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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68화 (168/338)

< 마지막 축제 (6) >

*

모략가는 쉴 수 없다.

쉬어서도 곤란하다. 일이 계획대로 흐르도록 챙기는 게 우선이니.

화장실에 다녀온 홍기준은 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인 후 수화기를 들었다.

“아, 정 차관님? 홍기준입니다. 성구대교 기사는 모레 조간에 내보내고 공사 시작하시죠. 예. 그럼.”

최대한 떠들썩하게 보도하겠다는 약속 아닌 다짐을 몇 번이고 받아두었다.

‘뉴보스파’라는 조직이라고 했다.

문석일과 장진남이 다방을 거쳐 시골 읍내 나이트에서 묵사발을 낸 패거리 말이다.

‘이것들이 겁도 없이 내 친구 회사에 쳐들어가?’

서울의 일부 조직원이 농공단지에 찾아가 무력시위를 하려다 양강욱과 명현우에게 치도곤을 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 1주일 전이다. 아마 제너럴과 태양군이라는 퍼즐을 조합해 용케 찾아간 것이겠지만, 양강욱이라는 괴물이 버티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

잠깐의 사소한 충돌로 치부하고 무시할 생각도 했다.

뒤에 세인그룹이 있다는 걸 알면 저들도 알아서 물러날 테니. 제아무리 조직폭력단이라 해도 거대 그룹 앞에서는 한 줌 먼지나 다름없다.

- 무서워서 오줌도 안 나와, 인마!

한데 점심시간에 전화를 걸어온 친구 놈이 엄살을 부리는 통에 홍기준도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세인그룹 부회장에게는 조폭보다 무서운 존재가 둘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아내 유세라요, 다른 하나는······.

- 네 직원이 벌인 일이니까 끝까지 책임져 인마!

엄살쟁이 내 친구.

모두 제 놈 가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인데 다른 회사 직원 취급을 하며 떠넘기다니.

크큭-, 귀여운 궤변에 웃음이 나왔다.

‘십새······.’

창밖 대로를 바라보는 홍기준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이틀.

이틀이면 뉴보스파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이다.

***

[타아앙-!]

명불허전.

신호총을 듣고 출발하는 게 아니라, 신호총과 연결된 장치 같다.

우와아아-!

진혁의 스타트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지 않을까.

습후습후-!

뜨겁고 건조한 공기 탓에 호흡이 약간 불편할 뿐,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힘을 아낀 건 아니다.

전국대회라는 큰 경기에서 힘을 아낀다는 건 오만에 지나지 않을 테니.

더 쏟아낼 수 있을 듯한데 꽉 막혀 나오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고 현재 능력이 다른 선수에 비해 뒤쳐지지 않으니 이걸 아쉽다고 해야 할지, 답답하다고 해야 할지.

나올 듯 나올 듯.

분명 뭔가 더 있는데 교묘하게 손가락을 피하는 코딱지처럼 애를 태웠다.

‘아오 짜잉나.’

상기처럼 해볼까?

“수, 수정-.”

아, 못해 먹겠다.

진혁은 입을 꾹 닫은 채 가슴을 내밀어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타앙-.]

두바바바박-.

우승자 탄생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다른 레인에서 달린 선수들이 도착했다.

거리는 꽤 벌어졌으나 시간으로는 1위와 1초 차이도 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준족들이다.

짝짝짝-.

무성의한 박수갈채가 여기저기서 쏟아질 때였다.

퍼어엉-! 짜자작-.

뜬금없이 경기장에 축포가 울렸다.

무려, 공식 대표 후원사 세인에서 준비한 축포였다.

한국 신기록 달성 시에만 발사한다며 딱 두 발 준비했다고.

- “그거 한 발에 삼백만 원이다, 너?”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랑하던 유세라가 떠올라, 진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해맑은 개구쟁이 얼굴이 겹쳐 보인 탓이다.

***

「10.40 중등부 100m 한국 신기록」

경기 기록관석에서 꾸벅꾸벅 졸던 신종현은 전광판을 확인한 후 벌에 쏘인 망아지처럼 분주해졌다.

“하씨-. 왜 자료가 없냐아-.”

어차피 전자기록이 도입되었으니 급할 건 없다. 기록관이란, 말 그대로 기록 후 보전에만 신경 쓰면 되므로. 다만 기록이 주는 이질감 때문에 신종현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지 못했다.

한참이나 책상을 난장판으로 만들다가 결국 자료를 찾지 못하고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경기파트 주효근 부장님 바꿔줘, 빨리!”

신기록이 나왔음을 알리는 축포가 지나가고, 안내 방송이 이어졌다. 하나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신종현은 기록의 주인공을 눈으로 쫓으며 통화 상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 더위만큼이나 타는 가슴을 해갈해 줄 단비 같은 사람을.

- 어, 신 과장? 무슨 일이야?

“중등부 결승 기록이 이상해서 그러는데요, 고등부 백 미터 한국 기록이 몇 초입니까?”

- 어디 보자······.

잠시 후.

멍한 얼굴의 신종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손에는 고등부 최고 기록과 손진혁의 소년부 기록을 받아적은 메모가 들려 있었다.

“아아아-, 걔였구나.”

지원 파트로 간 장연배 부장이 말한 놈이 저 녀석이었구나.

3년 전 대구에서 괴물을 봤다고, 다른 종목으로 빠지지 않았다면 중등부에서 볼 수 있을 거랬지. 2년간 보이지 않기에 종목을 바꾼 거라 여겼는데 이렇게 나타났다.

“하-, 아깝다. 키가 너무 커······. 야구, 농구, 축구······. 키가 너무 커.”

인기 종목의 발 빠른 선수 수급은 대개 초등부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기초 교육을 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중등부나 고등부에서 스카우트하는 경우도 있다.

‘엄청 빠른데.’

너 계속 육상하면 안 되겠니?

고등부 기록보다 빠른 기록이 중등부에서 나온 날인데 기자라는 놈들은 왜 죄다 VIP석에 몰려간 거야?

날씨도, 사람도 도움이 안 되는 날이 있다.

맞선을 보러 가는 길에 만난 소나기에 새로 맞춘 정장이 홀딱 젖을 때라든가, 그날 상대가 너무 미인이어서 더 초라해졌다든가······.

육상 매니아 신종현에게는 오늘도 그런 날이다. 맞선 이후 두 번째였다.

***

‘오늘은 어둠도 너희를 돕지 못한다.’

아직 해는 길어서 곧 해가 뜨리라.

벌써 동쪽 하늘이 파랗게 여명을 지피고 있었다.

밤을 잊고 흥청대는 거리에는 제정신으로 걷는 이를 찾기가 어려웠다.

정상태는 껌을 질겅거리며 압구정 모처의 대형 나이트클럽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크다, 커.’

단 한 번도 방문해 본 적 없는 곳이다. 유흥이라는 일에 관심이 없었으니.

이런 곳에서 노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곳의 무엇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걸까 궁금할 때가 있었다.

‘좋은가?’

이제 와 굳이 알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차피 시끄러운 건 질색이고 머리 아프니까. 가끔 지나가는 차에서 쿵쿵- 울리는 음악 소리에도 두통을 느끼는 정상태다.

그야말로 인파, 폐장 시간이 되자 밤새 신나게 즐긴 청춘이 썰물처럼 빠져나왔다.

사전에 설계도를 구해 숙지한 것은 물론, 혹시 모를 불법 개조까지 염두에 두고 내부 구조 파악을 완료했다.

보안전화기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가니?”

“간다.”

용건만 간단히 전하면 그뿐, 적송건설이라는 번듯한 건설회사로 위장한 뉴보스파 빌딩 인근 그늘에 은신한 문석일과의 통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죽이지는 마라.”

껌을 뱉고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정상태가 성큼성큼 걸어가자, 도시의 그림자에서 SSS 요원들이 소리 없이 뒤를 따랐다. 썰물이 난 곳에 밀물처럼 짓쳐들어가는 검은 그림자.

‘내일 조간신문에 난다고 했나?’

뉴보스파가 아니라 교량 공사 소식 말이다.

뉴보스파는 어디에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멸되는 바이러스 취급을 당하는 거다. 바이러스 퇴치에 실패하면 나라가 시끄러워질 거라고 했다.

‘반드시 성공시키라는 뜻이겠지.’

몇몇은 골절 이상의 중상을 입을 테고, 몇몇은 자수를 하리라.

도주는 없다.

지하 1층 홀에 들어선 정상태가 청소 중인 웨이터 복장의 젊은 사내를 불렀다.

“요오-, 돼지야. 다른 돼지들도 모이라고 해라.”

허? 참나-.

젊은 돼지가 명찰을 뜯어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모로 꺾은 얼굴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 “상태 삼촌은 리치가 좋잖아요. 굳이 붙거나 힘으로 싸우시기보다는 팔만 쭉 뻗어도 충분히 위협적이예요. 힘 빼고 주먹을 정확하고 빠르게 던져 보세요. 시선은 표적을 끝까지 쫓아야죠. 유도미사일을 던진다 생각해 봐요.”

진혁과 스파링할 때였다.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스포츠 해설가가 말로만 떠드는 것과, 프로 선수가 직접 시범을 보이며 한 동작씩 짚어주는 건 배움의 차원이 다르다.

빠르지만 가볍게, 정상태가 주먹을 던졌다.

떡-!

- “죽일 생각이면 뭐하러 어렵게 싸워요? 그냥 눈을 뽑거나 목을 꺾으면 되는데요. 제압만 할 생각이면 역시 턱 아닐까요? 골이 흔들리는데 누가 멀쩡히 버티겠어요.”

줄 끊어진 인형처럼 웨이터가 스르륵 무너졌다.

‘진혁이 덕분에 산 줄 알아라.’

손진혁의 보안취급 레벨과 의사결정 권한이 문석일보다 높다는 말을 들었다. 의아한 일은 아니었다. 정상태 본인도 이미 그런 이상한 세상에 섞여 살고 있으니.

홍기준 부회장은 차라리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게 낫다는 논조였으나 손진혁이 문석일에게 압력을 넣었다고 했다. 다시는 기어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공포심만 심어주라고 했다던가.

‘힘이 있으니까 그런 여유도 가능한 거지. 차라리 죽이는 게 쉬운데.’

꾸우웅-.

거구가 엎어지며 축제의 개막을 알리는 축포를 터뜨렸다.

덩치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뭐 하는 새끼들이야!”

놈들을 위해 작전명도 화려하게 지었다.

부회장의 말에서 착안해 양강욱이 이름 붙인.

마지막 축제.

꿈에 그리던 고향을 찾은 사람처럼, 오랜 굶주림 끝에 피 냄새를 맡은 야수처럼. 정상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혀로 입술을 축인 정상태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우린······.”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고는 새로 껌을 뜯어 입에 구겨 넣었다.

“회사원이다.”

이야아-!

꽈자작-.

모처럼 마음에 드는 음악이다.

정상태는 고개를 까딱이며 박자를 맞췄다.

기합과 파열음이 뒤섞인 축제의 장에서.

***

어른의 비즈니스는 어른들에게 맡겨두는 편이 바람직하리라.

새날이 밝았지만 진혁은 경기장에 비치된 신문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알아서 잘들 하겠지.’

문석일과 양강욱을 믿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삭도의 요원들을 육성하려는 홍기준의 의중 또한 이미 헤아리던 중이었고.

대회의 부담감을 감당하며 집중하기에도 심력이 부족할 판인데, 중요한 경기를 앞둔 선수가 어른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점검한다? 인공지능에게나 가능한 일일 터였다.

가볍게 몸을 푼 진혁이 친구들과 이병세가 있는 곳을 찾았다.

“선생님, 오전 경기 끝나고 바로 내려가는 건가요?”

“이이-, 그러야지. 진혁이는 쉬지두 뭇허구 학교 가야돼서 워칙헌다니?”

“전 괜찮아요.”

이병세와 염병택, 조슬찬은 어제도 진혁의 경기가 끝난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잠실역의 실내 놀이공원도 다녀오고, 백화점도 구경했다고.

“그 머여, 선생님은 얼리 가서 발 뻗구 쉬구 싶다.”

덕분에 이병세는 아이들을 위해 보모 노릇을 했다. 중학생이니 저들끼리 놀라고 배려할 수 있었으나 촌놈들 안전을 생각하면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저녁에 민용락과 나누는 맥주 한 잔이 이병세의 유일한 낙이었다. 서울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했는디 조뚜 웁써.

그런 교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슬찬은 저만의 감상에 젖어 있었다.

“아, 늑대월드 또 가고 싶다. 염병아, 우리 서울 살자.”

“늑대가 아니고 르떼, 븅시나!”

“아, 뭐라는 겨어-. 늑대나 르떼나, 병택이나 염병이나-!”

“육학년 소풍 때 갔던 데라 별거 없더라. 나는 거기 공기 끈적거려서 싫어.”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진혁은 입맛을 다셨다.

컨디션 관리를 하라며 이병세가 떼어놓는 통에 놀이공원에 동행하지 못했고, 소풍 때는 학교가 달라 구경도 못했다.

‘나중에 유진이랑 가야지.’

보나마나 보호자 노릇을 해야 할 테지만 어차피 주변인의 역할이란 그런 거니까.

그건 그렇고, 진혁이 태양초등학교에 다녔던 전생에는 분명 읍내에 있는 산으로 소풍을 갔던 것 같은데. 이번엔 학교에 돈이 생긴 모양이다. 그 많은 인원이 소풍으로 놀이공원에 가려면 얼마나 큰 돈이 들어갔을까.

“아아-, 그 쏘세지 너무 맛있어. 또 먹고 싶다.”

“핫도그 인마, 핫도그.”

“핫도그는 밀가루 묻힌 담이 기름이다 튀기는 거 아녀?”

“모르지, 뭐. 서울 사람들은 홀랑 벗겨 먹는지. 누나들 옷 입는 것도 핫도그 같잖아?”

이히히히히-.

시도 때도 없이 만담을 펼치는 녀석들 때문에 진혁도 어쩔 수 없이 웃어버렸다.

‘많이 보고 싶을 거야.’

함께 오지 못한 박상기의 빈자리가 못내 아쉬웠다.

말로는 가족 모임이라고 했는데, 진혁이 보기에는 종교적인 이유 같았다.

상기 그 녀석, 은근 독실한 기독교 신자더라고. 교회에서 어떤 기도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장 보고 싶은 건 가족이다.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툭툭-.]

누가 마이크를 두드렸다.

이제부터 내가 중요한 말을 할 테니 주목하라는 뜻이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잠시 후, 남자중등부 이백 미터 경기가 진행될 예정이오니 참가 선수들께서는-.]

예에-, 갑니다.

이제 한 번만 달리면 집에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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