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62화 (162/338)

< 곽란의 서머 캠프 (10) >

***

태양군에서 가장 용하다는 ‘소내과’라는 병원이었다.

아들 친구들이 단체로 아프다는데 차마 출근할 수 없었던 손광연은 어두운 얼굴로 원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설사를 하는데도 이렇게 혈색 좋게 멀쩡히 앉아 있다니. 허허, 참 튼튼한 학생들이네요.”

적잖이 안도할 때, 소내과 원장이 돋보기 안경을 올려 쓰며 손광연을 향해 웃었다.

“식중독으로 보입니다, 사장님.”

어지럼증, 두통, 복통, 설사, 열. 온갖 증상을 동반한 환자들을 살핀 후 원장이 진단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설명을 들었기에 진단은 어렵지 않았으리라.

‘장염 같은 거지? 역시, 고기가 문제였나?’

진혁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친구들을 보았다.

식중독이라면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도 일주일 이상은 운동이 어렵지 않을까. 2주간 만든 몸에서 근 손실이 발생하는 건 둘째 치고, 친구들의 컨디션이 무너질까 걱정되었다.

“즈어기요오-.”

의사를 부르며 조슬찬이 조심스레 진혁의 눈치를 살폈다.

손진혁이라면 환자에게도 운동을 시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더위 먹거나 그런 건 아니래유? 더운 디서 뛰댕겨싸서 그런 건 아닌지······.”

“증상이 일부 비슷하긴 한데, 너희는 식중독이 맞아.”

원장 소우철은 부드러운 이미지와 달리 단호했다.

염병택도 뭔가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소우철을 보았다. 이 몸으로 계속 운동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저는 어지럽고요, 메스껍고요, 식은땀이 계속 나요.”

“설사도 계속 하지?”

“네, 네. 맞아요.”

“응, 식중독.”

“네.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제 예상이 맞았네요.”

염병택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는데 병원 현관이 천천히 열렸다.

부드럽게 천천히, 일정한 속도로 열리는 것이 마치 미닫이 자동문 같았다.

“에으-.”

“으어어-.”

좀비 세 명이 어그적거리며 들어왔다.

함께 삼겹살을 먹은 민용락과 SSS 경호원들이었다.

다른 환자 요원 두 명에게 부축을 받은 민용락은 걷지도 못하고 발을 질질 끌며 들어왔다.

그 모습에 진혁의 고개가 옆으로 꺾이며 미간이 좁혀졌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유진이에게 귀를 잡혀 끌려다니는 아찌곰을 닮았다.

***

주변인은 조용하면서도 바쁘다.

제 스스로 주인공으로 설정한 인물이 돋보이도록 조명받지 못하는 곳에서, 티 나지 않게 잡다한 일을 하느라 그렇다.

장작을 나르는 발길이 분주했다.

‘후아후아-, 주변인은 바쁘다.’

천만다행으로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고는 하나, 오한이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진혁은 친구들을 흙집 안방에 눕히고 군불을 땠다.

발치를 향해 선풍기를 가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쾌적한 요양을 위한 조치였다.

“푹 쉬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친구들은 나란히 누워 진혁을 향해 눈동자만 굴렸다. 훈련하러 나가자는 말을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자면 못할 것도 없을 만큼 컨디션은 괜찮은데.

SSS 경호팀 의무담당이 주사한 수액 주머니만 바라보는 게 일이었다.

한 방울씩 똑, 똑 떨어지는 수액을 지켜보는 게 은근히 재미있었다.

‘야, 그런데 몸이 더 가뿐해진 거 같지 않냐?’

‘그러기? 속도 편혀.’

‘······노폐물이 다 빠져나갔나.’

병원에서 맞은 주사 덕분일까, 아니면 의사 말대로 튼튼한 몸 덕분일까.

아이들은 힘이 넘쳤고,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만화책 보고 싶다.’

‘진혁이네는 그런 거 웁써.’

‘······삼겹살 또 먹고 싶다. 바짝 익혀서. 정화한테 전화도 하고 싶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꼼짝할 생각 말고 오늘은 누워서 땀 좀 빼.”

한나절 만에 핼쑥해진 친구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핀 진혁은 밖으로 나섰다.

‘이상하네. 나는 왜 멀쩡하지?’

모르긴 몰라도 가장 많이 먹었을 텐데.

역시, 돼지고기는 바짝 익혀 먹어야 한다.

잘 익힌 고기만 오빠가 골라줬으니 유진이도 괜찮은 거겠지.

장군이와 홍시도 멀쩡하다. 아, 얘들은 개라서 관계없나?

진혁은 자전거에 올라 장군이를 불렀다.

“천천히 갈 거야. 같이 가자.”

헤헤헥-. 홍시도 따라나섰다.

개 모녀를 달고 조일헌의 집으로 향했다.

조일헌의 집은 버스길에 올라 읍내 방향으로 2km쯤 가면 나온다.

마당에 들어서 목청을 키웠다.

“계세요? 일헌이 성 계세요오-?”

어느덧 입에 붙은 형이라는 호칭을 댔으나 안에서는 대꾸가 없었다.

트럭도, 트랙터도, 굴삭기도 모두 차고에 모셔져 있었다.

스쿠터를 타고 면사무소 옆 깡통집에 진을 치러 간 모양이다.

곽향림과 함께 살며 생긴 버릇인데, 출근할 때 태워주고 퇴근할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 모셔오는 식이었다.

‘형수 퇴근할 때까지 또 기다리시려나?’

사랑꾼이 따로 없다.

‘좋을 때다.’

조일헌은 트랙터 드라이버이기도 하지만, 온갖 약초를 재배하는 사람이다. 가끔 구봉산에 들어가 산삼을 캐오기도 했다. 당시에는 머리 좋아야 입학할 수 있는 농업고등학교를 다니며 온갖 지식을 섭렵했다고 들었다.

허언증은 심했지만 나름 지식이 풍부한 성님이었다.

‘아, 익모초 구하러 왔는데.’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주인 없는 집에서 작물을 함부로 뽑아갈 순 없는 노릇이고, 조일헌은 아직 휴대전화도 없어서 전화로 허락을 구할 수도 없다.

더운 날 짧은 다리로 고생하는 장군이가 안쓰러워 자전거 짐받이 위에 태우고, 다시 버스 길을 따라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집으로 접어들기 전이었다.

“이놈아-, 이 더위에 어딜 다니느냐?”

우렁찬 목소리로 진혁을 불러 세우는 노인, 천길룡이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오냐! 하이고- 시벌 것, 부랄 밑에 땀 차도록 덥다. 지넥이는 뭐하러 돌아다니는고?”

진혁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천길룡의 복색을 흥미로운 눈으로 살폈는데, 하와이언셔츠에 삿갓은 여전했고, 승려 시주 주머니 같은 회색 천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있었다. 발에는 어디서 구하셨는지 번쩍이는 군용 전투화를 신었고, 목에는 십자가 목걸이를 두 개나 걸었다.

‘날이 갈수록 패셔너블해지시네.’

천길룡이 주머니를 뒤적이자 쑥갓을 닮은 탁한 풀색 식물이 두 묶음이나 튀어나왔다. 먼지를 뒤집어쓴 쑥처럼 뽀얀 빛도 돌았다.

“옛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듣는 둥 마는 둥, 천길룡은 장군이와 홍시를 쓰다듬기 바빴다.

“오호호-, 다른 개라는 놈들은 나만 보면 꼬랑지를 내리는데 이놈들은 여간 신통치 않아.”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더 귀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천길룡은 진혁의 집에 올 때면 장군이와 홍시에게 줄 고구마 말랭이 따위의 간식을 들고 왔다.

“익모초를 항상 지니고 다니시는 건가요?”

“암-, 촌구석에 살자면 여름에 많이들 필요하지. 더위 먹고, 배앓이하고, 물갈이하고, 기력 딸리고. 그뿐이더냐? 너무 더우면 자X도 안 서요오-. 그래서 이 동네에 5월생이 없는 게다.”

“아······.”

언제 봐도 TMI, TMT 할아버지다.

청취 연령 따위 고려하지 않는 진정한 프리 토커.

“이놈들도 먹일 수 있으면 먹이거라.”

“개가 익모초를 먹나요?”

“안 먹지. 안 먹으니까 먹이라는 소리지.”

“그게 무슨······.”

진혁이 뭐라 이를 새도 없이 천길룡은 휙 뒤돌아 안마을 방향으로 멀어졌다.

전투화를 신어서일까, 각 잡힌 걸음걸이에서 군 의장대의 절도가 느껴졌다.

‘걷기로는 나도 못 당하겠어.’

안 먹으니 먹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아, 억지로 먹이라는 소린가?

진혁은 장군이에게 익모초를 들이밀었다.

“장군아, 맛 좀 볼 텨?”

흐흐킁-킁-.

흐헥!

익모초 냄새를 맡은 장군이는 짐받이에서 뛰어내렸다. 장군이를 따라 홍시도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개 모녀의 뒤뚱거리는 궁뎅이를 물끄러미 보던 진혁은 다짐했다.

‘꼭 먹여야지.’

감히 날 버리고 도망을 쳐?

아니, 이게 아니고.

몸에 좋으니 먹이라고 하셨을 거야.

***

진혁은 흙집 마루에 걸터앉았다.

작은 돌절구에 삼베를 깔고 익모초를 모조리 집어넣었다.

이제 절굿공이로 콩콩 찧어 즙을 내면 된다.

믹서기도 있는데 수작업으로 하다니, 옛날 사람들과 함께 사니 진혁도 옛날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정성이 들어가야 약효도 좋겠지.’

콩콩콩콩-.

진혁이 뭔가 할 때면 주위를 기웃거리던 장군이와 홍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익모초 향이 그만큼 진했다.

대신 천마와 광마가 착한 강아지처럼 앉아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진혁이 흙집에서 뭔가를 할 때마다 맛난 간식을 얻어먹은 학습 효과에 따른 것이었다.

‘다 됐다아-.’

진혁이 방안에 들어서자, 친구들의 눈이 일제히 문을 향해 돌아갔다.

진혁은 친구들의 코를 잡고 억지로 한 사발씩 부었다.

도저히 굴복할 수 없는 협박과 함께.

“이거 뱉으면 나랑 사귀는 거다.”

앓느니 죽겠다는 심정으로 조슬찬이 익모초즙을 꿀꺽꿀꺽 삼켰다.

언제 봐도 참 잘 먹는 녀석이다.

“으아아-! 할머니이-!”

조슬찬은 역시 효손이었고.

“꺼으흐윽-, 초신수인가······.”

염병택은 드래곤볼 카카로트에 빙의된 듯했다.

“······ 끄윽- 주상전하.”

박상기는 사극 마니아답게 사약 받은 대역죄인을 연기했다.

약사발을 비운 친구들은 누룽지맛 사탕을 물고 누워 배를 문질렀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눈이 침침혔는디 디게 또렷허다. 대가리도 개운혀-.”

“······ 천장 거미줄이 골대로 보인다. 골대까지 최적의 침투 경로는······.”

아쉽게도 장군이와 홍시에게는 먹이지 못했다.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이 녀석들은 진혁의 손에 익모초가 없는데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잡히는 순간 강제로 먹어야 하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집안에 울려 퍼진 조슬찬 일행의 비명 소리를 듣기도 했을 테고.

‘흠-. 두더집에는 충분히 보냈는데 남은 건 어쩐다?’

멀리서 민용락의 비명이 들린 듯한 건 기분 탓이겠지.

남은 익모초즙을 들고 고민하던 진혁의 눈에 천마와 광마가 들어왔다. 녀석들은 칭찬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혀를 길게 빼고 진혁을 보고 있었다.

옳거니.

“천마, 광마. 착하지 이리 와-. 우쭈쭈-.”

헤헤헥-.

***

아이들은 흙집 황토방에서 찜질하며, 한유영이 쑨 시금치죽을 먹으며 하루를 지냈다.

“아, 간장이랑만 먹어도 맛있다.”

“이이, 죽이 아주 죽이는구먼?”

“······더 먹고 싶다.”

빈 솥을 치우던 장진남이 한유영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익모초가 좋긴 좋네오.”

도대체 어떤 배앓이 환자들이 죽을 솥째 비운단 말인가.

둘째 날, 천길룡이 아이들을 진맥하고 침을 놓았다.

“와-, 시원해요.”

“나는 대가리가 뜨거운디?”

“어······, 축구공이 보여.”

혀를 끌끌 차며 마루로 나온 천길룡을 진혁이 반겼다.

“애들은 좀 어떤가요?”

“별 것 아니다. 의원이라는 놈들도 순 돌팔이들은 아니구먼.”

혈색부터 맥까지, 환자로 보기 어렵다는 평이 따랐다. 몸에 맑은 기운이 가득하다고. 토사곽란을 거치고 땀을 흘리며 체내의 독소가 빠져나갔다는 설명이었다.

진혁이 반색했다.

“그럼 이제 훈련해도 되는 건가요?”

그때였다.

“아이고오-, 할머니-.”

“흐어아으-.”

“······눈이 안 보여.”

방안에서 들리는 앓는 소리가 아니더라도 아직 무리해서는 곤란했다.

“기력이 돌아오려면 한 사흘은 보양을 해야 하는 게여. 맑은 것과 힘이 넘치는 것은 말이 다른 벱이지.”

너는 바다요, 저놈들은 개울이다. 한바탕 홍수가 휩쓸고 지나가며 깨끗해졌을 뿐, 물줄기는 보잘 것 없느니. 그 말과 함께 천길룡은 진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신-. 할 일 없으니 이런 거라도 하는 게여. 허어- 날 한 번 덥구나.”

천길룡을 배웅한 진혁은 마루에 걸터앉아 계획을 수정했다.

어차피 당장 훈련할 생각은 없었다. 훈련이라는 말을 꺼낸 것도 친구들이 호전되어 기분이 좋아지는 바람에 던진 장난이었다.

‘이번 주는 휴식하면서 보양을 시키는 쪽으로······, 집에 보내도 되겠지만 원한다면 여기서 쉬는 게 나을 거야.’

찜질에, 수영에, 언제든 몸을 풀 수 있는 시설까지 갖췄다.

운동부터 요양까지 할 수 있고 이래라저래라 참견하는 사람도 없는데 여기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

계획 변경을 완료한 진혁은 채규호가 만들어준 교재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누워서 눈 감고 들어.”

가볍게 한숨을 쉰 환자들이 눈을 감자, 낭랑한 목소리가 흙집에 퍼졌다.

“백제 사 세기 근초고왕, 고구려 오 세기 장수왕, 신라 육 세기 진흥왕······.”

강의할 여건이 되지 않으니 요점이라도 중점적으로 주입할 생각이었다.

잠이 든 건지, 정신을 잃은 건지.

친구들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도 진혁의 낭송은 계속되었다.

언젠가 들어 본 말이 떠올랐다.

공부도 적성이라던가.

‘그래, 자라.’

잠결에 들은 내용도 어떨 때는 생각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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