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축제 >
*
더위에 설익은 돼지고기까지 덮친 서머 캠프였지만 선수들은 사흘도 되지 않아 부활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었다.
환골탈태까지는 아니었어도 아이들은 힘이 넘쳤다.
“염병이는 여드름이 싹 다 웁써졌네이-.”
“그러네? 아프면 사라지나?”
“······ 대신 눈이 쑥 들어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앓았던 친구들의 관절 부상을 염려해 산악구보 훈련은 과감히 생략했다.
대신 스쿼트와 런지 등 대퇴사두근 강화 훈련을 보강했다.
마지막 주에는 트랙 훈련만 반복했는데, 계주에 집중한 배턴 패스와 순간 속도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이 주를 이뤘다.
달리고, 기록하고, 휴식하고.
다시 달리고, 기록하고.
김영태에게 배웠듯이, 기록 단축보다는 호흡을 맞추는 훈련이었다.
“몸이 달궈질 듯 안 달궈지는······.”
“아, 호흡 딸려-.”
반복 스프린트를 해야 하니 가장 힘들었고, 실컷 달리지도 못하니 재미없으며, 배턴을 놓칠까 신경이 곤두서는 훈련.
마지막 과정으로 넣는 이유가 있었다.
드디어 길었던 합숙 훈련이 끝났다.
“고생했어. 방학이 일주일도 안 남았네. 이제 집에 가서 좀 쉬어. 컨디션 관리도 하고.”
방학 숙제로 주어진 시험지도 함께 풀었으니 친구들은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잘 땐 반듯하게 눕고, 앉을 때는 허리랑 어깨 곧게 펴고, 걸을 때는 가슴 내밀고, 고개 너무 숙이지 마-.”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했다면 지겨운 잔소리에 그치고 마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한 마디로 흘려듣지 않았다. 마지막이 될 잔소리였으므로.
“가야지. 할머니두 봐야 되구······.”
“가긴 가야 하는데······.”
“······저기 세인 연수원에 잔디 축구장도 짓던데.”
언제 다시 이렇게 힘들면서도 즐거운 훈련을 할 수 있을까.
어디에 가서 원 없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함께 웃을 수 있을까.
어느 누가 잔소리 없이 사춘기 청소년에게 이런 편한 자리를 만들어 줄까.
“나는 그 머여, 국민핵교 때 애덜 보이스카웃인가? 그거 부러웠는디 인제 그거는 개뿔도 안 부러워.”
“진혁아 내년 방학 때도 마당에서 캠프파이어 하면 좋겠다.”
“······회장님, 고마워.”
그런 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처음엔 기겁하던 친구들도 결국엔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진혁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데 마지막에는 아쉬워하는 모습이 과거의 어떤 프로젝트보다 더한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마지막까지 잘 해줘서 고맙다. 너희 모두.”
수치를 신봉하던 진혁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철저히 객체가 되어 낯선 감정에 몰입했다.
길쭉한 농구 가방을 멘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에 힘이 넘쳤지만 이상하리만치 발걸음은 무거웠다.
문석일이 태워주겠다고 했으나, 아이들은 버스를 택했다.
‘아마, 가면서 할 얘기가 많겠지.’
저들에게는 하나의 무용담이 되지 않을까.
모르긴 몰라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터였다.
친구들을 배웅한 진혁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마르지 않을 아쉬움이 제 가슴을 겨누고 있음을 관조하며.
“오빠아-, 정원이 말핸다요!”
정원이가 평상에서 떨어질까, 뒤에서 아기를 끌어안은 유진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으응아-.”
“와하하-, 울애기 엉아라고 한 거야?”
진혁은 냉큼 달려가 정원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쉬움은 간데없는 우렁찬 진혁의 웃음소리에, 하늘이 무너질 듯 울던 매미가 울음통을 닫았다.
“다시 해 봐, 다시.”
“애부우-.”
“아니, 그거 아니지이-.”
“애부우-.”
“그거 아니잖아아아-. 하하하하하!”
허공에 높이 뜬 정원이는 팔다리를 버둥거릴 뿐, 형이 원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아무렴 어떠냐.
“정원아, 천천히 커도 돼.”
“맞다요. 정원이 천천히 커라요. 누나랑 같이 놀자요.”
“애부우-.”
끔찍이도 더웠던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정말 끝났다는 건 아니다.
***
장군이는 오늘도 도토리나무 그늘에 터를 잡았다.
나무 그늘이 햇빛을 막아주고, 촉촉한 흙이 배를 시원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벼룩이 좀 꼬이겠지만 손왕왕이 잡아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벼룩 잡는 일을 좋아하는 손왕왕인데 벼룩쯤은 품어야 사랑받는 개가 될 수 있다.
장군이는 똑똑한 개라서 그런 전략적 사고도 가능하다.
끼잉-, 켁-!
더럽게 쓰다.
홍시를 이끌고 사냥을 다녀온 장군이는 쓸데없이 쓰고 맛없는 풀을 가득 물어왔다.
얘기하자면 긴데, 천마와 광마 때문이다.
으르르-.
빌어먹을 천옹옹 영감 때문이기도 하지.
아무튼 천마와 광마, 이놈들이 손왕왕에게서 풀물을 한 모금씩 얻어먹더니 갑자기 변해버렸다.
워얼-.
미친개가 되어버렸어.
장군이가 도토리나무 밑에 숨어든 이유도 다름 아니다.
저 녀석들은 이 나무를 쳐다보지도 않고, 오라고 불러도 꼬리를 말고 도망을 쳤더랬다. 몽총한 놈들. 어쨌든 하극상을 당한 장군이로서는 마땅히 택해야 할 은신처였다.
장군이는 고개를 돌려 집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1층에 광마, 2층에 천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장군이가 지배하던 곳이다.
홍시도 어미와 함께 쫓겨났다.
끼이잉-.
내 딸이 고생이 많다.
홍시는 두 녀석의 협공으로부터 장군이를 지키다 엉덩이를 물려 털까지 뭉텅이로 빠졌다.
끼이- 끼이-.
집을 빼앗긴 서러움 때문인지 홍시는 눈물을 흘렸다.
헥헥-. 아삭아삭-.
쓰고 맛없어도 먹어야 한다.
저놈들과 싸워 다시 집을 찾고, 장군이의 기상을 떨치려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켁켁켁-.
바람에 실려 오는 쓰디쓴 냄새를 따라, 조캥캥네 집에서 결국 익모초를 찾아낸 장군이는 홍시와 더불어 풀을 훔쳐다 뜯어먹었다.
손왕왕이 있었다면 장군이를 도와줬을 텐데.
한동안 집에 붙어있던 아이는 다시 가방을 멨고, 어제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워얼-.
집을 버릴 손왕왕이 아닌데, 다시 오지 않을까 봐 장군이는 걱정이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좋은 친구니까.
- “엉아는 시합 다녀올 테니까 집 잘 보고 있어.”
다른 말은 몰라도 집 지키라는 말은 알아들었다.
아이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장군이는 이곳을 지킬 것이다.
장군이가 지배하는 세상이니까.
그래서 아이를 찾아 나서고 싶지만 꾹 참는 거다. 몇 년 전에도 그랬듯이.
장군이도, 아이도 작던 시절. 다정하게 끌어안고 마당에서 자던 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혀를 타고 침이 흐른다. 그래서 기다리는 거지 충성심 그런 거 아니다.
아무튼, 아이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다.
장군이는 자립적인 개로서 인간에 의존하거나 충성을 바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 난관을 헤쳐야 한다.
그러자면 이 쓰고 맛대가리 없는 풀을 씹어 삼켜야 한다.
천마와 광마도 이 풀을 짠 물을 삼키고 두려움을 모르는 개가 되었으니까.
끄으으-.
더럽게 쓰다.
혼자 몸이라면 그냥 부하로 사는 것도 고려해 볼 텐데, 홍시 때문에라도 그럴 수는 없다. 나중에 장군이가 죽어 홍시 혼자 남으면 얼마나 고생하겠냐고.
손멍멍 아저씨를 보니 멍청하고 하찮은 인간조차 후세를 위해 고생하며 살던데, 고등견 장군이가 인간보다 못하게 살 수는 없지.
먹을 만큼 먹은 것 같다.
훔쳐온 익모초를 모두 뜯어먹었다.
어휴, 다음부터는 아이가 줄 때 먹어야지.
녹즙도 먼저 먹는 게 낫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어.
월!
가자, 딸!
장군이의 외침과 함께 크고 작은 두 마리 개가 돌격했다.
불의의 축제를 종식하고 고등견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왈왈왈-!
덤벼라, 개새끼들아!
*
컹컹-!
크르르르-!
이빨을 드러내고 맹렬히 짖는 시간이다.
천마와 광마가 눈을 까뒤집고 침을 뚝뚝 흘렸다.
장군이와 홍시의 입에서는 초록색 피처럼 녹즙이 떨어졌다.
어떤 개새끼가 먼저 다른 개새끼의 목이나 대구빡을 무느냐로 승부가 갈릴 것이다.
홍시가 두 녀석을 견제하는 동안, 장군이는 알짱거리며 기회를 엿봤다.
이쪽, 저쪽. 요리조리.
까불려는 게 아니다.
예리하게 적의 숨통을 노리는 맹수의 몸짓이다.
그때였다.
덜컥-.
“에그머니나! 얘들아, 왜 그러니!”
주인집 한앵앵 아주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왔다.
보통 개가 싸울 때면 인간은 무서워서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는데, 저렇게 달려온다는 건 겁이 없다는 뜻이다.
장군이는 똑똑한 개라서 그런 것도 안다.
기회로구나!
눈치 빠른 개라면 기회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깨갱-! 깨갱-!
장군이는 사력을 다해 엄살을 피웠다.
하늘을 향해 최대한 크게 깨갱거리며 곁눈질을 하는 거다.
한앵앵에게 한 번, 천마에게 한 번, 한앵앵에게 한 번, 광마에게 한 번.
옳지, 아주머니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저런 얼굴을 하면 손멍멍 아저씨도 꼼짝 못한다.
“어떤 녀석이 우리 장군이 괴롭혔니!”
와! 정말 멋진 대사다.
아주머니는 빗자루를 집어 들고 광마에게 달려들었다.
인간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광마가 가장 무섭게 생겼다고 떠들더라.
우리 중 가장 순한 놈인데, 역시 인간들은 멍청한 걸까.
“이놈들! 나쁜 놈들!”
깨갱-! 깨앵-!
아주머니가 휘두른 빗자루에 천마와 광마가 낙엽처럼 휩쓸렸다.
저 녀석들도 어지간히 엄살이다.
빗자루는 바닥을 쳤는데 저렇게나 죽는 소리를 낼 일인가.
캐앵-!
아이고 홍시야! 눈치 없이 자리를 지키던 홍시는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홍시는 내 편이에요!
적절히 개입한 지원군의 도움으로 일방적 승리를 거두었다.
장군이는 재빨리 2층에 올라 멀리 도망친 천마와 광마를 향해 선포했다.
워워월-!
여기는 내 집이여, 개새끼들아!
워우웅-!
천옹옹이 시키더냐!
왈왈왈-!
들어와. 들어와! 들어와 봐! 시골 놈들아!
돌발 변수가 등장하긴 했지만, 그것도 장군이가 예상했던 일이었다.
정말이다.
장군이는 똑똑한 개라서 그 정도 전략적 예측이 가능하다.
***
“아이고, 빗자루 휘둘렀더니 어깨가 아프네요.”
미연의 사고에 대비해 곁을 지키던 유태화를 향해 한유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어깨를 빙빙 돌리면서였다.
유태화는 그저 웃음으로 영웅을 격려했다.
“저는 개가 무서운데, 사모님은 대단하세오.”
현관 뒤에 숨어 빼꼼 고개를 내밀었던 장진남이 혀를 내둘렀다.
“무서워도 어쩌겠어요. 우리 집인데 내가 질서를 잡아야죠. 저 못된 녀석들이 덩치 작다고 장군이를 괴롭혔나 봐요.”
집에 들어가기 전, 스윽 돌아보니 천마와 광마는 멀리 나무 뒤에 납작 엎드려 눈치를 보고 있었다. 홍시는 집에 들어가 얌전히 털을 골랐고, 장군이는 미친 듯이 짖어댔는데, 그 소리와 박자가 축포를 연상케 했다. 흥겨웠다는 소리다.
‘뭐, 괜찮겠지. 착한 애들도 갑자기 짖고 싸우니까.’
한유영은 오늘도 여느 평범한 주부들처럼 하루를 보냈다.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딸을 유치원에 보내고, 돌배기 아들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빗자루 들고 개싸움도 말리고······.
물을 뿌릴까 생각했지만 그럴 시간도 없었거니와 물을 싫어하는 장군이에게 튈까 염려가 되었다. 모든 개가 예쁘고 기특하지만 장군이는 각별하니까.
재회 후 하루가 멀다 하고 통화하는 언니와도 안부를 나누었다.
회생 가망이 없음을 알고 병원 치료를 거부하던 황영모는 한유영이 보낸 사람들에 이끌려 병원에 입원했는데, 의사가 말을 아꼈다고.
종종 한숨을 쉬면서도 김응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라앉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유영은 생각했다.
“안 보셔도 될까오?”
함께 차를 마시던 장진남이 조심스레 물었다.
황영모를 직접 본 사람으로서, 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는 까닭이다. 물론,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 채.
“안 가는 게 좋겠어요. 언니도 그러길 원하고요.”
죄 많은 망나니 가는 길, 배웅은 식솔들로 충분하다며 김응녀 또한 한유영의 면회를 완곡히 말린 터였다. 한유영의 방문을 이 어쭙잖은 인간이 죄 사함으로 여기고 맘 편히 죽어서는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진혁이는 잘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두운 한유영의 눈빛을 살핀 유태화가 화제를 돌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한유영의 얼굴이 폈다. 유태화는 몇 년간 가족 다음으로 오래 붙어 있는 사람, 아들 이야기라면 늘 웃음을 띠는 한유영이라는 걸 알기에 유태화에게는 한유영의 심경을 살피고 변화를 유도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도 육상대회에 출전한 아들 진혁은 100m와 200m, 계주에서 모두 예선을 통과했다고 알려왔다. 동행한 민용락과 통화하기로는 특히 100m와 200m에서 적수가 없었다고.
“많이 아쉽대요.”
“계주 기록이 뜻대로 안 나와서오?”
한유영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계주는 혼자 하는 종목이 아니다, 계주 성적에 불만을 품는다면 결국 남 탓을 하는 꼴이 되는데, 진혁은 그런 아들이 아니었다.
“그냥, 진혁이 얘기예요. 더 빨리 뛸 수 있을 것 같은데 힘이 안 들어간대요.”
“아- 저도 들었어오. 코가 간질간질한데 재채기가 안 나오는 것처럼 신경 쓰인대오.”
유태화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계체조로 운동에 발을 들였으나 기본이 육상이었으니 경험한 바가 있는 까닭이다.
“저도 진혁이 나이 때 키가 컸습니다.”
“태화는 지금도 커오.”
“아, 그게 아니라. 몸이 크는 속도에 비해 힘이 붙지 않을 때가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한유영은 그거 그런가 보다 생각했고, 장진남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힘이 얼마나 더 붙어야 그 괴물이 완성되는 걸까, 생각하며.
“근데 다음에도 합숙 도와주실 거애오? 이번에 힘들지 않으셨어오?”
“아니요.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쿡- 소리를 낸 한유영이 기분 좋게 웃으며 받았다.
“이 집 식구들 엄청 먹어서 제 손이 커져서요. 그리고 다음이 있을까 싶네요.”
“육상 그만한대오?”
“아뇨. 고등학교 가면 혼자 해야 한 대요. 선수가 없어서······.”
한유영은 친구들을 배웅하던 아들의 쓸쓸한 뒷모습을 기억한다.
그건 마치 장군이와 짝을 지으러 왔다가 남겨진 채, 먼저 가버린 주인을 기다리던 누렁이 뒤통수를 닮아 있었다.
‘슬퍼 보였어.’
그 이상 적절한 비유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한유영의 아들은 외로워 보였다.
여가시간이 생겨도 가족하고만 어울리던 아이에게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보낸 시간이 어떤 의미였을지 가늠하지 못하면 엄마도 아니지.
‘어쩌면······.’
아들을 품에서 떠나보내야 할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