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둑들 (5) >
***
남겨진 황영모의 가족에 대한 감정은 이번에 정리한다손 쳐도, 대정은 그 경우가 다르다.
여전히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적이니까.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다.
홍기준이 그늘진 곳에 숨어 저격을 하고 있지만 대정이라는 공룡은 제법 잘 버티고 있었다. 정권이라는 방패는 견고했고 장학생의 엄호 사격은 제법 매서웠다.
이름도 모르는 연예인의 사생활이 폭로된 건수만 이달 들어 세 번째다. 뜬금없는 폭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혁이 모를 리 없었다. 그렇게, 장학생과 손잡은 언론의 비호와 물타기도 대정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활약했다.
‘기준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거대 그룹이 된 세인은 대정을 공격하기는커녕 승냥이 떼에 찢긴 고깃덩어리가 되었겠지.
양지에서는 굵직한 공사와 첨단기술개발과 도입으로, 음지에서는 구정물 흐르는 개천을 청소하며 세상의 응원을 등에 업었기에 홍기준이 지금처럼 당당히 걸을 수 있는 거다.
‘내가 갖지 못한 능력이야.’
정치 감각.
홍기준은 세상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사회성 부족했던 진혁은 그저 일만 잘하는 사람이었다.
사소한 친목 도모조차 못 하는 사람이 전략을 펼칠 수 있는 분야는 업무에 국한되었다. 때론 유연하게, 때론 과격하게 진행한다 해도 큰일을 이루려면 수많은 암벽을 오르고 구덩이를 피해야 한다.
‘역시 그런 점은 배워둘 필요가 있겠어.’
미래를 위해 구상한 일은 그대로 진행하되, 정치 감각도 익혀두면 좋지 않을까?
운동선수로 활약할 수 있는 시간은 짧고 생은 길 텐데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닌가.
*
조일헌의 집을 제외하면 이상하리만치 적요한 밤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탓에 배회가 길어졌다.
‘그나저나 내일 장례식장에 가야 하는 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소리를 들을 때가 있었는데, 이런 고민을 하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다.
독하지 않으면 어떤가.
어느 미친놈들처럼 확증편향에 다름없는 병적 집착으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전생의 악연을 정리하자며 달려들었다면, 무법자가 되었을 테고 지금과 같은 행복은 얻지 못했으리라.
물론, 유사한 일이 재발한다면 그때는 응징할 힘도, 자신도 있다.
다만 한 가지.
과거에는 황영모가 살해됐다는 소식에도, 남은 가족이 어찌 되었는지 들었을 때도 무감각했던 반면 지금은 약간 마음이 쓰였다.
다른 이도 아닌 엄마가 김응녀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대문 밖을 서성였다.
‘갈까, 말까.’
돌아온 직후에는 영원히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던 사람들인데, 이제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는 하다. 엄마와 문석일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호기심이 동했다.
학교에서 우연히 황가영을 보면 신기했다.
전에는 쓰지 않던 뿔테 안경을 쓰고, 단정한 옷차림에, 친구들과 어울려 수줍은 소녀처럼 웃던 모습. 어딘가 그늘졌으나 표독스러운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전에 알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악감정을 갈무리하기로 한 판국에 남겨진 도둑 가족과의 악연도 정리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어떤 식으로든.
‘엄마가 같이 가자고 하시면 가지 뭐.’
김응녀가 엄마를 대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판단해도 될 듯했다.
‘육개장 나오려나?’
뜬금없지만 장례식장 육개장은 맛있다.
유진이와 함께 해치운 잔칫상이 벌써 두 개인데도 피 같은 육개장을 생각하면 위장이 꿈틀댄다.
전생에 황영모의 악업은 육개장으로 치르게 하는 셈 쳐도 되지 않을까?
지극히 엉뚱한 의식의 전개였지만 진혁은 진지했다.
‘역시 육개장이 내 소울 푸드인가 봐.’
육개장이라는 아주 사소하고 세속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진혁은 전생에도 직장 동료 가족의 장례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육개장을 먹으면 몸 전체에 따스한 기운이 돌며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곤 했다.
사람들은 진혁의 그런 모습 때문에 겉보기엔 무뚝뚝하고 차갑지만 속은 따뜻하다는 평을 하곤 했다. 애사에 임한 지인을 위로하는 법 따위 알지 못했기에 말을 아끼는 모습에, 불필요한 구설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평판도 따랐다.
‘몽총이들.’
그런 거 아닌데. 육개장 먹으러 간 건데.
당연히 조의금도 두둑히 냈다. 많이 먹으니까.
육개장 루팡이라는 별명도 있었지 아마.
하찮은 황영모에서 출발한 의식의 물줄기는 육개장이라는 바다에 이르러 웅장하게 넘실댔다. 실로 대단한 돼지력이다.
“진혁아? 여기서 혼자 뭐해? 너 가을 타니?”
“으응? 아니 그냥 뭐-.”
진혁은 최미경이 건넨 병 음료를 받으며 얼버무렸다. 저도 모르는 새 흐른 군침을 급히 닦으면서였다.
태액-.
어린 녀석이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최미경은 손에 든 병을 진혁이 든 병목에 가볍게 부딪히고는 한 모금 삼켰다.
“크으-, 좋다. 야, 유진이 좀 어떻게 해 봐. 배 터지겠어.”
“우리 유진이 귀엽지 않냐?”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 말이 되돌아왔음에도 최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지. 그 조그만 녀석이 오물오물 쉬지도 않고 먹는데, 천천히 먹으라고 했다가 오줌 쌀 뻔했다. 노려봐서.”
“귀여우면 됐지.”
그래도 친한 친구라고, 짐짓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은 진혁이 너스레를 떨었다.
짝-.
“아야-, 씨.”
오랜만에 진혁의 어깨를 때린 최미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돌덩이를 때린 자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네 동생 배 터지기 전에 말리라니까?”
“괜찮아.”
아, 뭔 소리여. 아무리 먹어도 배는 안 터져. 그리 중얼거린 진혁은 음료를 한 모금 넘겼다.
달콤한 보리 맛 탄산음료. 미각이 예민한 진혁의 입에는 허용 가능치의 재떨이 맛도 은근히 났다.
“은정이가 너 여자친구 있냐고 묻던데?”
“김은정?”
별······.
6년 내내 같은 학급이었던 친구인데 그냥 물어보면 되는 거지, 그게 뭐라고 최미경 청소년을 거친단 말인가. 그 헛똑똑이 요즘 내외하나?
“야, 근데 은정이 섹시하지 않냐? 촌년 주제에 뽀얀게 아주-. 소고기 먹고 커서 그런가?”
풉-.
보리음료를 허공에 뿜은 진혁은 최미경 청소년을 흘겼다.
‘쪼그만 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어려서부터 조숙하고 어른스러운 최미경이다. 이런 털털한 면모는 유부녀가 된 후에나 볼 수 있었다. 진학한 학교와 영위하는 삶이 달라 관계가 소원해진 이유도 있었고, 직장생활을 하면 좀처럼 얼굴 보기가 힘드니까.
아무래도 사춘기가 지난 이때부터였나 보다.
최미경의 맛탱이가 가기 시작한 게.
갑작스럽고 엉뚱한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친구의 표정을 살핀 진혁은 콧바람을 뿜었다.
최미경의 눈은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었다.
‘아, 나를 떠본 건가?’
아니면 그냥 장난인가?
친한 친구라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건가?
김은정은 뽀송뽀송한 병아리처럼 귀여운 구석이 있긴 했다.
미경이 말대로 고기 먹고 자란 육식성 인간이라 말투와 성격이 좀 공격적인 게 조금-. 별로 똑똑하지도 않은데 똑똑한 척하는 모습이 딱할 때도 있고······. 아, 그래도 나한테 관심 있다고 하면 언제 읍내에서 햄버거라도-.
진혁이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였다.
“아무튼 너 임자 있다고 말해뒀어. 서울에 고이 모셔뒀다고.”
초승달처럼 짓궂게 휘었던 최미경 청소년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딴 맘 품지 말라는 듯.
“그랬구나······.”
그런데 왜 배가 아프냐.
그럴 거였으면 굳이 그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니?
“들어가자.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노는데 밤새 맥콜이나-.”
“잠깐.”
저를 불러세운 것도 아닌데 최미경이 토끼 눈을 떴다.
언제 화기애애했냐는 듯 심각하게 굳어진 진혁의 표정 때문에.
워우우우우-. 어우우우-.
진혁은 저 소리를 들으면 핏줄을 타고 뺨부터 가슴께까지 서늘한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 든다.
진혁은 음료병을 최미경에게 넘겼다.
“유진이 좀 챙겨 줘.”
“응?”
타다닷-.
“야! 너 어디 가는데!”
최미경의 외침을 뒤로하고, 진혁은 미친 듯이 밤거리를 달렸다.
푸화아아아-.
가로등에 홀려 도로를 점거한 각다귀 떼가 얼굴을 때리고 바람이 귓바퀴를 어지럽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장군이!’
워우우우우-.
저 늑대울음 같은 하울링은 분명 장군이가 부르는 소리다.
장군이는 딱 한 번 저렇게 울었다.
그 가슴 저미도록 서러운 울음을 진혁은 절대 잊지 못한다.
‘무슨 일이냐!’
태어나 한 번도 목줄을 하지 않은 장군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 동네를 자유롭게 쏘다녔다.
양봉하는 곳에서 꿀을 훔쳐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꿀벌까지 잡아먹다가 벌에 쏘이고, 김은정네 축사에 침입해 소 사료를 훔쳐먹다가 소 뒷발에 차이고, 키토산이 당기면 갯벌의 게 구멍을 헤집거나 개울에서 가재에게 집적거리다가 집게에 물렸다.
그 난리를 쳐도 집에 와서 낑낑대거나 어리광부리는 일이 없었다. 뱀에 물렸을 때만 해도 개가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돌아다니지 않던가.
그런데 한번은 늦은 밤에 최미경네 밭 한가운데 있는 생강굴에 빠졌다.
아마도 식물성유지가 당겨서 그랬나 본데, 수확이 끝난 땅콩밭을 헤집어 땅콩을 깨 먹다가 경쟁자인 두더지와 완타치를 쪼갰던 모양이다.
그게 4년 전 일이다. 5미터나 되는 수직 통로에 빠져나올 재간이 없으니 구조요청을 보낸 거다. 앞발로 두더지를 꾹 누른 채.
밤에 깊이 잠들었던 진혁은 그 소리에 깨어 장군이를 구출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는 소리는. 장군이가 위험에 빠져 도움을 청하는 소리다.
오직 진혁만이 알아듣는.
다른 개들도 많이 있을 텐데 저렇게 우는 것 자체만으로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진혁은 과식으로 답답한 내장에도 아랑곳없이 힘을 쥐어짰다.
‘엉아가 간다!’
후우우웁-.
놀랍게도 달릴 때마다 가슴을 간질이던 감각이 사라졌다.
밥을 많이 먹어 불편해야 함에도 단단한 복근은 위장의 난동을 허락하지 않았고, 폐는 기관차처럼 연료를 지펴 폭주를 도왔다.
복근을 한계치까지 수축시키니 다리를 들어 올리는 일이 전혀 버겁지 않다.
파아앙-!
열세 살, 계주 결승전에서 달리던 느낌이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의 진혁을 찾아왔다.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빠르고 강해진 팔다리로.
흐읍-!
단전에 힘을 집중하자, 확연히 달라진 감각이 육신을 깨웠다.
시간으로 정의할 수 없는 찰나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뜨거운 기운.
단전에서 용솟음쳐 미칠 듯 끓어오르는 힘이 정수리를 뚫고 하늘에 닿을 듯했다.
다리를 타고 발바닥으로도 힘이 뻗었다.
발바닥에 미지의 길목이 열리고 샘이 솟는 묘한 감각.
그에 걸맞게 달궈진 몸은 불기둥만큼이나 뜨거우리라.
파아앙-!
다시 한번 요상한 소리가 바닥에서 올라왔다.
땅에 발이 닿는 소리도, 자극도 없는 듯이.
워우우우-.
장군이의 소리를 쫓아.
후우우웅-.
그저 바람이 되어 달렸다.
***
공석두와 마군천.
참, 특이한 이름이 많기도 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공석두와 마군천은 대한민국이라는 국적과 남성이라는 성별, 공통점을 두 개나 가진 막역지우다. 굳이 하나 더 끼워 넣자면 우열을 가리기 힘든 멍청함도 비슷하다.
태어난 때와 장소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지만 죽는 건 한날한시가 될지도 모르겠다.
으르르-. 크르르-. 딱딱딱-.
셰퍼드와 도베르만, 순한 견종으로 알고 있던 리트리버까지.
대형견 세 마리에 쫓겨 막다른 담벼락에 몰렸다.
훔친 개를 닭장에 가두고 다음 목표물을 향해 이동하려는데 마침 이놈들이 마중을 나온 거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보니 도착한 곳이 다음 목적지인 최장환의 집이었다.
“가! 절루 가!”
“목소리 낮춰 빙시나.”
친구를 핀잔했지만 마군천도 절박하긴 마찬가지였다.
달빛에 비쳐 희번덕거리는 눈과 침이 뚝뚝 떨어지는 이빨, 목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으르렁거림은 개사육업자와 영양탕집 주인조차 얼어붙도록 만들었다. 달려들지 않고 포위망만 유지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마치 훈련받고 지시받은 군대처럼, 세 마리 맹견은 두 도둑을 에워싸고 으르렁거렸다. 무리지어 사냥하는 늑대처럼 사이드 스텝을 밟아 위치를 조금씩 변경하며.
“하이, 씨-. 그냥 여섯 놈 챙겼을 때 튀자니까-.”
“남겨두면 기분 더러워서 그랬지, 뷔앵시나-.”
공석두의 우는 소리에 마군천이 핀잔을 놓았다.
아무렴, 일단 시작한 도둑질은 상자를 가득 채우거나 물건을 싹쓸이할 때까지 해야 하는 법이다. 남기면 아깝잖아.
마군천이 팔꿈치로 공석두를 쳤다.
“야, 야. 우리 오토바이 어디에 있냐?”
워우우우우-.
“저기쯤?”
늑대울음 소리가 들리는 곳까지는 멀어도 너무 멀다.
그런데 이놈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그 부잣집 개들인가 봐.”
“어이구 대단한 발견했네-. 시방 그게 중요하냐, 빙시나?”
마군천이 재차 핀잔할 때, 공석두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한 명이 그 집으로 뛰면 이놈들이 쫓지 않을까?”
“그다음에는?”
“이 집 봐봐. 숨어들 수도 있고 이 집도 좋은 집이야.”
공석두는 등을 맞댄 집을 턱으로 가리켰다.
인심 좋은 동네여서일까, 1층에도 방범창이 없었다.
마군천은 즉시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기왕 이렇게 된 것, 한 명이 시선을 분산시키고 값나가는 걸 들고 튀자는 뜻이렷다. 여의치 않으면 잠시 침입해 개들이 물러가길 기다리는 것도 괜찮다. 어차피 모두 잔치에 몰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온 거니까. 동네방네 방송을 하는데 오늘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른다면 바보지.
“누가 뛸래?”
“아휴-, 도가니 멀쩡한 내가 뛰어야지. 출발!”
힘찬 외침과 함께 진혁의 집 방향으로 몸을 날린 공석두는.
으르르- 크롹!
“왐마, 씨벌!”
바로 잡혔다.
“에레이-! 씨발 공석두, 이 돌대가리 병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