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79화 (179/338)

< 도둑들 (4) >

***

SSS 요원들도 가득 차려진 잔칫상을 차지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였다.

민용락과 수다를 떨던 장진남의 오지랖이 느닷없이 유태화를 겨냥했다.

“태화도 결혼해오. 하면 좋아오. 용락이도 내년에 한다잖아오.”

이런 주위의 독려가 아니더라도, 독신주의자였던 유태화는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물론, 결혼 상대가 생길 경우의 이야기다.

“좋은 사람이 생기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민용락이 술주전자를 들었다.

“태화 형님도 막걸리 한 잔 받으세요-.”

“아니야. 난 근무 중이다.”

유태화가 점잖게 손을 들어 올렸다.

한유영이 잔치에 참석했기에 따라온 것뿐이다.

손광연의 근처에 자리한 양강욱과 명현우도 각각 갈비탕을 네 그릇이나 먹으면서 술을 입에 대지 않는데 유태화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말주변이 없어 연애는 자신 없었고 운동하는 것만이 지상 최대 목표인 양 살았다.

한유영의 전담 경호원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동안 유태화가 경호한 돈 많은 사람들은 이웃에 으스대고, 부리는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한유영은 달랐다. 고용주가 아닌 누나처럼 유태화를 대했다. 그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SSS 요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지만 저 사람들은 유독 남다르다.

착하게 타고난 천성이 세월의 풍파에도 변형되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겠지.

남편과 자식들과 화목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가족이란 저런 것이구나, 나도 결혼하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꿈을 품기 시작했다.

부러웠으니까.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한유영이 SSS가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태화 씨, 많이 먹었어요?”

“예. 갈비탕을 두 그릇이나 먹었습니다.”

아차, 이렇게 자세하게 보고할 필요는 없는데.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다.

“태화 씨도 막걸리 한잔해요.”

“아, 저는-.”

“괜찮아요. 이런 날 한 모금 해요. 양 팀장님도 허락하셨어요.”

“그럼 조금만 받겠습니다.”

꿀꺽-.

크으-, 죽인다. 가볍게 목만 축이려다 순식간에 사발을 비워 버렸다.

분명 술집이나 가게에서 파는 것과 비슷한 막걸리일 텐데, 시골 양조장에서 빚은 술은 맛이 다르다. 어쩌면 그날의 분위기와 사람들도 중요하겠지만,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미각이 예민한 장진남도 맛을 보고는 훌륭하다며 거푸 주전자를 비우는 중이었다.

“사카린 들어간 거 아닐까요? 아악-!”

민용락은 분위기 깨는 소리를 하다가 장진남에게 헤드록을 당했다.

술만 들어가면 까불이가 되는 민용락이었다. 맨정신에도 다소 그런 편이지만.

막걸리 한 사발을 다 비운 유태화가 호박전을 우물거릴 때였다.

드드드-.

품에 넣어둔 보안 전화기가 울렸다.

‘내 전화기가 아니네?’

한복을 입어 불편하다며 한유영이 맡겨둔 전화기였다.

유태화의 품에서 나온 전화기를 본 한유영의 미간이 좁혀졌다.

몇 번이나 보며 눈에 익은 번호였다.

‘병원?’

언니가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전화를 걸 사람이 아닌데?

전화기를 빼앗듯 넘겨받은 한유영은 소란을 벗어나 대문 밖으로 나갔다.

***

짝-!

아악!

뜻밖의 소요가 장내를 휘감았다.

연세 지긋한 어른들이 조일헌의 다리를 묶고 발바닥을 때리는 소리다.

“와하하! 이거 순 도둑놈이여어-!”

“워치게- 반백 살 다 뒨 눔이 이런 이쁜 샥시를 얻을 수가 있다니?”

“이눔 아배가 내 친군디 그눔두 젊은 처자 만났지-.”

“씨도둑은 뭇헌다더니, 이눔두 물건으루 꼬신 거 아녀?”

조무생의 러브 스토리가 노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일화인 듯했다.

고된 농사일에서 해방되어 노화가 멈춘 노인들은 이때다 싶어 힘자랑을 했다.

조일헌을 편드는 사람은 없었다.

“더 때려주세요. 더, 더-.”

배우자가 될 곽향림마저 웃는 얼굴로 지갑을 흔들지 않나. 노인들에게는 무엇보다 효과 좋은 응원이었다.

곽향림의 격려가 조일헌 타작쇼에 기름을 부었다.

와하하-!

“매우 쳐라아-!”

“아휴-, 숨차다. 이제 니가 쳐라아-.”

와하하하-!

꺽꺽꺽-!

구경꾼뿐 아니라 발목이 잡힌 조일헌도 숨이 넘어가라 웃었다.

“어이구우-. 어지간히 했으먼 고만허구 약주나 잡숫지, 근력두 웁는 노인네들이 뭔 까닭 웁는 힘자랑이여어-? 그러다 뒷골 잡구 자뻐지는규-.”

허세다.

발바닥에 불이 난 듯 뜨겁지만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 때문에 고통을 감내하는 거다.

조일헌이 살려달라 애걸복걸하는 순간 곽향림의 지갑에서 돈이 나올 게 뻔했다. 곧 두둑하게 현찰이 쌓일 예정인데 동네 노인들에게 주는 용돈이 아까워서 그러는 건 아니다. 어차피 노인들도 그 돈을 동네 아이들을 위해 사탕을 사거나 장날 읍내에 나가 센베이 따위의 건과자를 사는 일에 쓸 사람들이고.

“아 거, 논네들 몸살 날라-. 엥간히 했으믄 약주나 잡솨-. 꺽꺽-.”

게임이라는 것이 싱겁게 끝나길 바라지 않는 구경꾼들을 위해 버티는 거다. 그리고 승부는 승부 아닌가. 쉽사리 승리를 양보할 수 없는 늙은 사내아이들의 자존심 싸움이자 놀이였다.

“이눔 이거. 즐기구 자뻐졌는디?”

“그눔 애비두 그렸어. 맷집이 여간내기가 아녀. 씨도둑은 뭇허는 거라니께 그러네?”

벌건 얼굴로 뒤에서 기웃거리던 장진남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흥겨운 난동에 개입하고 싶은 눈치였다.

“제가 때릴까오?”

“어어어-, 그러는 것두 아니지이-!”

구경꾼들과 더불어 웃던 조일헌의 안색이 돌변했다.

“아이구-, 초상치를라구 허는 거 아녀. 젊은 사람들일랑 기양 구경이나 허여-.”

조일헌의 걱정을 아는지 노인들도 만류하고 나섰다.

장진남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고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 힘 약한데오.

“옛날 사람이나 이렇게 노는겨. 요즘 사람은 요령 웁써서 막 힘으루만 치다간 다치는 겨어-.”

백발 성성한 노인회장이 장진남을 위로했다.

그때, 커다란 손이 노인회장의 어깨를 짚었다.

한차례 휘청인 노인회장은 그 주인공을 돌아보고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오호호-, 옛날 사람이라······. 그럼 나는 되렷다?”

천길룡이었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이 조일헌을 보고 있었다.

“끄······.”

천길룡과 눈이 마주친 조일헌의 입에서 요상한 소리가 나오길 잠시.

조일헌이 다급하게 외쳤다.

“햐, 향림이! 임자아-!”

늦었다.

천길룡의 손에는 이미 회초리 다발이 들려 있었다.

쥐고 있던 노인이 군말 없이 건넨 것이다.

노인들은 가만히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섰다.

연배도 훨씬 높은 데다, 장승 같은 체구의 천길룡에게 위압감을 느낀 탓이다. 그뿐 아니라, 천길룡은 그들이 코흘리개였던 시대에 이미 마을의 살아있는 수호신으로 유명했다.

회초리 다발을 툭툭- 손바닥에 치는 천길룡의 입술이 활처럼 휘어졌다.

그 모습이 어딘가 사악해 보이는 건 조일헌만의 착각이 아니리라.

“임자! 돈 줘! 줘서 보내! 언느응-! 누가 이것 좀 풀어주유우우-!”

***

뻑! 퍽! 빡! 짜악-!

“내가! 돈이! 뭔 소용! 이더냐! 예끼 놈!”

“으악! 악! 장개두 뭇가구 죽것네에에에에-.”

와하하-.

뭔가 재미난 놀이를 하는 모양이다.

진혁은 그렇게 미루어 짐작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인 천길룡과 조일헌 콤비가 붙으면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배를 잡고 뒹굴게 만드는 콩트가 펼쳐졌으니까.

“뭐라! 장개를! 간다고! 나도! 못간! 장개를! 의리! 없는! 놈!”

“아아아아악-! 누가 가지 말랬나유우우우-! 사람 살려! 임자아-! 향림이이이이이-!”

소란을 귓등으로 흘리며, 진혁은 거리를 두고 부모님 곁을 서성였다.

안에서 무슨 소요가 벌어진 것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다른 중요한 일이 있다.

심각한 표정의 아빠가 대문을 나서는 걸 보고 따라왔는데, 엄마가 미리 나와 계셨다. 아빠는 엄마가 보이지 않으니 유태화에게 물어 따라온 모양이었다.

“식장은 잡았대요?”

“그냥 병원에 딸린······.”

소란스러운 잔칫집 소음이 방해했지만, 두런두런 나누는 부모님의 대화 내용을 잡아내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황영모가 죽었구나······.’

이번 생에는 대면하지 않은 사람이다.

아무런 연도 맺지 않고 끝내 모르는 사람으로, 그저 어딘가 존재하던 사람으로 끝내 그렇게 사라졌다.

“바로 가보지 않아도 되겠어요?”

“네. 그냥······ 잠깐 기분이 묘해서 바람 좀 쐤어요.”

“내일 저녁에 나랑 같이 다녀와요. 언니는 보고 싶을 거 아니에요?”

아빠는 진혁을 본체만체하고는 엄마의 어깨에 팔을 둘러 다시 들어갔다.

부모님이 들어가신 후, 진혁은 홀로 남아 턱을 괴었다.

‘엄마 마음이 이해가 간다면 오만일까?’

묘한 기분이다.

두 번이나 황영모의 죽음을 접했다.

전생에는 황영모가 죽고 김응녀 세 모녀가 사라진 지 한참 후에 신우성에게 소식만 들었다. 다방을 운영하던 어느 가족이 사채업자에게 쫓겨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다고.

‘이번엔 장례는 치르겠네.’

엄마의 재산을 훔치고 강도질한 인간.

생겨 먹은 것도,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도 못생겼었다. 게다가 하는 짓까지 못생겨 먹어서 ‘인생이 불쌍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더랬다.

애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통쾌할 것도, 기쁠 것도 없었다.

‘찝찌름하네.’

다시 만나면 어떻게 혼내줄까 잠시 고민할 때가 있었는데, 맥 빠지는 양상으로 흘러버렸다.

그냥, 죽었나 보다 하는 감상.

이름이라도 아는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기분이란 그런 것인 모양이다.

홍기준이 말했다.

‘복수만을 꿈꾸는 자의 삶은 얼마나 피폐할 것이며, 그 끝은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그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진혁은 그자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바보여서도, 너그러워서도 아니다.

‘시시하고 하찮아.’

불쾌한 감정은 가족과의 행복한 삶에 방해가 될 뿐이다.

망각이야말로 인간에게 내린 유일한 축복이라고 하지 않던가.

진혁은 그의 존재를 무시하고 잊음으로써 행복한 기분을 지키려 했다.

‘어쩌면 집중력 덕분인지도 모르지.’

사랑이든 증오든, 결국 감정의 유탄으로 여기며 살았다.

진혁은 행복에 정조준했고, 결국 명중시켰다. 인생을,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한 피눈물 나는 노력이었다. 누군들 속이 없어 과거를 묻고 싶을까만, 그만큼 현재의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엄마야말로 너그러운 분이다.

정작 현생의 피해자인 엄마가 복수를 원했다면 기꺼이 나섰겠지만, 엄마는 그러길 원치 않았다.

- “엄마는······, 그런 사람들을 어수선한 시대의 파편 같은 거라고 생각해. 엄마가 그 파편에 맞은 거지. 그땐 그런 못난 사람이 너무 많았거든. 엄마 어릴 땐 별일 다 있었어. 친구네 오빠인데 노름에 미쳐서 집문서 내놓으라며 부모에게 낫 들고 덤비고······”

잊지도 않았고, 용서도 하지 않았으나.

셀 수 없이 많은 시대의 피해자 중 하나일 뿐, 자기만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 “나 혼자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아. 누굴 사랑하는 법도 모르고. 그런 사람이 가정을 꾸린들 행복할 수 있을까? 결국 다른 가족도 불행해질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엄마도 그 사람처럼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치는 도둑이 될 뿐이야.”

딱한 시선은 원하지 않는다며, 울컥 올라오는 분노도 한 발 떨어져서 보면 한 번 내쉰 한숨에 흩어버릴 수 있다고 하셨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참으로 존경스러운 객관화였다.

그저 해맑은 분이라 생각할 때가 있었는데, 엄마는 알면 알수록 품이 넓고 속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의 영향을 진혁이 받지 않았을 리 없다.

엄마와 대화를 나누며 부지불식간 증오가 무관심으로 변했을 터였다.

누누이 되새기고 곱씹는 것이지만 닳고 무뎌진 진혁의 성격도 한몫했을 테고.

‘내 과거는 답이 없는 문제잖아.’

새로 태어나 성장하며 뇌리에 터를 잡은 현실감각도 무시할 수 없다.

사회라는 틀에 녹아들어 인간으로 살기를 갈망하는 처지에 사적인 복수를 하겠다며 무법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가장 완벽한 보복은 짜증나는 것들을 개무시하고 온전히 내 생에 집중하고 내 의지대로 누리는 게 아닐까.

‘난 지금처럼 사는 것도 좋아.’

확실히 정리하고 넘어가자.

알아주는 이 없이 오직 저만이 감내한 노력이지만, 진혁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

장군이의 길다란 귀가 연신 까딱였다.

{히이-, 끼이이-, 끄으이-.}

민감한 개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

다른 녀석들은 무슨 일이 있나, 하는 눈치다.

장군이만이 들을 수 있었으며, 저 소리의 정체 또한 알고 있었다.

으르르-.

저건······.

너무 두려운 나머지 저항하지 못하고 꼬리를 말고 뒷걸음질칠 때 내는 개 소리다. 짖기 위해 공기는 이미 뱉어냈는데 몸이 후퇴한 탓에 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는. 장군이는 똑똑한 개라서 그런 것도 안다.

장군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법 친분 있는 부하 누렁이부터, 데면데면한 황구, 백구, 흑구, 재구, 호구······.

뭔 놈의 구가 이렇게 많냐. 아무튼 온통 개판이다.

손왕왕네 집을 지키는 인간들은 한 명만 남기고 잔칫집에 갔다.

이곳엔 장군이를 도와줄 인간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결국 개가 나서야 한다.

장군이는 똑똑한 개라서 상황파악도 금방 한다.

으르르-.

이 동네 개들 모두 장군이에게는 부하들이다.

검은 옷 인간에게 부하들이 납치되도록 둘 수야 없지.

워워월!

얘들아, 가즈아!

월!

겁쟁이 누렁이는 꼼짝 말고 니 새끼나 지켜라!

어차피 손님 개들은 목줄 때문에 따라오지도 못한다.

파바바박-! 헤헤헥-.

무서운 질주였다. 장군이를 필두로 네 마리 정예견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장군이의 우렁찬 호령이 인적 지워진 밤공기를 깨웠다.

워워월!

나를 따르라, 개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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