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86화 (186/338)

< 겁쟁이 (3) >

***

앙금이 녹은 것과는 별개로, 타고난 내성적 성격 탓에 처음 본 사람과 친해지는 데 애를 먹는 진혁이다.

그러나 당연한 봄보다는 혹한을 이겨낸 후의 봄이 더 따스한 법이었고, 진혁은 제 어린 동생들을 살갑게 돌보는 황 씨 자매의 모습에서 그런 훈풍을 느꼈다.

긴장이 완전히 풀어진 덕분인지 다시 속이 허해져 육개장을 축내기 시작했다.

‘역시 맛있어.’

은근한 승부욕을 느낀 장진남이 가세했지만 애초에 소식가 손진혁에게 먹성으로 비빌 수 있는 인간은 최태양이나 이승훈 정도뿐이었다. 그들이라고 진혁을 이긴다는 보장은 없지만.

“진혁이는 정말 소 같네오.”

“제가 뭘 속아요?”

“아니에오. 많이 들어오.”

쇠귀에 경을 읽었네오. 까닭 모를 장진남의 구시렁거림을 뒤로 하고 연신 빨간 국물을 탐했다. 진혁이 좋아하는 건더기도 빼놓을 수 없다.

‘고사리! 숙주!’

제가 좋아하는 나물이 모두 들어있는 음식인데 육개장 귀신이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

시내에 위치한 의료원이었고, 바깥 날씨도 근사했다.

배불리 먹은 후 유진이 손을 잡고 시내 구경을 나섰다.

“나도 갈래요.”

황가영이 따라나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심 난감한 와중, 조심스레 물었다.

“자리 비우셔도 되나요?”

“친구들은 오전에 다녀갔······어요. 안에만 있었더니 답답해서······.”

달리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직 사회적으로 서먹하니 거리 두기를 해달라고 정중히 요청하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그렇게 두 사람이 양쪽에서 유진이 손을 잡고 걸었다.

‘별일이네.’

과거에도 이렇게 함께 걸었던 기억이 없다.

전혀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분명하다.

그 역시 어색했는지, 황가영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학교 어디로 가요?”

“태양고요.”

“공부 잘한다던데 아깝다.”

“아니, 뭐······. 그냥······.”

진혁도 덩달아 뒤통수만 긁었다.

엄마들 간의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고 가벼운 면식만 있는 사이, 특별히 나눌만한 대화는 없었다. 장군이 발로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듯, 불협화음까지는 아니었어도 다분히 듣기 불편한 음률이 두 사람의 걸음에서 배어났다.

어색하게 대화하는 오빠와 언니 사이에서 유진이만 신났다.

“언니, 저는 어동학교 갈 거예요오-.”

거북한 침묵을 깬 아이가 고마웠는지 유진이를 향해 고개를 숙인 황가영이 눈동자를 키웠다.

“어동? 거긴 어디야?”

“응응-, 어동학교니까 어동리에 있지요오-. 우리 집에서 노란 버스 타고 10분도 안 걸려요. 언니도 졸업하면 어동으로 오세요오-.”

“아이쿠-, 이걸 어쩌나? 언니는 이제 대학교에 가야 하는데?”

“우리 학교 좋은데 안 됐네요오-.”

“아하하-. 너 말 되게 재밌게 한다.”

검지로 뿔테 안경을 올려 쓴 황가영이 유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줍게 웃는 황가영의 모습이 진혁의 눈에는 작고 귀여운 병아리를 보며 신기해하는 여자아이처럼 보였다. 이런 면모 또한 당연히 낯설다.

오빠 앞에서도 충분히 수다스러운 아이였지만 유진이는 황가영 앞에서 더욱 신나서 재잘댔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 세계를 적극적으로 넓혀 가는 아이의 태도란 이런 것이려나. 어색한 공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동생의 음성이 고마워 진혁도 유진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응응, 우리 학교는요. 운동장에 소랑 염소도 있는데요오. 에고게에-, 요만한 소똥이 굴러가요오-. 가까이 가서 봤는데 까만 벌레가 물구나무서서 밀어요오-. 선생님이 소똥구리래요. 우리 어린이들이 관찰하는데 김호진이 막대기로 소똥구리를 쳤는데 이동호가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김호진이 ‘아녀어-, 나는 기양 도와줄라구 그런 겨어-.’ 그래서 이동호가 슬기로운 아이는 자연을 그냥 둔다고, 그게 도와주는 거라고 그랬는데 선생님이 어, 어- 친구들끼리 싸우지 말라고 하니까 김호진이 ‘그럼 누구랑 싸운대유우-?’ 그래서 다 웃었어요오-.”

“아하하하하-!”

황가영이 배를 잡았다.

진심으로 웃는 얼굴이었다. 눈물까지 한 방울 스며 나왔잖아.

‘이제······ 겁내지 않아도 되겠네.’

진혁은 잡고 있던 유진이의 손을 슬며시 놓아주었다.

유진이가 황가영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동생으로 말미암아 혹시 모를 황가영의 그늘이 밝아지기를 바라며.

이 순간 진혁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언니 우리 집에 놀러와요오-. 우리 집에는 장군이랑 홍시랑, 천마, 광마도 있고 고구마밭 건너가면 미경 언니네 검마도 있는데 너무 귀여워요오-.”

“그럴까아? 언니도 유진이 보러 갈까?”

“노란 옷 입고 노란 모자 써야 해요오-.”

“왜?”

황가영의 눈과 입이 우스꽝스럽게 변했기에 진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런 표정도 만들 줄 아는구나.

“그래야 잘 보여요오-. 아, 맞다! 가방도 메고 와요.”

“가방?”

“그래야 물에 떠요오-.”

아, 유진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결코 우스개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엉뚱한 아기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저를 보는 황가영을 외면한 진혁은 송아지처럼 눈만 꿈뻑였다.

***

기자를 피하려다 하루종일 육개장만 퍼먹었다.

언니 곁에 더 머물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린 아빠 덕분에 진혁은 저녁까지 육개장으로 해결했다. 당분간은 육개장이 아니라 육성찬을 봐도 신물이 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속이 편안하네.’

소울 푸드가 거들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저를 괴롭히던 놈이 미안하다며 진심으로 사과할 때의 환희 어린 경악과 비슷하달까. 더이상의 두려움이 없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안도를 느꼈다.

“삭막할 뻔했는데 많은 분이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딸 황가윤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아니에요. 가족끼리 챙겨야죠. 가윤 씨는 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봐요. 세인 바이오와 합작으로 미생물과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연구소를 곧 지역에 세울 예정인데-.”

“아휴, 아까 했던 얘긴데 피곤한 사람 붙들고 뭘 또 해요.”

“아하하-, 재원을 스카우트하고 싶은 마음에. 그럼 가보겠습니다.”

한유영이 남편을 제압한 덕분에 작별 인사의 어색함은 길지 않았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긴 한유영을 마지막으로, 진혁의 가족은 장례식장을 벗어났다.

정차한 듯 나긋하게 달리는 차 안에서 손광연이 아내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기는 더 있다 오지 그랬어요?”

“우리 큰아들 아침 먹여서 학교 보내야죠. 유진이 유치원도 보내야 하고, 정원이 기저귀도 하루치밖에 안 챙겨왔어요.”

조수석에 앉아 부모님의 대화를 듣던 진혁은 내심 고개가 숙여졌다.

언제 봐도 태산처럼 든든한 엄마 아닌가.

‘애기 기저귀까지 신경 쓰며 살아야 한다니.’

엄마들이야말로 천재로구나.

한데 룸미러로 살핀 아빠의 표정은 진혁의 감탄과 온도차가 있었다.

‘삐친 얼굴인데?’

분명 엄마가 자기 얘기는 안 했다고 저러시는 거다.

아이들만 챙긴다고 토라지는 저 아빠를 어쩌면 좋을까.

그러나 엄마는 시야도 넓은 사람이었다.

“우리 겁쟁이 신랑 출근길도 배웅하고요.”

“느허헛-.”

룸미러를 살피던 진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엄마의 어깨에 머리를 부비는 사람 때문에. 강아지도 아니고 저 무슨······.

그런데 궁금하다.

“아빠가 왜 겁쟁이예요?”

쉬는 날이면 늦잠에서 깬 아빠가 엄마를 찾아 방황하는 모습을 종종 보기는 했다. 엄마는 텃밭에서 채소나 토마토를 따고, 정원이를 업고 개울로, 바다로 나들이를 다니느라 바쁜데 말이다.

어릴 적 할머니를 잃은 기억 때문에 그런 행동을 보이는 거라는 생각에 진혁은 속으로도 흉을 보지 않았다.

아무튼, 엄마 찾는 아이처럼 굴어서 겁쟁이라고 하는 걸까?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험-.”

“아니 뭐, 그냥 하는 소리지. 네 아빠가 오죽 아이처럼 때 묻지 않고 또······.”

한데 영 마뜩잖은 부모님의 반응은 진혁의 궁금증만 키웠다.

“현우 씨? 빨리 좀 거-, 예. 갈까요? 피곤하네.”

“예. 사장님.”

아빠와 붙어 다니는 명현우는 혹시 알까 싶어 흘긋거렸지만 명현우라고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곰짐의 샌드백을 차지할 때만 잽싼 사람이다.

집에 다다랐을 무렵, 진혁은 조수석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직면했다.

‘와씨. 저거 뭐야.’

집 마당에 방송사 카메라와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민용락은 주말을 맞아 집을 비웠고, 대부분의 SSS 요원이 조문을 다녀왔으니 저들을 막을 사람이 없었던 것.

‘있어도 안 막았겠지.’

홍기준이라는 보스의 지시가 있었을 텐데 누가 저들을 막을까.

룸미러로 아빠의 눈치를 살폈더니 역시나, 진혁의 눈길을 피해 이마를 긁고 계셨다.

‘아빠도 알고 계셨구나. 저 사람들 너무 오래 기다릴까 봐 빨리 가자고 하신 건가?’

그런데 무슨 질문을 하려나.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얼마만에 느끼는 절박감인지 모를 정도로 진혁의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겁이 나는 건 아니다.

다만 학교에 가서 또 시달려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을 뿐.

아, 그게 겁나는 것과 똑같은 말인가?

‘에라 모르겠다.’

*

어두웠지만 평상을 빙 둘러 켜진 조명 탓에 대낮처럼 환했다.

가족과 안락하게 사는 집이 노출되는 걸 원치 않아서 반대 방향으로 구도를 잡았다. 기왕 하게 된 인터뷰, 제대로 연출해 보자. 그리 판단한 진혁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홍기준 아저씨가 협박했겠지.’

협조하지 않으면 광고 다 끊어버린다고.

그래도 따로 연락이라도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왠지 골탕 먹이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저-, 우리 학생? 어떻게 조직적으로 극성을 부리는 개 절도단을 소탕하게 된 건가요? 뭐가 어떻게 이상했고, 겁나지는 않았는지, 어떻게 움직여서 잡았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주시면 됩니다. 내 질문은 들어가지 않고 학생 멘트만 딸 거니까, 편하게. 알았죠?”

기자의 설명을 건성으로 들으며 멀리 최미경의 집을 보았다.

최미경의 집에도 조명이 설치되었는지 외벽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허공에는 불빛에 반응한 나방떼가 별무리처럼 아롱졌다.

“저 집에도 기자가 갔어요?”

“응? 아-, 경찰에 의하면 저 집에서도 사건이 있었다고-.”

사건 있었지.

개 도둑이 개에게 잡힌 사건이.

“자, 여기 보시면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올 거예요. 그때 시작하면 됩니다.”

진혁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주워들은 거 있어서 다 알아 이 양반아. 누굴 촌놈 취급하고 있어. 그거 녹화 시작 그거잖여.

후우-.

헤벌쭉 웃는 아빠와, 정원이를 안고 큰아들을 자랑스럽게 보는 엄마.

오빠 무릎에 앉아 장군이를 목 조르듯 끌어안은 유진이까지.

응원군이 이렇게나 많은데 떨까 보냐.

‘이상하게 두근거리네.’

3년 전만 해도 카메라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늘어놓았는데 말이다. 천하의 손진혁이 긴장이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시작할게요.”

진혁의 앞에 마이크를 댄 기자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마침내 주먹이 쥐어졌을 때,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때였다.

진지하게 표정을 바꾼 기자가 진혁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뭐야, 이 아저씨 왜 이래?’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이 양반아.

***

노란 버스 안에서 김호진에게, 유치원에 도착해서는 이동호와 선생님에게, 운동장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언니, 오빠들에게.

손유진은 오빠 자랑을 하고 다녔다.

“우리 오빠가 개 도둑 때려잡았어. 그래서 어제 방송국이 와서 찍어 갔어.”

“와아아-.”

어떤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떤 친구는 흐르는 콧물을 훔치며 손유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손유진도 나와?”

“응! 나도 나와. 오빠가 나랑 장군이 이케 안고 찍었어. 엄마가 머리도 다시 묶어주고 얼굴도 닦아줬어.”

와아아-.

손유진은 진짜 좋겠다. 방송도 타고. 이동호가 웅얼거렸다.

“그건 아무것두 아녀어-. 우리 삼춘은 무장공비 잡어서 헬리콥타 타구 휴가두 갔디야-.”

“야, 김호진! 모든 현상을 단순화해서 등치할 순 없는 거야!”

유치원 교실이 조용해졌다.

손유진이 빼액-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뭐라고 한 거야?’

‘나두 물러.’

‘어려워-.’

‘손유진 오빠가 등치가 크긴 해.’

‘나 등치 알아. 겁나 큰 물고기야.’

‘그거 뭐야. 무서워.’

목소리 큰디 말꺼졍 잘허니께 이겨 먹을 수가 읍네이-. 꼬리를 내린 김호진은 허공에 광선총만 쏘아댔다.

뾰뵤뵤뵹-.

***

그날 저녁에도, 다음날 밤에도.

졸린 눈을 비비며 9시 뉴스를 챙겨 보기 위해 버텼지만, 손유진은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아홉 시 뉴스를 마칩니다. 시청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도 안 하는데요?”

“수정 아빠한테 물어보셨어요?”

“태양이네서 인터뷰한 내용 중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사안이 있다고 경찰에서 보도 제한을 걸었다나 봐요. 다른 절도범들 잡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요.”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대요? 미경 엄마는 별 얘기 없던데 그 언니도 경찰이 입단속시켰을까요?”

“요새 회사 일이 바빠서 형님네를 못 챙겼네요.”

히잉-. 내일이면 나오려나?

친구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놀릴 텐데.

손유진은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무섭다.

거짓말쟁이는 코가 길어지고, 망태 할아버지라는 무서운 할아버지가 잡아간다고 했다.

상심한 가슴을 달래려 아찌곰을 꼭 끌어안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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