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둑들 (3) >
***
마을 인구가 많기도 하다.
이촌 현상이 무색하게도 진혁의 동네에는 7년 전보다 가구도, 인구도 증가했다. 마을 공동체와 제너럴 팜에서 기계식 영농과 상품 작물 재배를 지원하니 농사를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최상의 선택지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군가 터를 알아보러 방문하면 친절하게 대하는 주민들도 인구 유입을 거들었다.
“와아-. 사람 많아요. 저기 김호진도 있어요.”
북적이는 인파에도 유진이는 겁먹기는커녕 신나 보였다.
태생이 인싸였으니 이런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반응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역시 유진이는 대단해. 나는 얼이 빠질 것 같은데.’
사람이 더 많은 곳도 겪어봤으면서 무슨 소리냐 할 수 있겠으나, 육상 경기가 펼쳐졌던 서울의 경기장에서는 그 많은 인파를 직접 헤쳐야 하는 건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대회 때는 나 홀로 유유자적하는 아로아나 같았고 잔칫집에서는 구피가 득실거리는 어항 속의 구피 신세 같다고나 할까.
조일헌과 곽향림은 마당과 방은 기본이고 트랙터와 콤바인을 보관하는 차고까지 비워 손님을 받았다. 집 뒤의 텃밭에도 포장을 깐 후에야 모든 축하객이 들어갈 수 있었다.
결혼식은 아직이지만 마을 규모로 집들이를 하는 셈이다.
“마을 사람들 전부 모였나 봐.”
“이동호는 없는데요오-?”
이동호는 다른 마을이잖아.
진혁은 동생의 오류를 짚는 대신 손을 꼭 잡았다. 덩치 큰 어른들에 밀려 놓치면 곤란하니까.
“저기 삼촌들도 계세요오-.”
유진이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서울 동상들두 멕여야 헌다며 조일헌이 초대한 덕분에 SSS 요원들도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손을 거들고 주민들에게 부하가 쌓이지 않도록 할 요량으로 청년회에서 고용한 외부인들도 보였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더니, 그만큼 주민들의 품이 넓어진 증거로 봐도 될 듯했다.
다른 축하객과 인사를 나누던 조일헌이 진혁과 유진이를 맞았다.
“아이구-, 우리 지넥이 성이랑 유진이두 왔네이-. 어이구, 정원이는 이렇게 큰 성 있어서 좋겄다아-.”
진혁의 품에 안긴 정원이에게도 인사를 빼놓지 않았다. 형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버둥대는 아기를 쑥 뽑아 안으며.
“당연히 와야죠. 축하드려요.”
“쪼롱이 아저씨, 축하는 합니다아-.”
유진이는 늘 하던 대로 꼽박 허리를 숙였다.
조일헌은 유진이에게만은 오빠라고 부르라는 강요를 하지 않았다.
슬쩍 간을 봤다가 유진이에게 호통을 들었대나 어쨌대나.
진혁은 떠들썩하고 발 디딜 곳 없는 장내를 둘러보았다.
아빠는 천길룡, 최장환과 같은 상에서 막걸리를 들이켜고 있었고, 한복 차림에 앞치마를 두른 엄마는 아주머니들과 어울려 음식을 먹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엄마가 즐거워 보여서 더 좋다.’
집을 나서면 늘 엄마를 걱정했다.
아빠와 진혁, 유진이까지 집을 떠난 시간이면 정원이를 돌보고, 텃밭을 가꾸고. 대화 상대라고는 장군이나 유태화, 장진남, 민용락······.
아, 엄마도 이제 적적할 틈이 없으시겠구나. 엄마의 일상도 크게 변했으니 외로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왁자지껄한 장내였으나 일하는 사람이 많아 특별히 분주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필요한 음식은 각자 가져다 먹는 분위기였다. 회사원 시절 꽉 막힌 공간에서 진행하던 회식과는 전혀 다른 개방감과 자유가 느껴졌다.
“우리 정원이두 인쟈 말 배우먼 일헌이 성한티 성이라구 허야는 겨-. 알었지잉? 성이라고 혀 봐. 서엉-.”
“우우우-!”
찹찹-.
헛소리하는 입에는 예외 없이 손정원의 매서운 손바닥이 날아든다.
어설픈 자세로 정원이를 안고 세뇌를 시도하던 조일헌에게서 진혁이 아기를 넘겨받았다. 더 놔두면 정원이에게 맞아 조일헌의 입술이 오리 주둥이가 될지도 모르니까.
“잔치가 길어질 것 같네요.”
이미 어둑한 시간인데 급히 마시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벌써 취해 화투판을 벌이고 돈내기 윷놀이를 하자고 바람을 잡았을 텐데, 주민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몇 년 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달라진 풍경이다.
“다들 날밤 깔 생각으루 온 겨-.”
조일헌 역시 옛날이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라며 동의했다.
가을 농번기는 이미 닥쳤음에도 누구 하나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조직적으로 기계화 영농을 하고, 농가 소득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덕분이라고.
“이게 다 느이 아부지 덕이여.”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서운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내 덕도 있을 텐데.’
가계 식량 자급을 위한 작물과, 농협과 수매계약을 맺은 벼를 제외한 모든 작물은 제너럴과 계약해 재배 중이었다. 매년 계약한 금액에 제너럴에서 전량 수매하니 가격 폭락으로 걱정할 일도 없고, 효소 비료 덕분에 농약이나 비료 값 부담도 크게 줄었다.
“옛날이는 노상 농약값, 비료값이다가 기계 빌리기두 힘들어서 농사 베리는 게 일이었지. 쎄빠지게 지어서 팔먼 뭐허구? 빚 갚는디다 다 썼지. 뭇난 눔덜은 겨울이 노름판이서 다 날리구.”
저렴하게 빌릴 수 있는 기계 사용은 평범한 농가에서는 꿈꾸기 어려웠다. 조합장이나 지역 유지 등 인맥이 받쳐주지 않으면 예약조차 불가능했다.
일찌감치 상황을 판단한 조일헌 같은 사람들이 고가의 트랙터나 콤바인 등을 사들여 품을 판 것이고.
“느이 아부지헌티 촉탁 받어서 일허니께 나두 좋지. 일거리두 많구, 유지보수두 해주구. 제나랄이 농협보담 훨씬 나슨겨.”
이제는 5년 전과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봄이면 제너럴 팜 로고가 박힌 트랙터와 이앙기가, 가을에는 콤바인이 일대를 누빈다. 계약한 농가에 제너럴 팜에서 무상으로 기계를 지원하는 것이다. 기존 트랙터 드라이버들의 일거리를 빼앗는 격이 되지 않도록 그들과도 계약을 맺었다.
‘그거 다 제 생각이에요.’
손광연의 사업 중 진혁의 기획이 반영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생산부터 가공, 판매까지.
“겨울이두 인쟈 수중이 둔줌 생겼다구 딴생각 허는 눔이 움써. 일거리 천지니께. 암튼간 시설농사두 허구 겨울이는 부업두 허는디, 노상 하늘만 보구, 땅만 보믄 지치니께 이렇게 모여서 놀기두 허구 쉬엄쉬엄허는 겨.”
주민들은 겨울에도 비닐하우스나 마을 공판장에 모여 작물 가공 등의 2차 생산활동에 참여해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쪽파와 미나리 등 채소부터 약용식물과 화훼를 다듬어 포장하는 등의 일이었다.
진혁도 겨울방학 때는 최미경 청소년과 어울려 일을 거들곤 했다. 돈이 아쉬웠던 건 아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함께 유년기와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친구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쟈 농사짓는 사람덜두 따숩게 입구 배 두드리먼서 쫌 편케 살으야지, 이이-?”
능글맞게 웃으며 동의를 구하는 조일헌을 보며 진혁도 결국 미소지었다.
제 가족 덕분에 삶의 질이 높아졌다는데 누가 싫어할까.
‘내 공을 몰라주면 어떠냐. 아빠는 알아주시겠지.’
으하하하하!
여기저기서 불규칙적으로 박장대소가 터졌다.
흐뭇한 정경이다.
사람이 편해지는 길이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함께 잘살면 함께 편해지잖아.’
자기가 원하는 작물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고, 혼자 부자 되겠다며 욕심부리는 사람도 있다. 일부 모난 돌 같은 사람도 있고, 괴팍한 노인네도 존재한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흉보기도 하고 싫은 티를 드러내기도 한다. 하나 그게 어디 이 동네만의 문제일까.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있는 사람, 발생하는 일이다.
‘옛날엔 그 꼴 보기 싫어서 사회 친구도 안 만들었는데.’
할 줄 아는 게 일밖에 없어 그런 거면서 말은 잘한다.
“여그 내 술 한 잔 받어-! 인쟈 친구허는 겨-.”
근래 마을 행사에서 얼굴을 보기 힘든 손광연에게 김춘식과 육영구가 경쟁적으로 술을 권했다.
그 모습을 보며 어색하게 웃은 진혁은, 비어있는 손으로 유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도저히 유진이가 걸어서 뚫을만한 인파가 아니었다.
“읏챠-. 우리 유진이 배고프겠다. 오빠랑 맘마 먹으러 가자.”
“맘마 아니잖아요오-. 밥이랑 국이랑 고기잖아요오-.”
유진이는 이제 자기 생각과 다르면 대들 듯이 말하는 경지에 올랐다.
이런 싸가ㅈ-, 이게 아니고. 진짜 많이 컸다.
“그래! 밥이랑 고기랑 먹으러 가자!”
“국은 왜 빼요오-?”
한 대 치겠다, 이 자식아.
그래도 예쁜 동생이라고 꾸중하기보다는 쪽- 소리가 나도록 볼에 입을 맞췄다.
양팔에 동생들을 안은 진혁은 조심조심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최미경과 동갑내기 친구들이 손을 흔드는 사랑방으로.
뿌다다다다-.
집 밖에서는 경박스러운 단기통 엔진이 북적이는 인파와 즐거운 소음을 빗겨 갔다.
***
월-.
누렁이가 왔어.
지 새끼를 데리고 왔는데 동글동글하고 말랑한 것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그 겨울 손앵앵과 놀던 딸 홍시를 떠올리게 만드는 깜찍함이다.
헤헤헥-.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녀석이다.
햐-, 고놈. 사악- 훔쳐다가 맹견으로 키우고 싶네.
월!
히익!
예뻐서 한 번 핥으려다 누렁이가 개지랄하는 바람에 물러섰다.
아무리 누렁이가 장군이에게 개밥을 상납하는 녀석이라지만, 장군이도 새끼를 보호하는 애미애비에게 함부로 들이대지는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순식간에 된장 발리는 수가 있거든. 지켜야 할 게 있는 개는 강해지는 법이다.
장군이는 똑똑한 개라서 그런 것도 안다.
워얼-.
조캥캥네 집에서 동네잔치를 한다고 했다.
잔치가 벌어지면 장군이가 빠질 수 없거늘, 손왕왕이 집을 지키라고 했다. 이런 개쉑-.
다른 집에서 데려오는 개친구도 보호하라는 말도 남겼다.
어우울-.
어우, 억울하고 짜증난다.
그래도 장군이는 너그러운 개라서 손왕왕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충성심이나 헌신, 뭐 그딴 거 아니다. 그런 건 개나 주라지.
으르르-. 컹- 커엉-!
천마가 검마인지 까멍이인지 하는 강아지 꽁무니를 킁킁거리다 누렁이와 한 판 붙었다.
월!
조용히 해라, 개새끼들아!
월월!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은데 개견행동하지 말라고!
조캥캥네 집은 장군이의 튼튼한 다리로 전력 질주해도 한참을 가야 도착한다.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인데도 온 동네 인간들이 모두 모였는지 하늘이 쩌렁쩌렁 울리게 시끄럽다.
흐헤헥-.
바람을 따라 근사한 냄새도 날아들었다.
기름지고 고소한 냄새부터 꼬릿꼬릿하고 향긋한 냄새까지.
시골 개라면 절대 참지 못하는 냄새다.
헤헤헥-.
장군이가 좋아하는 막걸리 냄새도 난다.
늘어진 혓바닥을 타고 침이 뚝뚝 떨어졌다.
손왕왕, 양손 무겁게 오지 않으면 뒤꿈치를 물어버리겠다!
실제로 물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인간은 물어도 손왕왕은 물면 안 된다.
충성심이나 절대복종 그런 거 절대 아니다.
며칠 보이지 않던 손왕왕은 장군이를 위해 맛있는 간식도 사왔다.
손앵앵의 인간 친구가 들고 갔던 것을 바람처럼 달려가 되찾아온 충성스러운 인간이다.
그런 인간을 물면 그건 진짜 배은망덕한 개새끼지.
워얼-.
아들을 품은 누렁이가 지껄였다.
주인 아주머니가 맛있는 개밥 해주셨는데 먹지도 못하고 끌려왔다고.
사료가 입에 맞지 않는다는데, 이래서 촌놈들은 안 된다.
으르르-.
쯧, 주는 대로 처먹는 것이 참된 개의 자세거늘.
지체 높은 개로서 어찌 먹을 것을 가린단 말이냐.
우울-.
누렁이가 물었다.
제놈이 왜 여기 끌려왔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이래서 근본 없는 잡종 녀석들은 안 된다.
손왕왕을 따라 산책을 나갔을 때일 거다. 장군이는 손왕왕과 짬프네 김멍멍 아저씨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검은 옷을 입은 인간이 개들을 마구잡이로 훔쳐간다고.
그래서 누렁이가 장군이네 집에 온 거다.
검은 옷 인간에게 잡혀가지 않도록 장군이가 보호해주니까. 엣헴-.
얼마 전 새벽 안마을 메리가 하늘에 날린 개소리를 분석한 결과, 보이지 않던 인간이 동네에 들락거린다던데 그 인간인 모양이다. 메리에게 듣기로, 그 인간에게서는 온갖 개 냄새가 강하게 난다고 했다.
워얼-.
장군이도 희미하게 날아드는 그 냄새를 맡았다. 두려운 냄새였다.
인간은 맡지 못하는 피비린내와 불 냄새가 기계 냄새에 섞여 바람에 실려 왔다.
그나저나 잔치 언제 끝나냐.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 먹으려고 저녁 사료도 걸렀는데 잔칫집 소음이 잦아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였다.
접혀 있던 장군이 귀가 쫑긋거렸다.
풀벌레 소리가 잦아들고 묘하게 신경을 긁는 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히이-, 끼이이-, 끄으이-.}
흠칫.
엎드려 코를 벌름거리던 장군이가 벌떡 일어섰다.
오직 장군이만이,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