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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67화 (167/338)

< 마지막 축제 (5) >

*

박상기가 사랑하는 건 여자친구 박정화만이 아니다.

청주여중 심인희도 예쁘고, 태양여중 김은진도- 아, 이게 아니고.

심장 수술 후 재활을 위해 어릴 때부터 온갖 운동을 섭렵한 박상기가 가장 사랑하는 건 축구였다.

운동과 관계된 추억도 다양하다.

수영부터 육상, 축구······. 잊고 싶은 꼬툭튀의 추억, 발레까지.

‘······ 으아아아-! 힘이여 솟아라, 그레이스컬!’

축구를 최고의 스포츠로 여길 때가 있었다. 그 생각은 여전하지만 그 자리를 육상으로 대체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긴 시간을 매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장시간 체력을 쥐어짜는 축구와, 단시간에 온 힘을 토해내는 육상. 모두 그 매력이 특별했다. 무엇보다 육상은 다른 선수와 부대끼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몸싸움을 꺼리는 박상기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느낌이랄까.

다만 아쉬운 점은 금방 끝난다는 거였다.

“가랏! 조슬몬!”

턱-!

배턴을 넘긴 박상기는 숨을 고르며 다른 레인 선수들을 눈여겨보았다.

손진혁이 벌려둔 거리 덕분에 여전히 1등이다.

그러나.

‘아, 내가 많이 따라잡혔네.’

촌놈들이 더럽게 빠르군.

체육중학교 다니는 놈들은 밥 먹고 달리기만 하나······.

꽁지 빠지게 달리는 조슬찬의 등을 밀어 볼까, 후우- 가쁜 숨을 길게 내보냈다.

‘······과학이 널 돕는다. 조슬몬.’

박상기는 역시 이상한 놈이다.

*

헤헤헥-.

이제 조슬찬의 주문이 힘을 발휘할 순간이다.

6번 레인이라 곡선 주로에서의 강점을 보이지 못해 아쉽지만, 뭐 어떠냐.

훈련을 거치며 제법 교정된 자세가 여느 육상선수와 다를 바 없고, 속도도 제법 올랐다.

‘시벌시벌시시벌-.’

소년부 시절부터 달릴 때마다 되뇌던 주문이 오늘따라 입에 차지게 붙는다.

예전엔 배가 고파서였다면, 오늘은 마지막이라는 간절함 때문에 악에 받친 나머지 저절로 나오는 거다. 아니면 버릇이라 그런 걸지도.

곡선 주로를 벗어나자, 두 명의 경쟁자가 조슬찬의 어깨에 따라붙었다.

“씨이벌-!”

염병이가 마무리해주겠지.

턱-.

흰색 배턴을 염병택의 손에 넘기자, 긴 안도가 밀려왔다.

“후읍-!”

충분히 예열을 마친 염병택은 숨을 한껏 들이쉬고는 폐를 닫았다.

100미터를 달리는 진혁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초반 20미터 정도는 이렇게 달리더라.

모 아니면 도.

즉흥적이었으나 이렇게 흉내라도 내면 나도 진혁이처럼 빨리 달릴 수 있지 않을까.

이상하다.

힘이 남는다.

얼굴은 터질 듯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호흡의 여유가 느껴졌다.

팔자걸음은 끝내 고치지 못했다. 그러나 발가락으로 달리는 감각, 발목을 세우는 새로운 루틴은 몸에 찰떡처럼 달라붙었다.

그럼에도 실력의 한계는 직관적이었다.

‘젠장.’

늘 느끼는 것이지만 체육중학교는 아무나 가는 게 아니구나.

저놈이 100미터와 200미터에서 2등한 놈이지.

진혁이보다 느린 놈, 나보다는 빠른 놈, 재수없는 놈.

어느새 염병택을 추월한 선두는 벌써 결승선을 코앞에 두고 있다.

선두와 염병택의 사이에 다른 학교, 어깨 옆에는 어느새 또 다른 학교.

- “5등이면 현상 유지는 하는 거고, 4등만 해도 잘한 거야.”

기록상으로는 그렇다.

진혁이 기대했던 변수는 발생하지 않은 듯했다. 3위로 질주 중이니 이미 그 변수가 반영된 건지도 모르겠다.

후우우웁-!

다시 공기를 가뒀다.

‘제발 한 명만······.’

무거웠던 머리가 가벼워지며 배에 큰 구멍이 뚫린 듯, 공기 저항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나란했던 선수가 뒤로 쳐지는 게 느껴지고, 등을 보이던 녀석이 금세 가까워졌다.

그래, 누군가의 등을 보고 달리며 이를 악무는 것만큼 익숙한 상황도 없다. 1등 선수 뒤통수만 보고 달리는 거다.

‘평생 후회하느니-.’

달리다 죽는 게 낫다.

죽자!

후우우웁-. 더 들어갈 틈 없을 것 같은 폐에 공기를 더 집어넣어 가슴을 풍선처럼 부풀렸다.

[타앙-.]

1위 선수의 골인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몇 걸음 더 쥐어짠 염병택이 가슴을 들이밀었다.

몸을 날린다는 생각으로, 턱으로 전방을 찍는다는 각오로.

후억후억-.

“아이고 죽겄다아-!”

그리도 많이 달린 100미터 구간이 이렇게 힘들었던 날은 처음이다. 50미터 구간부터는 정말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 남은 수명을 불태우는 각오였으니.

드디어 지긋지긋한 육상도 끝이구나, 눈시울이 주책을 떨었다.

웅성웅성-.

“2등이 둘이여?”

“애매하네. 동시에 들어와서-.”

염병택도, 함께 들어온 선수도 결과를 확신하지 못했다.

감독관이 비디오를 돌려보는 1분이 길게도 느껴질 때.

장내 사회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퍼졌다.

[남자 사백 미터 계주 이 위는, 규정에 따라 가슴이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태양중학교-.]

에히히히히히-.

대자로 뻗은 염병택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실성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아하하······허억-, 내가······허억- 오리알 먹고 갑빠 키운 염병택이다아-.”

염병택은 끝내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여전히 배턴을 꼭 쥔 채.

***

“씨벌······.”

염병택 위에 포개진 선수들을 보던 이병세가 결국 욕을 뱉었다.

선수들에게 가려던 민용락은 이병세의 눈치를 살폈다.

처음에는 1등을 못해 그런 것인가 싶었다. 저 철없는 녀석들이 1위 팀보다 더 신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지도자로서 욕을 한 게 아닐까.

이내 실소가 터져나왔다.

훌쩍-.

이병세는 목에 건 수건으로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액체를 찍어냈다.

“선생님은 안 가세요?”

“아, 냅둬유-. 마지막 대횐디 주덜끼리 좀 놀구 그래야쥬-.”

미소 띤 얼굴로, 민용락이 슬그머니 다시 앉았다.

험상궂은 외모와 수시로 등장하는 욕설 때문에 무서운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마음 따뜻한 욕쟁이잖아?

***

대회에서 복귀한 이병세는 바빠졌다.

‘하-, 전국대회 참가 신청은 왜 별도여?’

자격이 있다 하여 출전권이 자동으로 부여되는 게 아니었다.

학생 신상정보와 학부모 동의서, 학교장 직인이 찍힌 신청서를 팩스로 보내야 한다.

‘영태헌티 먼저 물어보길 천만다행이지.’

경험자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대회 조직위에서 받은 안내문이 있지만 글자를 읽는 것과 말로써 듣는 것은 전달력 자체가 다르다.

그나마, 3년 전 방식에서 바뀌지 않아 다행이었다.

팩스를 보내려던 이병세가 멈칫했다.

‘가만.’

계주가 끝난 후 펑펑 울던 염병택과 조슬찬의 모습이 뇌리를 스친 까닭이다.

*

이병세는 교감 선생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자신은 없었다. 실속 없이 후원금을 펑펑 쓰면 되겠느냐며, 이병세가 뭔가 기획할 때마다 짠돌이 교감은 재정문제로 이병세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으니까.

지금도 그렇다.

이제 학교를 대표하지도 않을 졸업반 선수들이 전국대회 참관을 할 수 있도록 돈 좀 달라는 교사를 어떤 교감이 좋아할까 싶었다. 이병세 본인이 교감이라도 싫을 듯했다.

그래도 못난 스승이 이거라도 해주면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 암체두 한 팀인디-. 여태까적 같이 고생두 허구- 했으니께유-.”

반쯤 눈을 감은 교감은 테이블 위의 종이만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이병세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하, 이번이두 안 될라나. 3학년인디 수업 빠진다구 허먼 부모들두 싫어허겄지?

“안 되시먼 어쩔 수 없-.”

“다녀와요.”

“-쥬. 예?”

모스 부호라도 보내는듯하던 교감의 손가락이 멈췄다.

“잘 다녀와요. 그 전에 학부모 동의서 확실히 받아두고.”

이병세가 찾아오기 전, 교감은 이미 손광연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아들이 친구들 서울 구경 시켜주고 싶어 한다고. 그리 에둘러 표현했으나 함께 가고 싶어 한다는 뜻이라는 걸 누가 모를까.

“그려두- 된대유?”

“팀이라면서요. 팀인데 같이 움직여야지.”

표정을 풀고 씨익 웃은 교감이 품에서 노란색 편지 봉투를 꺼냈다.

“이 선생도 콧바람 좀 쐬시고-.”

두툼한 봉투를 쥔 이병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먼저 일어선 교감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 교장실에서 나갔다.

째려보듯 봉투의 내용물을 확인한 이병세의 눈이 쏟아질 듯 커졌다.

‘저 냥반이 내년이 교장을 맡아뒀다더먼, 통이 커진 겨?’

***

폭염으로 대회가 연기되지 않을까 하는 일부의 기대를 저버리듯, 9월에 열리는 전국대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일정을 연기할 경우 경기장 대관에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이유가 아니라도, 명색이 국가적 행사인데 어찌 쉽게 바꿀 수 있겠나. 낮은 관심도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일컬어 희망회로라고 하던가, 애초에 연기 계획도 없는데 일부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그래도 9월이니까 좀 선선하겠지?

“으아-! 내가 이런 곳에서 살았었나?”

민용락이 와이셔츠 깃으로 부채질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8월과 9월은 숫자만 달랐다.

그래도 북쪽이니까 좀 덜 덥겠지?

“으아아-. 우덜 동네보다 더 덥다아아-.”

조슬찬의 앓는 소리가 아니라도 말도 못하게 무더웠다.

염병택이 말을 잃은 것만 해도 증거로 충분하리라.

“상기가 뭇 온 게 차라리 다행이여. 야, 염병아 안 그르냐? 선생님이 서울 구경시켜 준다더니, 우덜을 아주 걍 서울이서 말려 죽일라구 그런 모냥여-.”

박상기는 주말에 청주에서 있을 가족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며 불참을 아쉬워했다.

염병택은 꺼방한 눈과 헤벌레 벌어진 입으로 고개만 까딱였다.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역대회처럼 천막도 제공하지 않는다.

선수들은 대기실이라도 있다지만, 관객은 찜통에 쪄 죽으라는 소리 같았다.

그건 지도자도 마찬가지였다.

“콧바람은 지미······ 일사병 걸려 뒈지겄네-.”

이병세가 나라 잃은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구세주가 등장했다.

곰의 탈을 쓴 사람인지, 사람 탈을 쓴 곰인지 헷갈리는 사람.

“더운데 고생들 많으십니다. 이거 하나씩 받으시고-.”

“어? 양 팀장님이 여긴 어쩐 일로······.”

땀을 뻘뻘 흘리며 기절 일보 직전이던 민용락은 양강욱이 건네는 양산을 받으며 헤벌쭉 웃었다. 시골 저택에서 함께 근무하는 동료를 먼 타지 서울에서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어, 민 대리가 고생이 많다. 보고 드릴 게 있어서 왔다가 들렀다.”

“보고요? 뭘요? 누구한테요? 팀장님이 직접요? 언제요?”

양강욱은 굵고 짧은 목을 움직여 VIP석을 턱짓했다.

그곳에 선글라스를 쓴 유세라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손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용락아, 잼잼-.

“아······, 이사장님 오셨구나. 진작 알려주시지.”

그런데 이상하다.

“양 팀장님이 이사장님께 보고할 일도 있습니까?”

“없지. 부회장님 뵈러 가는 길에 들렀다.”

양강욱은 민용락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며 이병세에게도 양산을 건넸다.

“선생님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진혁군 아버님께서 각별히 감사 인사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아이구-, 뭘 이런 걸 다······.”

이런 거 써도 될라나?

잠시 둘러본 이병세는 망설임 없이 양산을 펴들었다. 다른 이들은 경기장 입구에서 파는 괴상하게 생긴 기생 모자를 쓰고 있었으니까.

동방예의지국의 체육 지도자가 기생 모자에 양산이라니. 말세다, 말세여.

“결승이 언제입니까?”

“100미터는 내일이구, 200미터는 니열모리네유.”

100미터 경기가 200미터보다 하루 앞서 열린다.

“그럼-.”

“예-. 살펴 가슈-.”

양강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급히 자리를 떴다.

***

“고생들이 많아요. 챙겨주는 거 없는 고용주라 미안합니다.”

부드러운 말과는 달리, 홍기준의 표정은 근엄하기 짝이 없었다.

실권을 장악하고 경영 실무는 각 전문가에게 분산한, 모략에 집중하는 암흑가 보스의 아우라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사뭇 바뀐 홍기준의 모습에 양강욱도, 문석일도 상기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잘 벼린 면도칼을 목덜미에 들이댄 듯, 홍기준의 시선이 서늘한 탓이다.

“그쪽 업무는 누가 보고 있습니까?”

“명현우와 유태화에게 각각 맡기고 왔습니다.”

양강욱의 답을 들으며 주억인 홍기준이 이번에는 문석일에게 눈길을 돌렸다.

“김인랑은 별도 임무를 맡았습니다. 정상태와 강헌창만 왔습니다.”

“그래. 알아서 잘 처리했다. 자네만 왔으면 된 거지. 삭도 요원들 이끌 사람인데.”

말없이 한차례 고개를 숙인 문석일이 물었다.

“일이 너무 커진다면 부회장님 운신에 문제가 생길 텐데, 그게 두렵습니다.”

“작아지는 사건이란 없다.”

문석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대의 말을 즉시 이해하기 힘들 때 나오는 행동이다.

“사건이란 풍선 같은 거야. 터지기 전까지는 부풀어 오르지. 스스로 작아지는 놈이라면 풍선도, 사건도 되지 않는 단순 해프닝 같은 거고.”

“저희가 터뜨리면 되겠습니까?”

“터뜨리고 갈기갈기 찢어버려. 다시는 풍선 흉내 내지 못하도록.”

준엄하고 단호하다.

역시 젊은 나이에 큰 그룹의 실세가 된 인물답다고나 할까.

문석일은 자세를 바르게 고쳤다.

“오늘 바로 가면 되겠습니까?”

“오늘은 쉬고 내일 가지. 모처럼 왔는데 자네들도 쉬고, 그놈들······ 오늘 밤 마지막 축제라도 즐기도록 놔둬.”

“예.”

“양 팀장은 탈 없도록 뒤에서 잘 받쳐줘요.”

“맡겨두십시오.”

양강욱과 문석일이 사무실을 나선 후, 홍기준은 넥타이 품을 넓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확실히 다른 직원들과는 분위기가 달라.’

살벌해. 절로 투레질하며 고개를 젓게 되지 않나.

마주하고 있으면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기분마저 느껴질 정도로 박력 넘치는 남자들이다. 반면 저들의 얼굴은 긴장한 기색 없이 들떠 보이기까지 했다. 피 끓는 작전을 앞둔 무사들이라 이거겠지.

손광연 이놈은 어떻게 저런 놈들하고 시시덕거리며 지내는 거지?

‘아, 쉬 마려워.’

자리를 박찬 홍기준이 종종걸음을 놓았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호령하는 그룹 부회장도 화장실에 급한 용무가 생길 때는 어쩔 수 없이 똥 마려운 강아지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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