두 슬픈 모앵여-.”

“우리가 슬퍼야지 왜 하늘이 슬퍼하냐?”

“염병이 너는 애가 노상 잡지루 헐벗은 누나들이나 보니께 맘씨가 그 모냥인 겨어-. 나처럼 황순원이나 김유정 소설을 좀 읽어 보라니께? 도서실이 가먼 책 많어어-.”

“뭐래. 난 사진이 좋아. 씨뱅아.”

도무지 대화의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뒤이어 어떤 말이 나올지 알 수 없는 녀석들이다.

푸루룹-.

박상기가 떠먹는 요구르트를 입으로 빨아들여 오물거렸다. 점심 후식으로 제공된 것인데 숟가락을 미처 챙기지 못한 모양이다.

입가에 묻은 요구르트를 혀로 훑은 박상기가 웅얼거렸다.

“······김유정은 여잔가?”

“그렇겄지이-. 여자니께 그렇게 동백꽃 같은 거를 쓰는 겨어-. 남자덜은 거 누구여, 김진맹이처럼 무궁화꽃 쓰는 거여어-.”

오오오-.

감탄을 넘어 경이롭다는 듯, 염병택이 놀란 눈으로 조슬찬을 보았다.

그러나 박상기는 불신하는 눈치였다.

“······이름으로 알 수가 있나.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정화는 여자가 아니던데······.”

사회 수업 시간에 배운 〈정화의 원정〉 대목이었다. 정화라는 인물이 여자가 아닌 남자였고, 환관이자 장수였다는 사실에 받은 충격이 컸다.

환관에 장수였던 인물이 하필 여자친구 이름과 같을 건 뭐란 말인가. 내 여자친구가 환관이라니. 세상은 박상기에게 끊이지 않는 시련의 형틀이었다.

친구들의 엉뚱한 대화를 방관하던 진혁도 은근슬쩍 제 나름의 의문에 빠져들었다.

‘정화 본명이 마삼보였던가?’

무협지에 종종 절륜한 환관으로 등장하는 인물의 모델이 그 정화였지 아마.

알았었는데 가물가물하다. 시험을 위해 공부한 내용은 머리에 빼곡한 반면, 그저 활자 중독을 달래기 위해 읽은 텍스트는 흐릿한 것도 신기하다.

“상기가 요새 공부 열심히 허는 모냥여-. 외국인두 알구-.”

“외국 여자 사귀려고?”

“······니들은 어떻게 얘기가 그 방향으로 갈 수가 있냐.”

진혁은 박상기의 의구심을 완벽히 이해한다.

그래도 친구들이 헛발질을 하거나 말거나 그냥 두었다. 저러다 말겠지.

취향과 지적 수준 차이는 있을지라도 정말 좋은 친구들이다. 때 묻었다기보다 어른스럽고, 무식하다고 하기에는 순수하고, 겁쟁이라기보다는 조심성이 많았다. 헛소문을 맹신하거나 퍼뜨리는 일 없이, 의심하고, 생각하고, 끝없이 의견을 나눈다.

“조슬아, 황순원도 여자냐?”

뭐, 늘 화두가 이상하고 멀쩡한 결론을 내리는 일이 드물다는 단점이 있지만.

인간성은 참 괜찮은 친구들이다.

“그 냥반은 이름이 중립적인디 남자라는 거 같더먼-. 국어 선생님이 그러더라.”

“오-. 조슬이가 수업을 들었다고?”

“국어 선생님이 울옴마 사진이랑 닮어서······.”

아, 그렇다고 했지.

빗물 튀는 땅바닥으로 시선을 돌린 염병택이 중얼거렸다.

투두둑-.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구름이 가시고 햇볕이 드리웠다.

비가 그치자 뒤늦게 급식실로 뛰어가는 여학생들이 보였다.

‘어, 누나다.’

급식실 규모가 크다 해도 한 번에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중학생이 식사를 마치면 고등학생 차례였는데, 황가영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친구들과 더불어 배를 채우러 가는 듯했다.

‘쌀쌀한데, 안 추운가?’

학교 건물에서 급식실까지 가자면 거리가 꽤 되었다.

그런데 황가영은 재킷도 걸치지 않았다.

“오-, 진혁이도 이제 이성에 눈을 뜨는 거야? 악!”

진혁은 헛소리를 하려는 염병택의 승모근을 가볍게 쥐어 입을 다물도록 만들었다.

“사촌 누나야.”

“스읍-, 누구? 저 멀리 있는 사람이 보인다고?”

“아는 사람은 멀리 있어도 보이잖아.”

드넓은 갯벌에서도 아빠는 알아보는 것처럼.

조슬찬이 진혁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건 그려어-. 염병이두 다방 누나덜은 뒤통수만 보구두 맞히더라-.”

뒤통수만 보고도······.

‘그것도 인연의 다른 이름 아닐까?’

아는 사람은 그렇게라도 알아보고, 만나게 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푸루루루룹-.

알뜰하게 후식 흡입을 마친 박상기가 팔에 걸쳤던 외투를 둘렀다.

“꼭 놀러 와, 회장님. 병택이랑 슬찬이도. 청주대 근처에 뼈다귀해장국 맛있는 집 있어.”

박상기는 오늘이 마지막 등교였다.

이미 학급 친구들에게는 인사를 마쳤다고.

“······ 아빠 오셨다.”

박상기가 고개를 돌린 학교 정문에 승용차가 들어섰다.

한두 번은 놀러갈 수도 있고, 서로 노력한다면 만날 수도 있겠지.

그러나 한쪽이라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과연 관계는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

진혁은 정든 친구를 다른 지역으로 떠나보낸 기억 자체가 없었다. 정이 들 시간도, 계기도 없었으니까.

세상은 아직 느리게 흘러간다.

무슨 생각인지 홍기준은 휴대전화를 세상에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개발 완료된 제품을 세상에 당당히 공개했음에도 대량생산과 서비스에는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장과 소비자의 요구는 보란 듯 무시하면서 말이다.

홍기준은 그 진짜 이유를 진혁에게만 알려왔다. 이메일로.

「나는 너와 다르다. 처음 지구에 온 외계인의 눈에는 인간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겠지. 반면 선입견과 편견 등, 지구인을 보는 관념이 완성된 외계인은 어떨까? 닳고 닳은 늙은 외계인은 인간을 아름답게 보지 못해. 늙은 외계인의 업적을 고스란히 누리기에 인간은 너무 추악하다. 휴대전화가 아니어도 돈 버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 읽고 지워라.」

진혁은 지구에 처음 온 외계인, 홍기준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늙은 외계인. 조심하기 위한 표현일 테지만 어찌 그 비유를 알아듣지 못할까.

직설적인 진혁의 표현대로 하자면 ‘인간놈들 싸가지 없어서 베풀기 싫다’ 정도 되려나.

아무튼 홍기준이 내놓은 대답은 그랬다.

‘아쉽네.’

진혁에게는 보안전화기가 있지만 친구들은 삐삐도, 휴대전화도 없다.

그래도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고, 세계가 그다지 넓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연락처와 의지만 있다면 서로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잘 가라, 상기야.”

진혁이 손을 내밀었다.

박지범과는 학교가 달라 작별 인사도 못하고 보냈는데, 배웅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아쉬운데 다행스럽다니,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인간은 모순적이고 그 감정은 간사하다.

한편으로 명치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도 느꼈다.

‘이별 싫다.’

이거 뭔데 이렇게 아프냐.

되도록 하지 말아야겠다. 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감정이 메말랐을 때가 편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감정은 이제껏 접하지 못한 두려움을 안긴다.

“······갈게.”

친구들과 악수를 나누고 포옹으로 아쉬움을 달랜 박상기가 차에 올랐다.

촉촉이 젖은 박상기의 눈가만큼이나 축축한 모래 운동장이, 눅눅한 숨을 힘겹게 밀어 올렸다.

“비 와서 구적거린다. 우덜두 드르가, 인제. 드르가-.”

“가자.”

조슬찬과 염병택은 학교가 달라지겠지만 이사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짜식들 공부 좀 하지.

***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늦가을의 시골.

재동리는 능선을 사이에 두고 읍내와 인접해 있다.

저 언덕을 넘으면 바로 읍내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뻐뻐뻑-.

양계장 산란계들이 홰를 치며 ‘나 알 깠소!’ 외치지만 부지런한 양계장 주인은 아직 작업할 마음이 없다.

“이 시간이먼 댕기더니 오늘은 워째 안 보이네잉-?”

그때였다.

왜애애애앵-. 후우우웅-.

라이트 없는 자전거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언덕을 올라 금세 사라졌다.

얼핏 보기에 100cc급 오토바이보다 빠른 속도였다.

“허어어-. 귀신두 아니구 저게 당췌-.”

그래도 좋은 구경거리다.

처음에는 까무러칠 뻔했는데, 자꾸 보다 보니 그러려니 하게 된다. 인간의 내성이란 그런 것이겠지. 기이한 사건이 반복이 되면 무뎌지고 결국 하나의 진실로 인정하게 되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 벌어진다는데 저것도 그 중 하나 아닐까.

‘몽마메 똥따떼 쏭싸쎄 마담 메담 무슈 메슈 마드모아젤 엉 윈느······.’

학교까지 걸리는 시간은 더이상 줄이지 못할 정도로 짧아졌다.

장군이의 부름을 받고 달려가던 날 활짝 열린 심장의 기운 덕분이었다.

“너무 빨리 왔나? 아이구구- 허벅지 땡겨.”

한결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아침마다 운동장을 돌며 하루를 시작하는 진혁의 일과는 여전했다.

헐렁한 티셔츠 차림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운동장을 가볍게 돈 후 100미터 주로를 몇 차례 달린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지?’

선수 생활을 마친 염병택과 조슬찬도 등교하지 않은 시각, 진혁은 손목시계의 스톱워치를 눌렀다.

파아앙-!

자세는 부자연스러웠고 호흡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진혁에게 중요한 건 호흡이나 자세가 아니었다.

「9.23」

스읍-.

원하는 기록이 나오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잘 나오는데. 이러면 튀잖아.’

한 번 더.

「9.51」

재시도.

「8.58」

히익-!

“너무 빠른데?”

마지막 시도.

「11.80」

“이게 뭐야아-. 그냥 달렸을 때보다 느리잖아.”

개판이다.

덥혀진 몸을 식히기 위해 웃통을 벗고 사열대 옆 그늘에 앉았다.

후우우-.

고를 필요도 없는 호흡을 고르며 궁리했다.

‘편하게 하려다 머리만 더 아파졌다.’

몸이 가벼워지고 힘이 넘치지만 미세하게 조절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장거리를 달릴 때는 호흡과 판단에 여유가 있으니 비슷한 시간에 주파가 가능했는데, 10초 이내에 결과가 나오는 100미터 단거리에서는 조절이 어려울뿐만 아니라 결과값의 격차가 너무나 컸다.

자세와 보폭도 문제가 된다.

힘차고 매끄럽게 나와야 할 동작이 엇박자를 띄었다.

다리 힘만으로 달릴 때 3보 걸리던 거리를 1보에 넘는 식이다.

그래서는 육상선수라고 할 수 없다.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게 낫겠다. 훈련도, 시합도.’

그것만큼 간단한 결론은 없을 터였다.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보폭이나 점검해야겠네.’

가뜩이나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싫어하는 성격인데 제어하지 못하는 힘을 남발한다? 손진혁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뭐, 이상한 힘은 개 도둑 잡을 때나 쓰면 되지.

정체 모를 힘은 아마도 유진이가 뽑아다 쓰는 그 기운이겠지.

힘의 주인은 진혁인데 이제야 쓸 수 있게 된 것도 우습지만 진혁으로서도 할 말은 있다.

‘방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써요오-.’

힘이 개방된 후 더욱 향상된 체력과 쉬 피로해지지 않는 근육을 얻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힘을 얻으면 어디에 쓸까, 진혁은 넌지시 주위에 묻곤 했다.

- “은행 털어야지.”

- “본 팀장은 가면 쓰고 나쁜 놈들 다 철창에 집어넣겠다.”

문석일과 양강욱은 투명한 사람들이었다.

반면 아빠의 정서는 혼탁했다.

- “대정? 야, 뭐하러? 그냥 둬도 늙어 죽고 말라죽을 놈들인데, 그런 놈들에게는 관심 주지 않는 게 최고의 벌이야. 이 아빠는 말이지, 밤마다 아주 그냥 으흥흥-.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볼 거 없어요오-. 우리 아들도 늙으면 알게 돼요오-. 아빠는 요즘 밤이 무서워.”

혼탁한 데다 뭔가 불온한 냄새도 나는 듯했다.

겁쟁이 신랑이라고 하던 엄마의 말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눈치는 모자라지만 진혁은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대정을 먼 나라 오랑캐 취급하는 마음도 언뜻 이해가 된다.

아빠 역시도 뭔가를 증오하고 때려 부수는 일을 결국 같은 족속이 되는 지름길로 여기는 사람이었기에.

‘인간 세상 참 어렵다, 어려워.’

누군가는 진혁을 바보라고 놀릴지도 모른다.

가령, 양강욱이나 문석일처럼 광포한 힘을 무기로 삼아 저만의 이상향을 만들고자 꿈꾸는 이들.

약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운동선수들도 그렇겠지.

‘그렇게 살아서 얻는 게 뭐냐아-.’

유명세와 명예? 사회적 권력과 부?

진혁은 이미 본신의 역량만으로도 충분히 높은 위치에 도달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자만하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면 말이다.

단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세라가 제공한 장비로 어제도 곰짐에서 주력 측정을 했더랬다.

스타트 후 50미터를 주파하는 데 5.5초. 트랙이 짧아 100미터 주로 측정은 미뤄두었으나 후반부 탄력을 고려하면 이미 일반부 성인 선수를 넘어서는 기록이 나올 터였다.

- “가장 완벽한 승리는 모략 없이 당당히 완타치 쪼개서 얻는 것이지. 암-.”

진혁은 천길룡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근데 그 할아버지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천길룡을 떠올리며 빙긋 웃을 때였다.

사박-.

가볍지만 체중이 온전히 실리는 발걸음.

50킬로그램이나 될까, 전생보다 키가 작은 황가영의 발소리다.

진혁은 급히 티셔츠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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