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하지 않는 것 >
***
“선생님, 차에 자전거도 실을 수 있을까요?”
“이이? 그러믄-. 말 혀 뭐혀? 봉고찬디 다 실리지.”
빨리 고향에 내려가 동생들을 보고 싶었다. 방학 때부터 훈련에 전국대회까지, 바깥 행사에 집중하느라 동생들과 어울리지 못한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역시 시간이라는 놈은 가족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의 칼을 휘두른다. 매일 듣는 목소리가 그나마 위로가 되어주지만 아무래도 직접 보고, 만지는 것에 비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오빠이자 형 아닌가. 백화점이 있는 도시에 나왔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 이병세에게 부탁해 백화점에 들렀다. 공주에서도 유진이의 부탁으로 장난감을 사다 주었지만 서울에서 사는 건 왠지 느낌이 다르니까.
오빠가 서울에 왔는데, 비단 구두는 아니더라도 예쁜 신발 정도는 유진이에게 안겨주고 싶었다.
‘백화점은 냄새부터 다르구나.’
염병택과 조슬찬은 옷을 구경한다며 여성복 코너로 향했다.
야, 이놈들아! 도대체 뭘 구경하려는 거냐?
······라고 핀잔하기에는 아이들을 따라가는 이병세의 실룩이는 대둔근이 너무 신나 보였다.
‘도랏맨.’
한숨을 내쉰 진혁은 유진이를 위한 샌들부터 사기로 했다.
진혁의 팔짱을 낀 유세라가 함께 걸었다.
“우리 백화점 가면 더 좋은 거 많은데. 멀지도 않고.”
“그 생각을 못했네요.”
그래도 서운한 기색 없이 함께 구경하는 유세라였다.
상냥하게 웃으며 저를 올려다보는 모습에 진혁은 입을 꾹 닫았다. 자꾸 누가 떠올라서.
유세라는 유세라.
진혁에게는 그냥 아는 어른인데 타인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백화점 고위 관리자로 보이는 중년남성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에, 진혁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과 함께 걷는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유세라 사장님,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제가 미리 마중을-.”
“오호호-. 일 보세요. 우리 아들이랑 뭐 좀 사러 들렀어요.”
저 프락치 아니랍니다-. 푼수처럼 중얼대는 유세라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유진이를 위한 화이트 컬러의 샌들과 네발자전거, 정원이를 위한 세발자전거를 골랐다.
유아용 자전거는 진혁이 가져보지 못했던 아이템이다. 그래도 유아였던 최미경이 자주 양보해주어서 종종 타봤기에 자전거가 아쉬웠던 적도 없다. 소유는 근심을 부른다고 하던데, 진혁은 물욕이 없었다. 그래서 전생에도 그 많은 돈을 벌었음에도 차량을 구입하지 않았던 거고.
‘탈 일도 없었지. 회사 근처에서 살았는데 차는 무슨······.’
유세라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진혁이 다른 물건을 구경하는 틈에 점원에게 다가가 속닥인 거다.
“얼마예요?”
속삭임이라 칭하기엔 유세라의 목청이 5월 모내기 철 새벽 개구리의 그것만큼이나 빼어났다.
신체검사에서 무려 9년 연속 청력 좌우 정상을 기록한 진혁이 그토록 큰 개구리 소리를 듣지 못할까.
진혁은 점원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분한테 돈 받으면 안 살 거예요.”
“떼잉-. 걸렸네?”
한발 앞서 계산하려다 적발된 유세라가 혀를 뾰족 내밀었다.
“동생들 자전거는 제가 사주고 싶어서요.”
“그래. 그럼 나는 우리 수정이 브라자나 보러-. 얘가 요즘 부쩍 크는데 어휴-, 발육이 어찌나 좋은지······.”
그런 얘긴 안 하셔도 되는데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그렇게 크게 말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경호원들도 있고 주위를 맴도는 기자들도 많은데.
멀어지는 유세라의 뒷모습을 보며 진혁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변하는 사람도 많던데 저분은 전혀 변하질 않으시네.’
푼수불변의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한번 푼수는 영원한 푼수 같은······.
그래도 유세라가 사라진 덕분에 진혁은 자유를 얻었다.
끌고 다녀도 될 텐데, 그러자니 허리를 숙여야 했기에 자전거 두 대를 양손에 전리품처럼 들고 애견 코너를 찾았다.
“강아지 장난감 있어요?”
뽀미가 물고 놀던 뼈다귀 모양 장난감을 서울에서 가져온 것인데, 점점 닳더니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도대체 어떤 놈이 먹은 거니.
어쩌면 장난감 나무가 자라기를 바란 장군이 소행일지도 모르겠다.
“뼈다귀 모양은 이게 전부인가요?”
“창고에 더 있습니다, 고객님.”
“박스로 있어요?”
“예?”
잠시 눈빛의 대화가 오갔다.
‘한 상자에 이십 개······인데요.’
‘집에 플라스틱 똥을 싸는 개가 있어서요.’
진혁의 진지한 눈을 마주한 점원이 이내 얼굴에서 당황감을 지웠다. 점원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고로 향했다. 그 표정과 몸짓에서 비장미마저 뿜어져나왔다.
점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진혁은 프리스비를 집어 들었다.
‘개 접시는 열 개면 되겠지?’
뼈다귀 모양 장난감 한 상자와 프리스비도 넉넉히 샀다. 골판지로 만든 프리스비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더라고. 이놈들이 침을 묻히고 물어뜯어서.
개껌도 골라 들었다.
“이건 간식인가요?”
“네, 호주산 한우로 만들어 아주 맛이 좋은-.”
뭐라는 거야. 먹어봤어?
예나 지금이나, 진혁은 백화점과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헛소리하는 점원이 너무 많아.
“이것도 한 상자 주세요.”
“선물 포장해드릴까요?”
포장하면 장군이도 좋아하려나?
“네.”
뭐, 이것도 선물은 선물이니까.
*
‘운동할 때보다 몇 배는 피곤하다.’
마지막으로 완구 코너에 들러 유진이 친구들을 위한 광선총도 두 자루나 샀다. 별다른 장난감 없이 자라 완구방면에 문외한인 진혁은 점원이 추천하는 대로 고개만 끄덕였다.
유진이는 어찌나 기특한지 공주 대회에서 복귀할 때도 친구들 선물을 부탁했더랬다. 그 마음을 기억하는 오빠가 동생을 위해 한 번 더 선심을 쓰기로 했다.
“선물 포장해드릴까요?”
“네.”
개껌도 포장해 놓고 보니 그럴싸하던데 포장된 장난감을 받는 아이들은 더 좋아하겠지.
쇼핑은 목표물만 간단히!
백화점에서 보낸 시간이 20분쯤 되려나, 이제 살 건 다 산 듯했다.
경기 참관과 계약, 백화점 동행까지. 유세라의 선의가 고마워 시원한 음료를 대접했다.
“계약이니 뭐니, 부담 갖지 말고 하고픈 일을 해. 이 어머님은 항상 응원할 거야.”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 거예요.”
항상 애정 가득한 눈으로 보는 사람이다. 눈을 마주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그래서겠지. 검은색 눈동자가 유난히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쇼핑을 마치고 유세라와 사담을 나눌 때, 여성복 코너 구경을 마친 친구들이 합류했다.
두 손 가득 쇼핑백을 든 친구들을 보는 진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놈들, 도대체 뭘 산 거냐.
“할머니 옷이랑 츄리닝이여.”
“나는 게임기랑 츄리닝, 모자······.”
진혁의 시선을 의식한 친구들이 구입 목록을 줄줄이 읊었다.
다행히 이상한 건 없었다. 므야므야 가리개라든가······.
“집에 가자.”
“그려-. 할머니 다리두 뭇 주물러드렸는디 주말이 다 갔네이-.”
“으아아-, 누나들 보고 싶다.”
집.
돌아갈 곳이 있고, 그곳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거야.
긴 여정의 끝에 선 아이들의 얼굴에 평화가 깃들었다.
바쁜 와중에도 함께 해준 유세라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기자들과 약속이 있다면서도 참견 없이 곁을 지켜주었으니, 누구나 쉽게 보일 정성은 아니다.
“진혁이는 하루 자고 가지 그래? 수정이가 좋아할 텐데.”
갈등할 진혁이 아닌데 잠시 머뭇거렸다.
검도 대회에서 준우승했다며 아쉬워하는 홍수정과 통화할 때는, 너무 대견한 나머지 유명선처럼 웃었더랬다. 볼을 마구 찌그러뜨리며 장난치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내일 학교도 가야 하고요······.”
들고 갈 물건이 많으니 차가 있을 때 함께 이동하는 게 좋을 듯했고, 친구들과 함께 왔으니 돌아갈 때도 함께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수정이한테는 제가 또 전화할게요.”
이상하게 찝찝한 기분도 들었다.
불길한 정도는 아니지만 뭔가 일이 생길 듯한 기분.
‘별일 없겠지.’
집에 가고 싶었다.
***
한유영은 거실 흔들의자에 앉아 손뜨개를 했다.
손광연의 스웨터부터 진혁의 조끼, 손유진의 장갑과 손정원의 모자까지. 뜨고 싶은 건 많은데 다른 할 일도 많다. 때문에 하루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어디 보자, 추워지기 전에 완성하려면······.’
그런다고 계산이 되는 것도 아닌데, 눈을 가늘게 쓰고 손가락을 꼽았다.
금세 셈을 마쳤다.
‘뭐, 대충 열심히 뜨다 보면 완성할 수 있겠지.’
바늘을 찌르고, 털실을 감아 다시 빼내고. 딸 손유진의 음성을 음악 삼아 고개를 까딱이며 손을 쉬지 않았다.
일요일인데도 유치원복을 챙겨입은 손유진이 수화기를 붙들고 수다를 떨었다.
온갖 운동에 과외에, 바쁘기로 따지면 홍수정보다 바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데도, 홍수정은 손유진에게 전화가 걸려올 시간이 되면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킨다고 했다.
“오늘? 언니도 육상대회 갔다요? 우리 오빠는 그저께 가고 오늘 갔다요.”
- 아니이, 그게 아니고 언니네 엄마가 육상대회 갔다고. 언니는 어제 학교 다녀온 얘기를 한 거야. 오늘은 검도 대회 있었고.
홍수정은 손유진의 정돈되지 않은 말을 받아 차근차근 돌려주었다.
답답할 만도 한데, 수화기 너머 홍수정은 인내심에 자상함까지 갖춘 언니였다.
“아아-, 그렇구나요. 저도 어제는 유치원 다녀왔다요. 우리 오빠는 학교 그만뒀다요. 월욜에 다시 입학한다요.”
- 그건 입학이 아니라 등교라고 하는 거야. 오빠는 대회 때문에 잠깐 결석한 거지.
“아아-, 그렇구나요. 언니 내일 버스 타고 와라요.”
- 내일은 학교 가야지이-.
딸의 대화를 듣던 한유영이 피식 웃었다.
여자아이라 그런지 말을 곧잘 하는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화 주제는 머리 굳은 어른이 도무지 따라가기 힘들었다. 듣고 있자면 이마가 지끈거리는데 아이들끼리는 통하는 걸까, 홍수정이나 유진이의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아이들 세계는 복잡해.’
정신없이 떠들고, 싸우고, 소리 지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것에 관심이 돌아가면 금세 집중한다.
“음마아아-.”
“우리 정원이 응가했다요? 누나가 간다요오! 아아, 정원이 응가한 거 같다요. 언니 끊어라요.”
지금도 기저귀 뜯는 시늉을 하며 거실을 걷는 정원이를 보고는 태세를 바꾸지 않나. 훈련에, 대회에. 한 달 넘게 바쁜 오빠의 대체자로 여기는 듯 홍수정과 통화하는 일에 집착을 보이면서도 동생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누나였다.
‘유진이도 저러다 훌쩍 크겠지.’
아이들은 아침과 저녁이 다르다.
공주에 다녀온 큰아들이 유진이를 보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며칠 만에 쑥 커버렸다며.
비단 시간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벌에 쏘이거나 개미에 물려도 아이들은 성장의 계기를 만나는 듯했다.
사고를 치고, 생각하고, 깨닫고, 결국 그걸 말로써 표현하고.
하나의 사건이 아이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누구도 계측하지 못하리라.
아들 진혁도 아홉 살 때 갑자기 커버렸으니 유진이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현상이었으나 귀염성을 상실하는 건 아쉬운 일이다. 아마 모든 부모가 가진 모순된 감정일 터였다. 스스로 사람 구실을 할 정도로 자라서 손이 덜 가면 좋겠는데, 그러면서도 늘 아기처럼 귀여웠으면 하는 마음.
“우리 정원이, 기저귀 갈고 엄마랑 놀아라요. 누나는 친구들 만나야 된다요.”
“유진아, 삼촌들 안 계시니까 멀리 가면 안 되는 거 알지요?”
“알았다요.”
그나마 여느 아이들처럼 칭얼거리는 일 없고 똑똑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말투는 이상하지만.
“유진아, 요즘 벌 많아요. 벌 조심해야지요?”
“네에-. 벌 쏘이면 아프다요. 된장 발라야 한다요.”
시종일관 엄마 미소를 유지하던 한유영의 이마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똑똑한 딸이라 다행이긴 한데 이상한 소리도 곧잘 하는 까닭이다.
최장환이 그랬다.
조일헌이 동네 애들 여럿 버려놨다고.
한유영도 15년을 넘게 지켜봤는데, 그 나이 먹도록 동네 아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모습이 참 한결같은 사람이다.
***
손유진네 집 평상에 노란 옷을 입은 아이 셋이 둘러앉았다.
안마을 김호진과 뱀골에 사는 이동호가 놀러왔다.
그늘에 앉아 엄마가 만들어준 토마토주스를 마시고, 쌀튀밥을 먹는 게 전부지만 손유진은 즐거웠다. 친구가 많은 건 좋은 거라고 아빠가 그러시던데 그 말이 맞나 봐. 친구가 가장 큰 재산이라는 말도 했어.
“김호진이랑 이동호 이거 하나씩 가져라요.”
“이게 뭐여?”
“우리 친구, 이게 뭘까요?”
김호진과 이동호가 동시에 의문을 표한 물체는 카메라처럼 생긴 장난감이었다. 손으로 잡아 빼면 렌즈 부위가 돌출되고,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셔터를 누르면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순서대로 사진이 바뀌는.
“와아-. 이건 터미널 장난감 가게에도 없는 거네요!”
도시 문물에 비교적 해박한 이동호마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신문물이었다.
도시에 다녀온 오빠가 선물로 사온 장난감인데, 손유진이 친구들을 위해 부탁했다. 공주에서 돌아오기 전, 집에 전화를 걸어 유진이를 바꿔 달라고 한 오빠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을 때였다.
- 사, 사사사- 사랑하는 우리 유진이,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 “이히히히히-! 저는 아찌곰이면 된다요.”
아기를 가진 건지, 배에 가스가 차서 그런 건지 배가 뚱땡이지만 구곰이 명곰이라고 곰 팀장 아지찌가 그랬어.
대신 매일 함께 노는 김호진과 이동호를 위한 선물을 부탁했다.
오빠는 돈이 많으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손유진은 똑똑한 유치원생이라서 그런 것도 안다.
5천 원은 천 원이 다섯 개라는 진리도 벌써 깨쳤다.
오빠는 유치원에 다닐 때 10원만 있어도 설탕 묻은 젤리를 먹을 수 있었다고, 행복했다고 하더라. 손유진은 돈이 10원보다 많은 게 좋다. 홍수정 언니가 그러는데, 세상 엄마들이 돈을 숨겨둬서 어린이들이 어린이날 선물을 직접 고르지 못하는 거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오빠에게 부탁한 거다. 오빠는 엄마처럼 돈을 숨기지도 않고 돈도 많으니까.
나중에 회장이 되려면 사람들에게 미리 뭘 먹이는 게 좋다고 쪼롱이 아지찌가 그랬다. 그때 가서 부랴부랴 먹이면 체한다고. 아, 체하는 게 아니라 체포라고 했나?
어쨌든 그래서 이 녀석들에게 주스와 튀밥도 먹이고 장난감도 먹이는 거다.
‘어서 먹어라요.’
미래의 유권자 어린이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