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겁쟁이 (4) >
***
손유진은 행복하다.
드디어 오늘! 뉴스에 나온다고 아빠가 알려줬거든.
“까하하! 오빠! 나 잡아보세요오-!”
“홍시! 접시 물어 와요!”
“아쿠-, 내 동생 응가 많이 쌌더요오-?”
오빠와 자전거를 타고, 홍시와 뛰어 놀고, 정원이 기저귀도 갈아준 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오빠 무릎을 소파 삼아 TV 앞에 앉으니 목이 팍팍 꺾이고 입에서 침이 떨어졌다.
‘몇 시지요-?’
9시 뉴스가 시작하려면 아직 15분이나 남았는데.
눈꺼풀이 가장 무겁다던 오빠의 말이 틀림없구나.
그런데 단순화가 뭐고 등치가 뭘까.
아빠랑 오빠가 나누는 대화에서 어려운 말만 기억해두었다가 썼는데 효과가 좋았다. 친구들이 우러러보더라고.
[아홉 시 뉴스를 전해드립니다.]
어엇! 시작한다.
손유진은 눈에 힘을 주었다.
[- 오늘의 첫 소식입니다. 기록적인 폭염과 맞물려······ 다 큰 개를 훔쳐 보신탕집에 납품하던 절도단과, 훔친 개임을 알고 사들이던 식당 업주 등······.]
저 아저씨 목소리 너무 졸려.
아홉 시는 잘 시간이라서 졸린 목소리 아저씨가 뉴스를 하는 거야.
애들은 얼른 자라고.
[알고 보니 도둑을 잡은 학생은 육상 단거리 중등부 한국기록을 보유한 기대주로서, 얼마 전 세인 스포츠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한-.]
계약, 체결.
저 말은 아빠와 오빠가 대화할 때 자주 들어서 쉽다.
TV에 오빠 닮은 사람이 나오는데 닮은 듯 안 닮았다.
우리 오빠는 얼굴이 저렇게 하얗지 않아.
「손진혁(15)」
[그전부터 범인들이 현장을 답사한다는 느낌을 받고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 장군이가 도둑을 포위하고 저한테 신호를 보내서······. 우리 장군이가 다 잡은 거예요. 장군이가- 장군이가-.]
장군이가으가으가으가으-.
쳇. 우리 유진이가 라는 말은 하나도 안 나오네.
손유진의 눈꺼풀이 스르륵 닫혔다.
카아-.
“와, 우리 아들 화면 잘 받네.”
“우리 진혁이 말도 잘하네요.”
“유진이는 인형처럼 예쁘게 나왔어요.”
뭐라고? 내가 아찌곰이라고?
왜 내 눈앞은 캄캄한 걸까.
[경찰은 손진혁 학생에서 용감한 시민상을 수여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오빠가 뭘 받는다는데 나도 한 입 정도는 주겠지?
맵지 않은 걸로 줬으면 좋겠는데······.
기왕이면 고기로 주세요오-.
[개 절도단이 잡힌 마을에는 천하장사 최태양 선수의 집도 있다고 하는데요, 그 집에도 도둑이 들었다는 소식입니다. 현장 소식 김유덕 기자가 준비했습니다.]
다시 졸린 아저씨 목소리가 들리다가 사라졌다.
“에이-, 우리 아들 인터뷰는 짧게 끝났네요.”
“아빠, 엄청 길게 나온 거 같은데요?”
아쉬워하는 손광연을 진혁이 달랬다.
“그래? 우리 아들이 나와서 금방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나?”
진혁은 아빠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반가운 만남은 짧고, 낯선 조우는 오래 가잖아.
그런 것도 상대성 이론이려나. 엉뚱한 생각을 하며 진혁은 뺨을 긁었다.
“햐- 그래도 좋다. 우리 식구가 셋이나 티비에 나왔어.”
아들, 딸, 장군이.
아빠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손유진은 정신을 잃었다.
[피해 주민인 최태양 선수 어머님 만나보겠습니다.]
진혁은 유진이가 잠든 것도 모른 채 입을 헤에 벌렸다.
TV에 제가 나온 것보다 김순복이 나왔다는 사실이 더 신기했다.
「김순복(45, 최태양 선수 어머니)」
[아니이-. 시상이 잔칫집 댕겨왔더니 주방이가 온통 발자국이유우-. 우리 아들이 따온 금송아지두 있는디 그건 건드리지두 않구 우리 누렁이 줄라구 맨들어둔 개밥만 홀라당 웁써졌더라니께-? 아이고-, 옆집이다가 누렁이 맽긴다구 밥두 뭇 줬는디, 우리 누렁이가 월매나 순헌지 누가 가자구 해두 막 따라갈 눔여어. 그래서 이 도둑눔덜이 훔쳐갈께미 맽긴거유우-.]
옆에서 최미경의 손으로 보이는 하얀 물체가 김순복의 옷을 잡아당겼지만, 이를 뿌리친 김순복은 작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
[아, 얘가 왜 이려? 놔 봐아-. 아무튼간 이 천벌을 받을 눔덜이 훔칠 게 웁써서 우리 누렁이 밥을-. 차라리 잔칫집이 왔으믄 밥이라두 으더먹었지. 왜 개를 훔치다가 쇠고랑을 차냔 말여어-.]
[아, 엄마-. 그만해애-.]
최미경의 기어들어가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
김순복은 한껏 꾸민 모습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최미경이 거들었겠지.
머리도 새로 볶았는지 뽀글 파마머리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언니 고우시네요.”
한유영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하고픈 말이 있는데 억지로 참는 듯, 한유영의 얼굴은 벌게져 있었고 통제를 벗어난 콧구멍은 연신 벌렁거렸다.
[-당국은 주거 침입과 특수절도 혐의를······.]
아아?
저런 일이 있었어?
[너는 이년아, 옴마가 말허는디 왜 자꾸 방해를 해싸-.]
[아, 연습한 대로 해야지이-.]
[실전이 중요헌겨어-. 느이 오빠 봐라-.]
[오빠는 연습도 많이 해-.]
방송사고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김순복과 최미경의 조용조용한 대화가 여과 없이 전파를 탔다.
[- 뉴스-, 김유덕이었습니다.]
진혁은 친구의 흑역사 탄생 순간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경이 박제해야지.’
녹화 다 떠놨다, 이 녀석아.
나중에 인터넷 환경이 쾌적해지면 이 영상을 요긴하게 쓸 수 있을 듯했다.
손유진이 꿈속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사이, TV에 시선을 고정한 손광연이 혀를 내둘렀다.
“태양이네서 저런 일이 있었구나. 내가 바빠서 형님네 신경을 못 썼네요.”
“저 집에 사람이 없었기를 차라리 다행이에요. 해코지라도 했어 봐요. 도둑이 강도로 돌변한다잖아요.”
“그것도 그렇네요.”
곯아떨어진 동생을 아예 제 무릎에 눕힌 진혁은 아빠와 엄마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저도 개밥 도난 사건은 알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이게 9시 뉴스에 나올 소식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도가 지나치다.
뭐······.
누가 그러더라.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
한 번의 주말이 더 지나갔다.
3학년 3반.
진혁은 고등학교 복도를 서성였다.
고교생들이 힐끔거렸다. 교복 입은 고교생들 틈에 혼자 청바지에 헐렁한 남방을 입고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어려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다면 큰 키 때문에 외부인 취급을 받고 쫓겨났을지도 모르겠다.
“진혁이 누구 만나러 왔니?”
옆구리에 출석부를 끼고 지나가던 남자 교사가 물었다.
“아······. 예. 누구 좀.”
“뉴스 잘 봤어.”
“네.”
진혁의 어깨와 눈높이가 비슷한 교사는 웃는 얼굴로 진혁의 등을 두드리고 지나갔다.
진혁은 황가영을 만나러 왔다.
고등학교 교과서를 물려받기로 했다.
교과서 몇 푼이나 한다고 선배의 책을 얻을까마는, 진혁은 경제적인 이유로 찾아온 것이 아니다.
진혁은 최미경이 부러웠다.
선행학습을 하겠다며 오빠가 남긴 교과서와 참고서로 공부하는 친구를 보면서였다.
- “어으 씨-. 우리 오빠 책에 침 묻은 거 봐. 수업 시간에 잠만 잤나 봐.”
킁킁-. 우웩-.
냄새는 왜 맡니. 개냐. 최미견?
- “공부를 얼마나 안 했으면 책이 이렇게 깨끗하냐.”
괜히 민망해서 투덜거리는 소리였다.
최미경은 어릴 때도 오빠의 커다란 옷을 거적이나 망토처럼 두르고 들로, 바닷가로 뛰어다녔다. 그렇게 오빠 옷을 걸치면 힘이 세지는 것 같고, 오빠가 저를 보호해주는 기분이 든다고.
‘나도 이제 물려받는 거야.’
체격도, 성별도 다른 황가영에게 옷을 달라고 하는 건 이상하잖아.
그래서 떠올린 게 책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부탁했는데 황가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참고서는 없는데 괜찮······아요?”
- “네. 저도 교과서만 봐요.”
아마도 김응녀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교과서만 팠겠지.
그 마음마저도 진혁은 애틋하게 느껴졌다.
낑낑거리며 보자기에 싸인 교과서를 들고 나오는 황가영이 보였다.
재빨리 다가간 진혁이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헤헤, 안녕?”
부친상을 치른 후였음에도 낯빛이 밝았다. 진혁을 보며 배시시 웃는 얼굴 어디에도 그늘진 구석은 없었다.
“우리 언니 책 물려받은 거라 몇 과목은 교과서가 다를 거야. 지금 2학년부터는 개정 교과서거든. 아! 그리고 남자는 농업을 배우는데 우리는 가사야.”
“네. 괜찮아요.”
어차피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새 교과서도 신청할 계획이기에 책이 오래되거나 과목이 다른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려받는다는 경험이 중요하다.
“미리 공부한다니 대단하네. 이거 무거운데 들어다 줄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사람이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혼자 들 수 있어요. 잘 볼게요.”
진혁은 두 개의 책 보따리를 양손에 가뿐히 나눠 들었다.
황가영의 뒤로 고3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가영아, 너 얘 알아?”
“엊그제 뉴스에서 본 사람이다.”
“얘! 중학생이 여기서 뭐하니!”
“남자가 왜 여자 교실에 와?”
까르륵-.
1:1로 마주치면 말도 못 붙이는 겁쟁이 여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용기를 뽐냈다.
짓궂은 장난이라는 걸 알면서도 진혁은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황급히 황가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저 갈게요.”
“응. 잘 가.”
뿔테 안경 너머 황가영이 아쉬운 눈빛을 던지며 손을 들었다. 그 행동조차 조심스러웠다.
“둘이 사귀냐?”
“유명한 애를 네가 어떻게 알아?”
“가영아, 무슨 관계야?”
“아······.”
진혁은 걸음을 멈췄다.
친구들 틈에서 난처해하는 황가영의 모습이 뒤통수 너머 그려지는 듯했으니.
반쯤 몸을 돌리자 여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진혁을 향했다.
진혁은 목에 힘을 주고 입술을 뗐다. 이제 편히 바라볼 수 있는 황가영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우리······ 누나예요.”
예전에도 사용해 본 호칭이라고 제법 자연스럽게 나왔다.
여전히, 황가영의 모든 모습이 낯설다.
저렇게 수줍으면서도 환하게 웃는 모습은 더더욱.
그게 싫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양손에 보따리를 든 진혁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황가영이 작은 손을 방정맞게 흔들었다. 더 환하게 웃으면서였다.
까아아아악-. 여학생들의 호들갑을 묻어버릴만큼 눈부신 미소였다.
돌아선 진혁의 광대가 도드라졌다.
‘누나라······.’
나쁘지 않네.
누나.
뭐, 형은 아니니까.
***
짐받이는커녕 흙받이도 없는 자전거가 많지만 진혁의 자전거는 짱짱한 짐받이도 있었다. 덕분에 황가영에게 물려받은 교과서를 싣고도 무사히 집에 올 수 있었다.
평상에 앉아 물려받은 책을 한 권씩 살폈다. 발가락으로 장군이 머리통을 톡톡 건드리며.
그것도 좋은지 장군이는 꾸벅꾸벅 졸았다.
“오빠, 무해요오?”
“울애기 자전거 다 탔어?”
“네. 힘들어요오-. 종아리 아파요.”
유진이는 오빠 옆에 앉아 고등학교 2학년 교과서를 한 권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과목명을 검지로 한 글자씩 짚었다.
“수. 학. 아이아이?”
“수학 투.”
“아하, 투.”
그러고 보니 이 누나 이과네?
과거의 진혁은 문과였다.
‘내가 왜 문과를 갔더라?’
아, 맞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적성 검사가 법관으로 나와서 아무 생각 없이 그리 택했다. 상의할 사람도 없었고, 의논할 필요도 없었기에 별 고민 없이 선택했던 것 같다.
‘흠. 이번엔 이과를 가볼까?’
수학만 조금 다르겠지. 다른 과목이야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나.
교과서를 훑어보니 1학년 과정까지는 어려운 내용이 없었다.
2학년 과정도 제법 기억이 났고.
역시 한번 뇌에 새겼던 기억은 작은 힌트만 있어도 쉽게 돌아오는 듯했다.
그런데.
‘와씨! 이거 뭐야!’
울랄라-!
「Français」
뽕쎄.
제2외국어가 전생과 달랐다.
‘아, 일어는 혼또니 잘하는데.’
이렇게 되면 나가리 아니므니까?
진혁이 다녔던 사립고등학교는 일본어였는데 태양고등학교는 프랑스어였다.
그렇다고 제2외국어 때문에 이제 와서 진로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민 끝에 집에서 통학하기 위해 택한 학교니까.
‘조또······.’
······마떼. 잠깐.
수능도 안 보는 과목인데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나?
‘내가 언제는 같은 거만 반복했냐.’
돌아온 후의 인생은 전생과 달랐다.
그렇지 않은가. 일부 기억을 참고했을 뿐, 같은 하루, 반복한 역사는 없었다.
“까짓것 불어 배우지 뭐.”
진혁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정치•경제 교과서를 펼친 유진이도 오빠를 따라 했다.
“그래요, 뭐어-. 까짓것.”
다행히 황가윤, 황가영 자매의 필체는 깔끔했고 낙서도 없었다.
아마도 동생에게 물려주기 위해 깨끗이 사용한 황가윤의 영향이겠지.
교과서에서도 전생과 확연히 다른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해 흡족하다.
“으음-. 아 베 쎄 데 에 엪 줴-. 줴? 음. 줴. ······엫, 앟? 아흐? 알이 아니야?”
아흐흐흐흐흫-.
시범 보이는 교사가 없으니 발음기호와 그림을 보며 흉내를 냈다.
“이히히히히히히-. 오빠 웃겨요오-.”
웃기냐? 오빠는 돌겠다.
“엉 드 토와 꺄뜨르? 꺄흐? 셍크-. ······위ㅌ, 느프? 네프? 뽕 네프 할 때 네프?”
푸우- 부부부-.
입술이 뒤집어질 정도로 한숨이 강하게 나왔다.
‘나는 언제 꿀 빠나.’
회귀하면 꿀 빤다고 어떤 새X가 그랬냐?
지금 조지러 갑니다.
‘아니야. 착한 생각. 착한 생각.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해.’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저뿐만 아니라 전교생이 배우는 과목이고, 뭔가를 배운다는 건 즐거우니까.
도저히 안 되면 교과서를 외우면 그만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몽······? 몽 블랑 할 때 몽? 몽 마르뜨?”
“오빵, 몽 마르지용?”
야, 하지 마.
유진이 얘는 겉모습은 엄마인데 까부는 성격은 아빠를 닮았어.
원활한 선행학습을 위해 당분간은 프랑스어 교과서를 외워야 할 듯했다.
‘머리가 아프네.’
가족이 늘고 친구가 많아진 것처럼, 관심사 또한 많아지니 신경 쓰이는 일이 늘어서일까. 예전처럼 책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안 되면 되게 하면 그만이다.
페이지가 사락사락 넘어갔다.
“몽마메 똥따떼 쏭싸쎄-.”
“까하하하하!”
똥똥거리는 오빠를 보며 유진이가 평상을 뒹굴었다.
생소한 발음이 아이에게도 우습게 들린 모양이었다.
아니면 똥에 반응한 걸지도.
‘이런 씨부앵-. 뽕쎄 어렵수와-.’
그래도 넉넉히 한 달이면 외우겠지.
문자 자체는 알파벳과 비슷해 단어는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을 듯했다.
“일층이······ 헤- 헤드쵸씨? 헤드쇼쎄?”
“헤드촉새! 까하하-!”
뭐야, 유진이는 이상하고 불어는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