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하지 않는 것 (5) >
***
양강욱은 월요일 새벽에 서울에서 내려와 손광연을 보좌했다. 피곤할 텐데도 대단한 체력이요, 투철한 프로 의식이었다.
2진에서 후방 지원 역만 소화해서 괜찮다는데, 그게 말처럼 간단한 일이었을까. 짐승 같은 괴력의 양강욱은 그렇다 치고, 범인이라면 절대 엄두를 내지 못할 임무였을 것이다. 살인적인 훈련을 버티고 또 버텨 끝내 초인적 스태미나를 획득한 SSS 요원들이었기에 감당할 수 있었으리라.
“자네는 2관왕을 했다지? 축하한다. 본 팀장은 별일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양강욱을 보며 진혁은 새삼 감탄했다. 그의 피지컬은 차치하고, 불법적인 일을 대하는 정서가 어떤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자괴감을 느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양강욱의 낯빛에서 복잡한 감정은 읽히지 않았다.
‘괜찮으신가?’
진혁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힐끔거리던 양강욱은, 현관에서 한유영과 포옹하는 손광연을 기다리며 뇌까렸다. 누구 들으라는 듯이.
“나쁜 놈들이었다. 국가와 사회에 암적인 존재들이지.”
전에 알던 양강욱이 아닌 듯했으나 차라리 잘 되었다.
일찌감치 전역한 덕분인지 몰라도 보다 유연한 사고를 펼치고 있으니. 그랬기에 아빠의 사업에도 조력자 역할을 하는 거겠지.
떠나는 차를 배웅하며 문득 안심이 되었다.
과도하게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던 마음은 어제까지로 충분하다는 생각과 함께.
‘삭도에 보너스 지급을 요청해야겠어.’
홍기준 또한 고려하고 있겠지만 관리자로서 진혁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사력을 다해 도망치려는 놈들을 몸으로 막고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과격한 일을 했을 터였다. 칼이나 쇠파이프 등 흉기를 든 덩치들을 제압하느라 힘이 이만저만 드는 게 아니었을 텐데, SSS가 괴물은 괴물이다.
험난했을 현장을 머릿속에 그려본 진혁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양강욱이 일찍 내려온 덕분에 더욱 환해진 얼굴로 출근하는 아빠를 볼 수 있었으니.
안전에 있어서는 명현우로 충분하다지만 양강욱의 존재는 손광연에게 경호원 이상의 위치였다. 경영지원과장보다 양강욱과 업무를 논의할 때가 더 많지 않던가.
등교를 위해 자전거에 오르며, 진혁은 엊저녁 바둑을 두며 아빠와 나눴던 대화 중 양강욱을 언급한 내용을 상기했다.
*
“곰 팀장은 내가 곰 이사님으로 만들 거야.”
손광연은 양강욱이 힘에 부쳐 현업에서 은퇴할 때가 되면 제너럴 팜의 임원으로 모시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반드시 필요한 인재라면 조기에 스카우트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진혁은 의아했다.
“그냥 지금 채용하셔도 되지 않아요?”
그리 물었을 때 손광연은 천길룡을 흉내 낸듯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오호오-, 이런. 아들아, 넌 아직 멀었구나.”
“예······?”
갑자기 기분 나빠지려고 하네.
바둑, 장기 한 판을 못 이기고 걸핏하면 집에 일거리를 들고 와서 아들에게 떠넘기는 냥반이 누구더러 멀었대?
큰맘 먹고 한 수 가르쳐준다는 듯, 손광연이 얼굴을 들이대고 속삭였다.
“지금 채용하면 기준이 놈이 주던 월급을 아빠가 줘야 하잖니. 곰 팀장이 비밀이라며 말은 안 해주는데 꽤 많이 받는 눈치야. 게다가 세인에서는 차도 주고 집도 줬잖아. 아낄 수 있는 건 아껴야 하지 않겠냐?”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나빠지려던 기분이 젖산으로 변했다.
피로감이 몰려왔다는 뜻이다.
아빠의 잔머리는 진혁이 두 번, 세 번 회귀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빠는 팔색조 같네요······.”
“와하하! 역시 우리 아들이 아빠를 알아주는구나!”
진혁이 보기에도 아빠가 가진 재주가 많으니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한 속뜻도 모르고 좋아하니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원뜻은 차치하고, 대범하고 진중하다가도 한없이 가볍고 경망스러워지는 등 변신에 능한 아빠에게는 정말 팔색조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용돈 줄까?”
“감사합니다, 팔색조 아버님.”
역시, 속뜻은 알려드리지 않는 게 좋겠지.
백화점에서 동생들 장난감 사느라 주머니도 가벼워졌는데, 다시 채우려면 손금이 닳도록 손바닥을 비벼야 한다.
손진혁도 그렇게 사회화 과정을 밟아 갔다.
***
양강욱보다 하루 늦게 내려온 문석일은 학교에 다녀온 진혁과 나란히 평상에 걸터앉았다.
함께 수로변을 따라 조깅을 하고, 마당에서 등목을 하고, 단단한 복숭아를 따 먹고, 끝물 수박을 먹고.
‘이제 이게 익숙해.’
어둠 속에 숨어 피 냄새를 쫓던 삶은 그 죄업이 영혼에 새겨져 영원히 씻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각인이란 그런 것일 테니.
그런데 이제는 자신도 보통 사람처럼 살 수 있다는 기대와 만족감이 동시에 들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생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사람 때문일까, 환경 때문일까.
전투화를 빼앗아 간 천길룡 어르신이 그런 말을 했다.
- “마음먹기 나름이니라. 쉽지 않아 그렇지. 세상 모든 젊은 놈들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며 이성적이라 생각하지. 헌데, 결국은 대가리의 명령을 따르기보다는 꼴리는 대로 살지 않더냐. 대가리보다는 주먹이나 좆을 쓰지 않느냐 말이다. 꼴리는 게 잘못이라는 게 아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말이다. 헌데 지 좆대로 살면서 꼴같잖게 지성인인지 건성인인지 흉내 내니 어찌 같잖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문석일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우연히 산책을 하며 담소를 나누다 뜬금없이 나온 화두였다. 그렇다 해도 마음에 그늘이 있는 사람이 어떤 말인들 쉽게 넘길 수 있을까.
-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더냐? 그래도 말이다, 사지 멀쩡한 놈이 못 할 일도 없는 게여.”
계절과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악의 구분은 옳고 그름이 아니니 과거의 선택 때문에 스스로를 옥죄지 말라는 말과 함께.
- “배우지 못해서인지 어르신 말씀이 어렵습니다.”
- “꼴값하고 자빠졌네. 다 알아들었으면서 겸양 떨 거 없느니. 배운 놈이 똑똑하다고 누가 그러더냐? 한국대 나온 병신이 지천에 깔린 게 이 나라여-. 저 하바드인지 옥토퍼스인지 나오면 현인이고 군자인 줄 아느냐? 교수 나부랭이들이 똑똑한 종자들인 줄 알어? 놈들 중 편하게 벌어먹고 싶어서 마음에도 없는 공부한 놈 잡아가라고 차사에게 시켜볼까? 하루아침에 몇 놈이나 뒈지는지 함 볼쳐?”
천길룡 앞에서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한 문석일의 불찰이었다. 그는 두 시간 내내 고막 테러를 당했다.
- “변하지 않는 건 없는 벱이다. 민석랑이 네놈도 변할 수 있지. 암만.”
이름은 좀 제대로 불러주시면 좋으련만.
그래도 건진 게 있다면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이겠지. 이미 그걸 경험 중이고.
‘망둥어 잡아다 드려야겠다.’
세상의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살았는데, 여기 오니 모두가 품어주고 누구 하나 내 편 아닌 사람이 없다.
츄웁-.
수박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신문을 읽는 진혁을 곁눈질했다.
‘하루 늦게 내려온 이유는 이 녀석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문석일은 홍기준, 정상태와 더불어 뒷일을 처리하고 왔다.
함구하라거나 다른 당부가 없던 홍기준이었기에 문석일의 고민은 클 수밖에 없었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으니. 신뢰 표시가 반가운 것과 별개로, 명령대로 움직이는 게 익숙한 삶에 위임이라는 자유는 부담스러웠다.
허휴-.
저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
헤휴-.
평상 밑에서 개껌을 뜯던 장군이도 덩달아 한숨을 쉬었다.
야, 따라하지 마.
개가 저러니 놀리는 것처럼 보인다.
문석일은 뒷발로 장군이를 툭- 쳤다.
으르르-.
장군이가 이빨을 드러냈다.
아랫것이 감히! 이런 표정이다.
“장군아, 워워-.”
역시 장군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진혁뿐이었다.
언제 으르렁거렸냐는 듯, 장군이는 이빨을 숨기고 눈동자로만 문석일을 욕했다.
“무슨 걱정 있으세요?”
문석일의 한숨을 놓치지 않은 진혁이 신문에 눈을 둔 채 물었다.
“아니, 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예전 같았다면 보고계통 상위에 있는 인물이니 바로 즉시 보고를 했을 텐데, 문석일은 수박을 물고 눈을 굴렸다.
진혁이 문석일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여전히 신문을 훑으면서였다.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안 하는 게 좋대요.”
어린 녀석이 늙은이 같은 말을 곧잘 한다.
문석일은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수박만 우물거렸다. 끝물이라는데 참 다네, 달어.
*
할까말까 고민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쯥-. 진혁은 제가 뱉어놓고도 생소한 어감에 입맛을 다셨다.
‘나는 고민할 틈도 없이 살았지.’
와삭와삭 수박 먹는 소리, 까득- 아드득- 찹찹- 개껌 긁는 소리를 음악 삼아 신문지만 넘겼다.
어떤 뉴스에도 적송건설이나 뉴보스파에 대한 소식은 없었다. 재공사를 알린 성구대교 통제로 시민 불편이 가중된다는 소식이 가장 많았는데, 사전 안내 기간이 짧아 우회로를 찾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사전 안내를 했다면 시민이 불편하지 않았을까요?”
“글쎄, 내가 생각하기로는 아니야. 운전자들은 통제 직전까지 그 다리를 이용했겠지. 그게 사람이니까.”
문석일은 확신이 없으면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 진혁도 그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다.
안내 기간이 길었다면 그 시간에 우회로를 찾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가정이지만 10%도 되지 않을 거라는 조사 결과가 이미 나와 있었다. 다른 여러 유사 사례를 토대로 유추했으니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삼촌 말대로 사람은 안 변하잖아.’
인간은 성격이든, 단체 행동이든 이익 변화가 눈앞에 닥치기 전에는 크게 고민하지 않는 습성을 지닌 동물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과거 진혁은 사소한 일부터 중요한 일까지, 집단이 보이는 패턴을 아마추어리즘으로 정의했었다. 1분 1초를 계획하고 관리하며 살던 일 중독자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미리 준비하는 10% 인구 중에서 줄이고 또 줄여 프로가 나오는 걸 테지.
“이건 좀 의외네요.”
진혁이 다른 기사를 살피자, 문석일이 머리를 기울여 진혁이 읽던 지면을 살폈다.
재공사 기사에 덧붙여, 과적운행이 다수 적발되어 여의도의 한 건설자재 생산 업체와 운송업체가 동시에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는 기사가 사회면의 일부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웬일로 밥통들이 일을 좀 한 모양이다.”
그러게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풀렸네?’
다리 붕괴 사고만 막으려 했던 것인데 전혀 알지 못하던 분야에까지 불똥이 튀지 않았나. 오히려 의도한 것 이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다.
어차피 예전에 비해 크게 변한 세상이지만, 전혀 새로운 세상이 되었어도 신기한 건 신기한 거다.
“업체나 시민단체에서 반발이 클 거라는 전망이야. 그래서 여기저기 시끄러워지려나 봐.”
“필요한 일이고 적법하게 처리했는데도 그렇게 나오는 건 이익 때문일까요?”
“그렇겠지. 내가 뭐라 평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
정부에 대한 원성이 자자해지자, 관리 감독 소홀로 건설교통부 장관이 실각하고 정동준 차관이 장관에 내정되었다는 후속 보도가 있었지만 진혁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어차피 회전문이고 꼬리 자르기 아닌감. 옛날엔 그랬잖아.’
어쨌든 계획했던 일이 대체로 잘 처리되어 다행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지면을 넘긴 진혁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진혁은 두 개 지면을 전부 할애한 특집 기사를 재빨리 훑었다.
「SI스포츠, 중등부 육상 유망주와 파격 계약. 체육계 최초.」
- SI체육재단 산하 SI스포츠매니지먼트(이하 SI스포츠), 중등부 육상 단거리 한국 기록 보유자와 전속 후원 계약 체결.
- 閔勇珞 선임 매니저, “연예인처럼 스포츠 스타 뒷받침하는 선진 시스템의 선구자 될 것.”
「SI스포츠, 유망주 발굴 사업 지속할 것. 비인기 종목 육성에 중점.」
언제 찍었는지 경기를 마친 진혁이 허리에 손을 얹고 웃는 사진도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이 사진 때문에 학교에서 난리가 났지.’
교사들도, 학생들도 악수 한 번 하자며 3학년 1반을 찾아왔더랬다.
그 중엔 회장 선거 때 다른 후보를 찍은 사람들도 많지 않았을까?
느닷없이 고개를 드는 하찮은 부아에 진혁이 실소를 머금었다.
살다 살다 별게 다 서운하네.
신문에 자그마하게 사진이 걸릴 거라는 말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유세라에게 자그마하다는 기준은 진혁과 많이 다른 듯했다. 신문지 1/2 크기였으니까.
‘스케일 무엇.’
그래도 활짝 웃는 제 모습이 싫지 않아 내심 기분은 괜찮았다.
경기를 마친 진혁의 미소는 초등학교 졸업식 날 학교 정문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의 웃음과 닮아 있었다.
부부가 짜기라도 했는지, 다른 지면에는 홍기준의 칼럼도 실려 있었다.
「칼럼, 〈잘 키운 선수 한 명, 외교관 100名보다 뛰어난 外交使節로 활약하는 세상 온다〉 기고자 – 洪基俊(세인그룹 부회장)」
칼럼으로 힘을 보탠 걸 보면, 다른 기사도 홍기준의 지원과 조언에 크게 영향을 받았을 거라 판단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유세라의 인터뷰 사진도 진혁의 사진만큼이나 크게 붙었다.
어찌나 행복하게 웃는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진의 미소와 비슷했다.
‘이빨 쏟아지겠어요.’
아무리 담담한 시선으로 보려 해도 불가능한 사람이 있다.
진혁에게는 아빠 손광연이 그랬고, 유세라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애정이 없다는 건 아니다.
하아-.
한숨이 나올 뿐.
유세라도, 아빠도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했다.
유세라에 대해서는 홍기준과 아빠가 증언했고, 아빠에 대해서는 홍기준과 엄마가 증언했다.
사람이 확 변했다는 게 아니라,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았다고.
시나브로 변했다며, 홍기준은 그 계기가 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갸웃거렸다.
‘기준 아저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처음엔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사람인데, 이제는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언론, 정부 가릴 것 없이 나라를 뒤흔들고 통제할 힘을 쥔 권력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아-, 마지막 기사 제목을 읽고는 전두엽이 띵해졌다.
‘아, 이 기사는 기준 아저씨도 어쩌지 못했나 봐······.’
얼음을 이마에 댄 듯한 통각에, 의도하기도 전에 진혁의 손이 저절로 이마를 짚었다.
- 劉勢灕 이사장, “富나 名聲이 아닌 名譽를 추구, 내 能力은 빼어난 미모에 가려져···.”
······자기 입으로 빼어난 미모 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