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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71화 (171/338)

< 변하지 않는 것 (2) >

“오와-, 정말 신기하네요.”

“허우야-. 이게 워치게······ 이런다니?”

위로 형이 둘이나 있어 일찌감치 다양한 장난감을 접한 이동호가 처음 보는 장난감에 감탄했다.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하는 늦둥이 김호진에게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상은 넓고 장난감은 많다더니, 이런 제품이 있었어?

장난감 뷰파인더에 눈을 댄 김호진과 이동호는 세상 황홀한 표정으로 연신 셔터를 눌렀다.

“워어-, 독수리를 워치게 찍었댜? 우덜 동네는 소리개두 겁나 높이 떠서 안 뵈는디이-.”

“나는 배가 보이네요. 바다가 커요.”

배?

주둥이로 땅을 파다가 사람이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는 장군이처럼 손유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배애-?’

언젠가 오빠와 약속했는데?

아마 손유진이 지금보다 더 어릴 때였던 것 같은데, 분명히 오빠가 그런 약속을 했어. 배 만들어서 수로에서 타기로.

그런데 오빠는 바쁘고 얼굴 보기도 힘들다.

“배 타고 싶다요.”

손유진네 집에는 배가 없다.

달콤하고 아삭한 배가 열리는 배나무도 있고, 배 나온 아찌곰과 민용락 삼촌도 있지만 타는 배는 없다.

“우리 집이 가먼 배 있는디. 갈쳐?”

아, 김호진네 아빠는 겨울마다 작은 배를 타고 바다 물길을 건너 뭘 긁는다고 했다. 꽤 비싸게 팔리는 거라서 열심히 일한 김호진 아빠 덕분에 집도 2층으로 올렸다고. 감태라고 들은 것 같다. 감태로 만든 김에 밥을 싸서 간장 콕- 찍어 먹으면 정말 맛있어.

“손유진이 가면 나도 갈래요.”

“어른들 없이 놀면 위험하다요.”

오빠는 서울에, 아빠는 회사에. 늘 손유진을 보호하던 SSS 아지찌와 삼촌들도 서울에 일이 있다며 두 명만 남기고 떠났다.

“에이-, 위험허게 안 놀먼 되지이-. 남자가 둘이나 있는디 뭐가 걱정여어-?”

그런가······?

오빠처럼 키가 크지도, 힘이 세지도 않은 녀석들이 남자 행세를 하려 드는 게 하찮지만 왠지 그럴듯하게 들렸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사람이란 제가 듣고 싶어 하는 말에 마음의 귀가 쏠리기 마련이니까.

어른들은 위험하다며 아이 혼자 바닷가에 가지 못하게 하는데, 오늘이 좋은 기회 아닐까?

“가자요!”

모험이다!

대장 손유진이 외치자, 유치원 가방에 카메라 장난감을 집어넣은 두 친구가 토마토주스를 급히 들이켰다.

월!

손왕왕이 놀아주지 않아 심심했던 장군이도 꼬리가 떨어져라 돌렸다.

“장군이도 가자요!”

월-! 헤헤헥-.

대장견이 벌떡 일어서자 부하견들도 후다닥 모여들었다.

그렇게, 세 명의 유치원생과 네 마리 개가 땡볕을 이고 안마을 바닷가로 향했다.

두통을 유발하는 더위였으나 아이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들떴고, 동료와 함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힘이 넘쳤다.

*

“워어이-, 물 많이 들어왔는디?”

찰랑거리는 바다를 보며 김호진이 늙수그레한 감탄을 뱉었다.

“내일이 그믐 사리다요.”

“손유진이 그걸 워치케 알어?”

바다에 붙어사는 김호진도 모르는 걸 알다니, 역시 똑똑한 녀석이잖여.

“아빠가 달력에 써놨다요.”

이동호의 눈과 입이 동그랗게 변했다.

“우리 친구는 글자도 읽을 수 있나요?”

“읽을 줄만 안다요. 그리지는 못한다요.”

그것만 해도 어디냐.

김호진과 이동호의 눈이 존경심으로 빛났다. 역시 대장이잖아.

이동호도 글을 배우고 싶어 큰형에게 졸랐으나 학교에 가면 다 배운다고 거부당했더랬다. 큰형은 귀찮아서 그런 거겠지만, 어릴 때는 뛰어노는 게 좋다는 엄마 때문에 더 조르지 못했다.

“물이 많아서 배까지 못 간다요.”

“싯이서 땡겨 보먼 안 될라나?”

그리 말한 김호진이 밧줄을 당겼다.

이동호가 거들었고, 보다 못한 손유진도 힘을 보탰다.

모터도 달리지 않고 함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배였다. 세 명의 유치원생이 당기니 서서히 뭍으로 다가왔다. 물살을 점잖게 가르며 미끄러지듯 끌려오는 모양새가 마치 물방개를 떠올리게 했다.

“아야야-, 손도 아프고 무척 힘드네요.”

“덥다요. 헥헥-.”

“다 됐어!”

드디어 배가 손에 잡히는 곳까지 왔을 때, 꼬맹이들은 꺅꺅- 환호성을 질렀다. 힘을 합쳐 밧줄을 당긴 것뿐인데, 이조차도 유치원생들에게는 해전에 승리한 해적이 된 듯 짜릿한 모험이었다.

“내라 잡구 있을 테니께, 누덜 먼저 타아-.”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김호진이 뱃전을 잡자 이동호가 어기적거리며 배에 올랐고, 손유진은 폴짝 뛰어올랐다.

이동호가 내민 손을 잡고 김호진이 배에 올랐을 때였다.

“어어?”

구속력을 잃은 배가 스르르 미끄러지며 바다로 향했다.

이럴 땐 용감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임시 선장 김호진이 선원 통제에 나섰다.

“살짝허니 앉어 봐, 앉어-.”

모험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단 밧줄에 묶여 있으니 배가 먼바다로 흘러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작은 배는 아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작은 물살이 일렁일 때마다 좌우로 출렁였고, 용골이 없어 바닥이 편평한 탓에 움직이는 방향도 일정하지 않았다. 배의 움직임을 따라 아이들의 가슴은 철렁댔고, 눈에는 두려움이 서렸다.

“어어? 너무 많이 움직인다요!”

“이이-, 갠잖여. 쫌만 놀다 살살 땡겨서 나가먼 되지-.”

아, 그런가?

그래도 좀 무서운데.

월월!

멀리 물가에서 배를 향해 짖는 장군이가 보였지만, 손유진은 김호진의 말을 믿기로 했다. 모험에서 경험자의 한마디 말만큼 의지가 되는 것도 없고, 한 번 당겨봤으니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뱃놀이는 재미가 없네요. 우리 형이 만든 배보다는 큰데······.”

이동호네 삼 형제는 시골에 이사 들어온 기념으로 뱃놀이를 계획했었다. 손진혁의 설득으로 물거품이 되었던 그 뱃놀이였다. 그때 그 대야로 뱃놀이를 했다면 보나마나 뒤집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요. 내가 원한 건 이런 배가 아니다요.”

뱃놀이라고 해서 왔건만, 돛대도, 삿대도 없이 정처 없이 흔들리니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손유진의 취향에 어울리지 않았다.

승선감은 어떻고.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다리를 가누기 힘들었다. 물은 탁해서 바닷속이 보이지 않고, 해를 가려주는 그늘이 없으니 갈수록 더워지고 금세 지쳤다.

“우리 친구, 여기는 얼마나 깊을까요? 물속이 안 보여서 모르겠네요.”

“우덜 키보담 깊지. 물이 이르케나 많이 들왔는디이-.”

“무섭다요. 이제 나가자요.”

대장의 제안에, 충분히 겁을 집어먹고 있던 김호진과 이동호가 뱃전으로 모였다.

땅에 발을 디딘 채 한 줄로 서서 당기는 건 쉬웠다. 좁지 않으니까.

그러나 밧줄은 뱃전에 묶였고 공간은 부족했다.

서로 밧줄을 당기려던 유치원생들이 뒤엉키며 발이 꼬였다.

“어어-?”

풍덩-!

***

누구나 타고나는 운명이 있다.

적어도 천길룡이 읽고 다루는 학문에서는 그렇다.

그래, 형 천기륭은 감정을 거세하고 학문으로 다루어야 이지로써 다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좆빠지게 공부한들 사람에게 마음이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이오, 이 영감탱아.’

천길룡은 형의 지론에 절반의 긍정만 표했다.

그래서 칠순을 넘기도록 곰방대로 머리통을 맞았지만.

“태어나기를 심장을 지닌 짐승으로 태어났거늘 어찌 감정을 배제할 수가 있을꼬-.”

누구나 타고나는 운명이 있으되, 천길룡은 그것을 운명이라 이름 지어진 그릇이라 여겼다. 혹자는 그 껍질을 깨 더 큰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오므려 닫아 좁은 세상으로 들어간다.

운과 때를 만난 용자는 그릇 없이 제가 가는 길을 곧 군자의 도로 만들어 만인이 흉내 내고 따르게 만든다. 군자의 흉내만 내도 준걸이라 했으니, 세상에는 그렇게 군자가 늘어나고, 그 기운에 힘입어 일월은 비틀대면서도 결국 옳은 방향을 찾는 것이다.

“어허허-. 나처럼.”

사사사-.

대나무숲에 한바탕 지랄 맞은 바람이 불었다.

천길룡의 자화자찬이 하찮게 보인 모양이다.

“썩어 문드러질 놈들 거두어 줬더니 못난 심사만 드러내누나-. 그렇게 못났으니 등선은 꿈이요, 대나무 귀신에 머무는 게여 이놈들아-.”

험-.

감정을 지우지 못하고 일희일비하니 형만큼의 신력을 내지 못하는 겐가?

아, 빌붙어 사는 귀신 주제에 나한테 맞장구 안 쳐주니 기분 나쁜 걸 어쩌라고. 지넥이나 유진이라는 놈은 어찌나 처세가 옳고 바른지 기분을 제대로 맞춰주거늘.

“휘이-, 날 한 번 좋은지고-.”

대나무숲에 들어서면 무더위 따위 남의 일이요, 땡볕은 오히려 고마운 존재였다. 태양의 빛이 그림자를 만드니 대숲의 정취가 한껏 살고, 양기가 바람을 정갈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꺅꺅-.

어디선가 꼬맹이들 노는 소리가 들렸다.

호오-?

천길룡의 오른쪽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안마을에는 꼬맹이랄 수 있는 아이가 한 명뿐인데 아이들이 잔치라도 벌인 듯 떠들썩하니 신기한 일이로다.

아이들 노는 모습을 먼 언덕에서 지켜보는 천길룡의 얼굴 주름이 인자하게 구부러졌다.

“오호호-, 하나는 유진이라는 놈이고, 하나는 서울 도령이로구먼.”

사아아-.

대나무숲이 한 차례 음산하게 흔들렸다.

‘뭐라?’

대나무숲 입주신 중 영력이 가장 뛰어난 창림이라는 차사였다.

서울 도령의 형에게서 떨어진 살이 그 동생 근처를 맴돈다고.

“참으로 뜬금없도다. 내 힘이 다 된 겐가? 그럴 까닭이 없을 터인데?”

양기 가득한 그믐에 살귀가 설친다고?

십 리 사방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천길룡은 의아할 따름이었다.

왜 아니겠나.

엊저녁만 해도 묘한 귀기에 바다로 나가 동네 청년 중 하나를 살렸는데.

그믐을 앞두고 붕장어를 낚겠다며 밤낚시에 나선 청년이었다.

그 청년을 살펴본 바, 안색이 창백하고 사지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체기가 있어 손가락을 따준 것이 전부였지만, 그대로 바닷가에 섰다면 언제 주저앉아 방조제 아래로 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 살이 떨어져 나간지가 언젠데 다시 달라붙는단 말이더냐? 실력이 그 모양이라 차사 짓도 제대로 못하고 이승에 남은 놈이.”

사아아-.

창림이 고하길, 변하지 않는 운명도 있다고 했다.

천길룡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잡혔다.

‘절대’라는 말을 신봉하지 않는 그로서는 변수라는 놈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으니.

‘혹 모르는 일이다. 내 친히 가볼까-.’

수호의 업을 알게 모르게 진혁에게 떠넘겼으나, 수호신이 자리를 비웠으니 전임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에잉-. 지넥이 놈만 자리를 비우면 잡귀들이 설친단 말여-.”

낮에는 비교적 잠잠한 잡귀도 사건이 벌어지면 자제력을 잃고 발광을 한다. 가령, 사람이 물에 빠지면 강하게 밑으로 끌어당긴다거나······. 낚시를 하다가 물에 빠졌는데 뭔가 물속에서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는 증언이 잦은 이유다.

엊그제는 육성찬네 집에서 한바탕 난리가 있었더랬다. 물론,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천길룡의 눈과 귀에만 그 소란이 잡혔다.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과 가축을 다스리는 구신이 한바탕 드잡이를 벌였는데, 서로 제 놈이 성주신의 오른팔이라 우기다가 싸움이 붙은 거다. 마당에서 시작한 놈들의 닭싸움은 닭장에서 조왕신이 모이통에 발이 걸려 넘어지며 승부가 갈렸다.

고요하던 닭장에서 닭이 갑자기 홰를 치고 뻑뻑거리고 울면, 집을 지키는 신들이 심술을 부리는 거라던 옛말이 현실화하는 순간이었다.

그 우스운 소동에 엄한 암탉이 쌍란을 낳았다. 참으로 하찮고도 하찮은 귀신들이다.

재미있었던 구경거리를 떠올리며 웃은 천길룡이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장군아아아!”

끼야아아아-!

애타게 외치는 손유진의 목소리가 대나무숲을 세차게 흔들었다.

가녀린 목소리였으나 대기를 거칠게 찢는 파공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 신화적 위압감에 천길룡이 급히 귀를 막았다.

구슬프고 처량한 귀곡성은 애교로, 천둥 치는 소리는 산이 뀌는 방귀라며 놀라지 않는 도인인데.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는다.

기운이 어찌나 드셌던지 영기를 머금은 대나무 이파리 수십 개가 꽃잎처럼 바닥에 내려앉았다.

차사 창림도 언제 젠체했냐는 듯 영을 움츠렸다.

“이게······, 뭔고?”

눈이 휘둥그레진 것도 잠시.

천길룡이 죽장을 버리고 날 듯 언덕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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