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73화 (173/338)

< 변하지 않는 것 (4) >

***

만나면 가장 먼저 달려오던 장군이인데, 얌전히 앉아서 지켜보는 모습이 생소했다. 개도 철이 드나?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 유진이 많이 놀랐구나.’

오빠를 안고 부르르 떠는 동생을 보며 진혁은 뭔가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아이고, 이 녀석 급속충전하네.’

진혁의 몸에도 초음파 세척통의 모래알처럼 진동이 느껴졌다.

컨디션에 영향을 미칠 수준은 아니었기에 진혁은 동생이 하는 대로 두었다. 어차피 유진이가 누굴 해칠 사람도 아닌 데다, 자기도 모르게 하는 일일 테니.

그저 오빠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동생의 뒷머리를 쓰다듬어 애정을 표했다.

‘실컷 울어라.’

*

아이들은 정말 잠시만 떨어져도 크는 걸까.

유진이는 며칠 사이 더 자란 듯했다.

키도, 말하는 것과 행동도.

“아이고, 우리 유진이 많이 놀랬겠다.”

“그럭저럭 버틸만했어요.”

“그랬구나······.”

진혁은 사건이 사람을 크게 만든다는 말에 이견을 두지 않는다.

멧돼지 사건 때도 유진이는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지금은 아예 어른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쓰고 있다. 음성과 말투만 아이일 뿐이다.

“-막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오빠가 올 줄 알았어요.”

“그랬구나······.”

종알종알-.

계속 오빠 생각이 났다고, 오빠가 머릿속에 계속 말을 걸었다고 했다. 그래서 금세 올 거라 믿었다는데, 달리 맞장구 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진이는 기억력이 좋아서 생생하게 기억하는구나. 나는 점점 멍청해지는데.’

자동차 에어컨 바람을 쬐며 꾸벅꾸벅 졸았을 뿐, 달리 한 게 없는데 이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저렇게도 신난 동생인데 산통 깰 일 있나······.

조곤조곤 순서대로 나열하는 유진이의 설명을 들으며 안도하는 한편, 장군이와 부하견들이 동행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녀석들이 없었다면 어찌 됐을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고생했다, 이놈들.”

진혁은 한 마리씩 양 볼에 찰떡을 만들어 주물렀다.

이렇게 해주면 개녀석들은 신나서 혀를 더 길게 빼고 꼬리도 더 힘차게 흔들더라.

“유진아, 어른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쩌지 못해. 앞으로는 오빠나 삼촌들 없이 위험한 곳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혼내는 듯한 당부를 해서인지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유진이 말투가 확 바뀐 것부터, 뭔가 하고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시무룩한 모습에 진혁은 갑갑증을 느꼈다.

그때 유진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배 만들어서 놀기로 했으면서······.”

진혁의 청력이 그 아쉬운 여운을 놓칠 리 없다.

‘아, 그런 약속을 했었지.’

유진이는 도대체 언제의 일까지 기억하는 걸까. 어린 시절의 사소한 기억이 거의 남지 않은 진혁에게는 동생이 진정 천재로 보였다. 아니면 오빠와 한 약속이 중요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거나.

“우리 유진이, 튜브로는 안 되는 거야?”

실내수영장이 있으니 계절과 날씨에 구애 없이 수영도 하고, 지치면 튜브를 타고 놀았는데도 배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었다. 이런 것도 어린아이의 로망이려나······?

“튜브랑 배는 다르잖아요.”

“그렇지. 그건 그런데-.”

“그런데 이제 괜찮아요. 오늘 배 타봤는데 재미없었어요. 배가 너무 작아서 뱃속이 간지러웠어요-.”

늘 고분고분 듣던 동생인데, 웬일로 유진이가 오빠의 말을 앞섰다.

쪽배를 손으로 만졌더니 너무 뜨겁더라, 내가 원한 건 나무배였는데 나무가 아니더라. 흙집 창고 문에 덧댄 철판과 비슷하더라.

유진이는 기분이 풀렸는지 종알종알 감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함께 걷던 이동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보조를 맞췄다.

진혁은 한쪽 무릎을 꿇고 유진이의 두 어깨를 감싸쥐었다. 변함없는 미소와 함께였다.

“오늘 왜 재미없었는지 알아?”

“왜요?”

한층 밝아진 얼굴로 유진이가 오빠와 눈을 맞췄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오빠의 다음 말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오빠가 없었으니까. 오빠랑 배 만들어서 같이 타기로 했는데 유진이만 탄 거잖아.”

“아-.”

이럴 땐 정말 엄마와 표정이 비슷하다.

엄마는 진혁이 뭔가 해박하게 설명할 때마다 처음 접한 맛난 음식을 먹은 듯한 반응을 보였는데, 유진이는 그런 엄마를 많이도 닮았다.

“오빠가 돈 벌어서 배 사줄게.”

“사는 건 재미 없는데. 만드는 게 좋은데······.”

“그래, 만들자.”

오빠에게 완전히 설득된 듯한 유진이를 진혁이 다정하게 타일렀다.

“배 만드는 건 종이학을 접거나 팽이를 깎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거야. 오빠도 많이 알아봐야 하고.”

막말로 통나무 구해다 속을 파낸다고 배가 되는 건 아니잖아.

설계도 해야 하고 건조 기술도 익혀야 하지 않을까. 장군이를 먼저 태워 안전성 검사도 해야 하고, 몇 명까지 승선이 가능한지 모래포대로 실험도 필요할 듯했다.

진혁은 유진이의 기분도 풀어주고 동생과의 약속도 지키고 싶었다.

“유진이 말대로 돈 주고 사는 건 재미없잖아, 그치? 오빠한테 시간을 주면 멋지게 배 만들어서 유진이한테 선물할게.”

“히이-.”

다행히 유진이는 오빠의 약속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착한 동생이었다.

기특하게도 격렬히 끄덕이는 고개로 만족감을 표했다.

“집에 가면 유진이 선물 있어. 오빠가 서울에서 사온 거야.”

“뭔데요? 아니다! 말하지 마세요. 직접 볼래요.”

와-, 좋겠다. 나는 형들 거 물려받기만 하는데. 이동호가 부럽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이동호는 손유진에게 나이 차 많은 오빠가 있다는 걸 항상 부러워했다. 어른보다 크고 힘도 세 보이는데, 동생을 괴롭히지 않는 점이 가장 부러웠다고. 분유가 어쨌다고 하던데 나중에는 함께 먹었고, 인형 배를 터뜨렸다는데 동생을 때린 건 아니잖아. 결국 인형도 오빠가 꿰맸다고 했다.

제 형들은 동생을 구박하고 먹을 것을 빼앗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같은 놈들인데 손유진의 오빠는 램프의 지니 같다.

“동호 선물도 사왔어.”

와-, 손유진은 진짜 좋겠다.

동생 친구까지 챙기는 부자 오빠를 두어서.

그래서 이동호는 손유진이 더 부럽다.

“히히. 얼른 가요.”

유진이가 오빠 손을 잡아끌 때였다.

“유진이 아까 울었는데 그렇게 웃으면-.”

“그냥 오빠 보니까 눈물이 났어요.”

아니, 뭐 울 수는 있지.

“울다 웃으면 똥꼬에 털 나는- 악!”

유진이는 오빠 배에 정권을 지르고는 터벅터벅 앞서 걸었다.

‘아니, 쟤가······.’

수정이랑 놀더니 닮아가네.

2년 전, 1년 전, 그리고 한 달 전과 비교하면 동생이 많이도 변했다.

***

집에 오니 유모차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요즘 곽향림에게 뜨개질을 가르친다고 하던데, 정원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조일헌의 집에 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른에게 불필요한 걱정을 끼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굳이 바다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아찌곰아, 오늘 바다에 갔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냐면-.”

유진이가 아찌곰에게 모험담을 늘어놓는 동안 이동호 먼저 씻기기로 했다.

“좀 부끄럽네요.”

욕실에서 홀라당 벗은 이동호가 두 손으로 고추를 가리고 발을 동동거렸다.

시골 아이들은 여덟 살이 되어도 벌거벗고 뛰어다니는데, 서울에서 온 이동호는 가족 이외의 사람 앞에서 알몸을 노출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운 듯했다.

“그래도 씻고 가야 엄마한테 혼나지 않을걸?”

이동호의 엄마가 아이들을 얼마나 끔찍이 살피는지 아는 진혁의 한마디에 이동호는 바로 진압되었다. 그나마 말귀를 알아듣는 녀석이어서 다행이다.

“비누 냄새가 좋네요.”

“샴푸가 하얀색이네요. 우리 집은 초록색인데.”

“바디 샤워 우리 집에 있는 거보다 거품이 풍부하네요.”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요.”

“타올로 밀면 따가워요.”

“치카는 집에 가서 하면 안 될까요?”

“저기-, 손유진? 오빠에게 치카는 시키지 말아달라고 나 대신 말해주면 안 될까?”

허이구, 그놈 징그럽게 말 많네.

진혁은 입술을 깨물어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았다.

‘나도 이 나이 땐 수다스러웠다고 했지.’

온갖 허풍을 떨고 헛소리를 하며 돌아다녔다는데, 기억나는 게 없으니 왠지 아쉬웠다. 한번 떠난 동심의 기억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 걸까. 어쩌면 흑역사가 떠오르지 않아 다행이라고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육아는 정말 힘든 일이구나.’

이동호를 씻겨 내보내고 바닷물에 절여진 옷을 빨기 시작했다.

금메달은 친구들에게 선물했고, 몸에 남은 건 여독인데 집에 오니 가사 노동과 육아가 기다릴 줄이야.

그래도 세탁기보다 손으로 빠는 시간이 더 적게 걸릴 터였다.

꽉 짠 옷과 양말, 모자까지 짤순이에 넣고 10분을 세팅했다.

세탁기가 좋아져서 짤순이를 사용할 일이 없었는데, 그래도 탈수 기능만 사용할 때는 짤순이만 한 게 또 없다. 짤순이를 대체할 기계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나오기나 하려나?

‘얼씨구?’

지치고 피곤했을 터였다.

이동호는 선풍기 바람 앞에서 대자로 뻗어 잠들어 있었다. 알몸으로 그러는 걸 보면 부끄럽다는 것도 말뿐이었나 보다. 베개로 머리를 받치고, 수건 한 장으로 배부터 허벅지까지 덮어 주었다. 아이라도 프라이버시는 소중하니까.

“유진아, 목욕하자-.”

아찌곰에 업히듯 인형을 끌어안고 소파에 기대어 꾸벅꾸벅 조는 유진이를 씻길 차례다.

더운 날 갯바람을 쐬고 땀까지 흘렸으니 저대로 잠들면 피로가 풀리지 않을 게 뻔했다.

“물이 차가워요. 이동호도 찬물로 씻었어요?”

“응.”

“네.”

이동호 그 녀석도 제법인데? 그리 중얼거리는 유진이 얼굴에서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꺄아아아-!”

“휘이-, 우리 유진이 시원하겠다.”

머리에 쏟아지는 찬물에 꺅꺅거리고 발을 구르면서도 유진이는 잘 이겨냈다.

나중에는 조막만 한 손으로 연신 얼굴을 비비며 냉수를 만끽하는 의연함도 보여주었다.

‘이제야 여름이 끝나려는 모양이야.’

진혁은 손끝에 느껴지는 냉수 온도에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했다. 계절을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지하수 온도는 바람 냄새만큼이나 쓸만한 계절 변화의 바로미터가 된다. 뭐, 이것도 시골 사람만이 습득할 수 있는 스킬이려나.

‘물이 많이 차다. 우리 유진이 춥겠네.’

나 샤워할 때는 보일러 틀어야겠다.

근육 뭉치면 곤란해.

*

뜨거운 햇볕 아래 바삭하게 마른 옷을 입히고, 가방도 깨끗하게 닦았다.

그리 챙기고 이동호를 집까지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한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월워-! 월어어올-.

장군이가 저렇게 짖는 건 낯선 사람이 찾아왔을 때다.

혼자 있을 때는 도둑이 지나다녀도 짖지 않던 녀석이, 부하들이 생기니 기세가 올라서 저런다.

“아이고, 놀래라! 계세요? 동호야아-.”

장군이 짖는 소리에 놀란 여인이 마당 한복판에 멈춰 서서 집을 기웃거렸다.

이동호의 엄마였다.

동네에서 가장 크고 높이 솟은 집, 멀리 다른 동네에서 사는 사람이라도 찾아오는 일이 어렵진 않을 거다. 멀리 어동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교회 목사도 전도하겠다며 종종 찾아왔으니까. 무슨 전도를 한 집만 콕 집어서 오는지.

“더우실 텐데 시원한 거 드시고 가세요.”

진혁은 이동호의 엄마에게 거실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하고 시원한 주스를 대접했다.

“오늘 일이 좀 있었대요-.”

바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이들이 두서없이 하는 말에 이동호의 엄마가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여, 진혁이 나서서 유진이에게 들은 대로 과장하지 않고 설명했다. 어쨌거나 이동호의 보호자 아닌가. 비난이 오더라도 확실히 알려두는 편이 후일 오해를 낳는 것보다 나을 듯했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개들과 어울리는 사이, 이동호의 엄마는 놀라기도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하며 끝까지 경청했다.

“잘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잘 넘어간 듯했다.

이동호의 등짝을 두어 번 때리긴 했으나 손길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뽀샤시하고 명랑한 아들의 상태만큼 엄마가 안도하는 지점도 없으리라. 진혁은 아이를 씻기고 옷을 세탁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이고-, 우리 유진이 많이 놀랬지?”

저렇게 유진이를 안아 다독이고 이동호를 혼내지 않는 모습 때문이 아니더라도, 엄마라는 존재의 밝은 미소가 행위에 확신을 보탰다.

“이동호, 내일 보자.”

“손유진도 잘 있어. 형아, 안녕히 계세요.”

“그래, 동호야. 조심해서 가고 또 놀러 와.”

고급스럽게 포장된 선물을 품에 안고 꾸벅 허리를 숙인 이동호는 신난 걸음으로 엄마를 따랐다.

재잘거리며 떠나는 엄마와 아들의 뒷모습을 보는 진혁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나도 어릴 땐 엄마랑 저렇게 마실다녔던 것 같다.’

엄마 손을 잡고, 엄마를 올려다보며 헛소리를 했겠지.

그럴 때마다 엄마는 웃으며 어린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졌을 테고.

아! 이제는 흙집 마당에 숨겨둔 유진이 선물을 보여줄 차례다.

‘좋아해야 할 텐데.’

이동호도 선물이 마음에 들기를 바랐다.

집에 도착하면 형들 앞에서 자랑스레 선물 개봉식을 할 테지. 형들이 갖지 못한 광선총을 가지고 얼마나 좋아할까. 김호진 몫은 조만간 들러서 전해야겠다.

“으닷! 아이고오- 삭신이야! 하루가 엄청 길구나!”

이제 씻고 유진이를 새 자전거에 태워서 엄마 마중하러······ 응?

홀가분하게 기지개를 켜다가 얌전히 앉은 장군이와 눈이 마주쳤다. 장군이가 앞발을 다소곳이 모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예쁜 짓을 할 때는 바라는 게 있을 때다.

아, 우리 장군이. 얼마나 똑똑한지 서울에서 사온 선물을 내놓으라는 눈빛 아닌가.

유진이에 앞서 장군이 선물을 먼저 증정하기로 결정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어디 보자, 큰일한 우리 장군이 호주산 한우로 만든 맛있는 간식부터······ 얼라리요?”

덜거덕-.

이 소리가 아닙니다.

덜거덕-.

이 소리도 아닙니다.

포장된 선물을 하나씩 흔들어보던 진혁은 순간 얼굴에서 피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맙소사.

‘광선총이 왜 전부 여기 있냐.’

이동호 이놈, 개껌 들고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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