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61화 (161/338)

< 곽란의 서머 캠프 (9) >

***

박상기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하며 온갖 회식을 경험했다.

오리 로스구이, 삼겹살, 소고기, 고기 뷔페, 치킨, 중화요리······.

그중 최고를 꼽으라면 지난밤의 삼겹살 파티가 단연 최고였다.

기름이 쪽 빠져 고소한 삼겹살과, 손진혁의 어머니가 직접 담근 고추장이 선사하는 완벽한 하모니는 눈물겹도록 환상적이었다. 솥뚜껑을 따라 떨어지는 돼지기름이 장작불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던 광경도 눈에 선하다. 그건 기름이 아니라 차라리 솥뚜껑에서 뚝뚝 떨어지는 보석과도 같았다.

‘······죽는 건가.’

그런데 지금은 식은땀이 뚝뚝 떨어진다.

누군가 박상기의 내장으로 매듭을 지어 강하게 당기는 기분이었다.

복통 때문에 허리가 펴지지 않고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으니.

달칵-.

급한 마음에 노크 없이 문고리를 돌렸으나 문은 굳게 잠긴 상태였다.

배를 부여잡고 겨우 화장실에 온 것인데, 이미 선점한 사람이 있었다.

“끄흐으으-.”

망할.

안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게 분명했다.

페어웰, 마이 쁘렌······.

‘······ 3층으로.’

괄약근의 수명이 다 된 느낌이었다. 조이라는 신호를 아무리 보내도 제멋대로 미쳐 나비처럼 팔락팔락 날갯짓을 하려 들었다.

덜컥-.

3층 화장실도 잠겨 있었다.

탕탕-. 간절한 마음을 담아 두드렸다.

“에······.”

다 죽어가는 염병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상기는 한 손으로 배를, 한 손으로는 동군영을 틀어막고 1층으로 향했다.

‘······어른들 계실 텐데.’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드디어 도착한 1층 화장실.

‘열려 있다!’

마당을 오가며 분주히 음식을 준비하는 한유영이 보였다.

매일 정성을 들이는 친구 어머니의 모습에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 주시는 음식이나 먹을걸. 아니, 손진혁의 말대로 잘 익은 것만 먹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눈물을 머금고 화장실로 향할 때였다.

“으앗차차차! 싸, 싼다! 갈!”

횅-.

한 줄기 바람에 박상기의 몸이 휘청였다.

‘······진혁이네 아빠도 엄청 빠르시구나.’

박상기는 더이상 뒷골목 동군형님께 상납할 에너지가 없었다. 다른 화장실을 찾아 이동하는 순간 동군영에 분산시켰던 신경이 풀려버릴 것을 확신했다.

‘······ 조땐건가.’

목과 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그릇에 받는다면, 강땀량을 1리터 이상 기록할 거다. 올해 들어 유독 극심한 여름 가뭄에 도움이 되려나.

박상기는 화장실 문 앞에 다소곳이 무릎 꿇고 앉았다. 통쿠멍을 뒤꿈치로 틀어막은 채.

댐을 막은 네덜란드 소년의 간절함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뒤꿈치가 끝내 막아내지 못한다면 박상기는 쪽팔려 죽고, 집안의 다른 이들은 어이없어서 죽으리라. 결국 모두 죽는 결말이다.

‘······제발.’

여자친구 박정화에게 교제를 청했을 때도 이보다 간절하지는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정화랑 나는 같은 밀양 박 씨네. 박상기는 최선을 다해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다.

아버님의 용무가 소변이기를 바랐으나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점차 머릿속이 하얘지며 박상기는 망했음을 직감했다.

그런데.

꾸르릉-.

솨솨솨-.

달칵-.

‘······어?’

씻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상기 뭐하니? 아저씨한테 할 말 있니? 절 올리려고?”

화장실 문 앞에 꿇어앉은 박상기를 발견한 손광연이 토끼 눈을 떴다. 손을 탈탈 털며.

“······주세요.”

“뭐라구? 아, 통 안 들려어-.”

“······비켜 주세요.”

손광연이 옆으로 비켜서자, 박상기는 최선을 다해 바닥을 기었다.

이 집 남자들은 소변도 앉아서 본다는 걸 박상기는 알지 못했다. 뭐 아무렴 어떠냐. 이제 볼일을 보면 된다.

얼굴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듯 차가웠다.

‘아, 어지러운 듯.’

친구 집에서 변싼체로 발견되는 건 문제가 아니다.

여자친구 귀에만 들어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겨우 변좌에 앉은 박상기는 손광연에게 배운 기합을 속으로 외쳤다.

‘가아알······.’

***

온 식구가 아침도 거른 채 아이들을 챙겼다.

손광연은 차에 시동을 걸고, 잠이 덜 깬 유진이는 반쯤 감긴 눈으로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내 반듯하게 돌려놓았다. 환자들이 편히 신을 수 있도록.

‘희한하네. 유진이가 만져도 낫지 않다니.’

잠이 덜 깨서 그랬을까, 유진이가 배를 쓰다듬어도 친구들의 배앓이는 가시지 않았다.

진혁은 친구들을 부축해 아빠 차에 태우고, 문석일의 차에 올랐다.

긴히 할 말이 있다며 문석일이 찾아왔지만, 친구들을 병원에 데려가는 게 더 급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면서 얘기하면 되겠네요.”

“어차피 병원 가는 길이면 장 선배도 모시고 가자.”

“진남 삼촌도요?”

“어젯밤에 읍내에서 일이 좀 있었다.”

읍내 사는 삼촌들끼리 삼겹살 파티하셨나?

그래서 진남 삼촌도 배탈이 났나?

뭐, 기다리면 알게 되겠지.

어젯밤이라면 진혁도 말도 못하게 바빴고, 친구들 걱정에 심란했기에 가만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달궈졌던 체온이 금세 식으며 진저리가 쳐졌다. 역시 에어컨은 자동차가 최고다.

장진남까지 세 남자를 태운 차가 부드럽게 내달리기 시작하고, 문석일이 지난 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응녀 가족을 감시할 생각은 없었다는 이야기, 순전히 김인랑의 로맨스를 도우려 나섰다는 배경 설명이 시작이었다.

황가윤 때문에 김인랑이 설치다가 사고가 날까 우려했다는 말에는 진혁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김인랑은 이성보다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 중일 테니.

*

지난밤.

흉터 사내는 이를 갈면서도 묻는 말에 순순히 답했다.

“우덜은 정당하게 돈을 받을 그 뭐여-. 권리라는 게 있는 사람이여. 읭?”

손에 쥔 종이를 팔락거리던 사내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제 손에 있던 문서가 어느새 문석일의 손에 들려 있었다.

피로한 시선으로 문서를 확인한 문석일이 하찮다는 시선을 보냈다.

“불법 고리대금업이 정당하다고?”

“돈을 빌렸으먼 갚는 게 그 머여, 인지상정 아닌감?”

흉터는 지지 않고 계속 맞섰다.

“아, 그 머여어-. 형씨덜이 쫌 허는 모양이라 이대로 가긴 허는디, 오늘만 날두 아니구 돈 받을 구녕이 여기만 있는 건 아니니께에-.”

“무슨 소리냐?”

“그쪽이서 알 건 웁구.”

흉터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내던져진 동행이 무사한지 확인하고는 중얼거리며 출구로 방향을 잡았다.

“제너럴인지 지미럴인지 가서 받으먼 되는겨어-. 저 눔두 거그가 동서라먼서 돈을 빌려간 거니께에-.”

그때였다.

장진남이 출구를 막아섰다.

“그건 좀 곤란한데오.”

눈빛에 드러난 감정이라고는 무관심뿐이었던 장진남의 눈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흉터는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몰라서 그랬겠지만, 이젠 알게 되겠지.”

사내가 손광연의 회사를 언급하는 바람에 장진남이 발작해버렸으니 모른다면 바보들이지. 씁쓸하게 웃은 문석일은 뒤돌아 보고 싶은 속내를 꾹 눌렀다.

설명을 들은 진혁은 손을 세워 이마를 마사지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인 듯, 풀린 듯 애매했다.

뒷좌석에서 검지 두 개를 톡톡- 접선하며 안절부절못하던 장진남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왼손바닥을 오른 주먹으로 툭툭 쳤다.

“이렇게 찹찹-, 손만 봐줬어오.”

어떤 사람이 조폭 패거리를 두들겨 패며 손만 봐준다는 표현을 사용할까.

바위 같은 주먹으로 치는데 도대체 어디서 찹찹 소리가 난다는 걸까.

진혁은 어렵사리 평정심을 유지하며 되물었다.

“뒤탈은 없을까요?”

“문제는 없을 거에오. 헌창이까지 불러서 확실히 조졌거든오? 읍내 나이트클럽 하는 애들이었어오.”

경찰에 신고하는 게 먼저 아니었는지 물으려다 말았다.

그들 간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었을지 모르고, 신고한들 제대로 조치한다는 보장도 없었으니. 고리 사채로 인해 발생한 폭력이나 살인 등 2차 사건을 수사할지언정, 사채를 수사하는 경찰은 없다. 고소도 없으니 수사할 이유가 없다. 돈을 빌린 주제에 누가 누굴 고소하겠나.

“진남 삼촌은 나이트 쳐들어가서 싸우다 다치신 거예요?”

“쳐들어간 건 맞는데 싸우다 다친 건 아니에오. 미끄러진 거거든오? 누가 바닥에 술을 흘렸더라고오.”

피식-.

참을 수 없는 어이없음에 진혁은 결국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튼 한바탕 신나게 활극을 펼치고 왔다는 소리였다.

폭력을 싫어한다는 장진남의 얼굴은 의외로 밝았다.

운전 중인 문석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홍기준 아저씨께는 보고하시지 않는 게-.”

“이미 말씀드렸다.”

천생 무인이라 이건가, 쓸데없이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잘했다고.”

거듭 한숨이 나왔다.

홍기준도 변했다.

그렇게도 신중하고 책사 같던 회장이, 호방한 기상이라도 품고 돌아온 것 같지 않나.

돌아온 회장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만인에게 공평한 재시작의 기회가 온다면, 모두 같은 꿈을 꿀까?

진혁은 동의하지 않았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어떤 목표를 설정할지 대충 그림이 그려졌으나, 진혁과 홍기준은 특이한 사람들이었다.

‘한 번 살아봤으니 채우지 못한 걸 채우려 들 테지. 나처럼.’

홍기준은 전생에 누리지 못한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모두 누렸다. 부와 명예, 약간의 권력. 다만 아쉬웠을 것이다. 눈치 보며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살아야 하는 삶이었으니.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전에 없던 아들에, 정보와 막강한 권력까지.

결핍은 집착을 낳는다고 했다. 눈치 보지 않고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권력에 집착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다만 홍기준의 회귀에 미심쩍은 제약이 있어 멋대로 굴지 못하는 측면 또한 가늠하고 있었다.

홍기준의 결핍을 유일하게 짐작하는 사람으로서, 진혁은 그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진혁도 성공이나 재산, 미녀 따위의 목표가 아닌, 과거에 누리지 못한 일상을 갈구했을 뿐이니.

하나, 감상에 빠져 있기에는 당면한 문제가 약간 골치 아팠다.

아주 약간이었다.

홀로 맞선다고 해도 두려울 것 없고, 아군도 많으니까.

“지방에 있는 조직이 전부가 아닐 텐데요.”

어제도 저녁 뉴스에 전국구 조폭 어쩌고 하는 뉴스가 나왔더랬다. 거대 조직이 세력확장과 이권 확보를 위해 지방 소도시의 조직과 결연을 맺거나, 아예 흡수해버리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문석일과 장진남이 손 본 조직은 도마뱀 꼬리보다 작다는 뜻이다.

김인랑의 로맨스를 위해 형들이 나섰다가 정체도 알지 못하는 거대 조직을 건드린 건 아닐까.

진혁의 염려를 헤아린 문석일이 오른팔을 뻗어 진혁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서 보고드린 거지.”

“그런 놈들은 돈이면 되긴 하겠죠?”

그런데 홍기준은 그런 성격이 아님을 알기에 우려스러웠다.

절대 그런 놈들과 타협을 할 아저씨가 아니다.

“돈이 아니야.”

문석일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그제야 진혁은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괴물들을 풀어놓으려는 거구나.’

삭도의 SSS 요원들.

100명만 있으면 철통 항아리에 숨어있는 국가원수 제거조차 자신 있다는.

불법에는 불법으로, 힘에는 힘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로 비쳤다.

“누구 한 사람을 위해 힘을 쓰시겠다는 건 아냐. 시험의 장이지. 내가 건의했다. 힘 조절할 필요 없이 실전 테스트를 할 수 있는 좋은 장이 될 거야.”

진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잡초는 베어내고 뽑아내도 다시 뿌리를 뻗는다. 잡초를 확실히 제거하려면 씨까지 제거해야 하는데, 풀씨는 여기저기로 도망을 친다. 그뿐 아니라 아주 작은 뿌리만 땅속에 남아도 다시 싹을 틔운다. 불을 지르고, 땅을 갈아엎으며 토양에 농약까지 치는 게 확실하다.

‘다치는 사람이 많이 나오겠네.’

진혁은 제 신념에 다소 위배 되더라도 홍기준의 비즈니스에 월권을 행할 마음은 없었다. 양보할 땐 확실히 물러서는 게 차라리 협조적으로 보이기도 할 테고.

“없애도 계속 생길 텐데요.”

“보이니까 없애는 것과 보이는데도 모르는 척하는 건 다른 문제지.”

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인 진혁이 화제를 돌렸다.

“어때 보이던가요?”

“오래 못 살 거 같더라.”

황영모를 관찰한 문석일의 설명을 들으며 진혁의 심경은 다시 한번 복잡해졌다.

복부가 심하게 팽창했고, 피부는 거무튀튀했으며 흰자위는 누르스름했다고.

“언제 병을 얻었는지 가족도 몰랐던 눈치야. 하긴, 밖으로만 떠돌았을 테니.”

김응녀도 오랜만에 만난 남편을 끌어안고 오열을 했다고.

함께 산 세월이 20년이 넘는데 짙은 병색으로 몰라볼 지경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려나. 일말의 측은지심이겠지.

술을 그리도 좋아하더니 간의 수명이 다한 모양이었다. 돈이 없어 도박을 자주 하지 못하니 전생보다 술을 더 많이 마셨을 거라는 예상이 가능했다.

코딱지만 한 동네, 전생에는 진혁의 고시합격을 팔아 사채를 쓰고는 칼을 맞았고, 이번에는 손광연을 팔아 멍청한 짓을 반복했다. 다른 점이라면 김인랑 덕분에 살해당하는 꼴을 면했다는 것뿐.

‘변하지 않는 것도 있네. 더 안 좋게 변했다고 봐야 하나.’

그래도 전생에는 4년 정도 더 살았으니까.

“진정되고 안전할 때까지 보살펴주실 수 있을까요? 가게도 엉망이라면서요.”

“그래. 헌창이도 있고, 상태도 곧 복귀하니까 너는 훈련에 집중해. 안 그래도 인랑이가 계속 붙어 있기로 했다.”

김인랑이라면, 현재 호르몬의 노예 상태니까 충실하겠지.

몸만 쓰지 말고 머리를 써야 할 텐데.

“친구들은 그리 심각해보이지 않더구나. 역시 건강한 애들이야.”

“네.”

화장실에 용무가 있어 다녀온 친구들의 안색은 많이 나아져 있었다.

관절통과 전신근육통을 호소한다는 사실이 염려스러울 뿐.

심각한 분위기가 불편했는지 장진남이 진혁의 시트 등받이를 툭툭 쳤다.

“인랑이 제수씨가 아주 참하고 이뻐오.”

뜬금없는 소리에, 진혁이 머리를 짜증스럽게 벅벅 긁었다.

아, 어쩌라는 거애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오. 내 여자 아니거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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