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겁쟁이 >
내 적이 아닌 모두와 거래를 한다.
홍기준의 처세 기준은 명확했다.
감시하듯 눈을 가늘게 뜬 딸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인 홍기준은 목적을 밝히기에 앞서 넉살부터 떨었다.
“저 때문에 번거로우시겠지만, 일선 서에 제가 전화하기도 뭐해서 말입니다.”
- 아, 그럼요. 그러시면 형사들 일 못합니다. 격이 있으신데 저와 통화를 하셔야죠.
예의상 떡밥을 놓았을 뿐인데 격을 논한다.
언뜻 자신을 높이는 듯하나, 없는 말주변으로 홍기준을 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 각하께서도 부회장님과 통화를 하려면 약속을 잡아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사소하고 관심 없는 안부인사가 몇 마디 지나가고, 홍기준이 목적을 밝혔다.
“이런 쾌거는 빨리 알려야 다른 지방청에서도 분발하지 않겠습니까?”
예로부터 잔칫상을 차려줘도 걷어차는 게 일선 경찰이다.
외부에서 보면 그놈의 말도 안 되는 원칙, 그놈의 같잖은 규정으로 허송세월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실상을 들여다본 홍기준은 특정 업무 기피와 배치 불균형으로 인한 고질적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그건 일선의 문제였고, 업적에 목마른 고위직은 입장이 달랐다.
-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도 실시간 보고 라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만, 면식범 간의 암거래라는 것이 장부를 두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보니······.
그래도 홍기준이 보기에 당대 경찰청장은 실적을 짜내기보다는 부하를 변호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면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놈 트럭이 못 쓰게 되었다면서요?”
- 그런 것까지 아시니 제가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경찰청장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홍기준의 정보력이 이미 경찰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
홍기준은 이미 체포된 범죄자의 신상정보를 확보한 상태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가장 친한 친구의 집인 데다 SSS라는 심복들이 상주하는 곳이다. 홍기준은 간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일 터였다.
“재산 피해 정도는 보상해 주겠다 구슬려 보시죠. 귀가 솔깃해서라도 협조하지 않겠습니까?”
- 예? 트럭이 한두 푼도 아니고 범죄자인데 어찌-.
“일 이야기를 하는데 돈 얘기를 꺼내시니 이거 실망스러운데요.”
- 아, 그럼 부회장님께서 지원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후-, 송화기를 손으로 막은 홍기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만약 줘야 하는 상황이 오면 제가 지원하죠.”
다소 짜증 섞인 어투로 응답한 홍기준은 한 번 더 전화기를 막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오해할만한 말을 던지긴 했으나 상대의 머리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데서 오는 갑갑증 때문이었다.
“청장님은 행시 출신이시죠?”
- 예. 그건 왜 그러시는지······.
언뜻 불쾌감을 감추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으나 홍기준은 개의치 않았다. 불쾌하라고 한 말이니까.
‘답답하구먼.’
차라리 현장 수사인력과 통화하는 편이 빠를 뻔했다.
구슬리라는 말이지 돈을 내주겠다는 소리가 아니지 않은가.
형사도, 공무원도 모두 인간.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건 마찬가지다.
“약속 따위 알게 뭡니까? 원하는 걸 알아내면 그만 아닙니까? 경찰이 약속 어겼다고 이놈이 어디 가서 하소연이라도 할까 봐서요?”
그런 일머리로 세인그룹 이사 자리를 원한 겁니까? 홍기준은 쏘아붙이고 싶은 속을 꾹 눌러 삭였다.
어차피 현행법상 김우돈이 민사를 걸어온다면 손광연이 물어야 한다. 물론, 패소를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다.
진혁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는 바도 아니었고, 홍기준으로서도 내심 통쾌했기에 몇 푼 하지도 않는 그깟 트럭쯤 배상할 마음도 있었다.
- 설마 범법자로서 그런 소를 제기할 파렴치한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그저, 부회장님께서 아까운 돈을 쓰실까 봐······.
다소 높아진 홍기준의 억양이 신경 쓰였는지 경찰청장이 말을 돌렸다.
“매국노 후손도 나라 팔아 얻은 땅을 내놓으라며 소송을 거는 나라입니다. 재물 앞에 체면이 어디 있답니까?”
한 마디 더 쏘아붙이고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답답한 가슴을 달랠 필요가 있었으니.
잠시 침묵하던 경찰청장이 다짐하듯 말했다.
- 아주······ 좋은 의견이십니다.
앞으로 모시게 될 보스인데 그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 안으로 진전을 보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 뜻하신 대로 될 겁니다.
통화를 마친 홍기준은 텁텁한 입을 커피 한모금으로 달랬다.
‘쯧쯔-. 책만 들여다보고 시험만 친 놈들은 그저.’
정작 원칙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걸핏하면 원칙 타령을 하고 머뭇거린다.
유권해석이라는 그럴듯한 허울을 앞세워 원칙을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리고, 준칙에 위배되는 새 규정을 만드는 것도 서슴지 않으면서 말이다. 나아가 배운 걸 악용해 제 놈들은 법망을 빠져나가거나 서로 보호해준다.
홍기준이 지켜본 시험공부만으로 출세한 자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나도 한때 성공하는 방법을 몰라 공부만 했지만 답답한 건 답답한 거지.’
답답함과 별개로 야릇한 희열도 따랐다.
‘권력이란 참 좋구먼.’
권력이란 아무런 이해관계에 엮이지 않은 사람들끼리나 상호 독립성을 띨 뿐, 이미 주종관계가 맺어졌다면 제 손에 펜이 쥐어졌는지, 총이 쥐어졌는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 종의 위치를 점한 자의 습성이다.
세인그룹 본위의 권력 구도를 편성한 홍기준이 통찰한 인간의 본성은 그리도 보잘것없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니고, 이 좋은 걸 나 혼자 끌어안고 살 수는 없지.’
어차피 실무는 수만 명의 직원이 담당하고, 그중 특출난 인재들이 알아서 그룹을 이끌어 나간다.
살얼음 위를 걸으며 두통에 시달리던 회귀자 홍기준은 그저 권력자로서 방향타를 잡을 뿐이다. 라인을 만들어 사내 정치와 친목질을 꾀하는 임원을 견제하면서.
그렇다고 힘에 도취될 수는 없다.
세상을 손안에 둔 듯 흥청거리던 자들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지 익히 보아왔으니 항상 경계하던 터였다.
생명은 죽음으로 끝날지언정 오명은 대를 잇게 될 테니.
‘뒤를 이을 사람도 키워야지.’
세력과 후계 없는 권력자의 말로는 절대 해피엔딩이 될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늙는 건 금방이다.
하루아침에 사라질 운명이라 해도 헛되이 살고 싶지 않았다.
딸은 고생시키고 싶지 않고, 아들은 너무 어리다.
“아빠, 진혁 오빠 오늘 아홉 시 뉴스에 나오는 거야?”
얘는 도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거냐.
가슴이 들썩이도록 헛웃음을 지은 홍기준은 딸의 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오늘이 아니어도 아빠가 나오게 해줄게.”
그 겁쟁이 녀석, 유명해져야 하니까.
언론 접근을 막아주는 건 열세 살 전국대회 때 한 번이면 됐지.
***
“어으으-!”
장군이 털을 골라 벼룩을 잡던 진혁이 진저리를 쳤다.
괜스레 오싹하고 소름이 돋은 탓이다.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차갑지 않다. 어디서 물방울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별일이다.
“참새가 오줌싸고 지나갔나?”
잡아서 구워버릴라. 진혁이 꺼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밤과 낮은 공존하면서도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여명과 함께 다른 세상 이야기가 되어버린 간밤의 소란처럼, 점심때가 되어가는 진혁의 집에는 새소리만 남았다.
바각바각-. 찹찹-.
장군이가 갈빗대를 긁어대는 소리도 빼놓을 수 없지.
“우리 장군이, 맛있어?”
호헤헥-.
바닥에 배를 붙인 장군이는 태평하게 뼈다귀를 갉을 뿐, 개 친구들을 구한 영웅담 따위 관심 없는 눈치였다. 아무렴, 개에게는 서사보다 뼈다귀가 더 중요한 것이겠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장군이야말로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자의 본보기가 아닐까.
“여기 고기도 먹어.”
헤헷-.
알았다는 뜻인지 꼬리를 흔들면서도 장군이는 뼈다귀에 애착을 보였다.
고기가 온전히 붙은 갈빗대가 수북이 남았는데도 하나씩 해치울 생각인 듯했다.
“장군아, 그렇게 맛있어?”
헤헤헥-.
장군이는 진혁을 향해 혀를 길게 빼 보인 후 다시 갈빗대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개가 웃는다면 이런 모습이겠지.
진혁은 기특한 마음에 장군이를 한없이 쓰다듬었다.
“짜식-. 말도 하면 좋을 텐데.”
항상 해맑은 장군이를 보며 아쉬웠다.
말이 통하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고민도 털어놓고 인생의 희노애락을 함께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간밤에도 전화나 무전기로 교신할 수 있었을 텐데.
큭-.
엉뚱한 상상을 하던 진혁이 실소를 흘렸다.
‘나도 맛탱이가 가나 봐.’
아무래도 인성이 아니라 지능에 문제가 생긴 듯했다.
“잇챠-! 잇챠-!”
유진이가 현관 계단을 토끼처럼 한 칸씩 내려왔다.
뒤를 이어 현관이 분주해지며 검은색 옷을 차려입은 부모님이 나왔다.
함께 가자는 말이 없어서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결국 두 분만 가시려는 모양이다.
“응아, 응아-.”
정원이가 활짝 웃으며 엄마 품에서 형에게로 넘어왔다.
“우리 큰아들이 동생들 좀 보고 있어.”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유진이가 쪼르르 달려와 오빠 손을 잡았다.
부모님이 출타해도 든든한 오빠가 있고, 삼촌들도 있으니 유진이는 따라가겠다며 칭얼대지 않는다. 볼수록 기특한 녀석이다.
“엄마, 맛있는 거 많이 싸 오세요오-.”
어쩌면 외출한 부모님의 손에 항상 먹을 거리가 들려 있어서 잘 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홍시의 털을 빗던 문석일이 VIP석 문을 열어 정중히 배웅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래. 밤에 고생했는데 쉬어.”
손광연이 어깨를 다독이자 문석일이 소리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간밤에 고생을 하기는 했다.
재동리라는 다른 마을에서 납치된 개들에게 둘러싸여 진땀을 뺐지. 경찰을 도와 그 마을에 찾아가 한밤중에 이장집 문을 두드려 개를 인계까지 하고 왔다.
‘뭐,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다.’
누가 그런 경험을 또 해보겠냐고.
어떻게 흐를지 모르고 무슨 일이 생길지 알지 못하기에 인생이 재미있는 거겠지.
명현우가 운전석에, 유태화가 조수석에 올랐을 때 창문을 내린 한유영이 진혁을 불렀다.
“냄비에 갈비탕이랑 있고 냉장고에 전이랑, 나물 있어-.”
“네.”
믿음직스러운 아들을 보며 웃는 한유영의 얼굴이 차창에 가려질 때였다.
당부할 말이 남았는지 손광연이 몸을 기울였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웃음이 아내를 닮았다.
“기자들 오면 떨지 말고 말 잘하고.”
“예?”
뭐라고요? 다시 말해 봐요.
기자가 왜애애-?
“기준이한테 연락왔던데? 너도 아는 일 아니었니?”
손광연도 덩달아 꺼벙한 표정을 지었다.
홍기준이 어디서 뭘 하는지 친구인 손광연보다 훤하게 꿰뚫고 있는 아들이니 당연히 알 거라 여겼는데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몰랐어요······.”
“우아아-. 우리 오빠가 모르는 것도 있어요오-?”
놀리는 건지, 놀라는 건지. 이상하게 감탄하는 유진이를 외면한 진혁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문석일을 바라보았다.
문석일은 입술을 비죽 내밀며 모르는 일이라는 액션을 취했다.
“부회장님께는 네가 원하는 대로 말씀드렸다.”
“그 대답이 저거예요?”
“나야 모르지. 분명히 알았다고 하셨는데, 부회장님이 막지 못하는 일도 있는 거 아닐까?”
진혁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 홍기준이 못하는 일이 존재할 리 없으니까.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는 문석일이 얄미웠다. 미처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만 봐도 뭔가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쩌지, 어쩌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미 출발한 차를 따라 내달렸다.
“빼아아아-!”
“우와아! 달리기다아-!”
형 품에 안겨 강한 바람을 맞으며 손정원이 팔을 신나게 파닥거렸고.
유진이는 오빠가 달리니 그냥 따라 뛰었다.
진혁은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그 겨울, 까지 않기 위해 질주하던 절박함을 담아 외치는 거다.
“같이 가요오오오-!”
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