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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75화 (175/338)

< 변하지 않는 것 (6) >

***

미칠 듯 더웠던 여름이 물러가고, 밤마다 귀뚜라미 우는 계절이 왔다.

진혁에게 같은 하루는 없다.

여전히 매일이 새로웠고, 인간의 부지를 비웃으며 은근슬쩍 옷을 갈아입는 계절조차 진혁에게는 그 도둑 걸음이 들통났다. 지하수 온도로 여름이 끝나감을 느끼고 바람 냄새로 가을의 시작을 감지하는 것처럼.

‘먼지 냄새 사라졌다.’

눅진한 바람이 심장을 간질였다.

끼이잉-.

집에 도착해 앞뒤 브레이크를 함께 쥐었는데 목을 움츠리게 만드는 소리가 올라왔다. 자전거 브레이크를 또 손봐야겠다.

‘브레이크가 너무 빨리 다네.’

중학교에 진학하며 산 자전거인데 계절을 많이도 넘기며 여기저기 아프다고 아우성이었다. 브레이크 패드가 닳아서 교체한 것이 10여 회, 타이어 펑크는 직접 때우다가 20회를 넘어가면서 집계를 포기했다. 체인이 끊어져 펜치로 끼운 것만도 열 번이 넘는다.

“너무 험하게 탔나?”

그저 핸들을 쥐고 페달을 밟았을 뿐이다. 자전거니까.

어쩌면 자전거는 생각보다 복잡한 기계일지도 모르겠다. 자동차처럼 냉각수가 고갈되거나 실린더 개스킷이 낡은 것도 아닌데 가끔 연기가 올라오는 걸 보면 말이다.

돌아오는 주말에 대대적으로 손 본 후 그래도 말썽을 부리면 새 자전거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신경을 긁는 소리마저도 반가웠는지 유진이가 웃으며 오빠를 맞았다.

“오빠, 오늘도 일찍 오셨어요오-.”

“응. 우리 애기 유치원 잘 다녀왔어? 뭐 하고 있었어?”

“정원이랑 땅꼴 먹었어요오-.”

마당에 서서 거실을 들여다보니 정원이는 채반에 손을 넣어 뭔가를 주무르고 있었다. 아마도 까마중으로 주스를 제조 중인 듯했다.

“애아- 빠빠빠-! 까하하-!”

구타하듯 손바닥으로 찰팍찰팍 내리치기도 했는데, 아기의 만행으로 쟁반 가득 보라색 액체가 흥건했지만 엄마는 그저 웃으며 뜨개질을 하고 계셨다. 언제 봐도 존경스러운 너그러움이다.

“오빠 운동 가요오-?”

물음에 고개를 돌리니 그제야 동생의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유진이의 얼굴과 손은 보랏빛으로 물이 들었고, 옷에는 뭐가 묻었는지 누르스름한 얼룩이 졌다.

“으이그, 이 덜렁이.”

꾀죄죄해도 아빠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진혁은 유진이를 안고 볼을 부볐다.

“까르륵-.”

그저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운 생명.

깨끗하면 뽀샤시해서 예쁘고, 지저분하면 촌스러워서 예쁘다.

그래서 엄마는 동생들을 꼬질꼬질하다는 이유로 다그치지 않았다.

- “괜찮아. 진혁이는 더했어.”

그땐 허름한 집에 살 때였으니 그게 자연스러운 거 아닐까 생각했지만 비겁한 변명이요, 구차한 핑계일 뿐이다. 가세를 따라 행색이 정해져야 한다면 재산으로 계급을 나누는 세상에도 힘을 실어주게 되는 꼴이니.

아무튼, 이 오빠가 너의 꼬질룩을 한층 업그레이드해주마.

“우리 애기, 오빠랑 땅꼴 따러 갈까?”

“땅꼴도 따고 자장구도 타러 가요!”

유진이가 모처럼 만세 자세로 깡충깡충 뛰었다.

에헤헤-.

가야지.

내 동생이 가자는데.

진혁은 수돗가에서 바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 똥싸개가 언제 이렇게 컸는지, 기특하네.’

최미경 어린이가 차지하던 일상의 한편에 유진이가 들어왔다.

*

학교가 파한 후에도 중간고사 준비를 하며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얼굴과 이름이 실린 후로 얼굴 한 번 보겠다며 찾아오는 이들 때문이다.

한 공간에 머무는 태양고등학교 학생들을 위시해, 태양여중 학생들, 운동부가 있는 고등학교의 감독들.

1학년 초의 경험이 있어서 그나마 덜 당황스러웠고, 동네에는 SSS가 버티고 있어 숨통이 트였다. 어제도 모 일간지 기자가 왔다가 유태화의 정중한 경고에 줄행랑을 놓았더랬다.

“유진아, 땅꼴은 왜 땅꼴이라고 부르는 걸까?”

까마중은 생명력이 강하다.

이파리나 줄기만 꺾어도 쓴 냄새가 확 올라오는 것이, 연약한 식용작물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음-, 엄마가 그러시는데 땅에서 나는 꼴이라 땅꼴이래요.”

오빠도 어릴 때 그렇게 배웠지.

가난하고 먹을 것 없는 시골 아이들이 가을 수확기를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열매라고.

유래야 어찌되었든 고마운 건 사실이다. 군것질거리 없는 시골 아이들에게 좋은 간식이 되어주었으니.

진혁도 어릴 때는 밥공기를 들고 다니며 까마중을 수확했다.

수북이 쌓이는 까마중을 보며 수확의 기쁨도 배우고, 부자가 되는 기분도 만끽할 수 있었다.

“노린재는 먹으면 안 돼.”

“그 정도는 알아요. 지네도 먹으면 안 돼요.”

그래, 많이도 아는구나.

그리도 많이 아는 녀석이 익지 않은 까마중을 떼어 입에 넣었다.

“으애애애! 에투투-! 초록색은 먹으면 써요.”

“유진아, 여기 봐봐. 이렇게 톡- 떼면 여기는 까맣지?”

“오오-? 거기만 까매요.”

열매는 녹색이었지만 꼭지와 붙어있던 부분은 실선처럼 까맣게 변해 있었다.

“다른 거랑 비교해 볼까?”

한 눈에 봐도 전혀 익지 않은 녹색 열매를 하나 더 따서 비교했다.

“이거랑, 이거랑 비교하니까 확실히 다르지?”

“네. 이거는 배꼽이 까맣고 얘는 녹색이에요.”

오빠 옆에 쪼그려앉아 관찰하는 유진이의 눈이 빛났다. 이 오빠가 뭔가 보여줄 때마다 모르던 걸 하나씩 배우게 되니까, 그래서 유진이는 한눈을 팔 수 없다.

진혁은 먼저 딴 열매를 입에 넣고 쫍쫍거렸다.

“이건 하나도 안 쓰다?”

“그럼 나도-. 오아-, 이것도 배꼽이 까매요.”

비슷한 열매를 따서 입에 넣는 유진이를 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사람 말을 이렇게 잘 믿으니 놀려 먹기 좋겠네.

물론, 지금 진혁이 거짓말을 했다는 건 아니다.

“오오? 정말 안 써요! 근데 조금 시어요.”

“맞아. 완전히 까맣게 익은 게 달지.”

엄마와 아빠는 진혁이 어릴 때부터 까마중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기에 잡초를 제거할 때도 까마중만은 고이 보존했다. 줄기가 꺾일까 조심하며 낫질을 했고, 주위에 풀이 없어 쓰러질까 일부러 까마중에 바짝 붙은 잡초도 함께 남겨두었다.

“장군이 이리와. 너도 땅꼴 좋아하지?”

헤헤헥-.

그렇게 살아남은 까마중을 장군이와 나누어 먹으면, 다음 해에는 집 근처 여기저기에 까마중이 자랐다. 이듬해에는 더 많이 나고, 그다음 해에는 더 많이 싹이 돋고. 밭을 일구기 애매해 터를 고르지 않고 방치한 둔덕은 그렇게 까마중 밭이 되었다.

“이 땅꼴밭 장군이가 만든 거야.”

“진짜요오-?”

누구도 염두에 두지 않고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없으나, 장군이 농사견설은 여기저기서 증명되고 있었다. 간섭하고 이끄는 사람 없이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너무 시큼하면 설탕 뿌려 먹어도 돼.”

“설탕은 몸에 안 좋아요.”

제법 머리가 컸다고 대거리를 한다.

단 것을 좋아할 때인데 오빠 눈에 이보다 흐뭇한 일이 또 있을까.

‘짜식.’

하긴, 유진이는 토마토나 수박에도 설탕 뿌리는 걸 싫어했다.

너무 달게 먹으면 속이 쓰리다나?

“콜라는 몸에 좋아요.”

그런 녀석이 콜라만 보면 눈이 돌아버려 장군이처럼 이성을 잃는 것도 재미있다.

*

촤촤촤- 촥촥!

“왜 마당에서 씻어요?”

“그냥, 그게 편해서.”

바가지 가득 딴 까마중을 씻는 것도 유진이는 궁금한 눈치였다.

“마당은 지하수잖아요. 안에 들어가서 씻어요.”

“그······.”

그건 무슨 소리냐. 거기나 여기나 지하수인 건 마찬가지인데.

설거지할 때 다용도실 외벽 근처에서 지하수 펌프 작동하는 소리를 유진이가 들어야 믿으려나.

“마당에서 씻으면 물이 마구 튀어도 주방을 안 닦아도 되잖아.”

“오아-, 그러네요.”

역시 잘 믿는다.

낚시에 재미 들린 SSS요원들이 바다와 저수지로 나간 시간, 진혁은 요즘 새롭게 재미 붙인 일에 매달렸다.

“유진아, 이제 오빠랑 자전거 타러 가자.”

운동보다 동생이 먼저지.

“정원이는 언제 타요?”

“정원이는 아직 어려서 세발자전거 못 타요. 오빠가 너무 빨리 사 왔나 봐.”

페달에 발이 닿지도 않았고, 정원이는 안장에 앉는 일보다 핸들을 맛보는 행동에 더 집착을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세발자전거는 김장 비닐에 싸서 창고에 넣어두었다.

“헬멧은 꼭 써야 해.”

“네!”

일반 자전거에 비해 전복의 위험이 현저히 떨어지기는 하지만, 네발자전거라고 무조건 안전한 건 아니다. 진혁은 유진이에게 유아용 헬멧을 씌웠다. 팔꿈치와 무릎 보호대도 필수다.

“답답해도 참아.”

“네!”

아무리 치유능력이 있다 해도 머리를 다치거나 정신을 잃을 정도의 부상을 입는다면 누군들 안전을 장담할 수 있겠나.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안전제일이다.

헬멧을 쓰고 턱끈까지 매니 만화캐릭터처럼 귀엽기 짝이 없었다. 진혁은 동생의 통통한 볼을 쥐고 바보처럼 웃었다.

“이히히히히- 내새끼! 어쩜 이렇게 이쁠까.”

“출발!”

버스 길에 올라 손유진이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가을 하늘을 닮은 프레임에 베이지색 바구니가 달린 네발자전거가 가을 석양을 등지고 내달리는 모습이 경쾌하다.

가라라라락-.

보조 바퀴 소음에 오빠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 불안했을까, 유진이는 시선을 전방에 고정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 따라오고 있어요?”

“당연하지!”

살근살근 조깅하듯, 진혁은 팔이 닿는 거리에서 유진이를 바짝 따랐다.

개방된 도로라지만 언제 자동차가 올지 모르고, 수확기를 맞아 길가에는 트랙터나 트럭도 주차되어 있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수로변 트랙을 달리면 될 일이지만 유독 찻길을 달리며 마을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동생을 위해 오빠가 맞춰주는 거다.

“은정 언니네 벌써 생강 캐네요.”

“응. 올해는 더워서 알이 일찍 굵었다고 작년보다 일찍 캔대.”

“조생종이라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니. 요즘 애들은 정말 빠르구나.

“쪼롱이 아저씨가 저기는 박대순 아저씨네 밭이었다고 했어요.”

“그래. 그분이 농사짓던 땅이야.”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박대순은 약용 작물을 재배했다.

더운 날, 바람에 실려 훅- 날아오는 당귀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더랬다.

어린 진혁은 그 냄새를 많이도 싫어했다.

‘왜 그립냐.’

인간은 감정은 간교하다.

의심에서 시작한 마음이 원망으로 바뀌었고, 원망과 동정 사이에서 위태하게 외줄 타기를 하던 감정은 측은지심으로 기울었다.

아마도 그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어쨌거나 복잡하고 간사하다고 생각했다.

진혁의 마음 말이다.

“오늘도 방앗간까지 갈까요?”

“그래. 오빠는 많이 달릴수록 좋지.”

어릴 때부터 들로, 산으로 뛰어다녀 다리가 튼튼한 유진이지만 진혁에게는 병아리만큼이나 느린 생물이다. 운동 효과는 별로지만 동생과 함께 하는 이 순간이 진혁에게는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건 손유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들썩이도록 자전거를 타며 오빠와 대화를 나누는 초저녁이 가장 행복했다.

“오늘 유치원에서 카레밥 먹었는데 조금 매웠어요오.”

아, 유진이 옷에 묻은 얼룩이 카레 소스였구나.

“맛은 어땠어?”

“진짜, 진짜 맛있어요오! 저 두 번이나 먹었어요.”

규모가 작은 학교에 들어선 급식실.

영양사를 고용하고, 근거리 농가 주부 몇을 조리사로 채용했다. 진혁의 의견에 따라 사전 공모 후 진행했기에 모두 자격을 갖추고 지원했다고.

“음음-, 있잖아요. 겨울방학 때 우리 학교 이 층으로 만든대요오.”

“응. 정말 잘됐어.”

학생 수가 늘었고, 방과후 돌봄 교실 운영을 위해 어동초등학교는 증축을 할 예정이다.

예전처럼 폐교되는 일 없이, 오빠가 졸업한 학교를 유진이도 졸업하고, 정문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것이다.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오겠지. 시간보다 빠른 건 없으니까.

방앗간에 도착해 곡창에서 소란을 피우는 참새떼를 구경하며 유진이가 호흡을 다스릴 시간을 주었다. 쉬지 않고 운동하는 행위는 단순반복노동만큼이나 지겨운 일이다. 쉽게 질리는 아이들의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잠깐의 휴식은 필수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맛을 다시는 동생을 위해, 진혁은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졌다.

“짜잔-.”

“오아-! 피크닉이다!”

“잠깐만, 오빠가 빨대 꽂아줄게.”

갈증 해소를 위한 음료도 제 때 공급해야 아이라는 엔진이 지치지 않는다.

이럴 땐 소풍 맛 사과 음료가 최고다.

가뭄에 시달리다 물을 빨아들이는 대지처럼, 유진이는 숨도 쉬지 않고 음료를 빨아들였다. 눈은 오빠에게 고정한 채.

동생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영원히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

아기였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오빠를 봐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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